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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양쪽에만 머물러 있어서야 ㅡ 신심명 5

작성일 13-06-0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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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조회 5,39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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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매주 정기적으로 도덕경을 강의하는 대구 모임에 어느 날 새로운 분이 한 분 오셨습니다.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분은 강의를 마치자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요즘의 저의 결론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때 마음의 평화랄까, 자유랄까, 부동(不動)의 마음이랄까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많은 스승들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늘 현재에 존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밥을 먹을 때는 오직 밥을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길을 걸을 때에는 걷는 동작에만 마음을 모으며, 심지어 오줌을 눌 때에도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오줌만 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님은 ‘현재란 이런 것이다’라는 상(相)을 갖고 계십니다. 즉,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있거나 놓치고 있지 않는 순간만을 님은 ‘현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런 분별 때문에 오히려 현재를 놓치고 현재에 갇혀버립니다. 예를 들어, 님이 밥을 먹거나 걸을 때 혹은 오줌을 눌 때 마음이 그 순간에 있지 못하고 딴 생각을 하거나 과거나 미래로 가버렸다고 합시다. 이때, 생각의 ‘내용’을 보면 과거나 미래 혹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시점’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알아차리고 있거나 놓치고 있거나 혹은 잡생각이나 망상에 빠져있거나에 상관없이 님은 언제나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님은 단 한 순간도 현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노력이나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거나 실현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져 있는 존재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님이 기울이고 있는 그런 노력과 분별을 내려놓기만 하면 이 자리가 바로 님이 도달하려는 ‘그 자리’인 것입니다…….”
    승찬 스님도 말씀하십니다.
 
    9.
    莫逐有緣 勿住空忍
    막축유연 물주공인
    인연을 쫓아가지도 말고, 빈 곳에 머물러 있지도 말라.
 
    이때의 인연이란 내면의 인연 곧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인데 우리는 언제나 인 것과 아닌 것, 된 것과 안 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여기와 저기, 구속과 자유, 번뇌와 보리로 나누고 분별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만을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의 인연을 쫓아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분별심만 내려놓으면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요 중생의 모습 이대로가 바로 부처인 것을, 오히려 분별심을 좇아서 지금을 떠나고 중생을 버리려고 하니, 이는 곧 물 속에서 불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이를 곧 부처라 한다.
 
    상(相)이란 곧 분별을 가리키는데, 일체의 상대적인 분별을 떠난 무분별(無分別)의 세계에 들어감을 일컬어 부처 혹은 깨달음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무분별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거기서 또 한 번의 비약이 일어나는데, 무분별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온갖 상대적인 분별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래서 일체를 다시 분별하며 살지만, 그 모든 분별에도 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는 대자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불가에서는 불이비일(不二非一,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다)이라고도 하는데, 승찬 스님도 “인연을 쫓아가지도 말고, 빈 곳에 머물러 있지도 말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온갖 것을 분별하면서도 분별하지 않고 또한 분별하지 않으면서도 일체를 분별하는 이 이치는 알지 못한 채 단지 분별이 없는 세계에만 머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
    一種平懷 泯然自盡
    일종평회 민연자진
    한결같이 평등하게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끝날 것이다.
 
   "한결같이 평등하게 지니면"이라는 말씀의 뜻은 ‘바다와 파도’의 비유로 말씀드려 보고 싶습니다. 바다는 늘 고요하지만 파도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항상 솨~ 소리를 내며 출렁입니다. 바다는 넓고 깊지만 파도는 얕고 작습니다. 바다는 한결같고 흔들림이 없지만 파도는 언제나 변화하며 흔들립니다.
 
    필자도 오랫동안 한낱 파도처럼 보잘것없게만 여겨지는 자신이 너무나 싫고 괴로웠습니다. 바다처럼 넓고 깊고 흔들림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일상 속에서 늘 목격하는 자신은 작고 얕고 볼품없고 언제나 흔들리는 초라한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파도와 같은 자신을 못견뎌하며 끊임없이 바다와 같은 존재가 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바다가 되기만 하면 얕은 곳에서 요동치며 그저 포말로 부서지기만 할 뿐인 파도가 겪을 수밖에 없는 모든 목마름과 불안과 괴로움이 끝이 나고, 영원히 자유하고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보니, 파도 그 자체가 곧 바다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저는 몰랐습니다. 아, 초라하고 볼품없는 파도 한 알 한 알 그대로가 바다였습니다. 어떤 모양으로 부서지든, 고요하든 출렁이든, 크든 작든, 아름답든 추하든, 여기 있든 저기 있든 그 모든 파도가 남김없이 바다였습니다. 난 내가 파도라고 생각했기에 늘 괴롭고 고통스러웠는데, 그 모습 그대로 나는 완전한 바다였습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바다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 진실을 보게 되면서 마침내 제 마음은 고요해졌고, 깊고 깊은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모든 목마름이 사라졌고, 바다가 되고 싶어 늘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던 추구가 영원히 끝이 났습니다. ‘나’라는 파도는 지금도 여전히 온갖 모양으로 출렁이며 흔들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11.
    止動歸止 止更彌動
    지동귀지 지갱미동
    움직임을 그쳐 멈춤으로 돌아가면, 멈춤은 다시 더욱 큰 움직임이 된다.
 
    그렇게 추구가 끝나고 나니, 다시 말해 초라함을 벗어나 충만으로,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 번뇌를 버리고 보리로, 작고 보잘것없는 파도가 아닌 깊고 넓은 바다가 되려는 모든 노력과 움직임을 그쳐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로 돌아오니, 아! 놀랍게도 내가 곧 무한의 바다였고, 생명과 사랑 덩어리였으며, 우주의 역동적인 질서와 조화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이미 처음부터 충만한 존재였고, 무엇 하나 더 보탤 것이 없는 완전한 존재였습니다.
 
    12.
    唯滯兩邊 寧知一種
    유체양변 영지일종
    오직 양쪽에만 머물러 있어서야 어찌 한결같음을 알겠는가.
 
    바다와 파도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나’는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원(二元)의 분별심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눈에는 그것은 명백히 둘로 보일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으로 여겨지기만 합니다.
 
   사람들의 사소한 눈빛 하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고 경직되며, 시시로 때때로 찾아와 우리를 뒤흔들어버리는 강박과 불안과 무력감에 자주 사로잡혀 힘들어 하기도 하며, 결국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늘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아무리 봐도 부족하고 못난 존재인 것 같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누구를 만나더라도 당당하고 편안하며 주체적이고 안정되어 있는 ‘나’는 아무리 봐도 멋있고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이만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의 ‘나’는 어떻게든 버리려고 하는 가운데 얼른 ‘저런 사람’이 되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런 우리의 마음을 두고 승찬 스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렇게 양쪽에만 머물러 있어서야 어찌 한결같음을 알겠는가.”
 
    13.
    一種不通 兩處失功
    일종불통 양처실공
    한결같음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에서 모두 공덕을 잃으리라.
 
    그런데 버리고 싶어 하는 ‘나’는 쉽게 버려지지 않아서 괴롭고, 얼른 되고 싶은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해서 괴로우니, 양쪽에서 모두 공덕을 잃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한결같음에 통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마음의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목마름이 끝나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정녕 어디에 있을까요?
  
    뜻밖에도 그 답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이미 답입니다. 늘 뿌리 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기만 할 뿐인 파도 한 알 한 알이 그대로 바다이듯이, 우리가 늘 힘들어하며 벗어나려고만 하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보잘것없고 초라한 우리 자신이 사실은 우리를 영원토록 자유하게 하고 무조건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완전한 답이요 보물입니다. 파도는 결코 바다가 되려고 하지 않듯이, 따로 보물을 찾으려는 몸짓을 그치기만 하면 우리는 지금 이대로 완전한 보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노력하고 수고하면서까지 보물인 자신은 버리려고 하고 텅 빈 쭉정이는 그토록 가지려고 하니 양쪽에서 모두 공덕을 잃는 것입니다. 이런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늘 목마르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의 분별심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허망한 마음을 따라 가지 말고, 단 한 번만이라도 아무런 조건과 이유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초라하고 못났다고 늘 스스로 외면하고 구박함으로써 한없이 주눅 들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따뜻이 껴안아 보십시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그냥 한 번만이라도 있는 그대로 사랑해 보십시오.
 
    진실로 그렇게 해보면, 그 순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초라하지도 않고, 따뜻하며, 나눌 것이 많은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토록 찾아다녔던 사랑이, 자유가 바로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처음부터 완전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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