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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우리의 日常, 거기에 道가 있다

작성일 06-02-07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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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조회 35,66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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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우리의 日常, 거기에 道가 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요.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道―길 도, 말할 도, 常―항상 상, 떳떳할 상, 始―비롯할 시, 처음 시, 故―고로 고, 연고 고, 죽을 고, 欲―하고자할 욕, 바랄 욕, 觀―볼 관, 妙―묘할 묘, 요―가장자리 요, 변방 요, 돌 요, 此―이 차, 이에 차, 異―다를 이, 謂―이를 위, 玄―검을 현, 오묘할 현, 깊을 현, 衆―무리 중, 많을 중

    도(道)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이름(名)을 이름이라 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름없음(無名)은 하늘과 땅의 비롯함이요,
    이름있음(有名)은 만물(萬物)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무욕(無欲)으로써 그 오묘함을 보고,
    유욕(有欲)으로써는 그 가장자리를 볼 뿐이다.
    이 둘은 같은 것인데, 다만 그 이름이 다르다.
    이 둘이 같음을 일컬어 현묘(玄妙)하다 하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모든 오묘함의 문(門)이다.

    < 뜻풀이 >
    도덕경은 전체 81장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처음 시작하는 이 1장은 도(道)에 대한 일종의 '선포(宣布)의 장(章)'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이제부터 도(道)를 말하고자 한다. 도란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언어(言語)나 문자(文字)에 담을 수 없는 도를 나는 이제부터 언어나 문자를 통하여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그런데 주의깊게 '자신의 삶과의 반추(反芻) 속에서' 가만히 귀기울여 들어보면,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으나 언어에 갇히지는 않는 그 무엇이 넘실거리며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도는 곧 '삶'을 떠나있지 않는 바, 언어 너머의 그 무엇이 그렇게 제대로 들려오기만 하면 우리 자신과 삶은 조금씩 '근본적인 변화'를 맞기 시작하여, 마침내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도란 그렇게 단순히 지식적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근본에서부터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강한 힘과 직접성을 갖고 있다①. 그러므로 이제 나와 함께 이 도덕경을 통하여 '우리 자신'과 '삶'의 진정한 자유에의 길[道]로 나서보지 않으려는가?" 그렇게 노자(老子)는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① 성경에도 이를 웅변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魂)과 영(靈)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브리서 4:1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도(道)는 곧 '진리(眞理)'를 말한다. 진리의 다른 이름이 곧 도이다. 그것은 참된 것, 영원한 것, 변치 않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形狀)'에 있지 않으며, 시간의 연속선상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너무나 뜻밖에도,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매일 매일 되풀이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일상(日常) 바로 거기에 도(道) 곧 진리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진리는 그토록 가까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며, 마음이 닫혀 있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에 노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머리에서 다시 이렇게 우리에게 말한다.
    "눈을 떠라!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우리의 일상(日常), 우리의 삶 바로 거기에 진리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 안에서 살고 있으며,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떠난 적이 없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도(道) 그 자체다! 왜 이를 깨닫지 못하는가?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함으로써 진리에 닿으려는 그 마음만 쉬어라. 그리하면 그대는 스스로 알게 되리니, 진리가 무엇이며 도가 무엇인지를―! 그런데 그렇게 알고 보면 그것은 차라리 '진리'라 할 것도 '도'라 할 것도 없기에, <이름하여> 진리라 하며 <일컬어> 도라 한다는 것을―!"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사실이 그렇다. 도(道)는 그 어떤 말이나 개념으로도 규정되지 않으며, 그 어떤 언어로도 정확히 표현되거나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는 언어이전(言語以前) 혹은 언어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는 그 어떤 모양이나 형상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것이 도(道)이다!"라고 하거나 "이러 저러한 것이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이 그러한데도, 그렇게 말하면 도 혹은 진리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아주 먼 나라 이야기쯤으로 들리거나, 아주 높은 차원의 무엇이어서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다가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한 표현들은 단지 도가 우리의 인식(認識)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 도의 실재성(實在性)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우리 눈앞에 있다.
    그런데 그렇게 훤히, 더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감추어진 적이 없고 단 한 순간도 드러나 있지 않은 적이 없는 도를, 참으로 묘(妙)하게도, 단지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참 기가 막힌 말인데, 나는 앞으로 이 <도덕경 다시 읽기>를 통하여 이를 명백히 밝히고, 우리 눈앞을 가리고 있는 그 무명(無明)을 분명히 벗겨내고자 한다.

    名可名 非常名(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다)……이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본래적이고 변치 않는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이름도 <붙여진> 이름일 뿐, 그 이름이 곧 본래부터의 그 사물의 이름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분주한 삶 가까운 곳에서 언제나 우리를 가만히 굽어보고 있는 저 산(山)을 한 번 보자. 그 '산(山)'이라는 이름은, 그것의 본래 이름이 '산'이어서 우리가 '산'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산'이라고 <이름붙인> 것인가? 너무나 파랗고 푸르러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퍽 쏟아질 것만 같은 저 아름답고 눈부신 하늘은 또 어떤가? 그것이 정녕 '하늘'이어서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르는가, 아니면 우리가 '하늘'이라고 <이름한> 것인가?②

    ②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 창세기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창세기 2:19~20)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그런데 이때의 '아담'은 성경 창세기에나 나오는 태초(太初)의 아담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요즘에도 학계(學界)에 보고되지 않은 어떤 별이나 곤충 혹은 식물을 새롭게 발견하면 대개 그 형상(形狀)이나 소리 혹은 최초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을 붙이지 않는가? 몇년 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어떤 별자리를 발견했다며, 그 이름을 '세종별'로 명명(命名)했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이름'들을 붙이고 있다. 성경은 ― 그리고 다른 많은 경전(經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 이와 같이 태초나 혹은 오래 전의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들에 관한 얘기이다. 경전의 시점(時點)은 언제나 '현재(現在)'이다.

    만약 '산'이니 '하늘'이니 하는 이름들이 우리가 <붙인> 이름이라면, 그 이름들을 한 번 떼어내 봐도 좋으리라. 그렇게 각 사물들에서 우리가 <붙인> 이름들을 떼어냈을 때, 거기에는 무엇이 남는가? 거기에는 그 어떤 이름도 갖다 붙일 수 없는, 본래 이름이 없는 어떤 대상만 남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이제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무엇일까? …… 모른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참으로 아이로니컬 하게도 우리가 바로 조금 전까지 '산'이라 하고 '하늘'이라 했던 그것에서 우리가 <붙인> 이름들을 떼어내고 보니, 오호라!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냥, 굳이 말하자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거기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비단 '산'과 '하늘' 뿐이겠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름이 없다[無名]. 노자가 말하고 있는 '無名 天地之始(이름없음은 하늘과 땅의 비롯함이요)'의 참뜻은 그토록 가까이, 바로 우리 곁,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재(現在)'에 있다.

    지난 1991년 4월 나는 7개월 동안의 지리산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곧바로 경기도 포천에 있는 어떤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짐을 꾸리며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땐 정말이지 하루 하루가 견디기 힘들었고, 타는 듯한 내면의 갈증으로 언제나 발을 동동거리며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나곤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곳 저곳을 떠다니면서 소용되는 비용은 주로 노가다(공사판의 막일)를 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는데, 내 나이 서른 한 살 때의 봄빛 가득한 4∼6월 석달 동안에도 나는 그렇게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땀을 흘리며 공사판의 막일을 하고 있었다. 철근을 옮기고 벽돌을 져나르고 공구리(콘크리트)를 치는 속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내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썼고, 점심을 먹고 난 뒤 모두가 즐기는 짧은 오수(午睡) 시간에도 나는 홀로 공사판의 한 구석에 앉아 고요히 면벽(面壁)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되뇌었다.
    그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던 그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고 난 뒤였는데, 그날따라 유난히도 답답해 오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하며 나는 공사현장 인근에 있는 공터로 잠시나마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때가 아마 5월 중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햇살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봄을 맞은 만물(萬物)은 자기 안에서 솟구쳐 나오는 온갖 생명력들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텅 비어 잡초만 무성하리라 생각했던 공터는 그러나 이웃 주민들이 가꾸어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텃밭들로 어떤 정겨움마저 안겨다 주었고, 문득 마주하게 된 그 작은 평화로움에 나는 나도 모르게 살포시 햇살처럼 풀밭 위에 앉아 그 정경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무심코 앉은 자리 바로 앞엔 자그마한 파밭이 정성스레 가꾸어져 있었고, 제법 자란 줄기 위로 하얀 파꽃들이 여기 저기 터질 듯 피어 있었다. 그때 마침 어디선가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도 하려는 듯 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날아와 마악 그 하나의 파꽃에 앉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 나는 이 순간의 정경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 저건……, 저건 파가 아니다!"
    "저건 파가 아니다!"
    아아, 그랬다, 그것은 파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파라고 믿었던 그것은 파가 아니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바로 그 순간, 내가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그 '파'에서 '파'라는 이름(名)이 딱! 떨어져나갔다. '파'라는 대상과 '파'라는 이름은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것이다! '파'라는 이름은 단지 우리가 <붙인> 이름일 뿐 그것은 '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대상에서 하나의 이름이 떨어져 나간 바로 그 다음 순간, 아아 내 눈앞에 펼쳐진 모든 대상들에서 모든 이름들이 한꺼번에 다 떨어져나가 버렸다! 이럴 수가……!
    "그렇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본래 이름이 없다![無名]③ 모든 것이 본래 이름이 없는 그냥 그것일 뿐이구나……!"
    나는 그 순간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③ 지금은 일곱 살이 된 내 딸애가 네 살인가 다섯 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아빠 무릎 위에 달랑 올라앉아서는 사진으로 된 그림책을 펼쳐들며 언제나 이렇게 묻곤 했다.
    "아빠, 이건 뭐야?"
    그러면 나는 녀석의 고사리 손이 가리키는 사진들을 보며,
    "응, 이건 수박, 그건 진달래, 그건 해바라기, 저건 고양이, 이건 말, 그건 개, 그건 하늘, 이건 구름, 저건 물고기, 그건 사자...." 나는 그렇게 끝없이 그 아이에게 대답해 주곤 했다.
    어린 아이가 바라보는 세계(世界)에도 '이름(名)'이 없다. 無名, 天地之始....

    '이름(名)'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단순한 것 같지만,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라는 대상에서 '파'라는 이름을 떼어내고, 본래 이름 없는 그것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보게 되면, 우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주의깊고 섬세하게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름'을 통하여는 그것은 조금도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그냥의 단순한 '파'에 지나지 않지만, '이름'을 떼어내고 보면 우리는 그것을 무어라고 해야 할 지를 몰라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바라보게 될 터이고, 그러면 그 좁혀진 거리만큼 그것의 섬세하디 섬세한 구조와 모양과 빛깔과 향기가 비로소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처음인 듯한 그 새로운 발견에 스스로 놀라며 바야흐로 그것을 살포시 만져보는 데에까지 이르면, 아아 마침내 우리는 그 '생명'의 신비로움에 전율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매일 아침 마시거나 씻는 '물'도 마찬가지이다. '물'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名)'을 조금 옆으로 밀쳐놓고, 잠시만이라도 찬찬히 그것을 바라보라. 그리고 가만히 그것을 만져 보라. 그러면 하필 그런 투명함과 밀도와 질감(質感)과 시원함을 가진 그것이 여기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신기하지 않은가?
    하다 못해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민들레' 한 송이만이라도 그 낮은 키만큼 우리 자신을 낮추어 가만히 들여다 보라. 아아 그 노오란 꽃잎과,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는 그 자태와, 동그랗게 솜사탕처럼 부풀어 있다가 한 줄기 바람이 불 때마다 설레는 가슴 보듬고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 꽃씨들의 눈부신 축제와……! 나는 이 보다 더 큰 '기적'을 알지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나무'와 '돌'과 '새'와 '흙'과 '별'들에게서, 이름 모를 '풀'들에게서, '태양'과 '햇살'에게서 그 이름들을 떼어내고 가만히 그것을 느껴 보라. 오오, 세상은 온통 '신비(神秘)'와 '기적'과 '감동'으로 가득 차 있구나!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넉넉하구나!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그 모든 것들과 함께 또 하나의 '기적'으로 살아있는 '나' ― 우리 모두 ― 는 그러기에 얼마나 누릴 것이 많은가! 얼마나 가진 것이 많은가! 아아, 이 텅 빈 충만이여―! 세계(世界)는 이미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구나!
    그와 같이 '이름(名)'을 통하여 세상과 사물을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常有欲以觀其요)④, 본래 이름 없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놀랍게도 세계(世界)는 온통 기적과 신비 덩어리이다!(常無欲以觀其妙)

    ④ '이름'은 곧 관념(觀念)이며, 그것은 '언어'와 '생각(思考)'과 '약속'의 공허한 다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또한 '이름'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다. 이름 ― 곧 언어(言語) ― 이 있어야 우리는 인식하고 판단하며 분별할 수가 있고, 바로 그러한 인식활동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삶의 영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본래 이름 없는 각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보자. 그런데 우리가 붙이고자 하는 그 이름이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가 각 사물들에 붙여서 불러오던 이름들이 있으므로, 이제 기왕의 그 이름들을 그대로 각 사물들에 붙이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 이름 없는 어떤 것에 '산'이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그것이 '산'이 되었고, 이름 없는 어떤 것에 '하늘'이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하늘'이 되었으며, 무엇인지 모르지만 언제나 일렁이는 거기에 '바다'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그것이 '바다'가 되었다……이것이 '有名, 萬物之母(이름이 붙여지면서 만물이 있게 되었다)'의 뜻이다.
    그렇듯 '無名'도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의 일이며, '有名'도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의 일이다. 그와 같이 '道可道 非常道……'로 시작하는 도덕경(道德經)의 이 1장의 시점(時點)은 언제나 '현재(現在)'이다. 사실 도(道)란 '시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둘 ― 이름없음(無名)과 이름있음(有名), 묘(妙)와 요(요) ― 은 다만 그 이름이 다를 뿐 사실은 같은 것이 아닌가?(此兩者同, 出而異名) 그러나, 같지만 또한 얼마나 다른가! 오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구나!(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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