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단상

본문 바로가기

비원단상

너 자신으로 돌아오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4,148회 작성일 12-09-02 23:04

본문

 
   유난히도 햇살이 눈부셨던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는 진정한 행복을 찾아 먼 길을 걸어온 어떤 외국인 젊은이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마주앉았다.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한참을 침묵 속에 있던 젊은이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는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라마나 마하리쉬도 따뜻한 침묵을 깨고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그렇게 묻는 것은 마치 자네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선생님 앞에 앉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네.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닐세.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세.”
   또 다시 잠깐의 침묵 속에 있던 젊은이는 이렇게 되물었다.
   “선생님은 늘 ‘진정한 나’를 알게 되면 완전한 행복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진아(眞我)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진아에 도달한다는 그런 것은 없네. 만약 진아에 도달해야 한다면 진아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며, 획득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일세. 새롭게 획득한 것은 결국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세. 따라서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은 것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네. 진아는 획득되거나 도달하는 것이 아니네. 자네가 진아일세. 자네가 이미 그것이네.”
 
   열네 살 먹은 어린 동자승 하나가 어느 날 승찬(僧璨) 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스님, 해탈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허, 요놈 보소. 아직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승찬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해탈이란 마음의 모든 번뇌와 속박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과도 같은 것인데, 고작 열네 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가 그렇게 물어왔으니, 문득 놀라고 한편으론 대견스러워 하면서도 웃을 수밖에. 한참 만에 웃음을 그친 승찬은 잔잔한 음성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놈아, 누가 너를 묶었더냐?”
   “아뇨.”
   아이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런데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느냐?”
   “……”
   동자승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승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됐느냐?”
   “예, 스님.”
   묶여있지 않은데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느냐는 승찬의 한마디에 문득 깨달음을 얻어 영원한 지복(至福)의 상태에 이른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승찬으로부터 사조(四祖)의 법통을 이어받게 되는 도신(道信) 스님이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禪僧)인 도오(道悟)에게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넙죽 절을 하며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도오가 물었다.
   “무엇을 구하느냐?”
   “진리를 알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곳에 머물러라. 너에게 불법(佛法)을 말해주리라.”
   그 젊은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이후 오랫동안 도오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오는 도무지 그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젊은이가 섭섭한 생각에 스승에게 가서 따지듯 물었다.
   “스님, 왜 제게는 가르침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자 도오는 오히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놈아, 수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가르쳤더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젊은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구요? 저를 하루도 빠짐없이 가르쳤다구요? 아니, 도대체 언제 저를 가르쳤습니까?”
   ‘허허, 이놈 봐라!’
   도오는 제자의 표정을 살피며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젊은이는 화가 치밀었다.
   “스님, 대답을 해보십시오. 언제 저를 가르쳤단 말씀입니까? 저는 도무지 가르침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제자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쳐다보면서 도오는 달래듯 이렇게 말했다.
   “아, 이 녀석아, 네가 차를 가져오면 마셔주었고, 밥을 가져오면 먹어주었고, 인사를 하면 머리를 숙여 받아주지 않았느냐. 네가 말을 걸어오면 대꾸해 주었고…….”
   젊은이는 어리둥절해졌다. 스승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흡사 자기를 놀리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설마 스승님이 제자를 데리고 장난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
   젊은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도오가 정색을 하며 무섭게 소리쳤다.
   “이놈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하면 곧 어긋나는 것이야! 있는 그대로 보란 말이다!”
   그 말에 젊은이는 퍼뜩 깨쳤다.
 
   필자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예사롭지 않은 세 가지 이야기 속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보고 싶어서이다. 우선 진정한 행복을 찾아 먼 길을 돌아온 외국의 젊은이에게 라마나 마하리쉬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으며 무언가를 통하여 획득하거나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 자신이 이미 그것이라는 것을 문득 일깨워 준다. 그 ‘진실’을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는 묶여 있지 않다’는 도신의 깨달음을 통하여 거듭 확인해 주고 있고, 세 번째 이야기는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삶 자체가 곧 진리요 불법(佛法)이라는 도오 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행복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세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뜻밖에도 행복이란 참 단순해진다. 진정한 행복이란 다름 아닌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만약 행복하지 않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노자의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대성약결, 기용불폐. 대영약충, 기용불궁.
   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모자라는 것 같으나 그 쓰임은 끝이 없고, 크게 채워진 것은 마치 빈 것 같지만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이 보이고, 크게 정교한 것은 졸렬한 듯해 보이며, 크게 말 잘함은 마치 어눌한 것 같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 완성되기는커녕 누구나 얼마쯤 이런저런 모양으로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으며[缺], 충만하기는커녕 가슴 한 켠이 채워지지 않는 무엇으로 늘 텅 빈 듯하고[沖], 생각이나 행동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때로 힘들고 지치지 않던가[屈]. 마음과 감정이 성숙되거나 안정되어 있기보다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쉽게 흔들리기도 하고[拙], 우리네 삶이란 게 섰나 하면 무너지고 제대로 걷나 하면 또 어느새 고꾸라지기도 할 만큼 늘 어눌하지 않던가[訥]. 우리는 그 때문에 늘 힘들어하지만 그러나 노자에 의하면, 그리고 위에서 든 세 이야기에 의하면,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그런 모습들이 사실은 대성(大成), 대영(大盈), 대직(大直), 대교(大巧), 대변(大辯)이어서 우리는 본래 ‘묶여 있지’ 않으며, 그런 모습 그대로가 바로 진아요 진리이며 불법(佛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이요 해탈이며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행복이란 얼마나 단순한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취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 안에서 시시로 올라오는 게으름, 초라함, 수치심, 우울, 불안, 외로움, 긴장, 강박, 경직, 무기력, 대인공포, 말더듬, 공허감, 무료함, 미움 등과 같은 보잘것없고 볼품없어 보이는 모습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괴로워하고 못 견뎌하면서 끊임없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달아나려고 한다. 자신의 삶이 불행한 것은 오직 그러한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심지어 저주를 퍼부으면서까지 그런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직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서 평화를 찾고 자유를 찾으며 행복하고자 한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우리가 스스로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 <행복>을 거부하기에 우리는 결코 그 어떤 순간에서도, 그 어떤 노력으로써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고 싶어 기울이는 나의 노력이 오히려 나의 행복과 자유를 가로막는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러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러한 노력들을 정지해 보라.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미래의 어느 때에 영혼의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아 보라. 그리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라. 행복은 언제나 지금 여기 ―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한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안에 있다. 우리 자신이 이미 그것이다. 그렇게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볼 것이며, 이 유한한 존재 안에서 무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 우리는 그토록 아름다운 존재인 것이다, 지금 이대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40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원로그인

접속자집계

오늘
4,047
어제
11,215
최대
11,511
전체
3,093,161

Copyright © 2006~2018 BE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