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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과 물 같은 마음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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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3,926회 작성일 12-08-0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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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거실 천장에 있는 십자형 형광등이 자꾸만 깜박거리고 불이 잘 들어오지 않아 접촉 불량인가 보다 하고 제대로 불이 들어오게 해볼 양으로 형광등 중앙에 달려 있는 스위치 끈을 잡아당겼다가 너무 세게 당겼는지 그만 뚝 끊어져 버렸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형광등 본체와 스위치 끈을 연결하는 고리 부분의 매듭이 풀어져서, 하는 수 없이 형광등을 천장에서 떼어내어 본체에 끈을 다시 연결해 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여기 저기를 살펴보아도 본체를 덮고 있는 덮개를 벗겨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형광등과 스위치 끈을 들고 집 근처에 있는 조명등 가게에 가서 그것을 내보이며 말했다.
   “사장님, 이 끈이 떨어져서 연결시키려고 하는데, 아무리 해도 방법을 모르겠네요!”
   그러자 그 사장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아저씨가 못 하는 걸 내가 어떻게 합니까?”
   “에이, 그래도 그렇지! 사장님은 이런 형광등에는 전문가가 아니십니까!”
   그제야 재밌다는 듯 그 사장님은 일자 드라이브를 쓰윽 꺼내시더니 형광등 본체 뒷면에 나 있는 자그마한 홈에 갖다 대면서 약간 힘을 주며 누르셨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너무나 쉽게 덮개가 떨어지면서 스위치 끈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나타났다. 형광등은 조립식으로 되어 있어 분리와 조립이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내가 아주 새롭고 신기한 것을 발견한 듯 놀라워하면서 나도 모르게 약간 큰 소리로 말했다.
   “햐~,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몰랐군요!”
   그러자 그 사장님은 또 한 번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말했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모르면 그렇게 힘드는 거지요…….”
   그 말을 듣고는 나도 순간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도(道)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렇다. 도라는 것도, 진리라는 것도,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도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일 뿐인데, 모르면 그렇게도 우리를 목마르게 하고 지치게 하고 또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당나라 때 선사인 임제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道流! 佛法無用功處. 秪是平常無事. 倚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愚人笑我, 智乃知焉.
   도류! 불법무용공처, 지시평상무사. 의시송뇨, 착의끽반, 곤래즉와. 우인소아, 지내지언.
   도 배우는 이들이여! 불법(佛法)에는 애써 공부할 것이 없다. 다만 평상(平常)하고 일 없으면 될 뿐이다. 똥 누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라면 알 것이다.
   그렇기에, 노자도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상사문도, 근이행지. 중사문도, 약존약망. 하사문도, 대소지. 불소, 부족이위도.
   상근기의 사람이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중간 근기의 사람이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하근기의 사람이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만약 그들이 웃지 않는다면 족히 도라고 할 만하지 못하다.
 
   똥 누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 바로 도라고 하니, 평범한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게 무슨 도냐!”며 크게 웃을 수밖에. 그런데 그들이 웃지 않으면 그건 도가 아니란다. 노자는 또 이렇게도 말한다.
 
   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불출호, 지천하. 불규유, 견천도. 기출미원, 기지미소.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며,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보나니, 그 나감이 멀면 멀수록 그 앎은 더욱 적어진다.
 
   어느 여름 날 오후 늦은 시간에 처음 듣는 목소리의 어떤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이 사는 곳은 부산이지만 지금은 전라도 광주에 있으며, 몸이 아파서 어느 절에 잠시 의탁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는, 내 홈페이지에서 도덕경을 풀이한 글을 읽었는데 뭔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질문도 드리고 싶고 또 선생님의 강의도 한번 듣고 싶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마침 부산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하고 있으니 편한 시간에 어느 때건 한번 오시라고 했다.
 
   그 날 이후 몇 번의 통화를 더 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별다른 이유도 없이 허리가 아파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이후 서른아홉 살이 될 때까지 이런저런 모양으로 찾아온 온갖 병과 싸워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결혼도 못했고, 제대로 된 직장 생활도 할 수 없었으며, 그러다 보니 이제는 꿈도 삶의 의욕도 다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동안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녔고, 좋다는 약은 다 먹어봤으며, 심지어 용하다는 어느 무속인의 말을 듣고 천년 된 무덤의 흙을 파서 밤 12시에 촛불을 켜놓고 참기름을 개서 부적도 붙여보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이 결국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더할 나위 없이 지쳐가던 터에 광주에 있는 어떤 스님과 인연이 되어 지금은 그 절에 의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지난(至難)했던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내 마음도 참 애틋해져서, 그렇게 전화를 주셨으니 꼭 한번 시간과 마음을 내어 부산 강의에 오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느 날 그가 마악 강의를 시작하고 있는 시간에 깡마르고 푸석한 얼굴로 무척 힘들어 보이는 발걸음을 떼며 강의실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보자 먼 길을 찾아와준 그가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잠시 인사를 나누고 뒷자리에 앉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를 보며, 오래 힘들었을 그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강의를 하는 내 입에서는 자꾸만 마음과는 다르게 다음과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님은 오랫동안 몸이 아팠다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단 한 순간도 아파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단 한 순간도 아파본 적이 없기에 님은 사실은 아픔이 뭔지도, 고통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그의 얼굴은 일순간 설명할 길 없는 섭섭함과 분노와 억울함 같은 것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며 말을 계속했다.
   “왜냐하면, 님은 어떻게든 병이 낫고 건강해지고만 싶어서 님에게 찾아온 그 병과 고통을 언제나 원망하고 저주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달아나려고만 했지,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받아들여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한 순간도 받아들여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아픔을 알며 고통을 알겠습니까. 그런데 병은 그렇게 낫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님이 가졌던 그런 마음으로는 결코 병이 낫지 않아요. 저항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단 한 순간만이라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님이 진실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받아들임 속에서 님의 마음은 전혀 다른 질적 변화를 경험할 것이며, 동시에 건강과 자유도 함께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조금씩 나의 진심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표정도 이완되었으며, 강의를 마쳤을 땐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곤 몇 번의 강의를 더 듣고 돌아가던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던 도중에 그는 문득 자신이 39년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받아들여본 적이 없고, 단 한 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으며, 단 한 번도 자기 자신과 함께 살아본 적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날 이후 그의 허리는 조금씩 나아 나중에는 뛰어다니게도 되었고, 어느 날엔가는 축구를 하다가 다쳤다며 엄지발가락을 붕대로 감고 오기도 했었다.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며,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보나니, 그 나감이 멀면 멀수록 그 앎은 더욱 적어진다.”라는 노자의 말처럼, 진정한 치유는 고통을 받아들였을 때 그 고통 안에서 이루어지건만, 그는 오직 고통 밖에서만 건강하고 자유롭고자 했기에 그 오랜 세월 동안 더욱 질기도록 고통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 사이는 매번 서로 반대된다(天理人欲之間每相反)고 했던가…….
 
   계명대학교 한학촌 모임에 찾아온 어떤 여학생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 그날따라 강의 시간에 조금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처음 보는 여학생이 앉아 있기에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오게 된 연유를 물었는데, 그 여학생은 대뜸 마음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내가 말했다.
   “마음이 힘들면 그냥 좀 힘들어 보세요, 그 힘듦에 저항하지 말구요. 그 힘듦을 받아들이고 진실로 힘들어보면 오히려 힘들지 않게 되는데, 힘들지 않으려고만 하니 더욱 힘들기만 할 뿐이랍니다. 진정한 평화는 바로 그 힘듦 속에 있어요. 저항하지 않는 마음 속에요.”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든 힘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여 찾아왔는데, 오히려 그 마음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한번 힘들어 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강의하는 내내 진지하게 듣더니, 무언가를 이해한 듯 그래서 자신 안에서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 얼굴이 되어 그 여학생은 총총히 돌아갔다. 그리곤 그 다음 주 모임 때 다시 왔기에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쌩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힘들 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똥 누고 싶을 때 달려가 똥 누듯이, 오줌 누고 싶을 때 오줌 누듯이, 그리고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눕듯이, 힘들 땐 그냥 좀 힘들고 우울할 땐 그냥 좀 우울하고 무너질 땐 그냥 좀 무너지며 말을 버벅거릴 땐 그냥 버벅거리면 될 것을, 그게 결코 잘못된 것이거나 구속 혹은 초라함이 아닌 것을,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그것이 바로 도요 자유요 힘이며 평화인 것을,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것을 떠나 다른 어떤 것에서 평화를 찾고 자유를 찾으니, 오히려 매 순간의 삶이 너무나 힘들어져버리는 것이다.
 
   송(宋)나라 때 선승(禪僧)인 차암수정(此庵守靜)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流水下山非有意
   유수하산비유의
   片雲歸洞本無心
   편운귀동본무심
   人生若得如雲水
   인생약득여운수 
   鐵樹開花遍界春
   철수개화편계춘
   흐르는 물이 산 아래로 내려감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한 조각 구름이 마을에 드리움은 본디 무슨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만약 구름과 물 같은 마음을 얻는다면
   쇠나무에 꽃이 피어 온 누리 봄기운 가득 하리라.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우리 마음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힘겨움이 찾아오고 우울과 불안, 미움, 외로움 등이 밀려오는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감과 허무, 강박, 무기력, 초라함 등이 내 마음에 드리우는 것은 본디 무슨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저항하지 않으면 물과 구름과도 같이 그것은 다만 잠시 머물다가 흘러갈 뿐이니, 사람이 만약 이와 같은 마음을 얻는다면 닫히고 갇혔던 영혼에 꽃이 피고 생명의 기운이 다시 돌아, 모든 삶의 순간순간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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