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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찾기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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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58.♡.138.174) 댓글 0건 조회 5,222회 작성일 09-03-29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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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이 본인은 ‘진리’를 설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말해지는 것들이 우리의 각인된 감각과 언어습관 속에서 얼마나 허구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밝혀,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관념화된 의식의 엉덩이를 걷어 차고자할 뿐이다.



진리 찾기의 허와 실


1. 고전을 통해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허구

노장사상과 불교,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떠받든다면 이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를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대한 참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종교의 진수를 차용하는 이들이 마치 본인들이 ‘절대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식으로 공공연히 떠벌리며, 자신들과 같은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을 한 끝발 내리 까는 것은 다른 방식의 이해를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한 무시이면서 독단이고 동시에 심각한 폐악이다.

따라서 노장사상과 불교, 기독교를 좀 더 나은 진리에 다다르는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더할 수 없는 완벽한 진리의 정수로서 철저히 믿고 전파하려는 이들의 독단의 허구적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노장사상과 불교가 가진 ‘종교성’ ‘정치성’을 다 걷어낸 후에 그 속에서 ‘마음을 밝히는 기술’만을 습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많은 이들은 노장서와 불교,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문헌적으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변해 현재에 다다랐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터에 현대적 언어습관에 따라 고전을 해석하면서 그 결과로 자신은 ‘진리에 다다랐다’고 자부하지만 이 생각 자체가 허구이다.


2. 권력자들의 고전에 물타기

일 예로 (얼마 전에 거론했지만) 현대에 우리가 접하는 노장사상은 한나라 조조의 학문적 조력자 ‘왕필’이 도덕경으로 무장한 ‘혁명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이를 왜곡하고 물타기한 결과로 새롭게 해석-편집되었다. 그 앞뒤 장의 내용을 바꿔 강령의 성격을 가진 거창한 불가지론적 인식론과 회의론을 끄집어내는 1장이 가장 선두에 서게 되었는데, 이렇게 현실성에 ‘물타기’할 수 있는 ‘우주론-회의론’의 전면 배치는 도덕경 전체의 내용의 해석을 심하게 ‘관념적’으로 뒤틀어 놓았다. 더군다나 가장 오래된 도덕경의 초본에는 현재의 1장 내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상당히 혁명적인 종교였던 예수교가 예수 사후 로마권력자들의 손아귀에 포섭되면서, 현실적 실천성 사회개혁성을 잃고, ‘천국 놀음’으로 변질된 이유와 같이 권력자들과 이론가들이 교묘하게 ‘관념적 물타기’를 한 결과과 비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지배자들의 계략을 불교라고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 예로 불교는 영혼이 계속 유지되는 ‘업’의 개념 등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민중들이 현실 세계의 불만족스러움에 대해서 뭔가 그 불만을 누그러트릴 장치가 필요했기에, 인도의 지배자들은 업이란 개념을 만들어 냈고, 이를 통해서 민중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 표출과 개혁을 위한 실천보다는 ‘내세’의 좀 더 낳은 삶을 위해서 끊임없이 불공을 올리며 ‘얌전한 민중’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다듬어졌던 것이다.

기독교든, 노장자사상이든 불교든 그들 지배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떻게든 그 ‘불손한’ 가치체계가 발산할 수 있는 민중들의 움직임을 무력화 시킬 필요가 있었던 바, 권력은 그들이 부리던 학자와 사상가 종교가를 시켜 그렇게 치밀하고 교묘한 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앞선 질문을 다시 짚어보자. 그 사상체계에 정치적 필요에 의해 신비주의적-관념론적인 물타기를 당한 사상을 우리가 접하고서, 그 요소를 걸러 낸 후에 온전한 사상의 액기스만을 취해 애초 선인들이 얻고자 했던 ‘올바른 진리’에 다다를 수 있을까?

물론 인류의 지혜서들이 주는 그 통찰적 믿음들이 큰 자각을 얻게 해주기는 하고 마음을 닦는 한편의 지침을 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정치적으로 오염된 경전을 그대로 수렴하며 얻은 자각이 ‘절대진리’라고 믿는 것 부터가 큰 함정이다.


3. 언어습관의 문제

더군다나 과거 경전을 이용하여 그 속에서 진리의 정수를 뽑아내려할 때 이에는 중요한 오류가 하나 더 생겨난다. 현대에 우리가 쓰는 언어 습관이라는 것은 불과 1세기 전과 비교해서도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서, 여러분이 산 속에서 혼자 살지 않았다면, 일상적으로 서양적인 언어체계와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령 ‘선악’의 구분 ‘천지’의 구분 자체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분화’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불과 수 백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 양자를 서로 극단적인 양편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령 선의 반대를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하늘의 반대를 땅이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이는 서양식 언어체계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흔히 ‘정신’을 ‘영적인 수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과거 한민족의 의미체계로 정신은 물질적인 역동성의 혼합의 결과일 뿐이지 결코 고차원적인 영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성’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단순히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현실)를 뜻하는 심’과 ‘이(이론)를 뜻하는 성’의 복합체를 뜻하는 것이다. ‘귀신’ ‘혼백’이라는 것도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에 속하는 각각의 ‘귀’ ‘혼’(하늘의 기운)과 ‘신’ ‘백’(땅의 기운)이 하나로 뭉쳐진 개념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선조들은 통합된 태극의 사고를 했던 것이며, 정신적인 것을 결코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에서 나누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人)’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은 흔히 사람을 ‘자연’과 구분되는 그 무엇으로 여기지만, 과거에는 ‘땅’과 ‘하늘’의 중간자로 여겼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선조들은 ‘기’(물질)와 ‘리’(정신)을 연속성의 차원에서 인식하였다.

문제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지속되면서, 그리고 개발독재세력이 끝없는 ‘서구화’를 외치며 인민들을 사회화시키는 과정에, 모든 가치체계와 언어체계가 서양식으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디지털리즘화 되고 이분법화되고 처절히 분해되고 원자로 환원되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모든 고전(불교경전, 노장 경전 등)은 과거 읽혀졌을 때와 그 의미가 상당히 달랐다.


4. 과연 경전은 우리에게 온전히 읽혀질 수 있는가?

자... 다시 ‘진리의 추구’의 문제로 되돌아와서 생각해보자. 많은 독단에 빠진 이들은 자신들이 몇 개의 경전을 통해 얻은 통찰이 진리에 근접해 있음을 자부하면서 그것을 주변사람들에게 함부로 떠들어 대곤 한다.

문제는 그들이 진리에 근접한 방식은 최소한 앞서 살펴본 대로 두 번은 굴절되어 있다. 한번은 권력자들에 의해서 민중의 현실성-실천성을 거세한 추상과 관념과 회의의 철학으로 탈바꿈된 것이고, 두 번째는 서구식 언어-관념체계(디지탈리즘, 이원론, 환원론)에 의해서 이의 해석 과정에서 현대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언젠가는 이 함정을 살피고 그 질곡의 역사를 거슬러 현자들이 원래 말하고자 하는 온전한 바를 이해할 수 있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단적이기까지 하다 보니 이를 빠져나올 기회도 얻지 못하고 자신이 얻은 작은 이해의 우물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독단의 대가들의 아집은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는 확신과 ‘이를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는 말에 의해서 더더욱 공고히된다.

이렇다 보니 누군가 옆에서 ‘그게 과연 진리일까?’라고 추근덕 거릴 때,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진리라고 끊임없이 되뇌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진리가 쉽게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그것이 아니기는 할 것이고, 많은 선각자들이 이야기 해왔듯 말은 단지 진리를 찾아나서는 ‘방편’일 따름이기는 할 터이다. 하지만, 방편으로서 말을 사용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도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면서 이에 의혹을 제기해 오는 이들에게 ‘진리는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따위의 변명만 해대는 수준의 정신은 참혹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진리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진리 아닌 것을 말로서(이성적으로) 꼬집을 수는 있을 터인 즉, 이를 문제 삼은 상대에게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닌 것’을 풀어 설명해 주면 될 터인데, 그 독단에 빠진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닌 단지 ‘진리라고 믿는 것’이기에, 말을 방편을 사용해서 설명하지 못하고 ‘네가 이성을 거두고 똑바로 믿어봐야 한다’는 따위의 종교화된 믿음(믿어야 믿음이 되는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의 정신적 허술함은 그런 식의 ‘동어반복적’ ‘자기예언적’ 주장을 상대방이 똑같이 함으로 서로의 대화가 끝없는 혼돈으로 귀결될 수 있음의 사실 조차도 간파하지 못한다.


5. 관념과 독단의 악순환

이는 철저한 ‘유아론’(극단적 주관론/관념론/회의론)에 빠진 사고의 결과이다. 그렇다 보니, 객관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 자체도 염두에 두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만 안주해 있는 것이다.

이런 이들일수록 ‘세상’의 문제와 ‘나’의 문제를 철저히 나눠서(이분화) ‘나’의 문제에만 몰입하고 사회적 실천의 필요성을 미루거나 소극적으로만 찬성할 뿐, 그 본인의 삶이 사회적 삶으로 어우러트리지 못하는 것은, 앞서 말했던 대로 과거의 권력자들이 경전에 물타기(관념화)한 결과와 이원화된 서양식 사고에 포섭된 복합적 결과이다. ‘말로, 생각으로 진리를 알 수 없다’며 객관적으로 이를 살필 수 있는 좌표를 내 버리고, 유아론에 빠져서 자기 믿음에만 안주하는 한 결코 이 함정을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이에 대해 혹자는 과거에도 그러한 ‘깨달음만을 쫓는 자들은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 ‘견성’ ‘해탈’ ‘주님’만을 쫓는 노력의 정당성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근거는 TV에서 본 드라마에서인가? 현대의 어떤 소설을 통해서인가? 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중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승병을 일으켜 전쟁에 참여했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애도 낳고 정치도 했던 ‘고승’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과거 사람들이 ‘이랬을 것’(도만 쫓고 현실에는 무관심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다만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체계가 그렇게 기대한 결과를 보는 것일 뿐이다. 또한 TV나 소설 속에 묘사된 현자들의 삶은, 당신의 기대를 현대 문화가 반영한 결과임도 말할 나위 없다. 심지어 과거 문헌이 번역된 것 마저도 현대의 언어 습관에 맞게 ‘각색’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현실을 벗어나는 그 어떤 초월적이고 관념론적인 ‘진리’도 쓰레기 조각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과 실천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을 뺏어간 순간부터 ‘진리’라는 이름이 쓰여져서는 안되는 다만 ‘현실괴리적 종교’ 또는 ‘이율배반적 형이상학’일 뿐이다.


6. 현실을 떠난 진리가 만연되는 이유

-문자에 대한 집착 :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현실을 등한시하라’고 했던 자는 없다. 그런 비슷한 얘기를 했던 현자들도 기실은 ‘현실을 등한시하라’고 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우라는 가르침을 말했을 뿐, 이것이 와전되어서 현실적 실천과 참여가 필요 없는 것처럼 왜곡된 것일 뿐이다.

‘성인을 높이지 말고 지혜를 없애라’는 말 역시, 권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폭력의 난무로 민초들의 삶이 황폐하던 그 당시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뿐이다. (‘너를 버려라’했던 예수의 말도를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라는 말이지, 아무 생각없이 싸늘한 재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자주의자들은 글이 쓰여지던 시대상황과 언어의 당시적 의미를 헤아리지 않은 체,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정신으로부터 현실을 거세시키는 일에 앞장서곤 한다.

-권력자들의 권장 : 또한 권력자들은 ‘무실천’ ‘회의론’을 떠벌리는 이들을 ‘현자’로 추앙하여 떠받들기도 했는데, 이는 공자 같이 출세를 위해서 끊임없이 떠돈 인물을 성인취급해주는 것과 같은 국가 통치전략의 일환이었다. 노장적인 자유스러움은 유교 정치체제에 의한 압박감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민중들에게 제공했던 것이다. 조였다 풀었다하며 민중을 조종하는 관념의 도구로서 권력자들은 이를 기술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지배자들의 전략은 상당히 적중해서 많은 민중들이 사회현실의 문제를 등한시 한 체 ‘자기’에만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 결과로 지배자들을 현실적으로 견제할 시민세력을 와해시켰고, 이로 인해 부패한 사회정치체제가 만연하여 결국은 나라가 망하여 ‘자기’ 찾기 위한 노력 자체가 불가능한 ‘흉흉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폐해가 발생하곤 했다.

이 말은 그러한 철학적 종교적 사유가 주는 ‘해방감’, ‘자유감’ 자체가 무용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현실’을 거세하고 ‘초월론’ ‘관념론’ ‘신비론’으로 나아가는 순간 민중은 자기존재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을 떠난 사상이 빚어내는 폐해 : 일 예로 조선조 철학은 정도전에 의해서 기틀이 잡혔다. 그는 고려왕조 부패의 한 원인이었던 관념적 불교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후 10만 양병성을 주장한 퇴계이황의 주기론적(현실적)인 철학과 실학적인 사고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고개를 잠시 들기도 했지만, 이상주의와 명분만을 추구하는 주리론(이론적)적인 관념론으로 치우치게 되었고, 결국 그러한 비현실적 사고는 나라가 침탈 망국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녀자는 끌려갔으며, 사내는 죽임을 당했고, 노인과 어린아이는 굶어죽었다.

이렇게 빼앗긴 나라의 민중 억압과 착취가 일상화된 지경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 찾기’의 노력을 할 수 없는 바, 이는 경전이 제공하는 ‘해방’과 ‘자유감’의 의미를 초월론적이고 관념론적으로만 해석하여 현실을 거세시킨 민족이 당연히 겪어야 했던 말로인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순수 자유와 해방’을 추구했던 이들의 집단도 그 순수 자유와 해방을 맛본 적은 없다. 그러한 이들은 어김없이 노예로 전락해서 ‘정신의 해방’은 커녕 발에 족쇄까지 채워졌다.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인간 존재성에 충실하지 못한 응당의 결과라 할 것이다.

물론 간혹 시대와 역사와 현실까지를 넘어선 초월적 ‘개인’이 ‘절대자유’를 얻었다고 추앙받는 경우가 있곤 한다. 하지만 ‘실로’ 그러한 것인지의 문제는 둘째 치고, 그것은 그야 말로 그 자신의 특별한 기질과 천운이 ‘그럴 수 밖에 없게’ 운행된 결과이기에 보통 사람들은 이를 우러러서 추종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더라도 ‘모든 민중이 절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현실괴리 된) 자유를 향한 노력이 온 인민의 절대자유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싶은 달콤한 관념적 유혹은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민중이 절대자유를 얻는 현실’은 말 그대로 초월적 관념 속에서나 가능한 그것이기에 너도나도 초월적 자유만을 향한 치달음으로 발생할 현실의 공백과 이를 악용하려는 이들로 인한 망국(망세)을 앞당길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마땅히 노력은 하되 직접적으로 발디디고 있는 현실-사회에 대해서도 늘 관심을 갖는 실천적 노력을 경주함으로 존재의 기반을 탄탄히 해야 할 필요를 인식해야 한다.


7. 현실을 떠난 진리가 만연되는 현대적 이유

특이한 점은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파편화’된 성향이 상대적으로 불교, 노장적, 기독교적 회의론과 관념론을 부추긴 듯하다. 즉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인간과 세계(자연)를 양분화 해 놓고, 자연(세계-사회)를 투쟁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서양의 개발론적 사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다보니 자연을 열심히 착취해서 많은 재산을 쌓고 큰 권력을 얻은 이들은 우쭐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풀이 죽어서 그 앞에 한없이 무력하다.

이렇게 자기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세계에 대한 무력감을 갖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회의주의’ ‘허무주의’ 혹은 ‘초월론’ ‘관념론’ ‘신비주의’의 대양에서 나름의 위안을 얻게 된다. 기독교, 불교, 노장적 세계 속의 ‘회의’와 ‘허무’와 ‘초월’과 ‘관념’의 경향이 유독 횡횡한 역사의 질곡을 거쳐왔던 한민족에게 잘 어필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적, 관념적 경향에 아무리 매력이 느껴지더라도 그 유혹에 굴복하여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난다면 그곳에는 진리가 존재하지는 않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다른 이와 둘이 아님을 올바로 깨달아 조화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나눔’과 ‘실천’ 자체가 자기를 비우는 과정이지, 자기를 비우고 나서 나누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고 적당하지도 않다.

내가 다른 이와 둘이 아님을 올바로 깨달아 조화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나눔’과 ‘실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살피는 능력이 ‘견성’이지, 견성이 현실과 괴리된 특별한 인간의 정신적 상태를 일컬음도 아니다.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그 무엇을 견성으로 찾고자 하여 100일 정도 단식을 하면 머리가 핑~ 돌면서 뭔가 특별한 정신 상태가 발현되는 것이 견성이 아니다.

내가 다른 이와 둘이 아님을 올바로 깨달아 조화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나눔’과 ‘실천’의 길을 제대로 아는 것이 ‘도’이고 ‘하느님’이지 그것을 한 발이라도 벗어난 곳에는 똥구더기만 쌓여 있을 뿐이다.

일반인들이 흔히 고대하는 ‘견성’ ‘득도’는, 누군지도 모르는 제 3자가 로또 1등에 당첨되었으니 나도 따라하겠다는 대박의 꿈에 헛발질 하는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불생불멸의 절대의 도를 터득한 자가 과연 누구인가? 그 말을 누가 전했는가? 그 말을 전해 받은 ‘나’의 눈과 귀는 과연 온전했었던가?


8. 소승(나의 천국)과 대승(우리의 천구)

자기 자신이 발디디고 있는 세상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궁극적 영향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나 자신으로 인식으로부터 세계가 구성됨의 이해를 그 견성의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 소승적 깨달음이고,

나 자신의 존재 구성이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과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하나이자 전부로서 작용하는, 주체이자 객체임을 면밀히 알아 나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결코 실질적 현실로부터 괴리시키지 않고 내 자신의 행위가 보편타당한 인간의 행위의 원리로 확대될 수 있는 견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대승적인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한 문명의 끝이 다른 문명을 태동시키며 끝없이 역사가 돌고 돌던 시절. 소승적 깨달음과 대승적 깨달음은 다만 ‘취향’의 차이로 인정할만큼 구분의 의미조차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해서 더 이상 생태계와 인간 문명의 지속이 어려운 현 시점에서는 자기존재의 사회적 작용성을 무시하는 소승적 깨달음은 사치이자 개인주의의 발로로 여겨질만 하다.

이에 많은 소승적 관념론-초월론자들은 ‘그것도 결국은 우리의 운명 아닌가?’하며 자신들의 현실적 무참여의지를 합리화 하고 품 넓게? 사태를 관조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 제 입에서 곡기를 끊지 않는 한 이는 철저한 독선과 위선과 자기 배반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의 한정된 공급과 인간의 무한 수요의 균형이 진즉에 무너져서, 지금 우리의 입에 먹을 꺼리가 들어가는 만큼, 제 3세계 사람들과 후손들이 굶주려야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에는 하루 세끼 밥알을 쑤셔 넣는 것을 당연히 하면서 ‘현실적- 사회적-세대적인 책임성’ 자체를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의 초월이 아니라, 기실은 무책임, 무지, 독선과 위선이기 때문이다.


9. 진리의 길을 간다는 것

어떤 때는 ‘세계와 나는 하나’라고 거창한 감상과 수사를 사용해서 떠벌리다, 여차하면 ‘나의 견성과 사회적 실천의 문제는 다른 것이니 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선 견성이 중요한 것이다’혹은 ‘예수 믿음이 중요하지 사회변화는 나중의 문제이다’는 따위로 가치체계가 갑자기 바뀌는 자들. 이러한 박쥐의 정신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떠벌리고 이를 추종하는 이들이 모인다는 것은 참 ‘그럴만한’ 현실이다. 초월론과 관념론, 그럴싸한 수사학이 잘 들어 먹히는 것은 감각과 자극을 추구하는 현대문명의 경향이 그 정신에 그대로 삼투된 이유라 할 것이다.

이들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혹은 천국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현실적 실천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로 마음을 깨우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혹은 ‘올바로 예수 믿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지만, 이는 ‘나’에 대한 집착의 결과로 그리 말해지는 ‘결론적’ 선언인 것이다. 나에 대한 집착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들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위한 노력 '에만‘ 그리 몰입하지 않는다.

일찍이 현실을 멀리했던 이들이 올바로 도와 영생을 얻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가 없다. 누군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떠들어 대는 이들을 경계하라. 오히려 진리 아닌 것들을 하나 하나 가려가며 좀 더 온전한 것을 살필 여력을 가진 이들이 진리에 발 디디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절대불변의 단단한 콘크리트와 같은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협지를 너무 많이 읽어 몽상이 일상화된 결과이다. 우리는 다만 진리가 아닌 것들을 피해가는 와중에 좀 더 온전히 지금 여기에 놓여 있는 현실의 길에 발을 디딜 수 있을 따름이다.


10. 존재의 길

눈을 뜨고 보라. 에너지 위기와 지구온난화로 인해 조만간 망국-망세 해야 할 처지에 있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러한 위기의 현실 조차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그 알량한 정신으로 ‘진리’ ‘견성’ ‘득도’ ‘천국’ 타령이나 하는 모습을! 과거 무수한 문명들이 현실을 무시한 결과로 처참한 말로를 걸었던 사실을 살피라!

진리를 향한 ‘초월론’ ‘신비론’ ‘관념론’을 거부해 ‘현실’ ‘실천’을 중요시 여겨야 하는 것은 어떤 도덕성과 실질이 가득한 풍요의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다만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그 생명의 온전한 발현을 위한 적절한 노력일 뿐이다. 석가가 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보시를 하라’, 예수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던 것은 ‘도덕적 세상’ ‘사회복지가 실현되는 사회’를 원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다면 이는 참으로 큰 오해이다. 그들은 다만 ‘나’라는 인간이 온전히 세계에 작용하고 존재할 수 있는 길을 하나의 방편으로 말한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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