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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 오오, Let it be!

작성일 06-02-0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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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조회 14,34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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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 오오, Let it be!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탁약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芻―꼴 추, 짚 추, 狗―개 구, 猶―같을 유, 오히려 유, 탁―풀무 탁, 전대 탁, 약―피리 약, 열쇠 약, 乎―어조사 호, 屈―다할 굴, 굽을 굴, 愈―더할 유, 나을 유, 數―자주 삭, 셈할 수, 窮―궁할 궁, 다할 궁, 궁구할 궁, 守―지킬 수, 막을 수

    천지(天地)는 인자하지 않아서 만물을 추구(芻狗)처럼 여긴다.
    성인(聖人)은 인자하지 않아서 백성을 추구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나 피리와도 같구나!
    텅 비어 있되 다함이 없고, 움직이면 더욱 나온다.
    긴 말 하면 숨만 차고―!

    < 뜻풀이 >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천지는 인자하지 않아서, 사랑이 없어서……. 아아, 노자의 이 아름다운 역설(逆說)! 삶과 세상과 인간을 훤히 꿰뚫고 있는 노자의 이 서늘한 눈길! 천지는 사랑이 없어서……아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천지는 사랑 덩어리이며, 우주는 곧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1서 4:8). 그리하여 하나님에게는 오직 사랑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말한다. 왜? 스스로 그러한[自然] 모양의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넓고 깊으며 섬세해 차라리 '불인(不仁)'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인(不仁)의 인(仁)……노자는 안다, 차라리 '사랑'이라는 말조차 설 수 없는 천지(天地)의 그 크낙한 사랑을―!①

    ① 이런 역설과 반어(反語) ― 우리의 언어(言語)나 사고(思考)가 가닿을 수 없는 ― 를 노자는 도덕경 곳곳에서 하고 있다. 그 중에 몇 개만 우선 소개하면, 上德不德(큰 덕德은 덕이 아닌 듯하고/38장), 明道若昧(밝은 도道는 마치 어두운 것 같고/41장), 太白若辱(크게 흰 것은 마치 얼룩이 진 것 같고, 혹은 '큰 결백은 마치 욕된 것 같고'로 풀어도 된다/41장), 大成若缺(큰 이룸은 마치 아직 부족한 듯하고/45장), 大直若屈(큰 곧음은 마치 굽은 것 같고/45장), 大巧若拙(큰 정교함은 마치 졸렬한 듯하고/45장), 大辯若訥(크게 말 잘함은 마치 어눌한 것 같고/45장) 등등.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비유와 역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10계명을 내려줄 때의 얘기를 한 번 해보자. 출애굽기 20장1절부터의 말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좋다. 기왕에 이렇게 성경 얘기를 하게 되었으니, 우선 성경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그 바른 이해를 위한 나의 조언(助言)부터 말해 보고 싶다.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해, 다른 많은 경전(經典)과 마찬가지로, 기가 막힌 책이다. 어떻게 인간의 언어(言語)로써 언어이전(言語以前)의 자리, 언어가 가닿을 수 없는 자리를 그토록 분명하고 멋들어지게, 그토록 풍부한 비유와 넘치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지, 어떻게 그런 깊고도 아름다운 글들이 그렇게,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씌어질 수 있었는지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더구나 이 귀하고 놀라운 책이 우리 가까이, 손만 뻗으면 닿을 자리에 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어라, 크낙한 기쁨이어라!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성경이 성경답게 읽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기독교 혹은 가톨릭적 세계 속에서만 이해되고 있고, 너무 일방적으로 그들이 성경 속에서 찾아낸 <그림>과 교리(敎理)가 전부인 양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기독교 혹은 가톨릭의 전유물이 아니며, 오히려 엄밀히 말하면, 성경은 기독교 혹은 가톨릭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그것은 종교 이전(以前)의, 교리 이전의 무엇이다. 성경은 그러한 종교나 교리로 한정되어질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불경(佛經)과 불교(佛敎)에 대해서도 꼭 마찬가지로 말해질 수 있다.
    나는 앞으로 이 도덕경 풀이를 통해 가능한 한 자주 성경을 인용하여 기독교나 가톨릭의 <그림>으로 채색되지 않은 성경 본래의 진의(眞義)를 많이 캐내어 보고 싶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사실 나는 성경에서 이 말씀만큼 하나님의 그 크시고 한량없는 사랑을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하나님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 자신을 가질 때 뿐이며, 그 외의 어떠한 것도 <진정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토록 애틋하게 사람들이 오직 당신 자신만을 바라기를 원하며, 또한 그토록 간절하게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내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아,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행복하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란 곧 진리(眞理)이며, 사랑이며, 도(道)이며, 불법(佛法)이며, 진아(眞我) ― 진정한 나 곧 '참나' ― 의 다른 이름(名)인 것을!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천지는 인자하지 않아서 만물을 추구(芻狗)처럼 여긴다. 여기에서 추구(芻狗)라는 것은 '풀이나 지푸라기로 엮어 만든 개'라는 뜻인데, 고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던 도구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제사를 지낼 때 나쁜 귀신이나 기운이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풀이나 지푸라기로 개를 만들어 옆에 세워 두었다가, 제사가 끝나면 곧바로 버리거나 태워버리는 습속이 있었다. 즉, 필요할 땐 만들어 쓰다가 그 소용이 다하면 미련없이 버려서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니까 노자는, 때가 되면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새가 알을 깨고 나오고 그렇게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또 때가 되면 그 모든 것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천지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질서와 조화의 모양을 이와 같은 당시의 제사풍습에 비추어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라고 표현한 것이다.
    당시의 사람이면 누구나 지냈던 제사, 그래서 누구도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던 그 너무도 평범한 일상사(日常事) 속에서 이토록 깊은 도(道)의 향기를 바라보는 노자의 눈길이 서늘하다.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성인은 인자하지 않아서 백성을 추구(芻狗)처럼 여긴다)……앞 장(章)에서도 말한 것처럼 노자에게 있어서 '성인(聖人)'이란 단지 삶의 진실 ― 있는 그대로의 것 ― 에 눈 뜬 사람을 가리키는 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천지가 만물을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맡겨두어 '스스로 그러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듯이, 성인도 또한 백성들을 그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맡겨두어 각자의 존재의 빛깔대로 각자의 생명의 몫을 한껏 살아가도록 내어버려 둔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그렇게 무심하게 내어버려 둘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無爲]' 이 천지와 성인의 모습이 정말이지 노자의 표현처럼 사랑이 없는 듯 ― 불인(不仁)한 듯 ― 보이나, 그 그냥 <내어버려 둠> 속에서 얼마나 그 각각의 존재가 각각의 자리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가장 자기답게, 자신만의 생명의 빛을 한껏 살아가도록 해주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의 가장 완벽한 하모니를 엮어내는 천지의 이 놀랍고도 놀라운 지혜여, 사랑이여―!

    그러면 이제부터 잠시 우리의 '관점'을 달리하여 앞의 얘기를 이렇게 한 번 바꿔보자.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라는 말을 단순히 성인과 백성과의 관계로만 읽지 말고 우리 내면의 얘기로 한 번 읽어보자. 그러면 성인은 '나'가 되고, 백성은 '내 안의 백성'이 된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천지는 '나'가 되고 만물은 '내 안의 만물'이 된다). 이것은 앞서 3장에서도 말한 '관점의 전환'인데, 이렇게 읽었을 때 이 글은 갑자기 '나' ― 우리 각자 자신 ― 의 얘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이후 81장까지, 아니 모든 경전을 읽을 때에도 유효하다. 그렇게 우리의 눈이 내면으로 향해 있을 때 그 어느 한 순간 문득, 이미 진리가 내게 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도 말했다.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라고.

    내 안에도 '백성'들이 참 많은 것이다. 미움, 짜증, 분노, 기쁨, 의심, 게으름, 밴댕이, 불안 등등 온갖 생각과 감정과 느낌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우리는 그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노자가 말한 천지(天地)와 성인(聖人)처럼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내어버려 두는가? 아니면 끝없이 끊임없이 그것들을 <구별>하고 <분별>하여 어떤 것은 좋다 하여 할 수만 있다면 더욱 더 많이 취하려고 하고, 또 어떤 것은 부족하다 하여 끊임없이 버리려고 하거나 그것을 애써 더 나은 무엇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마음'은 그렇듯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상현(尙賢)'을 위하여 끊임없이 무얼 하려 하거나, 또한 그런 모양으로 '내 안의 백성'들을 들볶고 있질 않는가? 오오, Let it be! 그냥 내어버려 두라! 미움이 오면 그냥 그 미움 속에 있으라! 짜증이 오면 그냥 그 짜증을 살며, 불안이 오면 그냥 불안하라! 그리고 기쁨이 오면 그냥 기뻐할 뿐 그것을 부여잡으려 하지 말라. 온 것은 가게 마련이니, 어느 순간 홀연히 기쁨이 내게서 떠나가거든 그것이 그냥 떠나가게 내어버려 두라. 그 어떤 것도 <간섭>하지 말며 그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 그리하여 오직 '현재'를 살 뿐 '현(賢)'하려 하지 말라! 그냥 그렇게 순간 순간을 살라! 아아, 그 하나 하나의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이니!
    여기 용아화상(龍牙和尙)의 한 노래가 있어 문득 그것을 읊고 싶구나!

    深念門前樹
    能令鳥泊棲
    來者無心喚
    去者不慕歸
    若人心似樹
    與道不相違

    문 앞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노라.
    선선히 새들에게 그 둥지를 내어주고
    오는 자 무심(無心)히 맞아주며
    가는 자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만약 사람의 마음이 이 나무와 같다면
    道와 더불어 어긋나지 않으리.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어 또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와 메추라기>에 관한 이야기인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 종되었던 곳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가던 도중 광야에서의 일이다. 그렇듯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의 몸에서 놓여나게 해주었건만, 그들은 그들의 행로(行路)에 어떤 자그마한 어려움이라도 닥치면 곧 모세를 원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이스라엘 온 회중(會衆)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2∼3)
    이러한 거듭되는 원망의 소리를 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하는데,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오는 다음의 말씀들이 참 재미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애굽기 16:15∼20)

    성경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얘기는 뭘까? 자, 성경을 <다시> 보자. 성경은 결코 이스라엘의 역사서가 아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얘기도 아니다. <모양>과 <그림>은 그러하나, 성경은 전적으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와 '마음'에 관한 얘기이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 앞의 출애굽기 말씀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까?

    '애굽 땅 종되었던 집'은 분별심(分別心) ― 4장에서 말한 <안경> ― 에 사로잡힌 '나'의 모습이다. 우리가 그 '생각[思考]' 혹은 분별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 분별심 혹은 한 '생각'이 내려지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마음의 상태 ― 空 ― 를 말한다. 그리고 특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지는 장면에서 보면,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이 만나와 메추라기는 앞에서 노자를 얘기할 때 말한 '내 안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렇게 늘 때로 미워하고 때로 짜증내며, 때로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 눈물짓기도 하면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존재요 '생명'인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성경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참으로 읽을수록 기가 막히고, 전율할 만큼 오묘하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는 곧 '내 안의 백성'이며, 그것은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아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내 안의 온갖 백성들을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내어버려 두지 못하고 끝없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이 <구별>하고 <간택(揀擇)>했듯이, 어떤 것은 가려 "아침까지 두는" 이 어리석음이여―! 그것은 필연적으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되어 있다!
    오오, 그러니, 그냥 두라! 그냥 그대로를 살라! 그와 같은 끊임없는 간택(揀擇)을 통하여 내가 나를 <질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그렇게 '내 안의 백성'들을 내어버려 두고(Let it be) 무위(無爲)할 수만 있다면, 그때, 천지(天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온전한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게 했듯이, 우주적인 생명의 기운이 '나'를 살리고 '나'를 질서잡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평화롭고 행복하리라. 아아, 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어마어마한 힘이여―!

    天地之間 其猶탁약乎(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나 피리와도 같구나!)……그렇게 '나'라고 하는 이 천지가 무위(無爲)로써 텅 빌 때, '내 안의 백성'들은 여전히 제 각각의 존재와 생명의 빛깔대로 다함 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나[虛而不屈 動而愈出], 오! '나'는 아름다운 피리소리 되어 세상과 삶과 일상(日常)을 연주하는구나!

    多言數窮 不如守中! 긴 말 하면 숨만 차고―!
    (그런데 마지막의 이 문장을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 지나니, 그러므로 그 '중(中)'을 지킴만 같지 못하다.'라고 교훈적으로 해석하여, '중(中)' 혹은 '중도(中道)'를 찾으려 하거나 지키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어긋난다. 왜냐하면 '중(中)'은 찾을 수도, 잡을 수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사고(思考)'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그 한 '생각[思考]' 혹은 '마음'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만 내려지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리라, 이 세상에는 온통 '중(中)'밖에 없음을, 그리하여 따로이 '중(中)'이라고 할 것도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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