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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와 같을 수 있다면 ㅡ 신심명 17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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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6,531회 작성일 14-05-3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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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는 자그마한 자기 책상에 앉아 무슨 그림책인가를 보다가 문득 뭔가 아주 궁금한 것이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자유가 뭐야?”
    녀석의 느닷없는 물음에 짧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 주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바로 자유야~~”
    또 어느 일요일엔가는 제 엄마랑 교회엘 갔다 오더니, 나한테 쪼르르 달려와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아빠는 죽으면 천국 갈 것 같애, 지옥 갈 것 같애?"
   아마 예배 시간에 목사님으로부터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말씀을 듣고는 교회에 가지 않는 제 아빠가 문득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저는 녀석을 번쩍 들어서 가슴에 안고는 말했습니다.
    “응~ 아빠는 벌써 천국에 와있는 걸?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야. 또 여기 있다가 저기로 가는 공간적인 곳도 아니고……. 아빠는 이미 천국에서 살고 있는 걸?”
    그러나 녀석은 염려스러운 얼굴로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습니다.
    “에이, 아닌데……”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강의와 상담을 하고는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와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는데, 식탁으로 가만히 다가온 녀석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아빠는 밥 먹을 때 왜 기도 안 해?”
    그래서 밥 먹다가는 말고 녀석의 머리를 따뜻이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습니다.
    “응~ 기도란 반드시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두 손을 모으거나 눈을 지그시 감고 하는 것만이 아니야. 밥이 나왔을 때는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이 기도요, 길을 걸을 때는 걷는 것이 기도이며, 잠을 잘 시간엔 편안히 잠자리에 드는 것이 바로 기도야. 아빠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기도란다. 그래서 아빠는 오히려 기도하지 않는 순간이 없는 걸?”
    그러자 이번에도 녀석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습니다.
    “에이, 아닌데……”
 
    승찬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70.
    一卽一切 一切卽一
    일즉일체 일체즉일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다.
 
    이 ‘하나’란 곧 우리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조 스님도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心外無別佛 佛外無別心].”라고 하면서 “삼계(三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의식 세계를 가리킨다.)는 오직 마음이며, 삼라만상은 마음 하나가 찍어내는 것이다[三界唯心 森羅及萬象 一法之所印].”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기분이 좋고 상쾌한 것도 내 마음이요 왠지 모르게 무겁고 우울한 것도 내 마음이며, 비가 오구나 하고 아는 것도 내 마음이요 나무인지 꽃인지를 분별하는 것도 내 마음이며, 출근 시간이 바쁜데 늦게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거나 짜증을 내는 것도 내 마음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느끼는 것도 내 마음이요 피곤하여 쉬고 싶은 것도 내 마음이며,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요 분노하고 외면하는 것도 내 마음이며, 어느 순간 어색해하거나 쩔쩔매는 것도 내 마음입니다. 편안하고 당당할 때도 내 마음이요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온갖 잡생각과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도 내 마음이며, 강박이나 수치심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괴로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요 기쁨과 감사에 들떠 눈물을 흘리는 것도 내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 속에서조차 경험하게 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을 다 적어보자면 바닷물을 먹물 삼고 하늘을 종이 삼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이니, 오직 ‘하나’이지요.
 
    모두가 ‘하나’요 내 마음 아님이 없기에 그 전부를 ‘나’로서 통째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래서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 일상의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경험들 속에서 뜻밖에도 비범하고 영원한 것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혼의 자유나 마음의 참된 평화 혹은 진리나 깨달음은 결코 이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소소한 낱낱의 마음들을 떠나 있지 않으며, 오직 매 순간의 ‘지금’ 속에서만 영원히 변치 않는 무언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煩惱暗宅中 常須生慧日
    번뇌암택중 상수생혜일
    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불법재세간 불리세간각
    離世覓菩提 恰如求兎角
    이세멱보리 흡여구토각
 
    번뇌의 어두운 집 가운데에서 언제나 지혜의 태양이 떠오른다.
    불법(佛法)은 세간 곧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있으니,
    ‘나’를 떠나지 않아야 깨달을 수 있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떠나서 깨달음을 찾는다면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과 같다.
 
    또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色類自有道 各不相妨惱
    색류자유도 각불상방뇌
    憎愛不關心 長伸兩脚臥
    증애불관심 장신양각와
 
    사람들에게 본래 도(道)가 있으니,
    각자는 번뇌를 거리끼지 말라.
    싫어하고 좋아함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두 다리 쭉 뻗고 누울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하나’로서 다만 내 마음뿐임을 알아 취하고 버리는 몸짓을 정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는 실상에 눈을 뜨게 되어 그야말로 두 다리 쭉 뻗고 누울 수 있습니다. 삶에 완전한 자유가 온 것이지요.
 
    71.
    但能如是 何慮不畢
    단능여시 하려불필
    다만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끝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랴.
 
    오직 그뿐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의 삶에 완전한 자유와 평화가 임하게 되면, 그때 우리 밖의 삶도 깃털처럼 가볍게 되어 안과 밖이 ‘하나’로 통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명상이요 기도가 되고, 자유란 어떤 상태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가 곧 ‘그것’임을 알게 되며, 모든 의미의 ‘소유’가 끝난 그 텅 빈 마음 속에서 비로소 참된 것들을, 진정한 사랑을 사람들과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노자도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知足之足常足矣
     지족지족상족의
     지금 이대로가 이미 족한 줄을 알면 영원히 만족하게 된다.
 
    72.
    信心不二 不二信心
    신심불이 불이신심
    진실한 마음은 둘이 아니고, 둘 아님이 진실한 마음이다.
 
    본래 모든 것은 둘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인데, 이원성(二元性)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둘로 나누어서 본 것이지요. 올해는 이상 고온 현상으로 인해 모든 봄꽃들이 예년보다 일찍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꽃은 그냥 피었다가 질 뿐인데, 우리가 한 번은 ‘예쁘다’ 하고 다른 한 번은 ‘추하다’ 하는 것이지요. 또 때에 따라 인연 따라 우리 안에서는 사랑과 미움을 비롯한 온갖 감정들이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데, 우리가 어떤 것은 ‘좋다’ 하고 다른 것은 ‘나쁘다’ 하면서 가려서 택하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매여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예쁘다-추하다, 좋다-나쁘다, 됐다-안 됐다 등의 이원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둘’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인 것입니다. 그 진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 너머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데, 그것을 승찬 스님은 ‘진실한 마음[信心]’이라고 한 것입니다.
 
    73.
    言語道斷 非去來今
    언어도단 비거래금
    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언어의 길’이란 곧 둘로 나누어 보는 우리의 분별심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인 것을 좋다-나쁘다 등의 언어와 개념으로써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을 뜻하지요. 그 길이 끊어지면, 다시 말해 이원의 분별심이 내려지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라는 것도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것도 다만 관념이요 언어일 뿐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승찬 스님은 여기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요지는 이미 처음에 다 밝혀 놓았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서 택하는 마음만 내려놓아라."라구요.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만남으로 말미암아 영원을 만나고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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