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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ㅡ 신심명 6

작성일 13-07-0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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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조회 6,12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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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진리는 참 단순하답니다. ‘진리’라고 할 무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것 속에 진리랄까 영혼의 자유랄까 하는 것이 온전히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공자도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예수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마태복음 5:37)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있는 것도 없다 하고 없는 것도 있다 하며, 아는 것도 모른다 하고 모르는 것도 안다 하며, 인 것도 아니다 하고 아닌 것도 이다 라고 하면서 스스로 괴로움을 부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또 그 괴로움을 못견뎌하며 따로 마음의 자유를 찾고 진리를 구하지요.
 
    우리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할 때, 강박이 일어나고 이런저런 모양의 대인공포에 사로잡힐 때, 그래서 한없이 힘들고 초라해짐을 느낄 때, 단지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냥 좀 우울하고 불안하며 안절부절못하고 힘들고 초라하면 될 것을,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끊임없이 그 순간을 못견뎌하면서 그런 자신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거부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그 반대의 모습 속에서만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구하고 또 찾지요. 그러나 승찬 스님은 말합니다.
 
    14.
    遣有沒有 從空背空
    견유몰유 종공배공
    있음을 버리면 오히려 있음에 빠지고, 공(空)을 따르면 도리어 공을 등지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게 ‘있는’ 이것 곧 우울과 불안과 강박과 대인공포와 힘겨움과 초라함 등의 번뇌를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깊이 그 속에 빠지게 되어 고통만 더할 뿐 헤어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며,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없는 데에서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구한다면 도리어 그럴수록 영혼의 진정한 자유와는 더욱 더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마음의 평화는 그와 같이 취하고 버림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결코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무언가를 이루고 얻으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을 때 본래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어느 날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16년 동안이나 강박증에 갇혀 몹시도 고통 받으며 살고 있는데, 그동안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치료를 다 해봤지만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이제는 오히려 그 증상이 더욱 더 심해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면서 대뜸 저를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생면부지의 저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올 생각을 했을까요. 그 사람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던 중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간 적이 있습니다.
 
    “님은 지금까지 강박에 갇혀 살아온 지난 16년 동안의 힘겨웠던 삶을 제게 말씀하셨지만, 그 시간들을 한마디로 말하면 오직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제 삶의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 그 강박으로 인해 제 인생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저는 오직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만 싶었습니다. 얼른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원래의 제 모습을 되찾고 싶었고, 제가 꿈꿨던 인생을 다시 살고 싶었습니다.(이 대목에서 그는 조금 울먹였습니다.) 그리고……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지금껏 다 기울여왔습니다.”
    “그런데 그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했던 모든 노력이 조금이라도 님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던가요?”
    “아뇨, 그렇기는커녕 이제는 오히려 온갖 사소한 것들에도 강박 증세가 심하게 나타나 더욱 더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요? 너무나 분명한 그 사실 하나만이라도 좀 더 깊이 자각한다면, 다시 말해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16년 동안의 온갖 노력이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더 깊이 그 속에 갇히게만 했다는 사실을 진실로 이해한다면, 님의 일상 속에서 다시 강박 증세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본능적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또다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계속 하겠습니까? 아니, 16년 동안의 이 명백한 실패 앞에서 또다시 똑같은 몸부림을 해요? 이미 ‘안 된다’는 결론이 님의 삶을 통하여 명명백백하게 나타나 있는데도요? 이 사실 하나만이라도 님의 가슴 속에서 깊이 자각되고 또 살아 있게 된다면 다시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헛된 노력들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동시에 강박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은 그 마음 속으로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이해와 힘이 조금씩 차오르게 되면서,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득문득 이미 강박에 매여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올 만큼 절박한 마음이었기에 저의 애틋한 이야기를 미동도 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듣고 있던 그는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제가 말을 마치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제 삶의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비로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리고는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거듭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타는 입술로 뛰쳐나왔던 자신의 집으로의 그 먼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정지하면서 오히려 강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6년 동안의 고통이 마침내 끝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15.
    多言多慮 轉不相應
    다언다려 전불상응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통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이다-아니다, 좋다-나쁘다, 됐다-안 됐다, 번뇌-보리라는 이원(二元)의 분별과 판단 속에서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는 취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진리와 자유의 길은 더욱 더 막히기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을 버리고서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으며, 매 순간의 ‘이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가 바라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6.
    絶言絶慮 無處不通
    절언절려 무처불통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별(分別)하고 간택(揀擇)하며 취사(取捨)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한 마음이 사라지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생각을 해도 거기에 매이지 않으며, 온갖 분별과 간택과 취사 속에 뒤범벅이 되어 살아도 조금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이 현재로 돌아와 ‘지금’ ‘이것’을 분별, 간택, 취사하지 않고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막혔던 모든 마음길이 뚫리고, 닫혔던 모든 삶의 문이 열리며, 묶였던 모든 굴레가 다 풀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7.
    歸根得旨 隨照失宗
    귀근득지 수조실종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라가면 근본을 잃는다.
 
    승찬 스님은 짐짓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돌아가야 할 근본이란 본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근본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미 근본입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근본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마치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한 알 한 알 그대로가 바다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바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목말라 하면서, 돌아가 평안할 수 있는 근본의 자리를 찾고 또 구합니다. 이런 마음 상태를 ‘착각’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이 착각이 너무나 오래고도 깊어서 우리는 분리를 실재라고 믿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착각 때문에 우리는 우울과 불안과 강박과 대인공포와 힘겨움과 초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근본’을 그토록 쉽게 또 스스로도 못견뎌하면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착각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18. 
    須臾返照 勝脚前空
    수유반조 승각전공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추면 공(空)을 앞세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추면…… 매 순간 이대로의 우리 자신이 이미 근본이요 자유입니다. 근본이 근본을 찾을 수 없고 자유가 자유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찾고 구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기만 하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닌 남이 되려는 노력을 그치기만 하면 진리와 자유는 스스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본래 ‘그것’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마음의 모든 고통으로부터도 영원히 놓여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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