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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특이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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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58.♡.138.174) 댓글 12건 조회 6,113회 작성일 09-02-23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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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뱃속은 특이한 세상이었읍죠.

감각과 이성에 의해서 감정과 사물과 개념과 논리가 구분되지 않고, 시간의 길고 짧음도 나눠지지 않는 직접적인 인식만 있는 상태 였습니다. 오직 암흑이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감정적 이성적 동요도 없이 그냥 지긋히 이에 어우러져 있는 상태. 그 상태 속에 머물러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머물러 있는 상태라고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어떤 객체에 저라는 주체가 놓여있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자연히 있는 상태 정도였으니까요.


여섯 살 때 끝없는 벌판을 헤매면서 숨도 쉴 수 없는 고독감에 치를 떨던 백일몽을 꾸었습니다. 그때의 기억과 장면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로도 그렇게 처절한 고독감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요. 문제는 눈을 떠보니 어머니 무릎위였지요. 저는 그 순간 눈에 보이는 것, 내가 의존하는 것들,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직관했습니다.


그 이후로 청소년기를 지나면서도 수도 없는 특이체험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가위눌리는 경험을 하면서 왜곡되고 뒤틀리고 공포감에 사로잡힌 인식 속에 저를 다잡는 훈련을 했고, 유체이탈 비슷한 경험도 했습니다. 잠깐의 순간동안 영겁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경험을 하면서 내가 살아나갈 100년의 시간 역시 촌음이라는 것을 명증히 알았습니다. 이에 더 이상 제 사사로운 삶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겼죠.


이미 이때 일상적으로 보여지는 세상은 저에게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특이체험, 정신적 경험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그에 대해서 무디어져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신비적체험, 정신적 경험을 통해서 과거의 일상적 인식의 틀이 뒤집어지다보니, 일상 자체가 신비한 것이 되었습니다. 특별한 자극과 감상과 환호 없는 무던한 삶 자체가 신비한 것임을 비로소 알았다는 것이죠.


그렇자 이번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일상에 매몰되서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인양 그 외의 가능성은 생각지도 못하고 붕어빵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표면적이고 부수적인 것들에 매달려, 본질과 핵심을 지나쳐 보내는 사람들... 중요한 것이 눈 앞에 있는데 그 너머의 것만을 찾는 그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이 느껴지더군요.


스스로 선택한 부자유가 만들어내는 불이익이 그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것이기에 그들에게 ‘다른 길’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워야 했지요.

그 와중에 기독교와 불교(노장자 등 포함)가 만들어내는 특이한 ‘함정’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제대로 믿는다면 그 속에서 무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제가 본 바로 그러한 종교와 이해에 의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또 하나의 ‘부자유의 길’(맹신)을 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속에 그럴싸한 경구들의 난립과 특별한 감상과 특이한 정신적(직관적) 체험이 얼버무려져 있다보니, 정말로 그 속에 뭔가 진실 된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심리가 그 믿음을 공고히 하는 듯했습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흔히 이 길을 먼저 지나쳐 왔던 이들이 자신들이 경험한 ‘특별한 정신의 상태’를 최고의 정신 상태라고 무용담처럼 떠벌리고 이에 갖은 수사학적 표현과 끝없이 자기실현적예언을 남발하니, 여기에 하나의 ‘믿음의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같이 어렸을 때부터 특이한 정신적 체험에 단련된 사람의 시야로는 그야말로 시장판에 투전꾼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이한 정신의 상태를 추구하냐 않냐?’가 아닙니다.

‘특별한 직관의 순간을 멋진 수사학 표현으로 사람들에게 얘기해주냐 않냐?’가 아닙니다.

‘진리에 다다를 것 같이 보이는 환상적 정신작용의 기대를 한껏 부풀리냐 않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끝없이 ‘일반적 현실’과 ‘특이한 정신상태’를 이격시켜서 신비체험의 길을 트일 수 있는 정신 상태로의 몰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자체가 진정한 신비함이고, 그 삶 속에서 일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만이 그들 종교의 본질이고 진수요,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사이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상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만큼 훌륭한 것은 없지요. 일상을 온전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독려하고 일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끔 추동할 수 있는 신념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을 만큼의 최고의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 너무 찌들어 있습니다. 이렇다보니, 이 고통스러운 일상으로부터 탈출 할 수 있는 ‘다른 자극의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고, 그런 자극을 줄 수 있는 특별한 정신의 상태, 신비적 상태를 ‘견성’ ‘진리’ ‘혜안’ 등으로 포장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평생을 진리에 목마름 하며 쳇바퀴 돌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작용이란 일상에서 이미 운용되고 있는 것인데, ‘진리와 혜안은 일상과 다른 것이다’고 분별해 놓고 그 일상 외에서 찾으려하는 것은 진실로부터 오히려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일상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냄으로, 생명과 자유가 가득한 신비함 그 자체인 것을 알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현실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오직 관념적 '도'를 추구하게끔 독려함으로 결과적으로, 현실속에서의 우리의 책임과 실천을 등한시하게해서 더더욱 현실에 불만을 갖게하여, 상대적으로 더더욱 관념적 도를 쫓게 만들어 내지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1주일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다가 일요일만 하나님의 충복이 되는 것과 같은 위선을 끝없이 되풀이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스스로 보십시오. [일상의 잣대]와 [도를 추구할 때의 잣대]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게 다른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이는 앞선 ‘역사적 교주’들 중에서 ‘몇몇’이 그렇게 얘기했으니 이를 맹신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도’와 ‘진리’를 찾는 방식대로 일상에 임하면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이유가 큽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의 지반을 송두리체 내 던지고 온전한 ‘진리’를 찾아 떠나기기 힘들다 보니 ‘변종’적으로 일상에서 잠깐씩 떠나서 안위할 수 있는 방편을 만들어 낸 것이죠. 1주일에 한번 가는 교회 처럼요.


결국 크게 버릴 수 없으면 크게 얻을 수 없다는 말이 이 경우에 해당되는 말인데, 크게 버리지 못한 소심한 객들은 그 시장판 투정꾼 같은 이들의 이야기만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려 ‘내말 좀 들어보소~ 일상의 문제는 잠시 제껴두고 내가 하는 진리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보시구랴’하는 말에 그대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거듭 말씀드리건데 '일상을 제껴두라'는 식의 비슷한 어감을 주는 그 어떠한 믿음 역시도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와 현실을 분리시키려는 말이 시작되는 순간 온전한 존재는 '분열'되고,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속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속이는 사람들 자신도 본인의 인식이 위치한 지반을 인식할 역량이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을 속이는 줄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맹신’이 생기고 ‘사이비’가 생기는데, 문제는 이 나라의 수 많은 사이비 중에 단 하나의 사이비도 스스로가 사이비라고 여기고 있지 않다는데 있답니다. 이게 바로 의식의 함정이 지니는 특질입니다.


물론 이에 빠지지 않고, 설령 빠졌더라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이성에 의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종교적 신앙은 어떠한 이성적 공세에도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 이는 달라이라마가 한 얘기입니다.

끝없는 자기 갱신법의 다름이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이성을 통해서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여지는 어떤 현상의 원리를 이성을 통해서 어느 정도 계속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부정합니까? 그렇다면 여신도들 강간하려고 세워진 교단인 JMS교를 누가 문제 삼을 수 있는가요.


말인 즉은 그것이 아무리 좋고 그럴싸한 이야기라도, 자기실현적예언만 난무하는 관념, 감성의 증폭, 신비주의고양, 특이한 정신적 체험의 강조 등등만 운운할 뿐, (하찮은?)이성으로조차 검증할 수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사이비라는 것입니다.


신도들 강간하려는 목적이 없고, 금품착취가 없을 뿐이지, 불교-노장자 사상을 비롯한 갖은 아류의 사상들을 설법하는 이들의 그것 역시 (상당수)사이비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문제는 나중의 문제다’라며 현실과 이격된 철저한 관념론으로 갑옷을 두르고, ‘나를 깨우치는게 장땡이다’는 유아론적 사고를 무기로 삼으며, ‘분별과 간택을 하지 말라’는 처절한 회의주의를 방패삼은 그들의 믿음이 허황되다는 것은,

작금에 놓인 지구적인 위기를 인식도 하지 못 한체 오히려 그러한 위기를 더더욱 부추기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일 예로 당신이 한 달에 70만원 이상 번다면 당신은 ‘견성’, ‘득도’한 사람일 수가 없지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현재 하루 평균 동식물이 3종씩 명종하고 앞으로 2020년 양서류가 멸종하고, 후손들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지금 우리가 쓰는 에너지 소비가 너무 과대해서 이로 인한 자원고갈과 환경교란으로 인한 생태계 붕괴가 원인이지요.


일인당 국민소득으로 환경오염도를 나눠보면 70만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자체가 (지극히 계량화한 표현으로)지구를 망가트리는 주역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인의 일상적 생활 자체가 지구생명체의 존립자체를 못하게 막고 있는 야만적 삶이면서, 버젓히 ‘나는 견성했다’는 따위의 얘기를 하는 것이 가당찮을까요? ‘하지만 예상외로 이런 자들이 넘쳐납니다. 본인들이 주장하는 ‘견성의 특질’대로 ‘견성하는 것과 세상살이와는 별개’이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비록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야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은 견성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현실을 벗어난 믿음과 지혜라는 것은 철저한 위선과 허구적 관념에 기반된 것이지요. 감상적, 감성적, 관념적 믿음에 불과한 것이지 온전한 ‘진리’와 ‘대아’의 실현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거 노장자-석가시절의 끝없이 순환하던 시대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작금의 환경위기로 인한 생태계와 인류의 절멸이 다다르고 있는 순간에는 ‘도’를 한다는 이들은 최소한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철저한 생태적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계문제가 복잡하면 극히 단순화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딱 두사람이 있는데, 당신만 먹을 것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반대편 사람은 굶어죽기 직전입니다. 밥을 나눌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입에만 밥알을 쑤셔 넣으면서 ‘견성’ ‘진리’ ‘도’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우습습니까? 하지만 그 우스운 짓꺼리를 지금 많은 이들이 버젓히 하고 있지요. 웃지도 않고 심각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시야가 좁은 것이지요.

바흐의 잔잔한 음악과 램브란트의 아름다운 그림에 눈과 귀를 맞추고 평온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누구라도 거창한 삶의 원리와 생의 비밀을 주절댈 수 있지요. 하지만 진리는 혀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있습니다.


진실은 현실과 이격된 초월적인 것, 우리의 일상을 벗어난 것으로부터 숙고되는 특별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를 범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잘 못된 길에 한발을 내디디는 것이다.



하여간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많이 해와서인지,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보면 상대방의 정신적-영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특이체험’을 무기로 애꿋은 사람들을 얼마나 갖고 놀고 있는지, 갖은 수사학적 표현으로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등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까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저는 ‘직관적’으로 그 사람의 수준과 상태를 알기는 하지만, 제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직관의 표현 그대로를 상대방에게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당신 내가 척 보니까 영적으로 수준이 낮은데?’ 혹은 ‘당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양반이구만’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객관적으로 그 사람의 상태를 ‘논’할 수 있는 ‘논리적 표현’(달라이라마가 말한 이성적 검증)방법을 씁니다.

‘제가 보기에 이저저러 한데, 이것저것이 아닌지요’라는 식으로 말이죠. 항상 교통의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때 정신적-영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습니다.

‘(둥글이)당신은 뭘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바만 (직관적 수준에서)으로 계속 되풀이 하곤 하는 하죠.


여하튼 어떤 문제에 대한 객관적 논증의 필요 자체를 거부하고 계속적인 자기실현적 예언만을 거듭하는 모습을 대할 때 저는 어김없이 거기에 ‘교주’들이 서 있음을 확인합니다.



저 역시 그 누구보다 신비체험을 많이 했기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속아 넘기는 사탕발림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흔히들 ‘도’ 운운하는 이들이 좋아하듯이, 논리를 제외한 ‘직관’만 남발한 표현을 수사학적으로 구사할 수 있지요. 그리했다만 아마 진즉에 교주로 군림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라는 미명하에 스스로 얽어 가둬 매는 의식, 교조적 가르침, 현실과 괴리된 관념적 진리가 아니기에 그 ‘교묘한 작용’(함정)을 피해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찾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견성' '깨달음' '도'에 대한 맹목성을 가지신 분들은 우선 본인 스스로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장자-불교를 접해온 이유로 넓은 지반에서 문제를 살필수 없는 분들이 태반이기에 저의 이러한 얘기들이 반 노장적 반 불교적인 얘기, 트집잡는 얘기, (하찮은) 논리적 논쟁 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제가 까칠히 보이더라도 제 까칠함이 여러분에게 주는 진통의 근원을 분간하시라는 의미에서 서 올립니다.






댓글목록

그림자님의 댓글

그림자 아이피 (115.♡.93.12) 작성일

안녕하세요? 둥글이님!
처음으로 님의 글에 댓글을 달아봅니다.
님의 글이 너무 길어서 제대로 읽지를 못하여서 혹 제가 넘겨집고 댓글을 달게될까봐 좀 걱정이 되는군요.
우선 님의 글을 읽고 느낀점은 겉으로 표현하신 내용이야 어찌되었던 님또한 구도에의 갈망이 대단하다는 거였습니다.
저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경험들을 하신 것 같고 생각도 더 깊으시리라 여겨지네요.

제 짧은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님의 애정어린 걱정...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어쩌면 님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되네요.

저는 여기 사이트에 들어온지 얼마안되었고 특히나 대원님 글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읽어보았습니다.
글쎄요...
저는 대원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바가 없지만........
님의 걱정(맹신)은 좀 지나친 걱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동안 몇년정도 **선원 설법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이
오히려 선원장님께서는 님이 걱정하시는 그 부분에 대해서 무척 강조를 많이 하셨거든요.
뭔가 특별하고 대단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것...그것은 진짜 도가 아니다.
그런데에 관심갖지 말아라. 혹 그런 것을 부추기거나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말씀을 저는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전 지금의 공부의 방법에 대해서 거의 의심해본적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맹신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글쎄요...내면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그래...이길이 맞아...하는 마음이 들고 그냥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여지던데요...
단지 저는 아직도 님과 같은 구도에의 열정이 부족하고 여전히 세속적 관심이 많아서 그런것들이 장애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님의 글에 대해서 주제넘게 먼저 댓글을 단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드네요.
첨엔 님께서 무조건 논쟁을 하시려고만 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오늘 글 읽어보니까 많이 와닿더라구요...

앞으로도 님의 글 자주 볼 수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안녕히계십시요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59) 작성일

사회적인 적절한 행동은 겉모습에 해당되고
견성은 본질에 해당됩니다.

견성은 불생불멸을 체득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오쇼 라즈니쉬가 한말중에 자신과 아쉬람에서 채식을 하는 이유는
깨달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美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이와 비슷한 이치입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필요한 논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눈에 보이는 교주'들은 위험한 대상이 아닙니다.
그 내부에서이든 그 외부에서이든 언젠가 공격을 당하고 멸해지기 때문이죠.
물론 그 생명력이 계속 이후로 전해지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교주들은 그리 큰 위험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안보이는 교주'들입니다. 스스로 교주인줄 모르는 교주들이고, 이를 추종하는 이들도 그가 교주인줄 모르는 교주입니다. 그리고 그 '교주'는 우리 내면에 다소간 살아 숨쉬고 있죠.
이는 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현실'과 '진리'를 이격시키면서 끝없이 그 믿음을 공고히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주들이 '돈' '명예' '여자' 등을 쫒는데 반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교주들은 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주 선량하고 호인답고 사려깊기까지 하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실과 진리를 이격시킴으로 인해서 수도 없는 불이익과 불화를 자초하곤 하죠.

우리의 일상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냄으로, 생명과 자유가 가득한 신비함 그 자체인 것을 알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현실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오직 관념적 '도'를 추구하게끔 독려함으로 결과적으로
현실속에서의 우리의 책임과 실천을 등한시하게해서 더더욱 현실에 불만을 갖게하여, 상대적으로 더더욱 관념적 도를 쫓게 만들어 내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문제는 그러한 이해의 길을 가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이해가 위치해 있는 지반을 모르는 관계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까지 함정에 빠트린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게 어떤 내용인지는 위에 대략 다뤘지만, 좀더 집중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일 듯 합니다.)

뭐 그렇다는 겁니다. ㅋㅋ 아님 말구요. ㅠㅜ


그리고 이게 근본적으로 그림자님이 말씀하신 '구도에의 갈망'인 줄 모르겠지만,
저는 '생'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고 존재와 존재가 자유롭게 교통하는 생 말입니다.
이를 생각하다보니 그렇지 않은 '걸림돌'들이 너무 많이 보이더군요.
특히나 '자유' '도' '구원' '깨달음'을 찾는답시고 만들어지는 조직들에 말이죠.


하여간 저의 장황한 글을 읽어 낼수 있는 그림자님의 지구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도 다른 사람의 긴 글은 (꾸역꾸역ㅋㅋ)프린트해서 줄치며 읽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 자체도 하나의 구도의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그렇습니다. 제대로 견성하지 못했으니 겉모습도 그수준인 것이죠.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인류와 자연에 폭력적인줄도 몰라 삶의 변화를 기할줄도 모르고
'견성'만 외치는 이들의 비애라고 할까요?

오쇼 라즈니쉬가 '미'를 위해서 채식을 했다는 말은 피부가 좋아지기 위해서의 의미가 아니라,
무지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그 '미'의 의미인 것이지요.
다시 찾아서 그 대목 잘 읽어 보십시요.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59) 작성일

오해하고 계시군요.
저는 무지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그 '미'의 의미인 것이지요.  라는 뜻으로 한말입니다.
오쇼 라즈니쉬가 채식을 한 이유는 견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지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아... 죄송합니다.(속단을 인정합니다.)
공유님의 말의 뜻을 잘 못 이해했습니다.

언듯 보면 공유님의 말씀이 저의 생각과 다른 듯 하면서도 같군요. ^^

그러면 논의를 좀 돌려서 깨달음과 삶은 정말 그리 나눠져야할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봤으면 합니다.

대략 보면 1. '깨달음과 삶'을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는 분들이 있고,
2. 깨달음과 삶을 약간 다른 것으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3. 나눠질 것이 아닌듯 한데,
여러 인식과 작용들을 통해서 볼 때 제 개인적으로는 '1'부류의 것은 온갓 모순이 있는 듯 해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공유님은 '2' 부류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화두를 새글쓰기로 한번 던져주심이 어떠신지요.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59) 작성일

그리고 폭력적인줄 몰라 삶의 변화를 기할줄 모르고 '견성'만 외치는 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견성은 모르더라도 남을 위해서 헌신한 이나
둘다 '생명'이 붙어있고 호흡을 하는 것은 같습니다.
생명이 있고 호흡을 하는 것은 그런 겉모습과는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에 공평하게 있는 생명과도 같은 것을 탐구하는 것이 견성공부입니다.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59) 작성일

님의 질문은 과학을(ex:양자역학) 공부하는 것과 현실적인 삶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를 논하는 것과 같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그것은 '깨달음'을 뭘로 정의하냐에 따라 달라지지요. 그래서 먼저 화두를 던져보라 하지 않았습니까. ^^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제가 가진 개념과 혼동을 일으켜 제가 속단의 여지가 있습니다.
위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고 상세하게, 예도 좀 많이 들어서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피리소리님의 댓글

피리소리 아이피 (210.♡.203.130) 작성일

견성할려면 아무래도 10년은 걸려야될것 같은데요.

부처님도 6년을했는데 ....  맞는지모르지만  이정도의 넉넉한시간은가져야될것같네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ㅎㅎ 부처님보다 겨우 4년 더 걸릴 정도면 부처님과 다이다이먹어도 되겠군요.
근데 저는 별로 (흔한말로의)견성하고 싶은 마음 없는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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