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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답'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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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4,443회 작성일 12-08-0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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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노자의 도덕경을 강의해 온 지도 벌써 17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수십 번도 더 도덕경을 사람들에게 강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내가 이렇게 강의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도 젊은 시절 괜스레 삶이 아팠고 괴로웠고 때로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고통스러워, 내게 평화를 가져다주고 진정 나답게 살게 해주며 내 안의 모든 의문들을 해결해 줄 어떤 답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서른 네 살의 어느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내 안의 모든 갈증과 추구가 끝이 났고 마음에 쉼이 왔으며 무엇을 해도 허무하지 않은 평화가 나를 가득 채웠다. 삶의 어느 곳 어느 순간에도 점 하나 찍지 못한 채 마른 먼지 일으키며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삶이 끝이 나고,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돌아와 다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즐기며 자족하며 산 것뿐인데, 그리고 문득 한문을 배우고 싶어 향교에 등록해 열심히 배우며 공부한 것뿐인데, 자꾸만 이런저런 모양으로 사람들이 다가와 내가 보고 있는 책을 함께 읽어 나가자며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의 문자(文字) 공부가 일천(日淺)했기에 마냥 손사래를 치다가,
   言者所以在義 得義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언자소이재의 득의이망언 오안득부망언지인 이여지언재
   (말이 있는 까닭은 뜻에 있으니, 뜻을 얻으면 말을 잊을지라. 내 어디에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 그와 더불어 말을 해볼꼬!)
   라는 장자의 말이 생각나, 문자는 모르지만 뜻은 얘기해 볼 수 있겠다 싶어 조금씩 말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17년 동안의 강의하는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향교에서 배우던 논어를 가지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나의 얘기는 도덕경과 금강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 대한 강의로 이어졌는데, 그 모두는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저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요청에 의해 그리 되었으니, 그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그 많은 경전들을 읽어볼 마음을 내었을까를 생각하면, 내가 그들로부터 받은 은혜와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오늘도 그 감사함 속에서 살고 있다.
 
   도덕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들이 쓰여진 시기와 환경과 언어는 각각 다르지만, 그 모든 경전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시점은 바로 ‘지금’이며, 그 모든 경전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나’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리는 언제나 ‘지금’ 속에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자유 또한 ‘지금’ 속에 있고, 완전한 행복 또한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이미 그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복 혹은 자유를 어떤 내외적 조건이나 환경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내가 이러저러해지면 행복해질 것이다거나 어떤 상태가 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혹은 내적으로 어떤 경지에 이르면 마음의 모든 힘겨움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추구하거나, 얻지 못한 ‘지금’을 한탄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두는 행복이나 자유를 어떤 모양을 지어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행복이나 자유를 밖에 있는 것, 그래서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미래의 어느 순간에 가서야 얻을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행복은 밖에 있지 않으며, 자유 또한 어떤 조건이나 상태 혹은 미래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道在當人眼睫裡
   도재당인안첩리
   西來面目只如今
   서래면목지여금
   渴飮饑飧常顯露
   갈음기손상현로
   何用區區向外尋
   하용구구향외심
   도가 그대 눈썹 안에 있거늘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지금도 묻고 있는가?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데서 한결같이 환하게 드러나는데
   어찌하여 구구히 밖을 향해 찾을꼬?
 
   3년 동안이나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어떤 분이 있었다. 아무리 잠을 자려고 해보아도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고, 그 지긋지긋한 불면증을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러는 동안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쇠약해져 건강이 몹시 나빠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겠다 싶던 터에 가족과 지인들의 간곡한 제안으로 그 분이 마지막으로 부여잡은 것은 승철 스님을 찾아뵙는 것이었다. 승철 스님은 워낙 유명하신 분이었기에 쉽게 만나뵐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분 만큼은 자신이 숙면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실 것만 같았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승철 스님 앞에 앉게 된 그 분은 절박한 심정으로 간곡하게 말씀드렸다고 한다.
   “스님, 제발 잠 좀 자게 해주십시오. 3년을 제대로 못 자서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스님이라 큰 기대를 했고 또 무슨 시원한 처방을 내려주시리라 분명히 믿고 갔는데, 그 말을 들은 승철 스님은 오히려 퉁명스럽게, 마치 호통을 치듯이
   “그렇게도 오지 않는 잠인데, 뭐 하러 자려고 하느냐! 자지 마라!”라고 내뱉고는 홱 돌아앉아 더 이상 말을 하려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니, 3년을 불면증에 시달린 나머지 너무나 괴로워 어떻게든 잠 좀 잘 수 있는 방법을 구해 그 먼 길을 찾아왔건만, 자지 말라니, 그럼 나보고 죽으라는 말인가……?
   바위처럼 돌아앉은 승철 스님이 너무나 서운하고 매정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나 그 먼 길을 다시 터벅터벅 돌아오면서 그 분은 너무나 절망적인 마음이 되어버렸다.
   ‘이제 어떡하나……. 이대로 돌아가서 다시 그 지옥 같은 밤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을 때 또다시 불면과 싸워야겠다며 잠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바로 그 어느 한 순간 문득, 아까 낮에 승철 스님이 “그렇게도 오지 않는 잠인데, 뭐 하러 자려고 하느냐! 자지 마라!”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게도 오지 않는 잠인데, 내가 뭐 하러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나 자려고 애썼던고! 자지 말자……’
   말하자면, 그 분은 3년 만에 처음으로 불면에 대한 저항을 마음에서 내려놓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분은 죽음과도 같은 잠에 곯아 떨어져 이후 일주일간을 내리 자게 된다. 가족들도 그렇게 깊이 잠든 그 분의 모습이 너무나 고마워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게 되는데, 일주일 만에 잠에서 깬 그 분이 신기한 듯 툭 내뱉은 첫마디는
   “햐~, 여기에 뭔가가 있구나!”
   그리곤 그 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대구 도덕경 모임에 어느 날 63세 되신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 오셨다. 어떻게 이 모임에 오시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 분은 인생이 너무 외로워서 어떻게든 외롭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없을까 해서 왔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분은 평일에는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늘 바쁘게 지내고 있고 주말에도 친구들을 불러내어 차를 마시기도 하지만, 홀로 있는 시간만 되면 이 사무치는 외로움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잊으려고 하고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 내 안에서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이 외로움을 이제는 견딜 수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 내가 간곡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아주머니는 외롭다 외롭다 하시지만, 제가 보기에 아주머니는 외로움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단 한 순간도 외로워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이 밀려올라 치면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달아나려고만 했지, 단 한 번도 그 외로움을 받아들여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도 외로움을 받아들여본 적이 없고, 단 한 순간도 그 속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외로움을 알겠습니까. 외로움을 벗어나고 외로움을 달래려는 모든 몸짓들을 정지해 보십시오. 그리곤 진정 단 한 번만이라도 외로워보십시오. 그러면 영원히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달마(達磨) 대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은 신심명(信心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서 택하는 그 마음만 내려놓아라.
   다만 (내 안의 어떤 것은) 미워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圓同太虛 無欠無餘 
   원동태허 무흠무여
   良由取捨 所以不如
   양유취사 소이불여
   원만하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건만,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본래 그대로 한결같지 못하다.
 
   불면과 숙면, 외로움과 당당함은 모자라는 것도 아니요 남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런데도 하나는 미워하여 버리려 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여 취하려 하기 때문에 삶은 우리에게 매 순간 힘든 무엇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답’이 있을 뿐이다. 우리 안에는 온통 ‘답’뿐이다. 오직 그것에 저항하고 거부할 때 ‘답’은 오히려 우리에게 매 순간 해결을 요구하는 힘든 ‘문제’로 다가오게 된다. 자유란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행복 또한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There is no secret ingredient.
   It's just you.
 
   비법이란 없다.
   단지 너 자신이 있을 뿐이다.
                (영화 ‘쿵푸 팬더’ 1편의 마지막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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