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니까 울고, 우스우니까 웃는다 ㅡ 신심명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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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5,996회 작성일 13-12-02 14:06본문
마조어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백장 스님이 스승인 마조 스님을 모시고 산에 다녀왔다. 그리곤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갑자기 슬피 울었다. 옆에 있던 수행승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왜 우십니까?”
“……”
“스승님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갑자기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라도 났습니까?”
“……”
“무슨 창피한 일이라도 당하셨습니까?”
“……”
“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 슬피 우십니까?”
백장은 그제서야 입을 열고 말했다.
“스승께 가서 물어보게.”
스승님과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마조에게 간 수행승은 백장이 슬피 우는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마조가 대답했다.
“그에게 가서 다시 물어 보거라.”
어안이 벙벙해진 수행승은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와 다시 물었다.
“아니, 도대체 왜 우시오?”
그러자 백장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이번엔 깔깔거리며 크게 웃었다.
“아니, 아까는 슬피 울더니 이제는 어째서 웃으시오?”
그러자 백장이 말했다.
“아까는 슬펐고, 지금은 우스워서 그런다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부득이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천하신기 불가위야 위자패지 집자실지
物或行或隨 或呴或吹 或强或羸 或載或隳
물혹행혹수 혹구혹취 혹강혹리 혹재혹휴
장차 ‘나’라는 천하 혹은 ‘마음’이라는 천하를 얻고자 하여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을 보게 될 뿐이다. '나' 혹은 '마음'이라는 천하는 참 신비한 그릇과 같은 것이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는 자는 실패하기 마련이고, 부여잡는 자는 잃어버리게 된다. 도(道)라는 것은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며,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며,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고, 위로 실리기도 하고 아래로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승찬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38.
欲取一乘 勿惡六塵
욕취일승 물오육진
한 수레를 얻고자 하거든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말라.
‘한 수레’란 모든 것이 나누어져 있지 않은 ‘하나’요 ‘전체’인 실상(實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실상에 눈을 뜨게 되면 우리 마음 안에서 어떤 근본적이고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 언제나 둘로 나누어 보던 이원성(二元性)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동일한 대상을 보더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게 되지요. 이를테면,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이런저런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번뇌’라고도 생각되지 않고 ‘망상’이라고도 여겨지지 않아 다만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며 존재할 뿐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찾거나 구하는 마음이 사라져, 온갖 번뇌와 망상 속에서도 번뇌와 망상이 없는 평화와 고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본래 번뇌와 망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순간 그런 모양의 마음의 흐름과 작용이 있을 뿐인데,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번뇌니 망상이라고 분별함으로써 버리거나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착각’이라고도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착각을 실재라고 여김으로써 있지도 않은 번뇌와 망상을 버리거나 없애려고 헛되이 애를 쓰게 되고, 또한 그런 헛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마침내 평화와 고요를 얻으려고 허망하게 몸부림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런 몸부림을 가리켜 “한 바탕 꿈을 꾼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승찬 스님은 “한 수레를 얻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버려야 할 육진 번뇌가 본래 없음을 가리켜 주셨고, 노자는 “도(道)라는 것은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며,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며,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고, 위로 실리기도 하고 아래로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으로써 모든 것이 도 아님이 없음을 밝혀주셨으며, 슬프니까 울었고 우스우니까 크게 웃었던 백장 스님은 그런 재미있는 일화를 통하여 깨달음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이것’임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39.
六塵不惡 還同正覺
육진불오 환동정각
육진을 싫어하지 말아야 바른 깨달음과 같아진다.
육진(六塵)이란 우리 마음의 본성을 흐리게 하는 여섯 가지의 욕망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가리키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여섯 개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번뇌’라는 것은 우리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이름일 뿐 실재하는 것은 다만 그 순간의 이런저런 마음의 흐름과 작용일 따름이니, 그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되면 거기 어디에 싫어함과 좋아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지요. 이것이 바로 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40.
智者無爲 愚人自縛
지자무위 우인자박
지혜로운 사람은 일부러 하는 일이 없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를 얽어맨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한 수레’를 얻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 일부러 하는 일이 없습니다. 슬프면 울고 우스우면 웃고, 배고프면 밥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피곤하면 눕고, 앞설 땐 앞서고 뒤처질 땐 뒤처지고, 강할 땐 강하고 약할 땐 약하고, 따뜻할 땐 따뜻하고 차가울 땐 차갑고, 사랑할 땐 사랑하고 미워할 땐 미워하고, 넉넉할 땐 넉넉하고 초라할 땐 초라하고, 편안할 땐 편안하고 불편할 땐 불편하고, 당당할 땐 당당하고 쩔쩔 맬 땐 쩔쩔 매고, 분명할 땐 분명하고 모호할 땐 모호하고……. 그렇듯 그는 일부러 하는 일이 없는데도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진정한 평화와 고요와 자유를 누린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늘 바쁘게 무언가를 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얽어맨답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려고 애를 쓰고, 약함을 강함으로 고치려고 노력하고,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고, 초라함을 채워서 충만하려고 하고, 불편함을 못견뎌하며 언제나 편안하려고 하고, 쩔쩔 매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항상 당당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다만 메마르기만 할 뿐 진정한 평화와 고요와 자유를 알지 못한답니다.
41.
法無異法 妄自愛着
법무이법 망자애착
법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는데, 허망하게 스스로 좋아하고 집착한다.
마조 스님이 此心卽佛(차심즉불, 이 마음이 곧 부처다.)이라 하고 또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라고 했듯이, 법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고 다만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이것’밖에 없는데도, 사람들은 어떤 것은 좋아하여 집착하고 또 어떤 것은 싫어하여 버리려고 함으로써 스스로 법을 떠나고 자유를 떠나고 도를 떠나버린 답니다. 그리곤 물 속에서 물을 찾듯이 매 순간의 도 안에 있으면서도 도를 잃어버린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42.
將心用心 豈非大錯
장심용심 기비대착
마음을 가지고서 마음을 쓰니 어찌 커다란 잘못이 아닌가?
도니 법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은 마음의 이원성이 사라질 때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이 보여주는 대로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요, 부족과 완전이 둘이며,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고, 생멸법(生滅法)과 불법(佛法)이 서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 이원성의 마음 안에서 또 다시 마음을 쓰며 깨달음을 찾고 도를 구하며 완전한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니, 어찌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43.
迷生寂亂 悟無好惡
미생적난 오무호오
어리석으면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생기지만, 깨달으면 좋아함과 싫어함이 없다.
안과 밖의 모든 것은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어서 버릴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버릴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버릴 것과 얻어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요. 아, 어떻게 하면 그 미망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인 ‘한 수레’를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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