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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 신심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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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3,563회 작성일 13-03-0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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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늘 그것을 얻어서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왜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빈 가슴으로 돌아서야 할까요?
   진정한 행복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는 결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바깥으로만 그것을 찾아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행복하고 싶고 영원토록 자유하고 싶다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리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길은 언제나 밖이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라고 했던 것이구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하는 것만 그쳐라.”라고 했던 승찬 스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막힘없이 밝고 분명하리라.
 
   무엇을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말을 나와 남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오해한 나머지 ‘인연되어 오는 어떤 사람이든 너무 미워하지도 말고 너무 사랑하지도 말라’로 해석해 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읽으면 인생이 너무 힘들어져 버려요. 어떻게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며, 그것을 ‘지극한 도[至道]’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살아옴으로써 무한히 외로워져 버린 어떤 사람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구의 어느 모임에서 매주 금강경을 강의할 때였는데, 조금 늦게 합류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처음 인사를 나눌 때부터 환한 미소로써 다가오셨는데, 얼마나 그 얼굴이 좋아 보였는지 마치 부처 얼굴을 대하는 듯했습니다. 몇 주 동안 강의를 계속할 때에도, 다른 분들은 자연스럽게 질문도 하고 얘기도 나누고 했지만 그 분은 처음의 그 환한 얼굴로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마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달관한 듯한 모습을 늘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환한 미소 뒤에 감추고 있는 어떤 아픔과 삶의 무거움 같은 것이 제게도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과 같은 직장 동료인 어떤 분이 강의를 마치고 헤어질 때 가만히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을 좀 건드려 주세요.”
   “예? 건드려 달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자신도 처음에는 그 사람이 얼굴도 좋고 참 푸근해 보여 친하게 지내고 싶어 다가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더라는 겁니다.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남의 고민이나 말만 들어주면서, 자신은 마치 무슨 인생의 해결사인 양 늘 웃는 얼굴로 온갖 좋은 말만 하더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다가가기가 힘들고 자신마저 점점 답답해지더니, 나중에는 생명 없는 무슨 막 같은 것 안에 갇혀 사는 그 사람이 불쌍해지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어떻게든 끄집어내어 주고는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으니, 이렇게 선생님께 부탁을 드린다는 겁니다.
 
   참 감사한 마음이지요.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찾아왔습니다. 강의 시간에 그 분이 무심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제가 한창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 분은 제가 하는 어떤 이야기에 무척 공감이 되었던지 제 말을 끊으며 툭 한마디 내뱉었습니다.
   “선생님, 사람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러면 나도 안 다치고 남도 다치지 않으니까요. 사실 너무 사랑해도, 너무 미워해도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이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껏 그렇게 살아와서 무척 다행이라는 듯이 더욱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마치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삶의 중요한 원리를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터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 분의 말씀처럼 언제나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았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도 상처를 받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 분은 누구보다도 외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는…….
 
   그래서 어떻게 그런 삶의 원리를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날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에게 별 생각 없이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그 친구가 다음 날 아침 몹시 푸석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정색을 하면서, 너는 왜 남한테 상처 주는 말을 그렇게 하느냐, 너 때문에 내가 밤새도록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느냐며 울부짖더라는 거예요. 그 순간 그 분은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기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때부터 이 분은 마음 깊이 다짐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함부로 말하지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아야겠다고……. 그러나 그 다짐은 그 분 자신에게도 큰 상처가 되어, 그 날 이후 지금까지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교통하지 않는 외로운 가슴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분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제가 말했습니다.
   “아, 얼마나 외로웠을까! 남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으려는 그 고운 마음이 정말이지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또 자신도 상처 받지 않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다가가지 않고 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애써 피하기만 해왔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환한 미소 뒤로 끝없이 외로움만 키워왔을 님의 아픔이 너무나 저미게 다가옵니다……”
 
   그랬더니, 가만히 제 말을 듣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그 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습니다. 그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우세요, 마음껏 우세요……. 얼마나 참았던 눈물입니까, 얼마나 울고 싶었던 눈물입니까……. 마음껏 우세요…….”
   그 분의 눈물은 통곡으로 바뀌었고, 그 날 강의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단막증애(但莫憎愛)라는 말이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이라고 해석되기는 하지만, 그 말을 나와 남과의 관계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경전의 모든 글은 우리 내면으로 돌려 읽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요, 마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 내면으로 돌려 읽어서 먼저 우리 안에서 그 참뜻이 밝혀지면 밖으로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어, 마침내 삶에 자유가 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듯 신심명은 우리 삶의 완전한 자유에 관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이라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 내면의 무엇을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는 것일까요?
 
   우리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내면은 온통 생명 가득한 에너지들로 충만하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얼마나 다양한 감정, 느낌, 생각들이 때마다 인연마다 춤을 추며 화려하게 일어나는지요! 때로는 기쁨, 때로는 좌절, 때로는 나약함, 때로는 감사함, 거기에다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손님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경직 같은 것도 예기치 않게 우리를 찾아와 마음을 수놓기도 하지요. 가을 햇살처럼 투명한 사랑과 그리움과 평화와 즐거움이 우리를 가득 채우기도 하지만, 한여름의 대낮도 밤처럼 어두컴컴하게 만들며 요란하게 쏟아지는 소낙비 같은 불안과 우울과 힘겨움이 우리 마음을 무겁게 젖게도 만듭니다. 또 한 번은 초라함, 한 번은 외로움, 한 번은 슬픔으로 인해 남모르게 몸서리치기도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 마음은 또 다시 봄날의 새순 돋듯 환하게 일어나 삶을 희망하기도 하지요.
 
   그렇듯 순간순간 변화하는 우리 내면의 세계는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고 다양하며 풍성한지요! 얼마나 신기하기까지 한지요! 낮과 밤이 합하여 하루를 이루고 여름과 겨울이 더불어서 생명을 여물게 하듯, 우리 안에서 때마다 인연마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도 생명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얼마나 우리 영혼을 풍요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삶을 건강하게 하는지요! 그렇기에,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어떤 한 순간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거나 버려진다면 우리의 삶은 대번에 왜소해지고 가난해져 버린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하나가 눈부신 생명 에너지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어떤 것도 누락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해지고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찬 스님도 그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용납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극한 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를 않습니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전부를 살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내면을 좋은 것과 나쁜 것, 만족스러운 것과 불만족스러운 것, 자랑스러운 것과 수치스러운 것 등으로 둘로 나누어 놓은 다음, 하나는 끝없이 사랑하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미워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밉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은 단 하나도 자신 안에 남겨두려고 하지 않는 반면에,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들로만 자신을 가득 채움으로써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로 그러한 우리 자신의 노력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삶은 무한히 괴롭고 힘들어져버린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승찬 스님은 말합니다. 그것은 길[道]이 아니라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들만 남겨두려고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버리려고 하는 끊임없는 간택 속에서는 자유가 없다고, 행복은 그렇게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며 언젠가 미래에 획득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오히려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고 애씀으로써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경험하게 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 바로 그 속에 있다고. 아니, 그 모든 것들이 이미 그것이라고. 번뇌가 바로 보리요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고. 그러니 다만 간택함만 그치면, 자신 안의 어떤 것은 미워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만 않으면, 그래서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막힘없이 밝고 분명한 도(道)의 길이어서 비로소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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