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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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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3,851회 작성일 12-08-1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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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이 서른네 살 때, 질기고도 오랬던 생의 모든 방황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나 자신과 현실로 돌아왔을 때, 문득 모든 것이 감사해진 마음 속에서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잠시 고등학교 윤리 교사로 근무할 때 언제나 나를 믿어주며 가슴 따뜻한 형님처럼 대해주던 선배 선생님이었는데, 내가 교직을 사표 낼 때에도 기꺼이 나를 지지해 주었고, 지리산 토굴 속에서 칩거할 때에는 영양가 있는 반찬을 작은 배낭에 가득 넣고 그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와 주었으며, 상주 극락암에서 50일 단식을 한다며 가부좌를 틀고 있을 때의 어느 소낙비 내리던 날에는 큼지막한 우산을 쓰고 달려와 나의 건강을 염려해 주던 분이었다. 그랬기에, 내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영혼의 모든 갈증이 끝이 났을 때 맨 먼저 그 분께 연락해 이 기쁜 소식과 한없는 감사를 전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벅찬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는데,
   “어, 김선생, 웬 일이야? 볼 일이 있어서 내려왔어? 공부는 잘 되고 있고?”
   “아닙니다. 공부가 다 끝나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형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아니, 그래? 공부가 다 끝났다고? 그럼 당장 만나야지!”
   그리곤 그 분은 교외 어느 조용한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잘 차려진 상을, 그동안 정말 애 많이 썼다는 한마디 말씀과 함께 내 앞에 내놓았다. 동동주 몇 잔을 함께 기울이며 분위기가 조금 무르익어 갈 무렵의 그 어느 한 순간 그 분은 갑자기 소리 나게 탁 하고 빈 잔을 상 위에 놓으시고는, 오래 참았다는 듯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그래, 김선생! 이제 말해봐. 무얼 깨달았어? 깨달음은 곧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진리가 뭐던가? 김선생이 깨달은 게 뭐지? 정말 궁금해! 어서 말해봐.”
   그래서 내가 차분하게 말씀드렸다.
   “아뇨, 진리란 게 별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였습니다.”
   순간 그 분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 마음은 목소리에도 담겨 있었다.
   “아니,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고! 그것 말고 다른 깨달음은 없는가?”
   “예, 그것 말고 다른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진리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내게서 더 이상의 별다른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음을 직감한 그 분은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심한 실망감과 허탈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 그 분은 나의 오랜 방황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슨 대단하고 특별한 깨달음을 기대하셨던가 보다.)
   “아니, 김선생! 누구나 다 아는 그걸 깨닫기 위해 그렇게나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돌아다녔단 말이야?”
   “예, 누구나 다 아는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데 저는 15년이 걸렸습니다…….”
 
   노자는 말한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부자생, 고능장생.
   천지는 영원하다. 천지가 영원한 까닭이 있나니, 그것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에 오히려 능히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왜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말라[不自生]고 말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 앎이 무엇이기에 그 오래고도 질긴 방황과 목마름이 일시에 끝이 나고,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마음의 무거운 짐들이 다 내려졌으며, 그토록 갈구했던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한없는 자유가 내 영혼을 가득 채웠던 것일까? 나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완전히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일까? 진리란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말은 또 정작 무슨 뜻일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 이상으로 무슨 별다른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일까?
 
   나는 나의 모든 것이 싫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도 그렇고, 모든 일에 자신 없어 하는 마음도 그렇고, 그러면서도 사람들만 만나면 겉으로는 늘 겸손을 가장하면서도 속으로는 거의 본능적으로 잘난 체하며 우쭐거리는 나 자신이 참 싫었다. 언제나 남들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 또한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고, 어느 자리 어떤 순간에서도 부초(浮草)처럼 떠돌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불안도 언제나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혼자 있을 땐 더할 나위 없이 게을러지면서 모든 것을 미루고 귀찮아하고 변명하며 합리화하는 나 자신이 싫었고, 언제나 작심삼일을 넘어 작심삼초에 그쳐버리는 마음의 무력감도 스스로를 비웃게 만들었다. 더욱이 이런저런 감정들을 생색내거나 과장할 뿐 사실은 아무것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는 냉혈한(冷血漢)의 가슴은 때마다 나를 절망케 했다. 나는 그런 나에게 끊임없는 원망과 저주를 퍼붓고 다녔다.
 
   나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렇듯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볼품없는 내가 한없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으며, 그런 모습으로는 도저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마른 먼지 푸석 일어나는 내 영혼의 상태를 나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고, 그 무엇으로든 나를 채워야만 했다. 나는 마침내 ‘진정한 나’를 찾아 길을 떠났다.
 
   내가 꿈꾼 ‘진정한 나’는 이런 모습이었다. 무어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온갖 충만한 것들로 가득 찬 아름다운 영혼에,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성실하고, 무엇보다 사랑이 넘치고, 자유로우며, 당당하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자애롭고 따뜻하기도 하며, 무한히 남을 위해 사는 삶……나는 내가 너무 초라하다고 느꼈기에 충만하기를 구했고, 내가 너무 부족하고 못났다고 여겼기에 완전하기를 원했으며, 이기적인 모습이 싫어 이타(利他)를 추구했고,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며 겉과 속이 다른 내가 너무나 괴로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되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따라 떠났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학원 진학과 취직의 길 모두를 버리고 고독을 찾아 대관령 목장으로 떠났고, 대구로 돌아와 잠시 고등학교 윤리 교사를 하다가 말고는 지리산 깊은 토굴 속으로 떠났으며, 이어 경기도 포천에 있는 은성수도원으로, 경산에서의 칩거로, 어떤 극단적인 상황 속에 나를 집어던지고 싶은 울컥하는 마음에 배를 타 갑판원으로서 선원생활도 했고, 빵 공장 직공, 시도 때도 없이 뛰쳐나갔던 공사판의 막노동, 신문사 계약사원, 급기야 상주에 있는 극락암이라는 자그마한 암자에서의 50일 단식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몸부림은 마른 낙엽 타들어가듯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은 자유와 행복, 그리고 한없는 평화!
 
   그런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 내 앞에 펼쳐져 있음을 그때 알았다. 나는 부족하고 초라하고 못난 내가, 단 한 순간도 허허롭지 않은 때가 없어 늘 설명할 길 없는 불안감 속에서 숨막혀하던 내가 완전히 극복되고 나면 마침내 자유할 줄 알았다. 텅 빈 가슴이 그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고,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르던 영혼에 사랑과 자비와 진리가 넘쳐나면 그때 비로소 나는 완전한 충만감을 느끼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눈 앞에 펼쳐진 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꿈꾸고, 도달하려고 몸부림치고, 애타게 추구했던 ‘진정한 나’라는 것이 갑자기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단 한 순간도 쉴 수 없도록 나를 내몰았던 내 삶의 궁극의 목표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인생의 근본적인 답이, 진리가, 깨달음이 갑자기 내 앞에서 없어져버린 것이다!
 
   그리곤 있는 그대로의 나만 남았는데, 그때 비로소 알았다. 나는 그냥 나였을 뿐인데, 그 있는 그대로의 내가 싫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저항했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끝없이 거부하고 부정하고 외면했기에 나는 무한히 괴롭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나는 그냥 나였을 뿐인데, 그 나를 버리고 다른 나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던 바로 그 분별과 이원성(二元性)의 마음 때문에 내 삶은 그토록이나 힘들었다는 것을! 그 이원성이 마음에서부터 내려지고 나니, 나는 그냥 나였을 뿐 부족하지도, 초라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온갖 결핍감으로 힘들어하던 마음의 구속 그것이 바로 자유였고, 채우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채워지지 않아 늘 괴로워하던 그 텅 빈 가슴이 바로 충만이었으며, 언제나 마른 먼지 일으키던 내 영혼 그대로가 깊디깊은 사랑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이미 행복이었다. 찾을 것도 구할 것도 없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행복, 그것은 바로 ‘지금’ 속에 있었다. 그래서 노자도 애틋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故知足之足常足矣.
   화막대어부지족, 구막대어욕득, 고지족지족상족의.
   재앙은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도 큰 것이 없고, 허물은 얻고자 하는 것보다도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족한 줄을 아는 족은 언제나 만족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떠나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말라[不自生]. 천지가 영원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음에 있었듯이,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초라하다, 부족하다, 볼품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치스럽다 하고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껴안으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껴안는 고통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라. 이것이 바로 ‘지금’을 사는 것이며,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진리의 길인 것이다. 그렇게 껴안아 보면 스스로 알게 된다, 바로 그 속에 모든 것 ― 사랑이, 자유가, 평화가, 영원한 행복이 가득 들어 있다는 것을.
 
   是是非非都不關  
   시시비비도불관
   山山水水任自閑
   산산수수임자한 
   莫問西天安養國
   막문서천안양국 
   白雲斷處有靑山
   백운단처유청산
   옳거니 그르거니 상관 말고,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 두라.
   서쪽 하늘에 극락이 있느냐고 묻지 말지니,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자기 자신을 둘로 나누어 옳다 그르다 스스로 싸우지 말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곳에서 답을 찾지 말지니,
   그 한 마음 내려지면 지금 여기가 곧 진리의 자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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