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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의 진실 / 고증된 사실을 밝히다

작성일 09-03-0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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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21.♡.243.79) 조회 7,656회 댓글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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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많이 했씀다. ㅠㅜ
빨간 줄만 읽어도 됨다.

1. 도덕경의 진실

시대를 초월한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인지하는 인간의 정신 자체가 불완전하기에 그러한 진리가 있는지의 여부와 별도로 그러한 ‘진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진실 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만물은 무상하다’는 의미 조차도 그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의해서 윤색되거나 탈색되어지곤 한다. 여기에 바로 ‘노자’를 잘 들여다봐야할 필요가 생겨난다.


맹목적으로 노자적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하나의 종교를 숭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우리는 애초에 ‘온전한 노자’라는 것을 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완전한 진리를 접할 수 없음에 대한 ‘인식의 상대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노자’라는 문헌 자체가 심히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문헌적 노자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한학의 전문가여야 한다.

노자 시대 당시에는 한자가 몇 천자 안되었기에 비슷한 의미를 같은 자에 몰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지금 흔히 사용하고 있는 한자의 의미와 그 당시 사용되었던 의미와 다른 것이 많다. 따라서 그 당시의 역사, 제도, 관습, 문자의 용례 등을 정확히 파악해서 판단할 수 있는 고증학적 역량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노자 이해는 가능치도 않고 설령 그리했다고 한들 이는 현대화된 해석일 뿐이다.


둘째, 설령 노자를 ‘잘~’ 해석해서 이해를 했다고한다 하더라도 ‘어떤 노자’를 해석했냐는 문제가 생긴다.

21세기 현재 학계가 발견한 노자는 ‘왕필본노자’ ‘죽간본노자’ ‘백서본노자’ 세 부류가 있다.

우리가 가장 흔히 접하는 81장으로 된 노자는 ‘왕필본노자’본에 대한 해설서인데, 이는 정치적 기류가 작용해 원본을 왜곡한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도덕경은 후한 말 일어난 농민봉기인 황건의 난(2세기) 반란 중심세력이었던 도교세력의 혁명 지침서로 쓰여졌다고 한다. 국가 권력에 반대하는 내용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유가적 권위나 가치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인식의 대 혁명을 이뤄낼 수 있게끔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적 사회질서가 만들어낸 끝없는 착취에 시달리며 노예생활의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여 순응해가던 민중들에게 인식의 근본을 바꿔내는 혁명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군자는 군자가 아니다’는 덤덤한 서술이 ‘정권을 타도하라’는 결사적 구호보다도 민중을 들끓게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 당시 ‘조조’는 황건족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천하를 거머쥐게 되었는데, 도교세력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높은 관직을 주며 그들의 ‘저항성’을 탈색시켜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천재 ‘유학자’ 왕필은 이의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도덕경에 주석을 달고 재해석을 하면서 그 의미를 ‘친유가적’인 색채로 만들어 내고 한편으로는 ‘은둔’ ‘초월’의 경향을 부추김으로 민중적-현실적 의미를 탈색 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편에서는 ‘군자의 올바른 도(내려놓고 비우라는)’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위자연’의 의미를 현실도피적으로 해석함으로 민중들이 현실에 맞부딪힐 기회 자체를 빼앗아갔던 것이다.

황재의 총애를 받으며 한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대 학자로서 유가적 기강을 헤이하게 만들어내고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어내는 노자적 풍기문란을 희석시킨 왕필의 천재적 필치.


노자 53절의 내용이 어떻게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지 한번 확인해보라.

왕필 : 궁실은 심히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

기세춘 : 조정은 민중을 심히 닦달하니 농촌은 황폐화되고 창고는 비어있다.

김경탁 : 궁실은 심히 청결하지만,....

장기근 : 조정은 통치가 심히 부패했으므로...

노태준 : 그리하여 조정은 더러워지고...

오강남 : 조정은 화려하다...

[ 기세춘의 노자강의 발췌 ]


이러한 곡학아세에 대해 후대의 학자들은 불만이 많았다.

청대의 유명한 고증학자 고염무는 공자와 노자를 왜곡한 하안과 왕필의 죄악이 폭군 걸주보다 심하다고 비난했을 정도이고, 이러한 비판에 조선의 허균 등의 학자도 동참한다.


왕필의 뜻에 따라? 도덕경에서 ‘허무’와 ‘은둔’ ‘현실도피’만을 찾는 당대 민중들의 모습을 가련히 여긴 주희(12세기)는 ‘도가들은 자기네 학설은 이해하지 못하고 불가의 껍질을 주워모았다’고 푸념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천재 왕필의 작업은 그 후로도 민중들에게 더더욱 교묘한 이해의 뿌리를 뻗어 내리고 있다.


2. 고증

1993년 호북성 형문의 곽점이라는 곳의 한 분묘에서 발견된,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도덕경 죽간본은 BC300년 이전의 것으로서 현재 통용되는 도덕경 81장의 3분의 1 분량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흔히 우리가 접하는 일반적 도덕경의 1장, 5장, 6장, 8장, 42징, 80장 등의 핵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강령적인 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973년 호남성 마왕태 분묘(BC168년)에서 발견된 백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도덕경은 81장의 모습을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 BC300년 이후 그 어떤 정치적-문화적 필요에 의해서 도덕경의 내용이 첨부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왕필(3세기)은 마왕태 분묘의 백서본에서 한번 첨삭 된 도덕경을 다시한번 뒤틀기에 이른다.

일예로 작금의 도덕경의 모든 장을 포괄하는 핵심 장인 1장은 호북성 분묘(가장 오래된 원본)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은 것이 그 후(200년 후에) 호남성 분묘에 첨부된 것이 발견된 인데, 왕필은 원래 1장에 놓여있던 것을 45장으로 옮기고, 45장을 핵심 강령장으로 1장으로 옮겨서 재배치하고 재해석 했던 것이라는 것이다.


전면 제 1장에 ‘회의론적인 우주론’이 펼쳐지자, 사람들은 더도 덜도 볼 것 없이 이를 신비론적이고 초월론적인 그 어떤 진리가 숨겨있는 성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노장자는 기존의 권위와 가치체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에 반대했음으로 정언으로 말할 수 없어 우언으로 말했다는 것이 후인의 증언이다. 이를 반어와 역설과 우화로 된 점을 이용하여 현실을 외면하는 냉소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 묵점 기세춘


‘노자’ 자체는 가상의 인물이고, 단지 그 당시 여러 학설들을 조합해서 당대의 주도적인 유가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우주관의 종합이 이뤄졌다는 것이 상당수 학자들의 고증 결과이다. 그 당시 ‘순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물은 도의 한 조각이고 사물은 만물의 한 조각인데

어리석은 자는 한 사물의 한 조각만 보고 이것을 도라하니 무지한것이다.

신자는(현재의 세만 중시했으므로)뒤만 보고 앞을 보지 못한다.

노자는(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말함으로써)굽히는 것만 알고 펴는 것을 몰랐다.

묵자는(평등을 주장함으로써) 가지런한 것만 보고 차별을 보지 못한다.]


이렇듯 순자도 노자의 도를 말할정도라면 노자의 도덕경은 그 당시 많은 현인들이 늘어놓았던 직관과 통찰의 ‘유용한 부분’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왕필 같은 학자에 힘입어) 첨삭되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그 자체를 노자라고 하는 현인이 쓴 하나의 완벽한 진리서라고 여기는 것은 다만 자신이 믿고 있는 ‘노장’이라는 종교를 떠받들기 위해서 도덕경을 성경화 하는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실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노장사상은 시대에 맞게 윤색 각색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노장자는 율곡 이이와 박세당 등에 의해서 유학에 맞도록 맞춰졌으며,
연암 박지원은 풍류를 끄집어내는 매개로 사용했다.


현대에 이르러서 노장자의 ‘초월론’ ‘관념론’ ‘주관주의’가 더더욱 부각된 것은 인간을 원자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주의(이기주의)가 보편화되는 과정에, 이뤄질 수 없는 욕망에 시달린 개인의 현실 도피성향이 회의주의-허무주의와 중첩되는 과정에 빚어진 듯하다.


3. 삶으로의 확대

권력자의 교묘한 술책에 의해서 그 내용이 왜곡되고 그 안에 현실과 괴리된 초월적 세계가 생성되고 그에 광신도들이 늘어서게 되는 것이 어디 노자의 도덕경 뿐만인가?

기독교의 성경 역시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로마의 정치세력들이 민중의 혁명성을 누그러트리고 우민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고안해낸 심리적-관념적-문화적 기제라는 사실은 진즉에 밝혀진 사실이다.

불교는 또한 어떠한가? 불교도들 나름의 지배적 헤게모니를 성취하기 위해, 인간을 현실로부터 동떨어지게 만들어내기 위한 끝없는 노력의 성과물 아닌가?


물론 이들 나름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순수 지향성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보석 같은 진실성에 그렇지 않은 것들이 수도 없는 겹 포장이 되고, 이권세력들과 교묘히 부합되어 그것이 왜곡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를 찾기 위한 노력’만이 장땡이 아닌 것임은 바로 이를 통해서 드러난다. 내가 발디디고 있는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없는 상태에서의 ‘나를 찾기 위한 노력’은 다만 그 시대와 역사의 불순물들을 약간 걸러낸 그것일 뿐, 여전히 그 한 길 밑에는 침전물이 가라 앉혀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들여다보는 노력과 나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함께 병행되어야 함은 이 때문이다.


“세계를 들여다봄이 없이 나만 들여다보면 세계가 보인다”는 식의 초월론적-유아론적-관념론적 ‘헛발질’은, 그것이 헛발질임을 모르고 자신의 성취를 자신있게 공표했던 ‘성인’이라고 불리웠던 이들의 전처를 따르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나의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살아낼 용기가 없으니 그러한 ‘초월성’ ‘관념성’ ‘은둔성’에 매몰되는 것이고, 그 대부분의 종교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뭣도 모르게 적응되어 온,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워지는 ‘일상성’의 허구를 면밀히 알아, 내가 서 있는 이 시공간이 바로 절대영원의 진리임을 체득해, 주워진 이 순간에 온전히 직면할 용기를 얻게 된다면, ‘진리’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잘 살아내는 삶’이 자연스레 그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아님 말고.



- * 자료 참고 주로 [기세춘 -노자강의]

댓글목록

둥글이님의 댓글

profile_image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제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어떤 문제를 설명하려고 한다고 불편해 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리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말들 속에서는 진리가 없다고들 조언 합니다.
 
저는 그런 말들 속에 함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특이체험'이라는 글 속에도 썼지만,
저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를 기억하는 등으로 온갖 특수한 정신적 체험을 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수한 직관과 통찰의 경험을 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곳 누구보다도 그런 직관과 통찰만을 떠벌리는 투로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직관과 통찰을 이용한 대화는 자신과 '통하는 사람'과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끼리끼리'노는 풍조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공유하는 직관과 통찰만이 진리인 것 처럼 서로 끝없이 독려하면서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 가곤 하죠.
 
기독교 싸이트 들어가서 한번 자기가 아는 진리에 관한 것을 얘기해보십시요.
아마 이곳에 있는 분들 대부분이 아무런 소통도 되지 않고 싸움만 하다 나올 것입니다.
'넌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그쪽 사람들이나 이쪽 사람들이나 삿대질만 하다 나오겠죠.
그것을 알고 있다보니, 아예 그곳에서 기웃거리지도 않고, 오직 자기의 직관과 통찰을
수용하는 사람들 속에만 파 묻혀 있는 것이죠.
 
이러한 수준을 '통찰'이나 '깨달음' '견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 우습지만, 
본인들은 참 심각한 듯 하니 웃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게 실지로 함정이던 아니던) 자신이 빠져있는 함정을 살필 수 있는
정신적인 기반이 없으니 맹목적으로 그에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각자의 직관과 통찰은 각자의 몫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그 직관과 통찰을 맘껏 즐기십시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너는 왜? 내가 느끼는 직관과 통찰을 느끼지 못하냐?
네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는 따위는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얘기해 보십시요.
그게 바로 눈을 넓게 트이는 노력 아닐까요?
 
자기 직관과 통찰의 경험만을 되뇌이는 것은 하나의 독단일 뿐입니다.
진정 대화나 토론을 원한다면 어떤 문제를 이해시키기를 원하신다면
자신이 얻은 직관과 통찰을 공론의 장에서 객관적으로(논리적-이성적)으로 서술하는 훈련도 좀 하십시요.
 
논리적 이성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하려면 자기 직관과 통찰에만 의존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얘기지요. ^^

수수님의 댓글

profile_image 수수 아이피 (173.♡.103.156)
작성일

둥글이님의 뇌세포는 반짝 반짝 행복 하시겠어요^^

둥글이님의 온전한 노자는 잘 만나셨는지요~
사람 마다 만나고 싶은 노자가 있겠지요
전 사실 경전에 무식 하지만 사는데 하나만 절대적인 진리라고 규정해야 할 필요는 못느끼고 삶니다
둥글이님의 논리와 이성적인면도 저와 달라 좋네요



제 스스로가 믿는 나름의 주장에 제 자신이 매몰되지 않기 위한 처방인 것이죠
그속에 둥글님의 깊은 뜻이 있겠지만....
처방전까지 준비하고 사시는 둥글이님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네요
물론 둥글이님도 제가 하나도 부럽지 않으실 테지만 ^^

둥글이님이 궁극적으로 정말 원하는것이 무엇인지요
그냥 궁금해서요

둥글이님의 댓글

profile_image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아무런 점검 장치도 준비해 놓지 않고 일단 '진리'로 믿은 후에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의 정신세계가 궁금할 뿐입니다.
기독교인이든, 불교도들이든, 돈을 추종하는 이이든, 일상에 찌든이이든...

수수님의 댓글

profile_image 수수 아이피 (173.♡.103.156)
작성일

둥글이님 화이팅!
그 완전하고 단단하여 어느것 하나에도,  자신도 믿어 주지 않으시는 견고한 둥글이님
끝까지 그중심 삼고 점검 하시고 분석하시며  열씸히 사세요
그것이 아마 님을 자유롭게 하며 사는 방법인지 모르겠네요
아무것에도 빠지지 못하시는 자유!

둥글이님의 고단한 여행 앞에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응원과 격려를 보냄니다
 
님의 고양되고 깨어있는 의식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우린 모두들 나름대로 님처럼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둥글이님의 댓글

profile_image 둥글이 아이피 (121.♡.243.79)
작성일

인간이 유목생활을 끝내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 세상에는 문제가 발생되기 시작했죠. 누리기는 하되 얽매이지 않는 유목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한 자유는 우리의 것이 되지 않을까요...

수수님의 댓글

profile_image 수수 아이피 (173.♡.103.156)
작성일

하하하.. 둥글이님
누리기는 하되 얽매이지 않는 유목적인 사고....재미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둥글이님 하시는 일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은 해보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며 살기가 쉬운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하시는데 지금 님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같이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 합니다
결국 일을 성사 하는것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혹시 님이 가장 싫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시지는 않으시는지요
님과 같이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는 불편함 (죄의식)을 본인도 모르게 은연이 주시는건 아니신지....
분명히 님은 그런 뜻이 아닌데 사람들은 느끼기에 원시 제국 사회주의를 꿈꾸시나 하기도 하며...

둥글이님 저는 많은 사람들이 님을 응원하고 협조하고 사랑받기를 기도 합니다
님안에는 분명이 따뜻하고 사람과 자연을 이롭게 하고자하는 사랑이 있음을 저는 알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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