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옥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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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6,867회 작성일 06-02-07 08:43본문
안녕하세요?
오늘은 오연옥씨 이야기를 들려드릴께요.
오연옥씨는 지금 경남 거창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순박한 땅의 얼굴을 닮은 남편과 함께 따뜻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올해 마흔 한 살의 여인입니다. 얼마전 제가 거창 그녀의 집에 갔을 때 이런 저런 살아온 날들의 얘기를 나누던 그 어느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은, "그게 산 거예요? 지옥이었지....!"라는 그녀의 말처럼, 오연옥씨는 참으로 아픔이 많았던 여인입니다. 그 아픈 얘기들을, 지금은 그 아픔으로부터 많이 빠져나와 환히 웃는 날이 많아진 오연옥씨의 허락을 받고서, 진정 우리 모두를 위하여 이제 조금 할려는 것입니다.
저와 그녀와의 만남은 6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면 저는 언제나 대구 범물동의 한 가정집에서 몇몇 인연된 주부들을 상대로 도덕경(道德經)을 강의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자유게시판>에서 '아줌마'라는 아이디로 이현주 목사님의 <물(物)과 나눈 이야기>를 연재해 올려주던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범물동의 이 집은 바로 그 '아줌마'의 집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여러분들도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이 '아줌마'도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요!
6주 전 어느 날 오연옥씨는 제 강의를 듣고 싶다며 그 먼 거창에서 남편과 함께 대구로 나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버스 한 정류장을 앞서 내려버렸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범물동의 '아줌마' 집까지 그 거리만큼을 걸어서 오게 된 것인데, 그것이 그만 오연옥씨에게는 무리가 되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쓰러져버립니다. 사실 오연옥씨는 몹시도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거창 자신의 집에서 대구 범물동의 '아줌마' 집까지의 두 시간 남짓한 거리는 참 먼 거리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후 2시의 강의 시간에 늦지 않을려고 마음은 벌써 아침부터 서둘렀을 것이고, 도착할 때까지는 몇번이나 버스를 기다리고 또한 갈아탔을 터인데,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그토록 힘들게 하고 지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두 시간의 강의가 끝날 때까지 그녀는 일어나질 못했고, 그래도 그 먼 곳에서 강의를 들으려고 왔는데 인사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극구 깨워 부축해 나온 남편의 배려로 우리는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아아, 그녀는 여전히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어찌나 안쓰럽고 안타깝고 아프던지요! 그래서 대뜸 말했습니다.
"그 몸으로 이 먼 대구까지 강의를 들으려고 오셨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이젠 오지 마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마침 수요일엔 강의가 없으니, 매주 수요일은 오연옥씨를 위하여 완전히 비우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매주 수요일이 되면 저는 어김없이 거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마주 앉았을 때, 그녀는 참으로 오랜 동안 말하기 힘들었던 자신의 아픈 과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굵은 눈물 주르륵 흘리면서 말입니다....자신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보에 싸인 채 길가 어느 한 모퉁이에 버려졌었으며, 그것을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불쌍히 여겨 주워 키웠다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까르르 웃으며 잘 자라던 자신은 한창 예민할 나이인 중학교 1학년 때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변하여 말도 없어지고 웃음도 웃지 않게 되었으며, 친구들도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혼자 앉아 있는 날이 많아졌으며....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자신 속으로 침잠해 가면서 괜스레 슬프고, 불안하고, 두렵고....아아, 이제 막 자기 자신에 대하여 눈떠가기 시작한 사춘기 소녀에게 그것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무게요 굴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자신을 애써 보듬으며 살아내어야 했기에 그 아픈 세월 동안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저 그저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어느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 오랜 동안의 외로움과 긴장과 주눅들림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그래도 외면적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남들처럼 고등학교도 나오고 대학도 졸업하여 어엿한 직장생활도 하게도 되었지만, 그러나 내면으로 깊이 깊이 쌓인 불안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극도로 심해져, 급기야 스물다섯 살인가 스물여섯 살 때쯤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고 맙니다. 그때 이후로 17~8년간을 정신병원에의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면서 독한 약으로 인해 오연옥씨는 영육(靈肉)이 피폐해져만 갔고, 그 어느 한 시점 도덕경을 들으러 온 그녀를 저는 그렇게 만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오연옥씨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한 가지 아름답고 눈부신 얘기부터 먼저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다음날 '아줌마'가 난데없이 제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리곤 대뜸 제 통장 계좌번호를 불러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그런 차로 어떻게 매주 거창엘 가겠어요? 제가 오히려 염려가 되어서 안되겠어요. 돈을 좀 부쳐드릴테니, 타이어도 갈고 백미러도 고치고, 그렇게 차를 손 좀 보고 난 뒤에 타고 가시라구요...."
그리곤 마침 자신에게 있는 돈을 다 털었더니 20만원이 된다면서, 그걸 부쳐주겠다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마음을....안그러셔도 돼요, 돼요, 돼요...."
사실 제 차가 문제가 좀 많았거든요. 그 차는 지난 99년 11월경에 귀농(歸農)하시는 어떤 분이 폐차하려던 것을 그냥 얻은, 90년식 엑셀인데, 여기 저기 강의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2년여를 더 타고다니다 보니 타이어 마모도 심했고, 조금만 속도를 내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으며, 백미러도 떨어져버려 노란 고무줄 밴드로 겨우 매달아만 놓은 형국이었습니다. 더구나 여름엔 에어컨이 되지 않고 겨울엔 히터를 틀 수 없어 무진 덥고 무진 발시려워 했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에 무디고 무감각해 무식하리만큼 잘 견디는 저인지라 그저 그저 감사해 할 뿐이었는데, 그런 차로 거창엘 가려는 제가 '아줌마'는 고맙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던 것이지요.
저 또한 '아줌마'의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던지요! 덕택에 타이어도 갈고 백미러도 고치고 윈드브러쉬도 새것으로 달고 거기에다 기름도 가득 넣고 세차까지 한 번 하고나니 오, 예! 대번에 'BMW'가 부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하....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거창엘 가면서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더랬습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아줌마'의 그 마음 가득 안고 내 더 열심히 하겠노라고, 나를 불러주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부지런히 달려가겠노라고....
다시 오연옥씨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오연옥씨 집엘 도착했을 때 두 부부는 방을 조금이라도 더 따숩게 하기 위해 군불을 때고 있었습니다. 덕택에 연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방에 앉으면서도 제 마음은 얼마나 고맙고 따뜻해 오던지요!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대신해 남편이 찻상을 가져오고, 최대한 자세를 편안히 하라면서 그녀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으로 얘기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우리는 그렇게 마주앉았습니다.
그녀가 처음 제게 한 얘기는 '불안'과 '책읽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불안'은 남달라 너무나 깊고도 오랜 것이어서, 문득 문득 불안이 찾아오면 그것이 곧바로 몸의 경직과 근육의 마비로 이어져, 심하면 의식마저 마비되어 앰뷸런스에 실려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독한 약물을 투여받는 오래고도 끔찍한 병원생활을 감내해야 했는데, 아직 그렇게 심해지기 전 그녀가 대학 다닐 땐 그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어쩌지 못해 하염없이 밖으로만 나다녔답니다. 그러다가 직장생활을 할 땐 그것이 보다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온 존재를 조여들어 오는데, 아아 그 아뜩함 속에서 그녀는 이번엔 필사적으로 책에 몰두합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화장실 가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책에만 몰두하여 그저 닥치는 대로 미친듯이 읽었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랬던 그녀가 그렇게 저랑 마주앉았을 때 문득 하는 말이, 이젠 책을 그만 읽고 싶다는 겁니다. 대학 다닐 때 그렇게 나다녀 봐도 그것이 자신을 불안으로부터 조금도 구제해 주지 못하더니, 이젠 이것도, 이 미친듯한 책읽기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젠 자신은 어떡하면 좋으냐는 겁니다. 아아, 그런 얘기를 듣는 제 가슴이 얼마나 얼마나 미어지던지요!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한 말씀 드리지요. 이렇게 한 번 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연옥씨는 '불안'이 오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하려 하거나 그것에서 달아나려고만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불안'을 언제나 해소나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고, 불안이 찾아오면 그냥 불안해 보십시오. 그 '불안'을 회피나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어보라는 말입니다. 즉, 다음과 같은 한 생각을 일으켜 놓는 겁니다. 말하자면, '또다시 불안이 찾아오면, 이번엔 그냥 불안할 뿐 그 불안 이외의 그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않으리라.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어보리라. 그 불안을 살아내어 보리라....'라는 생각을요. <한 생각>이라는 것은 별것 아닌듯 하지만, 그러나 그 한 생각을 일으켜 놓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요. 보세요, 그 생각을 일으켜 놓지 않았을 땐 지금까지 연옥씨가 그랬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그 불안에 저항하여 그것을 피하거나 달아나려 하고 불안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찾아 바깥 ㅡ <책읽기>도 그렇고 <여행>도 마찬가지이며, 그밖에 다른 모양의 <노력>과 <수행>도 다 바깥입니다 ㅡ 으로만 내달리게 돼요. 그런데 그 <한 생각>을 일으켜 놓으면 우선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과 에너지가 정지할 터이고, 그러면 이제 저항하지 않게 된 그 '불안' 속에서 스스로 알게 돼요, <모든 것>을요!
오늘은 오연옥씨 이야기를 들려드릴께요.
오연옥씨는 지금 경남 거창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순박한 땅의 얼굴을 닮은 남편과 함께 따뜻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올해 마흔 한 살의 여인입니다. 얼마전 제가 거창 그녀의 집에 갔을 때 이런 저런 살아온 날들의 얘기를 나누던 그 어느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은, "그게 산 거예요? 지옥이었지....!"라는 그녀의 말처럼, 오연옥씨는 참으로 아픔이 많았던 여인입니다. 그 아픈 얘기들을, 지금은 그 아픔으로부터 많이 빠져나와 환히 웃는 날이 많아진 오연옥씨의 허락을 받고서, 진정 우리 모두를 위하여 이제 조금 할려는 것입니다.
저와 그녀와의 만남은 6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면 저는 언제나 대구 범물동의 한 가정집에서 몇몇 인연된 주부들을 상대로 도덕경(道德經)을 강의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자유게시판>에서 '아줌마'라는 아이디로 이현주 목사님의 <물(物)과 나눈 이야기>를 연재해 올려주던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범물동의 이 집은 바로 그 '아줌마'의 집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여러분들도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이 '아줌마'도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요!
6주 전 어느 날 오연옥씨는 제 강의를 듣고 싶다며 그 먼 거창에서 남편과 함께 대구로 나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버스 한 정류장을 앞서 내려버렸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범물동의 '아줌마' 집까지 그 거리만큼을 걸어서 오게 된 것인데, 그것이 그만 오연옥씨에게는 무리가 되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쓰러져버립니다. 사실 오연옥씨는 몹시도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거창 자신의 집에서 대구 범물동의 '아줌마' 집까지의 두 시간 남짓한 거리는 참 먼 거리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후 2시의 강의 시간에 늦지 않을려고 마음은 벌써 아침부터 서둘렀을 것이고, 도착할 때까지는 몇번이나 버스를 기다리고 또한 갈아탔을 터인데,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그토록 힘들게 하고 지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두 시간의 강의가 끝날 때까지 그녀는 일어나질 못했고, 그래도 그 먼 곳에서 강의를 들으려고 왔는데 인사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극구 깨워 부축해 나온 남편의 배려로 우리는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아아, 그녀는 여전히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어찌나 안쓰럽고 안타깝고 아프던지요! 그래서 대뜸 말했습니다.
"그 몸으로 이 먼 대구까지 강의를 들으려고 오셨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이젠 오지 마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마침 수요일엔 강의가 없으니, 매주 수요일은 오연옥씨를 위하여 완전히 비우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매주 수요일이 되면 저는 어김없이 거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마주 앉았을 때, 그녀는 참으로 오랜 동안 말하기 힘들었던 자신의 아픈 과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굵은 눈물 주르륵 흘리면서 말입니다....자신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보에 싸인 채 길가 어느 한 모퉁이에 버려졌었으며, 그것을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불쌍히 여겨 주워 키웠다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까르르 웃으며 잘 자라던 자신은 한창 예민할 나이인 중학교 1학년 때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변하여 말도 없어지고 웃음도 웃지 않게 되었으며, 친구들도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혼자 앉아 있는 날이 많아졌으며....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자신 속으로 침잠해 가면서 괜스레 슬프고, 불안하고, 두렵고....아아, 이제 막 자기 자신에 대하여 눈떠가기 시작한 사춘기 소녀에게 그것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무게요 굴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자신을 애써 보듬으며 살아내어야 했기에 그 아픈 세월 동안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저 그저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어느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 오랜 동안의 외로움과 긴장과 주눅들림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그래도 외면적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남들처럼 고등학교도 나오고 대학도 졸업하여 어엿한 직장생활도 하게도 되었지만, 그러나 내면으로 깊이 깊이 쌓인 불안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극도로 심해져, 급기야 스물다섯 살인가 스물여섯 살 때쯤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고 맙니다. 그때 이후로 17~8년간을 정신병원에의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면서 독한 약으로 인해 오연옥씨는 영육(靈肉)이 피폐해져만 갔고, 그 어느 한 시점 도덕경을 들으러 온 그녀를 저는 그렇게 만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오연옥씨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한 가지 아름답고 눈부신 얘기부터 먼저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다음날 '아줌마'가 난데없이 제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리곤 대뜸 제 통장 계좌번호를 불러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그런 차로 어떻게 매주 거창엘 가겠어요? 제가 오히려 염려가 되어서 안되겠어요. 돈을 좀 부쳐드릴테니, 타이어도 갈고 백미러도 고치고, 그렇게 차를 손 좀 보고 난 뒤에 타고 가시라구요...."
그리곤 마침 자신에게 있는 돈을 다 털었더니 20만원이 된다면서, 그걸 부쳐주겠다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마음을....안그러셔도 돼요, 돼요, 돼요...."
사실 제 차가 문제가 좀 많았거든요. 그 차는 지난 99년 11월경에 귀농(歸農)하시는 어떤 분이 폐차하려던 것을 그냥 얻은, 90년식 엑셀인데, 여기 저기 강의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2년여를 더 타고다니다 보니 타이어 마모도 심했고, 조금만 속도를 내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으며, 백미러도 떨어져버려 노란 고무줄 밴드로 겨우 매달아만 놓은 형국이었습니다. 더구나 여름엔 에어컨이 되지 않고 겨울엔 히터를 틀 수 없어 무진 덥고 무진 발시려워 했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에 무디고 무감각해 무식하리만큼 잘 견디는 저인지라 그저 그저 감사해 할 뿐이었는데, 그런 차로 거창엘 가려는 제가 '아줌마'는 고맙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던 것이지요.
저 또한 '아줌마'의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던지요! 덕택에 타이어도 갈고 백미러도 고치고 윈드브러쉬도 새것으로 달고 거기에다 기름도 가득 넣고 세차까지 한 번 하고나니 오, 예! 대번에 'BMW'가 부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하....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거창엘 가면서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더랬습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아줌마'의 그 마음 가득 안고 내 더 열심히 하겠노라고, 나를 불러주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부지런히 달려가겠노라고....
다시 오연옥씨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오연옥씨 집엘 도착했을 때 두 부부는 방을 조금이라도 더 따숩게 하기 위해 군불을 때고 있었습니다. 덕택에 연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방에 앉으면서도 제 마음은 얼마나 고맙고 따뜻해 오던지요!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대신해 남편이 찻상을 가져오고, 최대한 자세를 편안히 하라면서 그녀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으로 얘기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우리는 그렇게 마주앉았습니다.
그녀가 처음 제게 한 얘기는 '불안'과 '책읽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불안'은 남달라 너무나 깊고도 오랜 것이어서, 문득 문득 불안이 찾아오면 그것이 곧바로 몸의 경직과 근육의 마비로 이어져, 심하면 의식마저 마비되어 앰뷸런스에 실려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독한 약물을 투여받는 오래고도 끔찍한 병원생활을 감내해야 했는데, 아직 그렇게 심해지기 전 그녀가 대학 다닐 땐 그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어쩌지 못해 하염없이 밖으로만 나다녔답니다. 그러다가 직장생활을 할 땐 그것이 보다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온 존재를 조여들어 오는데, 아아 그 아뜩함 속에서 그녀는 이번엔 필사적으로 책에 몰두합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화장실 가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책에만 몰두하여 그저 닥치는 대로 미친듯이 읽었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랬던 그녀가 그렇게 저랑 마주앉았을 때 문득 하는 말이, 이젠 책을 그만 읽고 싶다는 겁니다. 대학 다닐 때 그렇게 나다녀 봐도 그것이 자신을 불안으로부터 조금도 구제해 주지 못하더니, 이젠 이것도, 이 미친듯한 책읽기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젠 자신은 어떡하면 좋으냐는 겁니다. 아아, 그런 얘기를 듣는 제 가슴이 얼마나 얼마나 미어지던지요!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한 말씀 드리지요. 이렇게 한 번 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연옥씨는 '불안'이 오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하려 하거나 그것에서 달아나려고만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불안'을 언제나 해소나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고, 불안이 찾아오면 그냥 불안해 보십시오. 그 '불안'을 회피나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어보라는 말입니다. 즉, 다음과 같은 한 생각을 일으켜 놓는 겁니다. 말하자면, '또다시 불안이 찾아오면, 이번엔 그냥 불안할 뿐 그 불안 이외의 그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않으리라.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어보리라. 그 불안을 살아내어 보리라....'라는 생각을요. <한 생각>이라는 것은 별것 아닌듯 하지만, 그러나 그 한 생각을 일으켜 놓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요. 보세요, 그 생각을 일으켜 놓지 않았을 땐 지금까지 연옥씨가 그랬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그 불안에 저항하여 그것을 피하거나 달아나려 하고 불안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찾아 바깥 ㅡ <책읽기>도 그렇고 <여행>도 마찬가지이며, 그밖에 다른 모양의 <노력>과 <수행>도 다 바깥입니다 ㅡ 으로만 내달리게 돼요. 그런데 그 <한 생각>을 일으켜 놓으면 우선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과 에너지가 정지할 터이고, 그러면 이제 저항하지 않게 된 그 '불안' 속에서 스스로 알게 돼요, <모든 것>을요!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 '불안'이 곧 진리예요.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라는 말이 있잖아요? 맞는 말이예요! 사실은 그 '불안'이 곧 진리인데, 그와 같이 만약 그 '불안'을 진리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을 극복이나 회피의 대상으로 생각하겠어요? 아니죠! 그냥 살아낼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무지(無知)와 분별(分別)이 끊임없이 그 진리를 번뇌라 여기게 한 다음 끝없이 거기에 저항하게 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그리고 비단 '불안' 뿐이겠어요? 삶 속의 온갖 다양한 느낌과 감정과 생각들 ㅡ 우리가 '번뇌'라 여기는, 매 순간 순간 일어나는 ㅡ 이 사실은 모두가 다 <진리>요 또한 <진리에 이르는 문>이예요. 그러니 얼마나 가까이 있어요? 다만 간택(揀擇)하지 않고 그 순간 순간을 살면 돼요. 진리의 문은 닫힌 적이 없어요...."
그렇게 말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연옥씨가 하는 말,
"어머나, 선생님! 참 묘하네요! 그렇게 되면 <가까이 있다>라는 말 자체도 성립이 안되네요!"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 였습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그래서 다음 주에 또 오마고 말하면서 연옥씨의 거친 손 한 번 살포시 잡아주곤 저는 돌아왔습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아 그때 이미 연옥씨의 병은 뿌리에서부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내 병이 나았다!!!" 이것은 몇 주 후에 연옥씨가 내게 전화로 다급하게 들려준 벅찬 외침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 다음 주에도 연옥씨를 만나러 거창엘 갔는데, 차에서 내리는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연옥씨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밝아보이고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차 한 잔을 마주하고 다시 앉았을 때 물었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참 좋아보이네요. 그래, 한 주 동안 어땠어요?"
그랬더니, 참 희한한 경험을 했다면서 약간 상기된 얼굴로,
"지난 주에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은 참 많이 듣던 것이기도 하고 또한 책에서도 많이 보아왔는데, 그런데 그때는 희한하게도 귀로 들리지 않고 제 가슴으로 들렸어요...."
그러면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참으로 저를 벅차게 했습니다.
지난 주에 그렇게 제가 돌아가고 난 바로 그날 밤에 남편이 잠깐 밖에 나간 사이 갑자기 예의 그 불안이 찾아와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런데 이번엔 남편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불안의 강도를 더하게 해 가슴이 떨리는 것은 물론이고 손과 다리마저 심하게 떨려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답니다. 아아, 그런데 그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었을 뿐입니다! 극도로 불안하고 가슴 마구 떨려오고 숨마저 막혀왔지만, 그냥 그대로 있어보자는 생각에 그 모든 현상들에 자신을 그냥 맡겨둔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답니다. 예전 같으면 벌써 남편에게 전화를 하거나 야단법석을 떨었을텐데도, '이러다가 죽으면, 기껏해야 땅에밖에 더 묻히겠나....'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있었을까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리 오래지 않아, 그렇게 요동치던 가슴의 떨림도 멎고 손발도 조용해졌으며 숨조차 고르게 내쉬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머나, 참 희한하다...."
자세를 다시 고쳐 앉으면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은 말입니다.
불안이 찾아왔을 때 그 불안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맞닥뜨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본 그 한 번의 경험이 그녀를 그 질기고도 오랜 병으로부터 낫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 주부터는 매주 거창엘 갈 때마다 오히려 제게 더 큰 은혜가 되는 나날들이 되었습니다. 말문이 터지고 감각이 다시 살아나 '살맛'이 난 연옥씨는 한 주 한 주 동안의 자신의 놀라운 변화들을 봇물처럼 제게 쏟아놓는데, 아아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전 그저 아멘! 아멘! 할 뿐이었습니다.
우선 몸이 눈에 띄게 좋아져, 매일 밤 근육의 마비로 인해 남편으로 하여금 언제나 등을 밟게 하고 한없이 주무르게 하곤 했는데 이젠 아프지 않으니 그럴 일이 아예 없어져 버렸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늘 그것으로도 고생했는데 이젠 누웠다 하면 아침에야 눈뜰만큼 잠을 푹 잘자게 되었으며, 불안하면 너무나 자주 화장실에 가고 싶어 힘들어 하던 증상도 사라졌고, 피부도 고와지고 감각도 되살아나 하루 하루가 새로운 나날들을 살고 있답니다. 뿐만 아니라, 42년만에 되찾은 환한 웃음과 생(生)에 대한 깊은 긍정으로 인해 삶에 대한 기대와 기쁨이 되살아나고,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꿈도 다시 퍼올렸으며, 날이 갈수록 새록 새록 새롭게 샘솟기만 하는 세상과 존재에 대한 감동은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녀의 지난(至難)했던 삶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매순간 풍요로이 넘실대기만 했습니다....아아, 그녀의 눈물겨웠던 지난 삶들을 여기 이 필설(筆舌)로써 다 말할 수 없듯이, 이제 새롭게 다시 살게 된 오연옥씨의 그 눈부신 변화와 가슴벅찬 영혼의 각성들을 어찌 다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연옥씨가 하는 말,
"어머나, 선생님! 참 묘하네요! 그렇게 되면 <가까이 있다>라는 말 자체도 성립이 안되네요!"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 였습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그래서 다음 주에 또 오마고 말하면서 연옥씨의 거친 손 한 번 살포시 잡아주곤 저는 돌아왔습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아 그때 이미 연옥씨의 병은 뿌리에서부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내 병이 나았다!!!" 이것은 몇 주 후에 연옥씨가 내게 전화로 다급하게 들려준 벅찬 외침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 다음 주에도 연옥씨를 만나러 거창엘 갔는데, 차에서 내리는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연옥씨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밝아보이고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차 한 잔을 마주하고 다시 앉았을 때 물었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참 좋아보이네요. 그래, 한 주 동안 어땠어요?"
그랬더니, 참 희한한 경험을 했다면서 약간 상기된 얼굴로,
"지난 주에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은 참 많이 듣던 것이기도 하고 또한 책에서도 많이 보아왔는데, 그런데 그때는 희한하게도 귀로 들리지 않고 제 가슴으로 들렸어요...."
그러면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참으로 저를 벅차게 했습니다.
지난 주에 그렇게 제가 돌아가고 난 바로 그날 밤에 남편이 잠깐 밖에 나간 사이 갑자기 예의 그 불안이 찾아와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런데 이번엔 남편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불안의 강도를 더하게 해 가슴이 떨리는 것은 물론이고 손과 다리마저 심하게 떨려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답니다. 아아, 그런데 그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었을 뿐입니다! 극도로 불안하고 가슴 마구 떨려오고 숨마저 막혀왔지만, 그냥 그대로 있어보자는 생각에 그 모든 현상들에 자신을 그냥 맡겨둔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답니다. 예전 같으면 벌써 남편에게 전화를 하거나 야단법석을 떨었을텐데도, '이러다가 죽으면, 기껏해야 땅에밖에 더 묻히겠나....'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있었을까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리 오래지 않아, 그렇게 요동치던 가슴의 떨림도 멎고 손발도 조용해졌으며 숨조차 고르게 내쉬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머나, 참 희한하다...."
자세를 다시 고쳐 앉으면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은 말입니다.
불안이 찾아왔을 때 그 불안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맞닥뜨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본 그 한 번의 경험이 그녀를 그 질기고도 오랜 병으로부터 낫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 주부터는 매주 거창엘 갈 때마다 오히려 제게 더 큰 은혜가 되는 나날들이 되었습니다. 말문이 터지고 감각이 다시 살아나 '살맛'이 난 연옥씨는 한 주 한 주 동안의 자신의 놀라운 변화들을 봇물처럼 제게 쏟아놓는데, 아아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전 그저 아멘! 아멘! 할 뿐이었습니다.
우선 몸이 눈에 띄게 좋아져, 매일 밤 근육의 마비로 인해 남편으로 하여금 언제나 등을 밟게 하고 한없이 주무르게 하곤 했는데 이젠 아프지 않으니 그럴 일이 아예 없어져 버렸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늘 그것으로도 고생했는데 이젠 누웠다 하면 아침에야 눈뜰만큼 잠을 푹 잘자게 되었으며, 불안하면 너무나 자주 화장실에 가고 싶어 힘들어 하던 증상도 사라졌고, 피부도 고와지고 감각도 되살아나 하루 하루가 새로운 나날들을 살고 있답니다. 뿐만 아니라, 42년만에 되찾은 환한 웃음과 생(生)에 대한 깊은 긍정으로 인해 삶에 대한 기대와 기쁨이 되살아나고,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꿈도 다시 퍼올렸으며, 날이 갈수록 새록 새록 새롭게 샘솟기만 하는 세상과 존재에 대한 감동은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녀의 지난(至難)했던 삶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매순간 풍요로이 넘실대기만 했습니다....아아, 그녀의 눈물겨웠던 지난 삶들을 여기 이 필설(筆舌)로써 다 말할 수 없듯이, 이제 새롭게 다시 살게 된 오연옥씨의 그 눈부신 변화와 가슴벅찬 영혼의 각성들을 어찌 다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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