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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 그렇게 '안경'이 내려지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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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12,448회 작성일 06-02-0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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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 그렇게 '안경'이 내려지고 나면

 
    道沖, 而用之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沖―빌 충, 깊을 충, 온화할 충, 或―혹 혹, 항상 혹, 盈―찰 영, 가득할 영, 淵―못 연, 깊을 연, 兮―어조사 혜, 似―같을 사, 비슷할 사, 宗―마루 종, 으뜸 종, 근본 종, 挫―꺾을 좌, 銳―날카로울 예, 解―풀 해, 紛―어지러울 분, 塵―티끌 진, 湛―깊을 담, 맑을 담, 잠길 침, 誰―누구 수, 象―꼴 상, 코끼리 상, 帝―하느님 제, 임금 제

    도(道)는 텅 비어 있어 아무리 써도 차지 않는다.
    깊구나! 만물의 으뜸[實相] 같네.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
    빛을 감추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
    맑도다! 언제나 있는 듯 하구나.
    내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나, 상제(上帝)보다 먼저인 것 같네.

    < 뜻풀이 >
    도(道)는 결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고도 구체적인, 바로 우리네 삶이요 현실이다. 또한 道는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무관한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따로이 무언가가 있는 양 말하지 말라. 삶과 유리(遊離)된 道도 말하지 말며,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너무나 구체적인 '나'와 무관한 道도 말하지 말라. 그것은 너무 공허하다.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대 道란, 진리(眞理)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道는 언제나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이 '현재' 속에 있다.

    道沖, 도는 텅 비어 있고……그렇다. 道는 텅 비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깐, 우리의 얘기를 계속해 나가기 전에 한 가지 명심해 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노자가 이미 도덕경 1장에서 道可道非常道(도를 도라고 하면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밝혀놓은 것처럼, 道라는 것이 무언가 따로이 어떤 실체(實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하여> 혹은 <일컬어> 道라고 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 저러한 것이 바로 道다!"라고 하거나 "진리(眞理)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라고 할 만한 무엇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또한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道라는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것이다."라고 가리켜 말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道沖'이라고 할 때의 道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텅 비어 있다'란 말은 또 무슨 뜻일까? 道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텅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불교경전의 심장부(心臟部)라고 할 수 있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色卽是空 空卽是色"(色이 곧 空이요 空이 곧 色)이라는 구절로 눈길을 돌려보자. '道沖'의 참된 뜻을 밝히는데 있어 반야심경의 이 구절을 설명함이 적절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道沖'이니 반야심경에서의 '空'이니 하는 말을 달리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된다. 있는 그대로……. 그렇다.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세상이란, 삶이란, '나'란, 그리하여 진리(眞理)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며 쉬운 것이다. 다만 우리의 '생각[思考]'과 '마음'이 이 단순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리하여, 아아 다만 우리의 눈앞을 가리는 그 한 '생각', 한 '마음'만 내려진다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할 때의 '色'이란 불교(佛敎)가 이 세상과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인 오온(五蘊)① 가운데 하나로서, 일반적으로는 '물질계의 총칭' 또는 '신체(身體)'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이러한 불교적인 설명방식에 매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色'의 의미를 우리가 보다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하여, 물질계 또는 신체 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활동 ― 인식작용, 느낌, 생각, 감정 등등 ― 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자. 다시 말하면, '色'이란 인식되거나 감각되어지는 일체의 것 ― 즉, '나' 밖(外)의 모든 대상세계 뿐만 아니라 '나'의 이 몸뚱어리, 그리고 인식주체로서의 '나'의 모든 정신작용을 포함하는 ― 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色'이란 물질계와 정신계를 총칭하는 말이 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 '色'이라는 말이 된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사실 이 세상에는 오직 '色'밖에 없다. 오직 '色'밖에 없으니 따로이 '色'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② 그런데, 반야심경에 의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이 '色'이 곧 '空'이니,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오직 '空'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 '空'이라는 말이다. 오직 '空'밖에 없으니 이젠 따로이 '空'이라고 할 것도 없고……. 아니, 가만, 이렇게 막 나갈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설명해 보자. 우선 '空'이라는 것부터―.

    ① 오온(五蘊) :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로서, 정신과 물질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 곧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이름. 온(蘊, skandha)은 집합, 집적(集積)의 뜻으로서, 일체의 존재 특히 인간은 여러가지 요소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이해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ㄱ. 색(色) : 물질적 요소. 물질의 총칭 또는 신체(身體).
    ㄴ. 수(受) : 감정 또는 감각과 같은 고통-쾌락의 감수작용(感受作用)
    ㄷ. 상(想) : 지각(知覺)·표상작용(表象作用)
    ㄹ. 행(行) : 의지작용(意志作用). 受, 想 이외의 마음작용.
    ㅁ. 식(識) : 인식(認識)-식별작용(識別作用),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
    말하자면, 色은 물질적 요소, 受-想-行-識의 사온(四蘊)은 정신적 요소를 가리킨다.
    ② 3장에서 말한 '빨간색'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오직 '빨간색'밖에 없을 땐 '빨간색'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며, 나아가 '색'이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없다.

    '空'이란, 자의(字義)로는 '빌 공'자로서 <텅 비었다>, <아무 것도 없다>란 뜻이다. 자의(字義)대로라면 이 세상과 '나'는 텅 비어 있으며,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된다. 참 적절한 표현이요, 멋들어진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과 '나'는 정말이지 텅 비어 있는 ― 그리하여 또한 온갖 것으로 가득 차 있는 ―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텅 비어 있다'란 말은 무슨 뜻일까? 무엇이 텅 비어 있다는 말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우리의 '마음'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이 <비어 있다>는 말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오랜 동안의 경험과 지식과 기억의 집적물(集積物)로서 어떤 형태로든 틀지어지고 조건지어진 인식주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말이며[無我], 그러한 '나'에 의한 왜곡 ― 언어(言語)나 이름(名)을 통한 사물규정 혹은 '선(善)'이니 '악(惡)'이니, '부족'이니 '완전'이니, '중생(衆生)'이니 '부처[깨달음]'니, '색(色)'이니 '공(空)'이니 하는 등의 모든 상대적 분별 ― 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또한 그렇게 살 뿐이라는 말이다. 마치 맑은 거울이 어떤 것도 간택(揀擇)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기만 할 뿐이듯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空'의 의미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나'라고 하는 것은 오랜 동안의 경험과 지식과 기억의 집적물(集積物)로서, 그 오랜 동안의 경험과 지식과 기억으로 인해 어떤 형태로든 틀지어지고 조건지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나에게는 이미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조건지어진 안경> ―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세계(世界)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이 씌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안경>은 언제나 어느 때나 상대적 규정 속에서 세계를 둘로 나누는 속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나'와 '너'를 가르고, '인식주체'와 '대상'을 나누며, '부족'과 '완전'을 나누고, '중생(衆生)'과 '부처[깨달음]'를 따로 두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 '색(色)'과 '공(空)'을 나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놓은 이 <안경>은 계속해서 다음의 두 가지 일을 교묘하고도 집요하게 해나가는데, 그 하나는 그러한 모든 상대적 규정들이 <안경> 자체에 속한 것일 뿐 실재(實在)하지 않는 허상(虛像)이요 허구(虛構)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쪽같이 숨기고는, 세계와 '나'가 <실제로>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보이는 세계 가운데서 끝없이 끊임없이 더 좋고 더 나은 쪽 ― 이름하여 '현(賢)' ― 만 추구하게 만들어 결국 우리로 하여금 그 양편 모두에 항상 끄달려 다니게끔 하는 것이다. 햐∼! 그러니, 이 <안경>의 교활함과 '장난'이 얼마이며, 그로 인한 자승자박(自繩自縛)③과 우리의 삶의 에너지의 소모는 또 얼마인가!

    ③ 자기가 꼰 새끼줄로 스스로를 묶는다는 뜻.

    그리하여, '空'이란 이 <안경>이 내려지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 <안경>에 의한 왜곡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나'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모든 이름(名)과 상대적 분별(分別)을 떠나 있는 거기에는 그래서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부족'도 없고 '완전'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부처[깨달음]'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보리(菩提)'도 없고, '色'도 없고 '空'도 없다. 그 모든 상대적 분별들이 <텅 비어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道沖(도는 텅 비어 있고)……그렇게 우리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던 그 한 '생각', 그 한 '마음' ― 곧 <안경> ― 이 내려짐을 '일컬어' 道 혹은 '道沖'이라고 하고, 이미 처음부터 그 <안경>과는 무관하게 늘 그렇게 있는 그대로 존재해 왔던 모든 것들을 또한 '이름하여' 道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이제 세상에는 이미 처음부터 道 혹은 진리(眞理) 아님이 없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봄날 짝짓기를 하기 위해 하늘거리며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한 쌍의 나비가 곧 道요, 뜰 앞의 잣나무가 곧 道이며,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는 이 '나'가 또한 道인 것이다. 아아, 그렇듯 세상에는 道 아닌 것이 없기에 따로이 '道'라고 할 것도 없고, 道라고 할 것도 없기에 그냥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인 것이다.

    而用之或不盈(아무리 써도 차지 않는다)……그렇게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던 그 <안경>을 벗고 '나'를 보니 오호라! 나는 그냥 나일 뿐 ― I am who I am,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 아무것도 아니질 않는가! '나'는 중생(衆生)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며, 언제나 부족하고 못난 존재라고 여기며 괴로워하던 이 모습 이대로가 또한 이미 완전하질 않는가! 그토록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던, 그래서 어떻게든 버리고 싶었고 버리고 싶었던 만큼 그것은 '나'가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고 외면했던 내 안의 많은 것들 ― 이를테면 식욕, 성욕, 수면욕, 미움, 짜증, 분노, 이기심, 게으름, 교활함, 불안 등등(햐∼, 이런 걸 다 나열하려면 얼마나 많은지!) ― 도 사실은 어쩔 수 없는 '번뇌(煩惱)'가 아니라, 그 하나 하나가 올올이 '보리(菩提)'가 아닌가!
    아아, 그리하여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녔던 '참나[眞我]'는 저기, 나 밖(外)에, 언젠가는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곤 하던 먼 미래의 무엇이 아니라, 이럴수가! 나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참나'가 아닌 적이 없으며, 언제나 '참나'로서 살아온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한바탕 꿈을 꾼 것인가……?

    그렇게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던 <안경>이 내려진 '나'와 세계가 곧 道沖이요, 그 '나'가 그냥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곧 而用之或不盈이다. 아무리 써도 차지 않는다? 즉, <안경>이 없는 '나'는, 그리하여 이미 '부족'이니 '완전'이니 하는 등의 모든 상대적 규정 속에 있지 않는 '나'는, 이제는 그냥 아무런 무게 없이 살아가게 된 일상(日常)의 삶 속에서 때로 미워하고 때로 짜증내며, 때로 분노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 속에서 살지만,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물들거나 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온갖 것들이 오고 가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간택(揀擇)하지 않고 다만 고요히 비추기만 할 뿐인 거울처럼 말이다④.

    ④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이 지은 <신심명(信心銘)>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至道無難이니 唯嫌揀擇하라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
        지극한 道은 어렵지 아니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것이라.
        미워하고 사랑함만 없으면(분별심만 내려진다면) 문득 모든 것이 환하게 밝아지리라.

    淵兮, 似萬物之宗(깊구나! 만물의 으뜸[實相] 같네)……道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얘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참으로 묘(妙)한 것이다. 그것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湛兮, 似或存], '만물의 으뜸'이니 '근원'이니 '실상(實相)'이니 해도 단지 이름하여 그렇다는 것일 뿐 근원이요 실상인 무엇이 따로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道는 '시간'의 연속선상에도 있지 않다. 道는 '시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도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내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나, 上帝보다 먼저인 것 같네)라고 말을 하지만, 이때의 '먼저(先)'라는 것도 사실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 빛을 감추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그렇게 <안경>이 내려지고 나면,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던 상대적 분별 속에서 끝없이 끊임없이 끄달리던 자기분열(自己分裂)의 날카로움이 비로소 꺾이게 되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내면의 어지러움과 그 아뜩한 얽힘이 마침내 풀어지게 된다[挫其銳 解其紛].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어떻게 '나'에게 그토록 목말라 하던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으며, 꿈에도 그리던 '영혼의 쉼'이 왔는가? 그것은 <안경>이 가르쳐준 분별(分別)로써가 아니라, 그리하여 부족하고 못난 '나'를 못견뎌 하며 더 많이 채우려 하고 더욱 더 완전해지려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 문득 그 <안경>이 내려지면서, 있는 그대로의 이 '나'가 바로 '참나[眞我]'임을 밝히 알게 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和其光 同其塵]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먼저 내 안(內)의 부족하고 못나 보이는 '티끌'과 하나가 될 때 이윽고 '나' 밖(外)의 '티끌'과도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진실로 '티끌'과 하나가 될 때, 이제 거기엔 '티끌'이란 없고 오직 상생(相生)만 있다. 모두를 진정으로 살릴 수 있는 사랑의 상생(相生)이―! 아아, 모두가 알게 되기를, 이 진실한 도리(道理)를!

    ⑤ 중생(衆生)이 곧 부처요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이며, 색(色)이 곧 공(空)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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