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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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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4,496회 작성일 12-11-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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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上天下唯我獨尊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 말은 석가모니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외쳤다는 ‘탄생의 노래’이다. 중국 선종사서(禪宗史書) 중의 하나인 『전등록(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태어나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고 말하였다.”
 
   물론 이때의 ‘나’는 석가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개개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든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상징한다. 석가가 이 땅에 온 뜻은 바로 이를 깨우쳐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을 구제하고 인간 본래의 성품인 ‘참된 나[眞我]’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때의 ‘나’를 좀 다르게 해석해 보고 싶다. ‘모든 생명의 존엄성’이니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이니 등과 같은 교훈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뜻을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필자에게는 문자나 메일, 전화, 만남 등 여러 경로를 통하여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을 상담해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긴장하고 경직되고 쩔쩔매게 되는데, 그런 저를 목격하면 몸과 마음이 우울해져요.”
   “말더듬 때문에 괴롭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 힘이 듭니다.”
   “얼굴이 붉어지고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저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습니다.”
   “이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요.”
   “함께 사는 시어머니가 너무 미워요. 그럴 때마다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대인공포 때문에 친구 결혼식에 가지 못했어요.”
   “제 마음이 너무 불안합니다. 이 불안을 어떻게 할 수가 없겠는지요?”
 
   그때마다 필자는 애틋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님의 몸과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경직되고 긴장하고 쩔쩔매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고 거부하는 바로 그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 마음을 내려놓고, 경직되고 긴장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십시오. 그때 변화는 저절로 찾아옵니다. 님이 꿈꾸는 삶의 진정한 변화는 바로 이 ‘받아들임’ 속에 있답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님은 말을 더듬거나 얼굴이 붉어지는 ‘현재’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치유된 미래만을 원하니, 괴로움이 그치질 않는 것입니다. 님의 삶 속에서 ‘현재’를 빼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현재’를 껴안을 때 님이 원하는 미래는 스스로 찾아온답니다. 그렇듯 진정한 치유는 오직 ‘현재’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랍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기는 님의 마음이 오히려 힘겨움을 일으킨답니다. 그 마음의 빗장을 풀고 앞으로 한 달간만이라도 부정적인 생각들을 끊임없이 허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부정적’이라는 판단은 저절로 사라지고, 다만 ‘생각’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 미워하지 말고 오직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님의 요구가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답니다. 아뇨,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미움도 하나의 생명 에너지인데, 그것을 억압하면 진정한 사랑도 경험할 수 없게 된답니다. ‘지금’ 님의 마음 안에서 올라오는 미움을 밀어내지 말고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경험해 보십시오. 그때 그 미움은 뜻밖에도 님을 사랑으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대인공포 때문에 친구 결혼식에 가지 못한 자신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따뜻이 품어줄 수 있는지요. 지금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또다시 못났다고 초라하다고 내치지 말고, 함께 부둥켜안고 그 아픔을 진정으로 울음 울 수 있는지요. 아, 그 울음 속에서, 그 따뜻함 속에서 어쩌면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대인공포도 조금씩 녹아내릴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저항이 아니라 사랑이니까요.”
   “모든 것은 100%가 되었을 때 ‘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불안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불안 속에 있답니다. 그러므로 불안을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을 정지하고 불안과 하나가 되어 보십시오. 그때 님은 문득 지극한 평화 속에 있는 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나’는 곧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가리킨다.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긴장하고 경직되는 나, 말을 더듬는 나, 부정적인 생각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나, 얼굴이 붉어지고 시선을 어디 둘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나, 이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에 늘 슬프고 아픈 나, 시어머니를 사랑해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또다시 미움에 사로잡히는 나, 대인공포 때문에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나, 이해할 수 없는 불안으로 인해 늘 동일한 힘겨움에 빠져버리는 ‘나’ 말이다. 바로 그런 ‘나’가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나’를 조금도 존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 외면해 버리고 싶어 한다. 자신이 불행한 것은, 그리고 자신의 삶이 한없이 힘들어져 버리게 된 것은 바로 그런 초라하고 못난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런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닌 남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진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무시하고 멸시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가장 존귀한 ‘나’를 스스로가 짓밟고 업신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고통이 성큼 걸어 들어와 오래도록 우리의 마음에 머무르지 않겠는가.
 
   ‘나’는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존귀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대로 무한히 존귀하다. 그러니 그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삶이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하고 큰 축복인 ‘나’를 거부하지 말라. 그래서 ‘나’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늘 꿈꾸어 오던 모든 것들은 이미 처음부터 우리 자신 안에 온전히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당나라 때의 선사로서 중국 선종의 황금기를 열었던 마조(馬祖)는 이 진실을 이렇게 말한다.
 
   汝等諸人 各信自心是佛 此心卽佛
   여등제인 각신자심시불 차심즉불
   그대들은 각자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이때의 ‘이 마음[此心]’이란 다름 아닌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가리킨다.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경직되고 긴장하는 그 마음, 말더듬, 부정적인 생각, 얼굴이 붉어지고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것, 외로움, 미움, 불안 말이다.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그 번뇌가 바로 보리인데, 그것을 버리고 다시 어디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말인가. 마조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즉시 도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는 것이 바로 평상심이다.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약욕직회기도 평상심시도 하위평상심 무조작 무시비 무취사
 
   평상심이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늘 경험하는 바로 ‘이 마음’을 가리킨다.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경직되고 긴장하는 그 마음, 말더듬, 부정적인 생각, 얼굴이 붉어지고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것, 외로움, 미움, 불안 말이다. 그런데 그 평상심이 바로 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평상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험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다른 멋들어진 마음으로 고치고 바꾸려는 등으로 조작하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리려고 애씀으로써 스스로 도를 떠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스스로 도를 버리면서 도를 구하고,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서 자유를 찾으니 말이다. 얼마나 불가능한 길을 우리 스스로가 걸어가고 있는가. 그래서 마조는 다음과 같이 일침을 놓는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 어떤 것이 더럽히는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들이 바로 더럽히는 것이다.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爲汚染 但有生死心 造作趨向 皆是汚染
   도불용수 단막오염 하위오염 단유생사심 조작추향 개시오염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는 말이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가 이미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니,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만나고 ‘나’로 살라는 말이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위대한 일이요, 완전한 행복이며, 진정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夜夜抱佛眠
   야야포불면
   朝朝還共起
   조조환공기
   欲知佛去處   
   욕지불거처
   語黙動靜止
   어묵동정지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껴안고 자고
   아침이면 아침마다 다시 함께 일어나나니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자 하거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히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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