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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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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4,301회 작성일 12-10-0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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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을 강의하다 보면 노자라는 사람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자주 매료될 때가 많다. 노자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 황실의 도서관장으로 있다가 은퇴를 결심하고 관직을 물러나면서 상·하 두 권으로 된 『도덕경』을 썼는데, 대단한 석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섬세하고 따뜻하며 가정적일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탄복할 만큼 깊고 오묘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는 언제나 도(道)를 말한다. 도란 ‘우주와 인생을 관통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형이상학적인 도를 노자는 언제나 가장 구체적이고도 소소한 우리네 일상과 삶 속에서 찾아내어 우리 앞에 펼쳐 보여줌으로써 늘 생생한 감동을 준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도덕경 8장]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 공(功)을 자신에게로 돌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물의 미덕이다. 그러니 그런 물을 본받아 우리도 인생을 그렇게 살면 그것이 바로 도에 가까운 삶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단지 그렇게만 읽지 않고 우리 내면으로 돌려 읽어보면, 거기에서 노자가 말하는 도의 의미를 좀 더 깊이 느껴볼 수 있다.
 
   우리 안에도 ‘마음’이라는 물이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 물은 매 순간 이런저런 모양의 감정, 느낌, 생각이라는 형태로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우리의 생명을 가득히 수놓는데, 때로는 기쁨으로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으로 흐르기도 하며, 외로움으로 흐르기도 하고 충만감으로 흐르기도 한다. 또 때로는 느닷없이 불안과 긴장과 두려움과 분노와 미움과 질투와 강박과 초라함과 무기력 등으로 소용돌이치며 흐르기도 하고, 어느 때는 소낙비 뒤의 투명한 햇살처럼 맑고 고요하게 사랑과 감사와 이완과 따뜻함으로 흐르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 있기에 ‘마음’이라는 물은 늘 그렇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그 물이 매 순간 있는 그대로 흐르게 하라. 사랑과 감사와 기쁨과 당당함과 충만 등 자신을 만족하게 하고 흡족하게 하는 쪽으로만 ‘마음’의 물이 흐르게 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불안과 긴장과 두려움과 외로움과 초라함 등 자신이 싫어하는 쪽으로는 흐르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지도 말라. 낮[빛]과 밤[어둠]이 합하여 온전한 하루가 되듯, 그 모든 ‘마음’의 물이 매 순간 있는 그대로 막힘없이 우리 안을 흘러야 우리의 생명도 온전해진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에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넘실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자도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으로도 흘러가기에 도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란 바로 그런 것이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 흐르는 것!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삼십복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바퀴통이 비어있음으로써 수레로서의 쓰임이 있게 되고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선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것이 비어 있음으로써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되며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문을 내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것이 비어있음으로써 방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된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그러므로 무언가가 이롭게 되는 것은 그것이 비어있을 때이다. [도덕경 11장]
 
   이 글에서도 보면, 누구나 다 타고 다녔을 수레와 누구나 먹고 마셨을 그릇과 누구나 들어가 쉬거나 잠을 잤을 방이라는 일상의 소소한 기물들 속에서,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주목해 보지 않았던 그 평범 속에서 도를 바라보는 노자의 그윽한 눈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특히 필자에게는 그릇의 비유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릇은 비어 있기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요긴한 기물이 된다. 만약 그것이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그릇은 주인이 담는 대로 그저 담길 뿐이다. 결코 스스로 의지를 발휘해서 제 담고 싶은 것만 담으려고 주인에게 이것을 담으라 저것은 담지 마라 하지 않는다. 또한 담기는 내용물에 따라 그릇의 격이 달라져서, 다이아몬드를 담는다고 해서 그릇이 더 멋있고 훌륭해지거나 갓난아기의 급한 토사물을 잠시 담는다고 해서 그것이 추해지지도 않는다. 그릇은 그렇듯 담기는 내용물에 조금도 물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릇은 언제나 곧 비워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그릇도 그렇게 될 수 있을 때, 그게 바로 도라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그릇에는 매 순간 이런저런 모양의 감정, 느낌, 생각이라는 형태로 온갖 것이 다 담긴다. 때로는 기쁨 때로는 슬픔, 때로는 외로움 때로는 충만감, 또 어느 때는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좌절, 불안, 긴장, 강박, 두려움, 미움, 무기력 등이 거침없이 담기기도 하고, 다음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이완과 감사, 사랑, 따뜻함 등이 살포시 담기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 있기에 ‘마음’이라는 그릇에는 늘 그러한 생명 에너지들이 시시로 담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그 그릇을 언제나 비워두어 그 모든 것들이 매 순간 있는 그대로 담기게 하라. 어떤 것은 좋다, 마음에 든다, 아름답다 하여 그 그릇 안에 오래도록 담아두고 잡아두려고 하지 말고, 어떤 것은 나쁘다, 싫다, 추하다, 부끄럽다 하여 아예 그 그릇에 담기는 것조차 거부하거나 가로막지 말라.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담길 것은 끝내 담기고야 말며, 담겨진 것은 마침내 비워지고 만다. 끝내 담기고야 말 것을 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하지 말고, 끝내 비워지고야 말 것을 잡아두려고 몸부림치느라 스스로 괴로움을 부르지 말라. 그렇듯 우리의 ‘마음’이라는 그릇이 비어 있어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담기도록 할 수 있을 때, 다음 순간 그것이 저절로 비워지는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도를, 진정한 평화와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노자도 애틋한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가 이롭게 되는 것은 그것이 비어 있을 때이다.”라고.
 
   含德之厚, 比於赤子.
   함덕지후, 비어적자.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갓난아기에 비유할 수 있다.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脧怒, 精之至也.
   골약근유이악고, 미지빈모지합이최노, 정지지야.
   뼈는 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워도 움켜쥐는 힘은 강하고, 남녀의 교합은 알지 못하지만 고추가 빳빳하게 서는 것은 정기의 지극함이요,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
   종일호이불사, 화지지야.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의 지극함이다. [도덕경 55장]
 
   어쩜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필자는 노자라는 사람이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마음’이라는 물을 간택하지 않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흐르도록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마음’이라는 그릇을 비워두어 어떤 감정, 느낌, 생각이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담기도록 할 수 있을 때, 그 이원(二元)의 분별과 간택을 넘어선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모든 마음의 갈등과 대립을 넘어선 완전한 조화와 정기의 지극함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을 비유로 말하면서, 무엇이든 꽉 움켜쥐는 갓난아기의 자그마한 손과 빳빳하게 서는 고추, 그리고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또 다음의 글을 보자.
 
   治大國, 若烹小鮮.
   치대국, 약팽소선.
   큰 나라를 다스리고자 할 때에는 작은 생선 조리듯 하라. [도덕경 60장]
 
   ‘큰 나라’를 다스림에 ‘작은 생선’ 조리듯 하라니, 이 얼마나 절묘한 대비인가! 노자도 부엌에 서서 작은 생선을 조리해 봤을까? 그래서 이런 아름다운 비유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노자의 감각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필자는 서슴없이 우리 각자 자신 곧 ‘나’라는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내 위에 우뚝 서게 되면, 그리하여 내 안에 완전한 질서와 조화가 있게 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두려움이 없겠지만, 내가 나 자신 속에서 제대로 서지 못해 늘 우왕좌왕한다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온전한 점 하나 찍지 못한 채 그 삶은 언제나 불안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나’라는 큰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까? 그래서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내 마음과 삶 속에 이룰 수 있을까? 노자는 그 방법으로써 뜻밖에도 작은 생선 조리듯 하라고 말하고 있다.
 
   작은 생선을 맛있게 조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냄비에 작은 생선과 갖은 양념을 다져 넣고 물을 자작하게 한 다음, 약한 불 위에 얹어 가.만.히.놓.아.둬.야.한.다. 다 익을 때까지 가만히 놓아두지 못하고 자꾸만 뒤적이면 작은 생선이 다 부서져서 급기야 무엇을 끓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때 가만히 놓아두라는 것은 노자가 늘 강조하는 무위(無爲)를 가리키는데, 바로 그때 작은 생선은 저절로[自然] 가장 맛있게 조리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가장 완전하게 ‘양념’이 되어 있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이대로, 시시로 긴장하고 강박에 사로잡히는 그대로, 우울한 그대로, 불안한 그대로, 말을 더듬거나 벌벌 떠는 그대로, 가끔씩 기쁘고 즐거운 그대로가 이미 완전하게 간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삶의 매 순간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이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양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삶을 더 맛있게 하려고, ‘나’를 더 멋있게 하려고, 더 행복하게 하려고, 더 자유롭게 하려고, 더 가득 채우려고 어떤 ‘양념’은 빼고 어떤 ‘양념’은 더하지 말라. 작은 생선 냄비를 가만히 놓아둬야 하듯, 그냥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 그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남김없이 맛보게 될 것이다. 아, 우리 모두는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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