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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만 하며 살아온 31년의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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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7,278회 작성일 06-02-0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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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어느새 가을이 많이 무르익었습니다.
    하늘은 맑구 햇살은 눈부시구 물들어 가는 단풍은 더없이 곱기만 합니다. 아,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살만한 곳인지요! 거기다 36.5도의 따뜻한 체온과 삶과 숨결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
    오늘은 그 가운데 한 사람, 김미영이라는 제 대학 후배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느 인연인들 귀하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미영이와의 만남과 인연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해 전 어느 날 대구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느림'이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던 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카페가 비어있는 낮시간 동안 그 곳에서 도덕경 강의를 하면 어떻겠느냐구요. 그러면서 그는 강의 사실을 주간지에 광고도 내고 또 따로이 팸플릿도 만들어 학교 여기 저기에 뿌렸었는데, 강의를 시작하는 날 그것을 보고 찾아온 몇 사람들과 서로 인사도 나누고 또 강의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바로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미영이를 제 친구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아마 미영인 그 카페엘 가끔씩 왔던가 봅니다. 그렇게 미영이와 나는 만났는데, 아! 처음 그 얼굴을 마주할 때의 제 마음은 무언지 모를 안타까움과 함께 왜 그리도 아려오던지요! 서로 인사를 나누며 나이를 물으니 스물 아홉이라고 하는데, 그 얼굴에는 스물 아홉의 나이가 주는 생기나 탄력은 하나도 없고, 깡마르고 푸석한 피부에 눈동자는 어떤 설명할 길 없는 불안감으로 그저 두리번거리고만 있었습니다.
    '아, 삶이 참 힘든 아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몇 마디 나누다 말고는 제가 대뜸 말했습니다.
    "미영아, 너 앞으로 6개월만 날 따라다니거라. 강의도 듣고, 또 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날텐데, 그때마다 네게 연락할테니 함께 가자꾸나. 그렇게 하다 보면 그 6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어쩌면 네 마음의 짐도 내려놓을 수 있을 거야……."
    그랬더니 미영인 반가운 얼굴로 흔쾌히 그러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뿐 이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 카페에서의 강의는 물론이거니와 매주 목요일 연암찻집에서 있는 도덕경 모임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딱 한 번 우연하게 대구시립도서관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더욱 초췌해진 모습에 이번엔 병색마저 완연해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미영이 아니냐! 이게 어찌된 일이냐? 너 어디 아프니?"
    그랬더니, 수면제가 없인 잠을 못 자는데, 돈은 없구, 그래서 값싼 수면제를 계속 먹었더니 간을 다쳤답니다. 그래서 요즘엔 서울로 치료하러 다닌다기에, 아! 더욱 안타까운 마음에 자주 보자며 거듭 힘주어 얘기도 하고, 또한 그 후에도 몇 번 전화통화를 했지만, 그러나 그와 인연이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꼭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불쑥 연암찻집 강의 모임에 나타났습니다. 건강은 좀 좋아진 듯 보였고, 옷 매무새도 무척 신경을 쓴 듯 말쑥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아니, 미영이 아니냐! 어서 오너라! 난 이 자리에서 널 1년 동안이나 기다렸단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으면서 둘러앉은 다른 도덕경 식구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잠시 강의와 모임에 나온 사람들의 주고받는 얘기를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미영인 갑자기 더는 못참겠다는 듯 짜증섞인 투로 말했습니다.
    "쳇, 여긴 나름대로 한소식 하지 못한 사람들은 끼지도 못하겠네요! 입으로는 사랑이다 뭐다 하지만, 사실은 군림하려는 자들의 역겨운 오만과 값싼 동정에 불과할 뿐인 이런 모든 말과 제스처들이 제겐 그저 역겹고 같잖게 보일 뿐입니다……!"
    갑자기 분위기는 썰렁해져 버렸고, 어색한 침묵만이 짧은 순간 모두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어색한 침묵을 깨고 제가 말했습니다.
    "미영아, 네 눈엔 그런 것들밖에 보이지 않는지 모르지만, 내가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 이 모임엔 그런 것은 없단다. 오히려 그렇기는커녕 여긴 사랑과 따뜻함과 진정한 위로가 흐르고 있단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렴. 지금 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그러나 정말 아니다 싶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면 돼. 그런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여기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않았고, 공부를 마치고 연암찻집을 나와 뒤풀이를 위해 좀 더 편한 자리로 옮겼을 때, 그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내 옆에 앉아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선배님, 저는 지난 10년 동안 사실은 오직 '절제'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열여덟 살 때 출가(出家)하려고 어느 절엘 찾아갔었는데, 아직 너무 어리다며 그곳 스님이 받아주질 않아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이후 저는 지금까지 마음으로는 언제나 출가승(出家僧)처럼 절제하며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108배를 했고, 계(戒)를 지키려고 애썼으며, 참선(參禪)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어떤 체험들도 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때로 그러한 체험과 삶이 지속되지 않고, 또 마음먹은 대로 제대로 절제가 되지 않을 땐 이번엔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저 자신을 학대하며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듯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과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 자유하지 못하며, 여전한 굴레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래, 미영아. 그렇다면 내가 네게 하나 물어보자. 너는 지난 10년 동안 오직 절제를 위해 몸부림쳤다고 하지만, 그러나 단 한 순간인들 <진정으로> 절제가 되더냐?"
    "……아뇨."
    "또 절제가 되지 않을 땐 커다란 절망감 속에서 스스로를 쓰레기 취급하며 내팽개쳤다고 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내팽개쳐지더냐?"
    "……아뇨."
    "그래, 그런 거란다. 우리의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말하자면, 절제의 모양은 있으나 절제는 없고, 내팽개침의 모양은 있으나 진정한 내팽개침은 없었던 게지. 그런데 존재의 해방(解放)은 그러한 노력과 몸부림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야.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써 스스로를 완전케 할 수 없어.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이대로 이미 완전하니까! 이미 완전한 것을 다시 어떤 노력을 통해 완전케 한다는 게 가능하겠니? 너 자신을 한 번 보렴. 지난 10년 동안의 그 애틋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 네 안에는 단 한 톨의 진정한 평화도, 자유도 없지 않니? 다시 말해, 너는 지금껏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거야. 그건 지금의 네 삶이 이미 충분한 증거가 되고 있고. 그렇지 않니?"
    이 대목에서 미영인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위선(僞善)과 깊은 우쭐거림이 들켜버렸다는 부끄러움과 함께, 심히 자존심을 상해 하는 묘한 표정이 일순간 그 얼굴을 스쳐지나갔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순간 미영인 자신이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버티고 있던 한 뼘 남짓한 내면의 땅마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의 실상(實相)을 한 번 봤던 게지요. 어쨌든 저는 그런 미영이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을 계속했습니다.
    "혹 너는 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지금보다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다 보면 그러한 것들이 가능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항변할는진 모르지만, 아냐, <자유>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야. 자유란 '열심'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란다. 다른 통로가 있어. 말하자면, 우리를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로 인도하는 다른 통로가 말이다. 그 다른 통로를 알지 못했기에 네게는 그 오랜 세월 <자유>를 향한 무한대의 수고와 몸부림만 있었지, 존재의 진정한 해방(解放)은 없었던 거야. 만약 네 안에서 어느 순간 그 다른 통로가 열리기만 하면……."
    그때 미영인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습니다.
    "선배님, 그 다른 통로라는 게 뭐죠? 어떻게 하면 그리로 들어갈 수 있나요? 그리고 전 내일부터 한 달 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모임에 나오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 일을 하면서도 이 <공부>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을 수 있나요? 제게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참나[眞我]'를 찾는 것이예요!"
    "그래, 좋아. 그럼 이렇게 한 번 해보렴. 지금까지 네가 해오던 방식과는 정반대로 하는 거야. 즉 <마음공부>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해보려는 바로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적어도 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 한 달 동안만이라도 그냥 먹고 자고 일만 하는 생활 ― 네 마음 속 깊은 오만 속에서 저차원(低次元)의 것으로 무시하거나 밀쳐놨던 ― 만 하는 거야. <마음공부>에 관한 어떤 책도 읽지 말고, 108배도 걷어치워 버리고, 참선도 하지 마. 뿐만 아니라 어떤 영적 스승을 찾아가 무언가를 질문하는 일도 하지 말구. 말하자면, 네가 지금까지 <자기완성>이나 <깨달음>을 위해 기울여왔던 그 모든 노력과 애씀들을 정지하고, 다만 현실에서 주어지는 생존을 위한 일만 해보라는 거야. 진리는 바로 그 '삶'과 '생활' 속에 있건만, 너는 어느새 <마음공부>라는 것에 갇혀 '삶'과 '생활'로부터 유리(遊離)되고 박제되어 있어. 그러니 이제 그만 하라는 거야. 네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마치 진리를 떠나 진리를 구하는 것과 같아……."
    이때 미영인 땅이 꺼지는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정말 막막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 선배님. 그건 제게 너무 어려운 일인데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그 마음을 놓아본 적이 없거든요!"
    "봐, 어느새 네게는 '삶'과 '수행'이 분리되어 있어. 그리고 '삶'보다는 '수행' 쪽에 보다 더 많은 의미와 가치와 무게가 부여되어 있구. 그래선 결코 네가 바라는 진리의 자리에 닿을 수 없어. 너는 '깨달음'과 '진리'를 향한 노력과 수행을 네 삶 속에서 결코 놓을 수 없는 '생명줄'로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정작 그건 '썩은 동아줄'에 불과해, 너를 결코 진정한 생명과 자유에로 인도해 줄 수 없는―! 그러니, 진실로 진실로 네가 자유코자 하거든 <자유>를 향한 네 모든 노력과 마음과 몸짓들을 정지해 봐. 그리곤 다만 생존만 하는 거야. 그러면 돼. 그러면 너는 그 '무위(無爲)' 속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많은 새로운 발견들을 네 안에서 하게 될 터이구, 그 새로운 <발견>들 속에서 너는 조금씩 조금씩 자유하게 될 거야. 정말……!"
    저의 그런 애틋한 말들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미영인 이윽고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선배님. 어렵겠지만,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리곤 미영인 돌아갔고, 저는 다시 예전처럼 강의를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바쁘게 돌아다녔습니다. 가끔씩 미영이 생각이 날 때면 나와 약속한 '실험'을 잘 하고 있겠지 하는 마음과 함께, 그 '실험' 속에서 문득 문득 자신 속에 켜켜이 쌓여있던 온갖 거짓과 위선과 오만들이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그가 겪게 될 놀라움과 힘겨움과 고통들이 못내 저에게도 느껴지면서, 까닭없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그가 1년만에 내 앞에 모습을 보이던 그때처럼 불쑥 연암찻집 모임에 나타났습니다.
    "아니, 미영이 아니냐! 벌써 한 달이 됐니?"
    "아뇨, 3주만입니다. 비록 한 달을 약속했지만, 더 계속 하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서 도망쳐 왔습니다."
    "그래……, 그럼 마침 강의도 거의 다 마쳤으니, 네가 한 '실험'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꾸나."

    그가 들려준 얘기는 이랬습니다.
    비록 만족스러운 결과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깨달음과 진리와 참나[眞我]를 향한 끊이지 않는 마음과 노력들이 있었기에 그것으로써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한 그것들을 자신이 살아야 하는 너무도 분명한 이유로서 붙잡고 있었는데, 비록 '실험'이라는 형태로나마 그 모든 것들을 놓고 보니, 처음엔 너무나 초조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도무지 '하루'를 산다는 게 사는 게 아니었고, 그 긴 시간들의 막막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미영인 순간 순간 다시 열심을 내어 명상과 깨달음에 관한 책을 읽으며 자신을 추스르고 싶었고, 더 늦고 더 망가지기 전에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참선을 해야만 할 것 같았으며, 그도 못하면 미친 듯이 뛰쳐나가 술을 마시거나 짧은 여행이라도 갔다 와야 살 것 같았는데, 그 모든 <구멍>들을 틀어막기로 약속했으니, 그 답답함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러나 미영인 달아나지 않았고, 그 <맞닥뜨림>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아! 그럴수록 이번엔 자신에 대한 깊은 슬픔과 함께 견딜 수 없는 환멸감이 밀려오더랍니다.
    태어나자마자 미영인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삼촌집에 보내어졌는데, 이후 생모(生母)와 길러준 엄마 사이를 오가며 어린것이 일찍부터 '눈치'와 사랑 받기 위한 '몸짓'부터 먼저 배웁니다. 이 '눈치'와 '몸짓'은 이후 31년 동안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욱 깊어지고 내밀화 되어 그만 자신의 삶의 토대가 되어버렸는데, 그 뿌리깊은 무의식이 이번 '실험'을 통하여 발견되면서, 미영인 탄식합니다.
    '아, 나는 31년 동안 연극만 하며 살아왔구나……!'
    '지금까지 나는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구나……!'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까지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통해서만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 <거리> 속에서 그나마 파리한 자신을 지탱해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곧 지금까지 자신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며, <진정으로> 누구와 교통한 적도 없었음을 자각케 하는데, 그 자각 속에서 미영인 처음으로 자신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오랜 외로움을 발견하면서 통곡하고 맙니다.
    '아,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도(道)나 깨달음이 아니라, 따뜻함과 사랑이었구나……!'
    그런데도 그것이 엉뚱하게도 도(道)니 깨달음이니 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그것으로써 자신의 끝없는 공허를 채워보려 했지만, 그 속에서 도리어 턱없는 우쭐거림과 겸손을 가장한 오만과 깨달음이니 도니 하는 허영으로써 세상과 사람들을 비아냥거리고 있었음을 문득 깨닫고는 한없는 자괴감과 함께 깊은 환멸 속에서 강한 자살 충동마저 느꼈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즈음 더는 견딜 수 없어 달아나듯 연암찻집으로 왔구요.

    저는 그 아뜩한 힘겨움 속에서도 3주 동안이나 '실험'을 계속해준 미영이가 너무나 고맙고 대견스러워 몇 번이나 무릎을 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오랜 '실험' 얘기를 다 쏟아놓고는 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가면서 미영인 생애 처음으로 눈물과 하나가 되고 울음 그 자체가 되어 동네 어귀에서부터 펑펑 울기 시작하는데, 그 울음은 먼동이 훤히 틀 때까지 그치질 않았답니다.
    그 후에도 미영인 저와 시간만 되면 만나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연암찻집이나 다른 지역의 강의도 따라가 듣기도 했으며, 또 다른 '실험'을 하기도 했는데, 특히 코 끝에 의식을 모아 자신의 호흡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실험은 31년 동안의 미영이의 그 질긴 불면증을 단번에 고쳐놓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렇게 그와 '실험'을 시작한지 두 달 보름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미영인 조금씩 말이 달라지고 눈빛이 맑아지며 그 많던 질문들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그의 삶 전체에서 문득 사자후(獅子吼)가 발해지는데, 아아 그 감동과 감사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갇혀 있던 삶의 문제와 무게와 아픔이 지독했기에 거기에서 빠져나온 뒤의 에너지가 그만큼 더 눈부시고 충만했는진 모르지만, 제 한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그가 이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짐과 그 아픔마저 넘겨받아 따뜻이 어루만져 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에게서 비로소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주인'된 자의 기쁨과 그 넘쳐나는 '긍정의 힘'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자신의 눈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이 '현재'와 '세상'과 '사람'과 '관계'에 대해 그가 모임 때마다 들려준 많은 이야기들은 둘러앉은 우리 모두를 감동으로 일렁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아, 얼마나 가슴 벅차던지요!

    미영인 지금 멀리 호주에 가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와 깊은 영혼의 '쉼'이 오면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어 망설임 없이 그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몇 년간 영어과외를 하면서 느낀 허기를 맘껏 채우고 싶었다나요? 어학연수를 위해 떠난 그 '떠남'이 다시 그를 어디로 인도할는진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어디에 있든 이제는 자신 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어떤 '힘'과 '지혜'가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주고 인도해 갈 것입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두려움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얼마의 세월이 걸릴진 모르지만, 삶과 자신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다시 돌아오게 될 그 날까지 그의 항상적인 건강을 기원해 봅니다. 그리고 도덕경 식구들 모두의 따뜻한 사랑도 함께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의 글은 미영이가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오고 난 뒤에 제게 보내온 글입니다. <이재하씨의 귀가(歸家)>와 같은 글을 한 번 써보라고 했더니, 많이 망설인 끝에 제게 메일로 보내온 것인데, 단지 김미영이라는 한 타인(他人)의 얘기로써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혀지기를 바라면서, 보내온 메일 그대로 미영이의 허락을 받고서 여기에 올립니다.)

    *   *   *

    제목 : 마침내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김미영이 올립니다.
    보낸 날짜 : 2003년 05월 29일 목요일, 아침 06시 16분 30초 +0900 (KST)
    보낸이 : "return to the origin point"
    받는이 : 김기태

    선배님! 이 글은 제가 며칠동안 고민하다가 선배님께 도저히 못쓰겠다고 메일을 보내려다가 얼떨결에 기억이 자꾸 올라오길래 앉은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것입니다. 막상 글을 쓰려고 홈페이지에 있는 <비원단상>에 올려진 이재하씨나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니 도저히 제가 글을 쓸 입장이 아니었어요. 진리를 찾아서 모든 것을 버린 적도 없고, 단지 술 먹고 방황 좀 했다는 내용뿐인데, 너무나도 시시하고 흔해빠진 내용밖에 없더라구요. 이런 얘기쯤은 요즘 젊은 얘들한테도 진부한 그저 그런 얘기지만, 전 선배님께만 보내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진리를 갈구했던 심정을 잘 표현하려 했는데, 쓰다보니깐 저 혼자 흥분해서 이런 글이 됐습니다. 선배님 혼자만 읽으셔도 저는 얼마든지 좋아요. 쓰고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공개할 거리가 별로 못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선배님한테 보냅니다. 그 이후로 전 신경 안 쓰겠습니다. 내것이 아니니까요.
    쓰면서 저 혼자 눈물도 많이 흘리고, 밤새 좋은 여행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 모든 일들을 다시 반추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과거와의 작별을 하는 기분이었으니까요. 무척 가벼워지는 느낌이네요. 이제 잘랍니당……아궁 졸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지난 나의 삶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날들이었는데,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악몽으로만 생각했을까? 나를 돌아보는 글을 한 번 써보라는 기태 선배님의 전화를 받았을 땐 부모님의 이혼소송 조정이 있던 날 아침이었다. 31년 동안의 지긋지긋했던 부모님의 불화(不和)의 끝자락에서마저 일말의 나의 마지막 기대도 외면하고 돌아서는 부모님을 보고 무척 가슴이 아팠었다. 나처럼 상처받고 왜곡되어 비틀어져버린 영혼이었구나…….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와서야 부모님을 증오한다고 믿었던 것이 지독한 착각이었음을 느꼈고, 오히려 내가 진정한 어른이 될 때까지 오래 서로를 참고 견뎌준 두 분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렸다.

    막상 내가 살아온 글을 쓰려고 하니 정말 어려웠다. 우선 지나간 사실들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나열해도, 또는 나의 방황이 얼마나 절절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멋지게 표현한다고 해도 결국은 또 한 벌 껍데기를 뒤집어쓰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또 언어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전부를 말하진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1. 초대받지 못한 손님

    부모님은 원하지 않는 결혼을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억지로 한데다가 성격차이도 굉장히 심해서 함께 있는 것이 고통일 정도였다. 게다가 난 넷째로 태어났는데, 그것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삼촌집에 입양을 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낳은 자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지 2년인가 있다가 숙모가 늦은 나이에 임신이 되는 바람에 나는 되돌려졌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건, 내가 5살 정도밖에 안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고 미친 듯이 이쁜짓을 했던 것들이다. 밤에 오줌을 이불에 안 싸려고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나중엔 온몸이 퉁퉁 부어서 오줌도 제대로 못눠서 약을 먹었고, 똥도 참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누려고 애써서 나중엔 병원에 가서 관장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노력도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항상 우울했던 엄마를 더 화나게 만들었고, 아버지와 갈라서지 못하고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게 다 나를 낳았기 때문이라는 원망만 들었다.

    처음 자살을 꿈꾼 건 정확하게 여덟 살 때였다. 그땐 몽유병이 심했을 땐데, 밤만 되면 일어나서 새벽이 올 때까지 맨발로 거리를 걷고 또 걸어다녔다. 그러나 내딴에는 높다고 생각했던, 예전에 살았던 이층집은 너무 낮았고, 난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잘 살았다.

    2. 숫타니파타

    내가 열세 살이었을 때 큰언니가 대학생이었는데, 그때 우연히 큰언니 책장에서 발견한 숫타니파타를 보고 밤새 충격에 빠졌었다. 그땐 책으로의 도피를 하던 시기여서 어린이들이 읽는 책뿐만 아니라 큰언니의 영향으로 라즈니쉬, 까뮈, 사르뜨르의 책들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닥치는 대로 읽었었는데, 숫타니파타만큼 나를 황홀하게 해준 책은 처음이었다. 그 후 중·고교를 다니면서 큰언니와 혹은 혼자 절의 선방엘 찾아다니면서 참선을 했고, 큰스님을 찾아다니면서 진리를 구걸했다. 그때에는 해탈(解脫)하고 싶다는 열망이 극에 달해서 삼매(三昧)에도 자주 빠지고, 가끔 유체이탈 같은 현상도 경험했다. 그러고 나니 세상일이 하찮게 보이고, 내가 그렇게 사랑을 애걸했던 부모님이 너무나 한심한 인간들로 보였으며, 연예인에 목숨 거는 내 친구들이 같잖게 느껴졌다. 그래서 말을 해도 현학적이고 지적이고 초월적인 단어만 골라 쓰면서, 마음으로는 "너희가 진리를 아느냐?" 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물리학 서적을 탐독하여 불교와 물리학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고, 세상사가 얼마나 덧없는지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설명하고 싶어했다. 그러다 나의 갈 길은 지저분한 사바세계(裟婆世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매한 승려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리산 화엄사에 가서 온 몸이 법열(法悅)로 가득 찬 스님을 만나서 출가를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지금은 때가 아니니 몇 년 더 있다가 오라고 했다. 그때 문득 세상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

    3. 술, 담배, 그리고……

    나를 잊기 위해서 대학시절부터 선택한 것은 여행과 책, 그리고 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지겨워졌다. 삶은 권태였고, 더 이상 새로울 게 전혀 없었다. 첨엔 신기하고 설레던 해외여행도 나중엔 시들해지고, 책도 마치 미궁(迷宮)처럼 나를 끌고 들어갈 뿐 나가는 길은 말해주지 않았다. 진리를 노래하는 책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이르는 길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으며, 그렇게 해봐도 나는 점점 더 심한 갈증을 느꼈고, 마침내 나 자신에게마저도 회의가 들었다. 그러면서 그토록 집착해왔던 출가자의 삶이 단지 라이프스타일의 차이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내게서 없어져 버렸고, 그러고 나니깐 무척 허탈했다. 그래서 자해(自害)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신선했다. 남들이 잘 못 보는 다리와 팔 안쪽에 칼로 상처를 내어 흐르는 피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었고, 상처가 주는 쓰린 고통에 번민을 잊을 수 있었다. 나중엔 피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 대구 동성로에 가서 헌혈을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나 서랍에 쌓여가는 헌혈증을 보면서 차츰 회의를 느낄 때쯤 지친 나는 이 지긋지긋한 땅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것마저 아버지의 반대로 물거품이 되자 마침내 부모님을 저주하면서 알코올중독에 빠져들었다. 술에 만취한 채로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며 달리기를 예사로 하고, 어느 날엔가는 아버지를 각목으로 때리다가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사건 이후 지독한 분열감(分裂感)과 자괴감에 빠져 거식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거의 사는 게 지옥이었다.

    그러다가 방황의 마지막에 만난 사람이 열일곱 살짜리 소년이었다. 그 애는 냉소적이고 차갑고 철저하게 삐딱한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너무나도 헌신적인 사랑을 주었다. 첨엔 장난 좀 쳐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엔 내가 술을 끊게 되고, 마침내 나도 나 자신을 사랑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사랑이란 걸 몰랐고, 태어난 걸 저주했었는데, 처음으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와 작별을 하고나자 갑자기 기태 선배님이 간절히 생각났다. 한 해 전에 술집에서 술 마시다가 우연히 옆자리에서 기태 선배님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땐 내 자신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짧은 우연한 만남 속에서도 나를 정확하게 간파하는 기태 선배님에게 약간의 희망을 느꼈었다.

    4. 그녀가 나를 보네

    일년만에 다시 찾아간 연암찻집 공부방 문을 들어서는 순간 기태 선배님의 첫 마디는 "일년동안 여기서 너를 기다렸다."였다. 그는 내가 이때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독특한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나를 되비춰줄 뿐이었다. 어떤 간섭이나 결정을 하지도 않았고, 심오하고 난해한 이론을 끌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에고에 매몰되려는 나를 건져내 주었다. 그와 처음으로 한 '실험'은 책과 일체의 수행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무척 고통스럽고 초조하고 불안했다. 약속한 한 달을 못 채우고 3주만에 실패했노라고 실토했다. 근데 그 후 얼마가 지나자 내 머릿속에서 수많은 관념의 집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하늘이 보이고 개미가 보이고 버스가 보이고 나무와 꽃들이 보였다. 너무나 컬러풀하게…….

    그래서 두 번째 '실험'을 했는데, 그건 매일 일정한 시간에 나의 호흡을 단지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한 달을 하고 나서 찾아간 엄마를 보면서 나는 난생 처음 가슴이 저릴 정도로 사랑을 느꼈다. 또 보수적이고 완고하지만 한평생 교직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신 아버지가 나 같은 딸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니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그러고 세상을 보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랬다, 비 오는 날이면 예쁜 빗방울 소리가 똑똑 들렸고, 맑은 날엔 나무들이 선명한 초록이어서 눈이 부셨다.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바람은 또 얼마나 감미로웠는지! 차가 고장나면 버스를 타고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즐겁고, 길거리에서 오뎅도 사먹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예전엔 2000cc 안 되는 차는 승차감이 나빠서 싫고, 버스는 불편해서 못타고,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은 불결해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먹었지만 하루종일 찜찜했었다.)

    이런 글을 쓰고 나니깐 좀 쑥스럽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거나 진리를 아는 게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난 여전히 그런 건 모른다. 아니 이젠 그런데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옛날보다 더더욱 무식해지고 단순해졌다. 그리고 중요한 건 깨달음이나 진리를 좇지 않아도 삶이 불안하거나 공허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술친구이자 스승이신 기태 선배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   *   *

    (끝으로, 미영이가 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린 '그녀에게'라는 제목의 글을 여기에 첨부합니다.)

    그녀에게……

    한때 나는 온갖 종류의 마음의 병이 있었다. 요즘은 완전히 까먹고 산다는 걸 어제 연암찻집에서 있었던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에 느꼈다. 정서불안, 조울증, 약간의 강박증, 대인 기피증, 피해망상증에다가 가벼운 분열증세까지……한마디로 정신병 종합선물셋트였다.
    각종 정신분석책과 심리학 관련서적들을 뒤적이며 원인을 미친 듯이 찾아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깨달음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혼자 나름대로 하던 수행도 점차 지쳐갔다. 그래서 점점 술을 마시는 양이 늘어나서 나중엔 하루라도 안 마시면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지경이 되었다.
    내가 기태 선배님을 첨 만난 것도 술집에서였다. 다른 테이블에서 기태 선배님 일행이 술을 마시다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서 얘기를 하게 되었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런 인연이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때 아부지의 간곡한 권유대로 술을 끊었더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니 무쟈게 아찔하다.

    그땐 그랬다. 누가 나를 인정해 주기를, 사랑해 주기를, 이해해 주기를, 배려해 주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 좌절, 원망, 우울이 왔다. 정말 끔찍한 다람쥐 쳇바퀴였다. 겉으론 그럴듯하게, 당당하게, 인생의 주체로 사는 척했지만 속으론 완죤히 땅거지였다. 타인의 사랑을, 관심을, 이해를 얻기 위해서 내 자신을 속여가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첨에는 이런 내가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면 이런 내가 좀 더 당당한 인생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번엔 열나게 깨달음이라는 것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힘든 수행도 할려구 몸부림치고, 소위 한소식 했다는 사람들의 말씀을 밑줄 좍좍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점점 더 황폐해지고 편협한 인간이 되었다. 결국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저쪽에서 안되니까 다른 쪽에 빌붙어서 깡통 들고 구걸을 한 것이었다. 도(道)를 구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서 난 여전히 뭔가를 채우지 못해 환장이었다.

    정말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2시에 대성통곡을 하면서 절규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찾아오고, 놀란 가족들이 아무리 그만 하라고 해도 울음이 그쳐지지 않았다. 새벽 6시가 넘어서야 겨우 멈춰졌다. 마치 조강지처 버리고 창녀한테 수십 년 동안 순정을 바치다 버림받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곤 알았다. 그냥 이대로가 가장 완전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나였음을……!
    뭔가 더하려고 했기 때문에 마음의 병이 생기고 찌들기 시작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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