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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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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8,861회 작성일 06-09-1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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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원수를 사랑하라
 
 
    성경은 참 좋은 책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또 오해의 소지가 많은 책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경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이사야 61:1) 더할 수 없이 좋은 책이기도 하지만, 때로 잘못 읽으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율법(律法)에 갇히게도 하고, 또 그런 만큼 마음의 짐과 무게를 더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도 하지요. 
  
    그렇게 오해의 소지가 많은 표현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가르치신 유명한 산상수훈(山上垂訓) 중에 나오는 말로서, 이제 그 온전한 말씀을 여기에 다시 인용해 봄으로써 작게나마 그 ‘오해’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①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3∼48)
 
    ① 세리(稅吏) :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여 일정액을 로마에 상납하고 거리서 폭리를 취했기 때문에, 동족들로부터 반역자라고 천대를 받았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바깥’ 사물을 먼저 보게 되어 있습니다. 눈의 시선(視線)이 눈 자체를 향할 수는 없으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의 마음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언제나 ‘바깥’을 먼저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런 구절을 읽을 때에도 대뜸 그 의미를 ‘바깥’에서 찾고 또 ‘바깥’과의 관계에서만 살피려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원수’니 ‘핍박하는 자’니 하는 등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대뜸 그 존재를 ‘바깥’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그리고 그렇게 읽은 바대로 생활 속에서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살려고 하면 삶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무거워지고 힘들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바로 다음 구절에 있는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賞)이 있으리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씀에 우리는 더욱 공감(共感)을 하고는, 한층 더 그 ‘온전한 실천’을 위해 노력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전한 실천’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온전히’는커녕 사실은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조금도’ 실천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은 결코 ‘공감’과 ‘실천’의 영역이 아니건만, 우리는 언제나 그런 것들을 통하여 삶과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가려 하고, 또한 그런 것들을 통하여서만 자신과 삶을 완전케 하려 하니,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그것과 하나가 되고 그것 자체가 되는 진정한 합일(合一)의 기쁨과 평화에로는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우리 내면에는 언제나 2%의 ‘부족감’과 ‘분리감(分離感)’이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이미 이 말씀에 대한 깊은 공감(共感)과, 그렇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에의 길이요 삶의 길이라는 이해와, 오직 그 ‘온전한 실천’을 통해서만 삶을 완전케 하려 하는 욕구가 가득하니, 아! 그 끝내 가닿지 못하는 ‘분리감’과 그로 인한 마음의 힘겨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할밖에요.
 
    그 모든 원인은 바로 이 성경 구절을 ‘바깥’으로만 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코 ‘바깥’의 얘기가 아니요 또한 ‘교훈’과 ‘실천’의 영역도 아니건만, 우리는 단지 그렇게만 읽고는 대뜸 삶 속에서 ‘실천’하려고만 드니, 어찌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에게로 되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해주려고 하신 예수님의 이 간곡한 말씀이 오히려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마음에 구속이 되다니오! 그것은 뭔가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오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의 ‘원수’는 과연 누구이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는 또한 누구일까요?
 
    얼마 전에 어떤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하여 저를 알았는데, 자신은 오랫동안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어 너무 힘들다며 저를 한 번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은 그 강박증을 고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노력들을 다 해봤지만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져 버렸고, 이제는 마음마저 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둘러 그와 약속 시간을 정했고, 만나기로 한 날 애틋한 마음으로 멀리서 오는 그를 마중 나갔습니다.
 
    이윽고 그를 반갑게 만나 차 한 잔을 하며 마주앉았을 때, 그는 머뭇거리면서도 힘들고 괴로웠던 자신의 지난 삶의 얘기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문득 찾아온 강박 때문에 무려 16년 동안이나 온갖 모양으로 강화되고 더욱 세밀화된 그 강박에 시달리며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리하여 그는 타는 입술로 그 모든 이야기들을 제게 쏟아놓았고, 그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저는 간곡한 마음이 되어 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님은……강박에 갇혀 살아온 지난 16년의 힘겨웠던 세월을 말씀하셨지만, 그 세월을 한마디로 말하면 오직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맞아요,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 그 강박으로 인해 제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깝고……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옛날의 저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 강박 때문에 제가 꿈꿔왔던 인생의 모든 꿈들도 다 깨어지고……더구나 얼마나 많은 세월을 납덩이같은 가슴을 안은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살아왔는지……!”
 
    그랬기에, 그에게 있어서 그 강박은 얼마나 죽여버리고 싶고 자신에게서 영원히 뽑아내어버리고 싶은 ‘철천지원수’ 같았겠으며, 또한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핍박하는 자’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오직, 자신에게서 그 강박이 사라져 없어지기만을 미친 듯이 갈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난 16년 동안의 처절했던 노력과 몸부림이 단 한 톨이라도 님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던가요?”
    “아뇨, 그렇기는커녕 이제는 오히려 온갖 사소한 것들에도 강박증세가 나타나, 더욱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요…….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지금 이 순간 그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 하나를 님이 깊이 자각한다면, 다시 말해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16년 동안의 온갖 노력이 자신을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더 그 강박에 갇혀버리게 했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님이 진실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 이해가 님의 가슴 속에 늘 살아있게 된다면, 또다시 일상 속에서 강박증세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본능적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그 강박에 저항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습관적인 몸부림>을 이제는 그만둘 것이고, 그러면 그 ‘정지’ 속에서 오직 그 <강박증상>만이 님에게 남아있게 되는데, 님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그 강박을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이 사라졌으니, 그냥 그것을 가만히 내어버려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그 ‘Let it be’ 속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에너지가 님 안에서 생겨나게 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강박은 설명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하여 저절로 힘을 잃고 사라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실은 ‘강박’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강박’이 문제가 아니라, 그 강박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거부하며 그 강박이 사라져 없어지기만을 바라는 바로 그 마음 때문에 강박은 오히려 더욱 더 강화되고 세밀화 되었으며, 그로 인해 님의 삶은 한없이 더 힘들어지고 괴로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음을 돌이켜,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 강박에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어버려 두게 되면, 즉 그 강박을 사랑하게 되면, 강박은 저절로 힘을 잃고 눈 녹듯 님에게서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항’을 그치는 데에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어줄 것은, 그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지난 16년 동안의 노력이 자신을 단 한 톨도 자유케 해주지 못했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님이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해'가 스스로 님을 '자유'에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님의 강박을 치유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참 고맙고 감사했던 것은, 제가 그렇게 간곡하게 말을 마쳤을 때 그는 대뜸 자신의 마음 중심에서부터 제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곧 “이제 알겠습니다. 이제 모든 걸 이해했습니다.”라는 짧은 단음절의 말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터미널까지 배웅해 주겠다는 저를 한사코 말리면서, 다만 정중히 머리 숙여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는 입술로 왔던 자신의 집으로의 그 먼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아, 그 무언가 경쾌하고 개운한 듯한 걸음걸이로 돌아가는 그를 눈으로만 배웅해주던 저에게도 그 순간 알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와 제 가슴을 가만히 적셨더랬습니다…….
 
    이것이 바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의 참뜻입니다. 다시 말해, ‘원수’는 바깥의 어떤 대상이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며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바로 그것, 이를테면 위에서 예를 든 사람의 경우엔 ‘강박증’이 그것이며, 어떤 사람에겐 ‘말더듬’이, 어떤 사람에겐 남들 앞에만 서면 괜스레 주눅들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경직과 긴장’이, 또 어떤 사람에겐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도 또다시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는 ‘게으름’이, ‘무기력’이, ‘우울’이, ‘불안’이, ‘외로움’이, ‘미움’이, ‘탐진치(貪嗔癡)’가……이름(名)하여 온갖 모양의 자신 안의 ‘번뇌(煩惱)’와 ‘부족’과 ‘결핍’이 바로 나의 ‘원수’요 나를 ‘핍박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것들을 ‘원수’로 여기고는, 늘상 그것들과 싸우면서, 그러한 것들이 조금도 자신 안에 남아있지 않는 순간 속에서만 이윽고 만족하며 평화로우려고 하지요. 
 
    하지만 예수는 말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구요.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구요. 그렇다면 이때 ‘사랑하라’는 말은 무엇이며, ‘기도’는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있는 그대로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마음껏 자신의 흐름대로 흘러가도록 내어버려 두는 것[Let it be], 그리하여 ‘그것’을 다만 ‘그것’으로 존중해 주는 것, 또한 어떤 ‘모범답안’을 따로 두고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닦달하거나 요구하거나 주장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요 또한 ‘기도’입니다. 사랑은 그와 같이 참 단순한 것이랍니다. 그런데 또 사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원수’라고 하고 ‘핍박하는 자’라고 하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매 순간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어집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하여 우리의 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외의, ‘강박’이 없고 ‘말더듬’이 없고 ‘경직과 긴장’이 없고 ‘게으름’이 없고 ‘무기력’이 없고 ‘불안’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고 ‘외로움’이 없고 ‘미움’이 없고 ‘부족’이 없고 ‘결핍’이 없는 ‘나’만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상(賞) ― ‘마음의 진정한 평화’랄까, ‘자유’랄까, ‘진리’랄까, ‘깨달음’이랄까, ‘존재의 영원한 해방(解放)’이랄까 하는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어떤 것 ― 이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늘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것들 ― 이를테면 사랑, 자비, 겸손, 지혜, 여여(如如), 성실, 당당함, 충만함 등등의, ‘자기완성’과 결부된 가치들 ― 만을 가까이 하려 한다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러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내가 바라는 나’만이 아니라, 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좀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보듬어주자구요. 왜 우리는 그토록이나 모질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핍박하며 마치 무슨 원수처럼 대하는지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요? 내게 있는 그 어떠한 ‘부족’과 ‘결핍’도 한 점 허락하지 않고 몽땅 몰아내어 버리면 그때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며 완전해질 것 같아서요? 또한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길인 것 같아서요?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고(思考)가 집요하게 만들어내는 착각이요 미망(迷妄)이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것에 속으며 살아왔어요. 

    보세요, 16년 동안이나 강박에 갇혀 힘들어했던 그 사람도 자기 불행의 원인은 오직 강박에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 강박이 사라져 없어지기만 하면 자신은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만 같아 일편단심으로 노력했건만,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세월만큼 더욱 더 그 강박에 사로잡혀 갔고, 급기야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버렸잖아요? 자기 불행의 원인은 ‘강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거부하려 한 바로 그 ‘마음’에 있었건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그 오랜 세월 강박 없이 살고자 몸부림친 바로 그 노력으로써 그는 도리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으로까지 내몰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라져야 하는 것은 ‘강박’이 아니라, 그것에 저항하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 ‘저항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강박 또한 눈 녹듯 우리에게서 사라져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그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요, 모두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간곡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구요.
    그러나 사실은 ‘원수’란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사랑해야 할 ‘나’만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랑’이란 바로 ‘저항을 그치는 것’이구요. 그렇게 내 안의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내 바깥의 '너'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렇게 모두가 ‘나’임을 아는 것,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 아님이 없음을 이해하고 그 모두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하여 모든 ‘저항’을 그치고 다만 매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우리의 모습이랍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저항’을 그친 그 마음으로 보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가 이미 온전하네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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