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고 버릴 것이 본래 없나니 ㅡ 신심명 7
작성일 13-08-0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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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조회 5,499회 댓글 0건본문
몇 해 전 어느 날 어떤 선생님 한 분이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몹시 힘들어하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얘기를 좀 나누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든 편안히 오시라고 했더니,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오신 그 분은 저랑 마주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제 마음에는 불안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불안한 지를 조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고 있던 그 분은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교사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애를 써도 제가 진정 교사다운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일을 할 때에도 이게 정말 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구요. 또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이것 또한 늘 불안합니다. 이게 과연 아버지다운 모습인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그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언제나 마음 씁니다만, 그저 입술만 탈 뿐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 저 자신이 참 괴롭고 힘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불안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하게 삶의 모든 순간들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애틋한 마음으로 제가 대답했습니다.
“다시는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게 삶의 모든 순간들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그러자 그 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색하는 얼굴로,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불안을 해결하고 극복하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하려는 그 마음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버려 보십시오. 그리곤 선생님을 찾아온 그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냥 불안해 보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불안에 저항하려는 그 마음을 그칠 때 도리어 영원히 불안하지 않은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선생님. 삶의 어느 순간에서도 늘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저 자신을 견딜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타는 목마름으로 찾아와 말씀을 드린 건데, 오히려 그 마음을 버리라니요! 그러면 나보고 죽으라는 겁니까?”
어느새 그 분의 얼굴은 실망과 한숨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구하는 마음의 평안은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서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뇨,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불안한 ‘지금’을 거부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은 결코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자유란 ‘미래’에 있지 않고 ‘지금’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돌이켜 단 한 번만이라도 지금 이 순간의 불안을 진실로 받아들여 보십시오. 그래서 그냥 불안할 뿐 그것을 벗어나려는 어떠한 노력도 몸짓도 정지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이미 불안하지 않은 자신을, 이미 자유한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승찬 스님도 말씀하십니다.
19.
前空轉變 皆由妄見
전공전변 개유망견
공을 앞에 두고도 경계를 따라 흘러감은 모두가 허망한 견해 때문이다.
공(空)이란 곧 색(色)을 가리킵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는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어서 색과 공은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색(色)이란 ‘감각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고, 공(空)이란 그 모든 것이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짧다’는 것도 ‘길다’는 인연을 만남으로써 잠시 생기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 옆에 더 짧은 것이 와버리면 이번에는 ‘긴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처음의 그것은 짧은 것일까요, 긴 것일까요? 사실은 짧은 것도 아니요 긴 것도 아니지요.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인 것입니다. 잠시 인연 따라 짧은 것이 되기도 하고 긴 것이 되기도 할 뿐 ‘짧다’ 혹은 ‘길다’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공하다’고 하는데, 감각되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큰 것도 아니요 작은 것도 아니며, 넓은 것도 아니요 좁은 것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요 나쁜 것도 아닌,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색 그것이 곧 공이라는 말이지요.
모든 것이 공하다는 이 진실에 눈을 뜨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상대적인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되고, 동시에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리려고 하는 헛된 몸짓도 멈추게 됩니다. 취하고 버릴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 선생님은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불안’은 나쁜 것, 힘든 것, 괴로운 것인 반면 ‘평안’은 좋은 것, 쉬운 것, 행복한 것이라는 분별을 자신도 모르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안은 어떻게든 버리고 극복하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어딘가 따로 있을 것 같은 평안을 찾고 또 구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불안이라는 '색'은 실체가 없는 '공'이어서 버릴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것이며, 평안이라는 '색' 또한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구할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불안 그것이 바로 공이기 때문에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오래지 않아 본래 공한 실상이 드러나면서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찾고 구하는 평안은 뜻밖에도 우리가 그토록 버리려고 애를 쓰는 불안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기에, 다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불안을 온전히 껴안기만 하면 평안은 선물처럼 우리에게 그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찬 스님도 애틋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공을 앞에 두고도 경계를 따라 흘러감은 모두가 허망한 견해 때문이다.”라구요.
20.
不用求眞 唯須息見
불용구진 유수식견
참됨을 구할 필요는 없으니, 오직 허망한 견해만 쉬면 된다.
참[眞]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이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원효(元曉) 스님도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以一切法 悉皆眞故 亦無可立
이일체법 실개진고 역무가립
일체 모든 것이 다 참[眞]인 까닭으로 따로 세울 무엇이 없느니라.
무겁고 답답한 마음으로 저를 찾아오셨던 그 선생님은, 얼른 이해되지는 않으나 무언지 모를 힘이 느껴지는 저의 말에 처음엔 몹시도 혼란스러워하며 돌아가셨으나, 세 번을 더 찾아와 오랜 시간 말씀을 나눈 후에는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어느 순간 문득 불안에 대한 모든 저항을 그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맞게 됩니다. 마침내 그 선생님에게도 영혼의 자유와 쉼이 찾아온 것이지요. 다시 태어난 듯 밝게 웃으며 행복해 하시던 그분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21.
二見不住 愼莫追尋
이견부주 신막추심
둘로 보는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둘’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마음이 지어낸 허구적인 분별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닌―긴 것도 짧은 것도, 큰 것도 작은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번뇌도 보리도, 중생도 부처도 아닌―것입니다. 그러니 그 허망한 마음을 따라 어떤 것은 버리려고 하고 어떤 것은 좇아가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자유요 해탈입니다.
22.
才有是非 紛然失心
재유시비 분연실심
옳으니 그르니 따지기만 하면 어지러이 마음을 잃게 된다.
우리 인간의 몸은 60조 개가 넘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60조 개의 에너지 덩어리라는 것이지요. 비단 몸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생각 하나 마음 한 자락도 모두가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있지도 않은 이원(二元)의 분별을 따라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리려고 애를 쓰고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니, 그 에너지의 헛된 소모가 얼마이겠습니까. 그렇기에 삶이 제대로 뿌리 내릴 수가 없고 마음이 길을 잃어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부초(浮草)처럼 떠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3.
二由一有 一亦莫守
이유일유 일역막수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으나 하나 또한 지키고 있지 말라.
실재하는 것은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를 두고 우리의 마음이 좋다-나쁘다, 길다-짧다, 크다-작다, 높다-낮다, 번뇌-보리 등의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깨달아 마음이 만들어낸 ‘둘’이라는 상(相)을 우리 눈앞에서 확연히 걷어내고 나면 이번에는 ‘하나’라는 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다시 온통 ‘둘’로 나뉘어진 상대적인 세계로 우리 앞에 다가오니까요. 그러나 그는 압니다, 상대가 곧 절대요 절대가 곧 상대라는 것을, 하나가 곧 둘이요 둘이 곧 하나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여전히 ‘둘’에 범벅이 되어 살지만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대자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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