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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찾기 위한 노력이 '광신'으로 변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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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21.♡.243.79) 댓글 0건 조회 5,404회 작성일 09-02-04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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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친 부분만 읽으셔도 됩니다.)


하나의 [견해]가 [믿음]으로 그리고 [종교]로...

'삶은 무상하다' '견성을 위해서는 분별과 간택을 중단해야 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들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석가의 가르침이 집약된 사성제의 원리 -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다다르는 길 등에 이르는 방법론과 노장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인 '도' 역시 진리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 견해(사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불교 철학과 노장사상의 특성 자체가 일반 서양의 형이상학적인 원리체계와는 달리, 본질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거창한 이론-이성 체계가 상당히 제거되어 있고, 나를 찾기 위한 직관적 노력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사람들은 이 자체를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반들이 흔히 하는 얘기는 다른 모든 진리를 표방하는 얘기들은 '논리'와 '개념' '지식'을 이용하지만, 자기들이 추구하는 바는 전혀 그러한 것이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잡다한 논리와 개념을 끄집어 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구요.

따라서 불교-노장적 이해를 쫓으시는 분들은 자칫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늘 이 점을 명심해서 자신은 지금 다만 하나의 견해를 쫓아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는 불교-노장적 이해에 거리를 두기 위함이 아닙니다. 불교-노장적 이해의 정점에 다다르기 위해서라도 그 과정에 수 없는 ‘전해지는 이야기’ ‘변형된 이야기’ ‘왜곡된 이야기’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노장적 견해는 좀 더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론인 것 같기에 이에 맹종하고 푼 욕심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한번 빠진 함정에서는 다시 나오기 힘이 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함정은 큰 '평안'과 '안락'을 주기 때문이죠.

불교와 노장사상이 주는 큰 매력은 그 속에 무한한 해방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매달리지 않는 상태', '늘 거울같이 세상을 비추는 상태', '있는 그대로를 직관하는 상태'가 이를 듣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고 무한한 해방감을 줍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은 과거 시시콜콜한 문제에 얽매이고 고통받던 삶을 되돌아 보면서,

이러한 '무상'을 향한 일념을 불태웁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그들 나름의 진리'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고, 도가 지나칠 때는 종교적 맹신으로 탈바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특이한 정신적 현상이 동반됩니다. 우리가 흔히 '위약효과'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이 자기가 믿은 것이 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자기예언적실현이 이루워지는 현실이죠.


'무상'의 삶- '대자각'의 삶을 위해서 수련하던 이들이 점차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바를 보고 '견성'했다고 일컫는 순간은 바로 그런 작용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모시면 천국간다고 믿는 이들의 바램이 실지로 단단한 믿음으로 그 자체가 현실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리고 '원리상' 이 두 사례는 좀 다르게 보일 뿐 결과적으로는 같은 심상의 결과입니다.

물론 견성하기 위해서 끝임없이 내면을 바라보며 도를 닦아 왔던 이들은 우리가 믿는 것은 기독교인의 신과 같은 비현실적인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내 자신이다라고 반발하고플 겁니다. 하지만 자기가 찾아 왔던 '나'역시 결과적으로 '나'가 '나'라는 대상을 대상화해서 찾았던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나'가 '너'(신)를 찾는 것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는 얽매임의 존재를 없앤 무상의 상태를 추구하지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의식과 편견에 휩쓸리지 않는 눈,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사하는 완전 직관의 삶. 이는 불교-노장사상이 최고로 꼽는 이상향이죠. 다만 그 이상향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기에 안정되어 보입니다. 언듯 이러한 상태는 흔히 '대자유'를 얘기하는 듯 하기에 많은 이들이 여기에는 ‘어떠한 걸림이 없는 완벽한 진리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숙고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얽매이지 않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다’는 입장 자체는 넓게 봤을 때 회의주의-허무주의 사고체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적-노장적 가치는 ‘대자유’를 위해서 현실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긍정하는 것도 아닌 미묘한 중간세계를 제시하고 있기에 이를 ‘회의주의 체계이다’라고 말하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여 정확히 표현을 하자면 ‘불교적-노장적 가치가 추구하는 세계다’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것이 완전무결한 진리와 동격이 되는 사고를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 길을 먼저 지나쳐 왔던 이들이 경험한 ‘특별한 정신의 상태’를 최고의 견성 상태라고 무용담 처럼 떠벌리곤 하니 이에 귀가 솔깃해서 끌리는 분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좀 면밀히 숙고해 봐야합니다. 생리 구조상 태양광의 95%를 걸러내는 인간은 애초에 ‘분별 간택하는 존재’로서 태어났기에 태양광의 95%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바이러스 수준으로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죽어서 바이러스로 되돌아가기 전까지는 불가능하지요.


따라서 ‘그 상태’라는 것은 다만 훈련된 정신의 상태를 말함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늘상 경험하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이지요. 어느 때 산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시공간이 한 터울로 엮어지고 내 존재가 이 거대한 세상에 꽉 차 있는 듯 한 직관을 순간적으로 경험한 적은 누구나 다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을 그들은 완벽한 존재의 상태로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득도’내지는 ‘견성’했다고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말을 할만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기존의 ‘습관’ ‘기질’ ‘경험’ ‘개념’의 작용이 멈추면서 ‘본원적인 정신작용’이 이뤄지는 상태로 기존의 습관적 경험적으로 세상에 반응했을 때 보다 훨씬 폭넓게 사물의 작용을 이해하고 이에 반응할 수 있는 자세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역시나 이 상태도 다만 인간의 의식이 머무르는 한 상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나름의 진리’이기는 할망정 모든 세상의 문제까지를 해결하는 완벽한 진리는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한 진리다’라고 주장할 때는 그들 자신에게는 완벽한 진리가 되게는 하겠지요.


문제는 이 순간 자신들의 이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때 바로 광신이 생겨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상태가 주관적인 견해에 자신들이 작용한 상태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완벽한 객관의 상태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한국 사람들 얼마나 감성적입니까? 자신의 경험들에 거창한 미사어구를 붙여 놓고 불생불멸 대자대비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 대고 포장하니 옆에서 듣는 사람들도 뭔 특별한 천국이 있는 듯히 여기게 되는데, 하여간 이를 타인에게 ‘강요’할 때 바로 광신 작용이 발생합니다.


여기서의 강요는 기독교인들 처럼 꼭 ‘니들이 도를 알어? 도를 모르면 지옥가?’라는 식의 독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도들의 언행은 좀 점쟎죠.

그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논리적인 설명이나 주장, 비판은 잘 못이다. 당신이 내 말을 한번 제대로 믿어봐라. 있는 그대로를 봐라. 그럼 크게 깨우칠 것이다.’


이는 앞서 얘기했던 ‘자기예언적믿음’의 체계가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 믿으면 그게 진실이 되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그게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나는 ‘기독교맹신자’가 되든 ‘불교맹신자’가 되든, ‘뱀신맹신도’가 되든 하겠지요.


이 순간 함정이 ‘두 곳’에 생겨나지요.

이는 이 말을 한 사람 자신과 이 말을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마치 세계적 진리인양 확대하는 실수를 함으로 자기예언적믿음을 더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고,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정말 한번 해볼까?’하는 유혹과 함께 그 믿음의 체계를 공고히 할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이해에 접하게 하려는 노력을 꼭 ‘맹신’이라던가 ‘함정’이라던가 하는 말로 표현해야하는가는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의 가능성’ 조차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 아니면 안돼’라는 식의 태도를 가지는 것은 그 견해 자체의 건전성과는 별도로 한편의 개념적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이러한 ‘맹신자’들은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함정’속에 빠진 상태에서는... 즉 자기예언적믿음을 믿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게 ‘진리’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설명과 논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특정한 정신 상태인 것을 모르다보니 상대방이 막혀 있다고만 투덜대는 것이죠.



‘보편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좀 더 나은 삶을 살게끔 도와줄 수 있는 좀 더 나은 진리만 존재하지요. 이 한계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이러 이러한 상태’를 제안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으로 나가면 광신도가 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흔히 불교-노장사상에서 추구하는 ‘무상’ ‘견성’ ‘득도’ 추구적 삶은 그들의 ‘광신성’에 대비해서 세상에 별로 유익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 ‘견해’의 극단적 주관성에 있습니다.

우선 견성 득도를 추구하는 이들 대부분이 주관적 고통과 삶의 갈증이라는 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이를 접하게 되고, 극히 사적인 방향의 문제의식으로 에너지가 흐르는 와중에 견성-득도함으로 평생을 주관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견해에 고착되는 불이익을 얻는 듯 합니다.


더군다나 늘 ‘자기견성’의 문제에 집착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자기가 속한 세상의 문제-자기 자신을 더욱 폭넓고 실증적으로 들여다보고 다스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의 문제에 제대로 작용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이들은 설령 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해가 주관적으로 고착되고 관념성을 띄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 자신의 정신의 원리를 터득해 정신은 맑고 현명히 마음을 쓰지만, 상대적으로 세상의 문제를 보는 능력에 에너지가 고루 투입되지 못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자기가 얻은 지혜를 어떻게 쓸 줄 몰라, 온전한 세계 작용을 하지 못하고 다만 ‘착한 사람’이 되곤 합니다. 도를 하는 ‘착한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는 ‘착한 사람’이나 알라를 믿는 ‘착한 사람’이나 실질적인 세계 작용 면에서 구분할 수 없는 그냥 ‘착한 사람’일 뿐입니다. ‘대아심’이라는 것이 단순한 ‘관념적인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닌 ‘실천 작용으로서의 삶’을 말한다면 이런 이들에게 올바른 ‘대아심’이 들어찰 자리는 없습니다.

이렇게 ‘무상-무아심’의 발현을 통해서 견성했다고 자부하는 이가 ‘모든 세계는 하나이다.’ ‘인류는 하나이다’는 따위의 ‘대아심’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과는 관계없는 그냥 컨셉으로 하는 얘기니까 현혹되면 안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통해 찾은 세상은 그야 말로 ‘무상-무아’한 ‘주관적’ 세상을 뿐이지, 그것이 대아심과 연결된 거창한 사랑과 통합과 불생불멸로 이뤄져 있는 그러한 천국 같은 세상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올바른 대아심을 깨웠을 때나 가능한 것인데, ‘그런 수준의 견해’에서는 그 말이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잘 들여다 봐야합니다.


개인적으로 삶에 대한 이상적 ‘견해’는 ‘실천적 대아심 구축’이라고 봅니다.

애초에 ‘무아심’을 발현한 후에 올바로 ‘견성’하고 이 후에 각고의 노력 끝에 ‘대아심’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이 길은 너무 어렵고 견성 직후에 다시 한번 탈각의 필요성이 주워짐에 그 단계를 뛰어 넘기가 힘들 듯 합니다. 반면 애초에 ‘모든 존재가 하나이다’는 대아심의 ‘견해’를 습득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훈련해 나간다면 그 매 순간순간이 자기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고, ‘지금 여기’서의 노력 자체가 지금 직면한 인류와 환경의 문제까지를 해결하는 열쇄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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