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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자유케 하는 건 저항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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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9,308회 작성일 06-03-0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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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어느 요가명상 공동체에서 계간(季刊)으로 발행하는 소식지 최근호에 실린 저의 글입니다. 그분들의 소식지가 발간되어 며칠 전 제게도 배달되어 왔기에, 이제 여기에 올려 여러분들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건 저항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 당신은 우리들을 당신을 향하게끔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영혼은 당신 가운데서 안식하기까지는 그 불안함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Fecisti nos, Domine, ad Tei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이는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성인(聖人)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 354~430)가 그의 <고백록>에서 한 말이다. 

    (이때 ‘하느님’이란 곧 다른 이름으로 말하면 진리(眞理)이며, 도(道)이며, ‘참나[眞我]’이며, 깨달음이며, 부처[佛]이며, 또한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러한 ‘이름(名)’들을 그때그때 혼용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진실로 평화로우며, 오직 ‘그’ 안에서만 진실로 자유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만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가 없으며, 존재의 이 근원적인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오직 ‘그’만이 생명이요 또한 궁극의 답(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 곧 ‘나[眞我]’ ― 를 만나야 한다. 

    아, 우리가 ‘그’ ― 곧 ‘나[眞我]’ ― 를 만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영혼의 메마름과 부조화와 그 한없는 구속감이 얼마이며, ‘그’를 만나 마침내 자유하기 위해 떠돌아다닌 세월이 또한 얼마인가!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누리는 자’의 풍요로서가 아니라 ‘추구하는 자’의 가난함으로 여기 서 있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를 만날까?
    어떻게 하면 ‘그’ 를 만나 생(生)의 모오든 방황과 메마름과 가난함을 끊고 영원히 자유하며 영원히 풍요로울 수 있을까? 아, 도대체 그 길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미 ‘그’ ― 곧 ‘나[眞我]’ ― 를 만나 있다. 아니, 우리 자신이 이미 이대로 ‘진아(眞我)’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야 할> 진아(眞我)란 본래 없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진아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며, <단 한 순간도> 그것과 분리된 적이 없다. 우리가 이미 그리고 본래 ‘그것’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화로운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나?
    ‘하느님’을 만나면, ‘진아’를 만나면 생(生)의 모든 메마름과 방황이 영원히 끝이 나고 가득한 평화 속에서 지복(至福)을 누린다는데,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기에, 이미 ‘그것’이라는 우리는 평화는커녕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깊디깊은 갈증을 어쩌지 못해 하며 지금도 이토록이나 몸부림치고 있는가? 아,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우리에게 잘못되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그 하나만 우리에게서 버려지면 우리는 즉시로 ‘본래의 나[眞我]’를 만나게 되어, 지금 이대로 영원한 평화와 지복 속에 있게 된다. 그렇다면, 잘못된 그 하나란 뭘까?
    그것은 곧 우리의 ‘생각[思考]’ 혹은 틀 지워진 ‘마음’이다. 

    이를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라 하기도 하고,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선악과(善惡果)’의 비유로 말해지기도 하는 바, 그것은 즉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을 단지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만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단지 이분법적으로만 ―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거룩하다’ ‘추하다’, ‘부족하다’ ‘완전하다’ 등으로 ― 바라보도록 틀 지워져 있다 보니,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고, 오직 좋은 것은 취하려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끊임없이 버리려고 하는 취사간택(取捨揀擇)의 미망(迷妄)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생(生)은 한없이 굴절되고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잘못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이분법적으로 분별(分別)하고 간택(揀擇)하고 취사(取捨)하는 바로 그 마음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한 마음만 내려지면, 우리는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히려 그 ‘분별심’을 따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고치고 바꿈으로써 보다 더 완전한 존재가 되려고 하니, 아, 그 미혹(迷惑)을 어찌 한단 말인가?
    필자는 이를 라마나 마하리쉬의 다음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깨달음의 상태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이며, 진아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 ‘있는 그대로’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란 또 어떤 것일까?
    그것은 뜻밖에도 너무나 단순한 말이다.
    진리란 그와 같이 참으로 단순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란 지금 여기 우리네 이 현재의 삶 속에서 매 순간순간 경험하는 온갖 다양한 감정, 느낌, 생각들을 가리킨다. 그 속에는 때때로 빠지게 되는 ‘잡생각’도 있을 것이고, 어느 순간 문득 찾아오는 괜한 우울과 무기력도 있을 것이며, 분노와 짜증, 게으름, 때때로의 미움, 불안, 기쁨, 즐거움, 설렘, 답답함, 경직과 긴장, 우유부단, 공허감 등등 뿐만 아니라, 한 줄기 따스한 햇살로 가슴 속에서 살포시 일기 시작한 어떤 설명할 길 없는 행복감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란 지금 여기 이 현재 속에서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 살아가는 우리네의 매 순간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내면의 모습’을 가리킨다. 

    그런데 라마나 마하리쉬에 의하면, 그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가 바로 ‘깨달음의 상태’요, 그것 외에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 ‘진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하리쉬는 또 다른 곳에서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다.”거나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라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다. 우리는 이미 이대로 ‘진아’이다. 따라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무언가를 함으로써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 다만 매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 그것이 곧 ‘깨달음’이요 ‘지복(至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렇기는커녕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고,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며, ‘있는 그대로’를 극복함으로써 깨달음과 지복과 평화를 얻으려고 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삶의 어느 순간 문득 우리 자신 안에서 짜증과 무력감과 게으름과 불안과 우울과 격렬한 화와 미움과 우유부단과 공허감 등등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대뜸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거나 버리려고 함으로써 내면의 질서와 평화를 다시 회복하려고 한다.
    즉, 우리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존재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란 뭔가 부족하고, 초라하고, 그래서는 안 될 것 같고, 심지어 추해 보이기까지 하니 우리는 잠시도 ‘있는 그대로’ 있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지금’을 버리고 ‘미래’로, ‘부족’을 버리고 ‘완전’으로, ‘혼란’을 버리고 ‘질서’로, ‘번뇌(煩惱)’를 버리고 ‘보리(菩提)’로, ‘중생(衆生)’을 버리고 ‘깨달음’에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아, 그러나 완전한 평화는 그러한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결코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목표>도 아니다. 삶의 질적인 비약(飛躍)은, 그 완전한 자유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다만 이분법적인 사고(思考)의 영역일 뿐이며, 깨달음은 결코 사고의 영역이 아니다.  
 
    그리하여 라마나 마하리쉬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말한다.
    “깨달음의 상태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이며, 진아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그렇다. 우리가 삶의 매 순간순간 경험하는 모든 내면의 있는 그대로의 감정, 느낌, 생각들은 이미 그대로 완전하다. 그 있는 그대로의 낱낱의 것이 모두가 진아이다. 진아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번뇌(煩惱) 그대로가 보리(菩提)요, 생멸법(生滅法) 그대로가 불법(佛法)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지 말고, 단 한 순간만이라도 거기 그냥 있으라.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것’에 저항하지 말고 온전히 받아들여 그 자체가 되어 보라. 그리하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되리라, 우리는 이미 이대로 완전하다는 것을, ‘부족’ 그것이 ‘완전’이며 ‘중생’ 그것이 ‘부처’라는 것을, 그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가 이미 자유요 평화요 지복이라는 것을!
 
    그와 같이, 우리를 진실로 자유케 하는 건 저항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바로 있는 그대로의 것에 대한 모든 ‘저항’을 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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