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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산청모임후기(79장. 하늘의 도는 편애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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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83.♡.203.138) 댓글 5건 조회 6,560회 작성일 17-10-1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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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함이 붕괴의 첫 조짐이다. 과도함은 충족될 수 없는 욕구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과도함의 기저에 결핍과 불안이 놓여 있다. 어딘가 '충분하지 않음'이 탐욕과 '너무 많은'을, 충족되지 않을 폭식과 갈망을 낳는다. <올리버 색스>

내 안에 말도 못하게 차가운 내면아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어서 한없이 차갑게 반응하고, 차가운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으며, 세상을 온통 적으로 돌려버린 아이, 살아오는 내내 이런 저런 원치 않은 충고를 듣고, 이렇게해라, 저렇게 해라는 강요를 당했으며, 멸시와 수모를 당하고, 끊임없는 잔소리를 듣다가 더이상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 아이, 어른이 되어 아픈 상처를 다시 경험하고, 육체적으로 병들어 약해질 때 그 빈틈으로 상처받은 아이가 서리처럼 스멀스멀 올라와 내뱉는 짧은 말들은 정말 위력이 대단해서 내 주변으로 차갑디 차가운 얼음의 집을 지어버릴 정도입니다. 정말, 부족한 자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한번도 인정받지 못하고, 늘 상대방의 투사의 대상이 되어 부족하기만 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고쳐지고 수정되어야만 하는 아이로 인식되던, 그 아이가 내품는 응어리진 한이 얼마나 차가운지.... 또 그러면서 그 아이는 얼마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사랑받고 싶었겠습니까. 그 사랑받고 싶어하는 열망, 그 결핍으로부터 비롯되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열망, 그 파괴적이고도 과도한 열망.......


도덕경 79장. 하늘의 도는 편애함이 없다.(깨달음의 두가지 길)

큰 원한을 푼다고 하면서 반드시 남는 원한이 있게 된다면 어찌 잘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좌계를 잡고서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계를 맡고, 덕이 없는 사람은 철을 맡는다.
하늘의 도는 편애함이 없으니, 언제나 잘 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


●오늘 집밖을 나서면서부터 전형적인 가을하늘, 애머럴드 빛 하늘과 구름, 쌀쌀한 기온, 가슴이 저밀만큼 그 가을날씨가 좋았습니다. 저 햇살의 눈부심, 단풍이 들어가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속삭임, 또 논가에 피어있는 억새풀, 지금이 한창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바람에 하늘거리는 그 모습에 감동하게 됩니다. 황홀하게 누런 들판, 사람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깊고 깊은 색감, 그 들판의 일렁이는 모습은 황홀하기만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세상에 없으면 참 밋밋할 것 같다는, 계절마다 불어오는 바람이 다른데, 봄에는 황사바람이 아주 세게 부는데, 아직 추운 날씨에 움츠리고 있는 산천초목을 흔들고, 생명력이 다했으면서도 남아 다른 생명이 자리나는데 방해가 되는 나뭇가지를 그 거센 바람이 쳐 냅니다. 우리 몸에 나쁜균이 들어오면 지키려고 하면서 우리몸이 더 건강해지듯, 상실이 있음으로 무언가를 얻을 때 기쁨이 더 커집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그러면서 나무가 혈액순환이 더 잘되고, 뿌리가 튼튼해지는.....
 이 세상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세상이 참 사랑의 손길로 이루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정말 지금 여기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귀가 닫혀 있으면, 가슴이 딱딱해져 있으면 지금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데, 내가 무엇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미래에 목표를 두는, 지금이 아닌 미래에 두게되면 지금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매 순간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진짜 소중한 것은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 즉시로 감사와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하고 미래로, 과거로 가는, 아무런 조건없이 지금 있는 풍요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지금으로 돌이킬 수 있는 강의가 지금 하는 도덕경강의입니다.


오늘 도덕경강의 이래 가장 적은 숫자의 분들이 오셨는데요, 그것이 주는 이익을 한껏 누렸습니다. 오늘 참 많은 음식이 있었는데, 빵/생선 회/호박 전/사과, 이밖에도 많이 있는데 기억이 않나요~, 적은 분이 오셔셔 더많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ㅋ,


●'편애함이 없다', 진리는 특별히 누군가를 더 사랑하는 것이 없고, 누구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하늘의 도를 맛보지 않는 사람이 없고, 진리는 이미 지금 여기에 주어져 있고, 누구에게나 100%주어져 있는데, 이걸 자기것으로 찾아 감사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뜻밖에도 아주 드뭅니다. 노력해서 얻을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그것을 찾아 즐기는 사람이 아주 드뭅니다.

●옛날 주나라시대는 계약서를 대나무판에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권자와 채무자가 나누어 가졌는데, 왼쪽 계약서는 채권자, 오른쪽 계약서는 채무자가 가져갔습니다. '성인은 좌계를 잡고'는 곧 성인은 채권자의 입장에서 사람을 다그치고 꾸지람 하지 않는다입니다. 다만 계약서를 가지고 있을 뿐 나무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나라시대의 세법은 '철'이었습니다. 생산량의 10%를 세금으로 국가에 납부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법이 아주 좋은 법이었습니다. 풍년이 들고 나라가 안정적이었으니, 그정도의 세금이면 백성도 풍요롭고 국가도 부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지방의 관리가 부패하고, 수많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그로인해 먹고살기가 힘들어졌고, 이 '철'법이 정한 10%의 세금을 내기가 버거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인정되지 않고 무조건 10%를 바쳐야 하는, 그것을 내지 못하면 관리들은 살림세간을 걷어가고, 그것도 없으면 마누라를 또 딸을 데려가 노예로 삼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이 철법은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제도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처럼 '철'을 맡는다는 것은 다그치고 빼앗아간다는 것입니다.

●'큰 원한을 푼다고 하면서 반드시 남는 원한이 있게 된다면 어찌 잘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제목이 '하늘의 도는 편애함이 없다'인데, 제가 부제로 '깨달음의 두 가지 길'이라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삶의 질곡들 속에서 고통, 괴로움, 상실을 경험하고 거기에서 배움과 성장이 있게되는데, 이 '큰 원한(대원)'은 살아가면서 관계속에서 오는게 아닌, 보다 궁극적인, 인간존재가 가지는 근원적인 한입니다. 인간이라면 꼭 풀어내야하는 한, 목마름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서울 모임에서 누군가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이라고 말했습니다. 뭔가 허전하고, 애를 쓰는데도 불안하고, 끝없이 무엇인가를 얻거나 이루고 싶은....'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을 보면 애벌레가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하고 찾아가는데, 이와같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권력, 돈, 이런 것들을 추구합니다. 진시황제는 다 가졌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불로초를 찾습니다. 이와같이 인간은 무엇인가를 찾을 수밖에 없는 목마름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 행복이라 할 수 있는데, 누구나 행복을 원하는데, 소유를 통해, 얻는 것으로는 행복을, 진정으로 나를 채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 다시 부족해지지 않는 진정한 만족, 대자유, 진정한 마음의 평화, 완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생사를 초월한 자유로움...'큰 원한'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을 지금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게되는데... 그래서 인생은 한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생활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소유를 통해서, 노력을 통해서, 밖으로부터 얻으려는 것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고 한을 풀지 못합니다. 끝없이 찾고 목마르게 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그게 대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말로 나자신을 잃어 버렸다는 것과 같습니다. 나자신,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닌 참나이고, 그 참나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참나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나를 알게되면 내가 곧 그것이고, 행복이고, 한이 풀어지고, 원래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누립니다. 이걸 알게되면 끊임없이 성장하게 됩니다. 충만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 존재의 다른 이름이 충만입니다.

요즘, 정말 하늘이 눈시리게 푸른데요, 저번 금요일 아침엔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는데, 제가 그 맑고 차가운 파란 하늘에 그대로 파랗게 파랗게 물들어 버릴 것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눈이 아니라 가슴이 시렸는데요, 아마도 그 파란색들이 제 상처의 틈사이로 스며들며 멋진 무늬를 그리려다, 상처를 조금 건들어서 그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원한을 푸는 길을 찾아가보겠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 사실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왼쪽 계약서를 잡고서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다.'
 천형, 태어나면서부터 고통과 결핍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 끊임없이 결핍이 자신의 본질인 것처럼 살아가는데, 밖으로부터 채우는 것으로는 절대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으로 가면, '채권자'는 '나, 내가 생각하는 나'이고, '사람'은 '내면의 나(안에서 경험하는 나)'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즐거움, 불안, 수치, 우울, 무기력, 외로움, 잡생각, 시기질투, 평화, 감사, 사랑, 미움' 내안에서 일어나는 이것이 이미 해원입니다. 이미 풀어져 있고, 이게 진아입니다. 원한을 풀 수 있는 길은 지금 이대로입니다. 매순간의 지금, 지금 올라오는 기쁨, 그 다음에는 슬픔, 이 모든 것들은 매순간의 지금 올라옵니다. 만약에 진실로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허용해주면, 슬픔이외의 다른 것을 만나지 않고 슬픔자체가 되고, 진실로 그 순간에 존재하게 되면 알게 됩니다. 풀어야할 원한이 이미 풀어져 있다는 것을,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못삽니다. '나'라는 에고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에고는 무지하고 오해를 많이 합니다. 잃어버렸기에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는데, 이 평화와 자유, 충만을 누가 추구하느냐, 바로 에고입니다. 이 에고는 결핍과 메마름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데, 여기에서 에고가 착각하는게 뭐냐면, 수치심이 가득하고, 우울한 여기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게 너무 힘들기에 이게 사라진 어떤 상태를 목표로 추구합니다. 에고는 지금 이속에는 평화와 자유가 없기에 저기 미래에 있다고 여겨 미래로  가서 얻으려 하는데 이게 착각입니다. 사실은 미래로 가서 얻으려하기에 지금이 부족해 보이는 것입니다. 거꾸로입니다. 이게 부족하다 여기기에 저기에서 찾는데, 그게 착각입니다. 저기에서 찾는 모습을 내려 놓으면, 추구하는 마음을 내려 놓으면, 믿음을 가지고 내려 놓으면 알게됩니다. 다른 곳에서 찾기에 지금 여기가 결핍과 고통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경험하는 감정은 구체적이고 그것이 기회입니다. 내가 늘 비난했던 그 감정이 왔을 때가 기회입니다.

●'수치심, 무기력, 평화', 이게 이름이 '수치심, 무기력, 평화'이지 이건 사실 에너지입니다. 이것 자체로는 이름이 없고 하나의 에너지일뿐입니다. 사람은 70조의 세포가 있고 이것 하나하나가 에너지입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에서는 에너지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수치심도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고 여기에는 에너지가 없다여기고, 에너지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합니다. 수치심을 만나 그것과 하나가 되면 거죽은 사라지고 그 안의 에너지를 만나게 됩니다. 수치의 껍질은 사라지고 에너지를 만나는데, 그때 어떤 안도감, 평화를 느낍니다. 무엇인가를 따로 찾아갈 필요가 없는 안도감, 자존감이 성장하면서 평화로워집니다. 또 그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한번만이라도 껍떼기를 뚫고 그 밑의 에너지를 만나면, 이 평화/만족/재미/기쁨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이게 진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진짜 수치심을 만나면, 그 에너지는 이 육체안에 있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그 에너지는 우주전체에 가득차 있는 생명력입니다. 이 수치심을 통해 근원의 에너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 쉼, 이 참나를 만나면 원한이 풀어지고, 모든 결핍이 해결되고, 삶이 변화되고 목마름을 그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직 우주에너지, 참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없습니다. 참나를 누리기만 할 뿐, 참나를 명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이게 제가 보기에 가장 쉬운 길입니다. 이 길이 깨달음의 첫번째 길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삶, 이것으로 충분히 족합니다. 저는 이 길을 '헌신의 길'이라 이름을 붙여 봅니다. 자신을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온전히 바치는 길,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는 것, 다른 대상에게 바치는게 아니라, 지금 자기안에서 올라오는 것에 다 맡겨 버리는 길, 헌신의 길.....

오늘 거의 두시간에 걸친 강의, 배고픔도 참아가면서(ㅋㅋ) 참 고생하셨습니다. 깨달음의 두가지 길, 헌신의 길/자각의 길..........예전, 힌두교 성자의 글을 읽을 때 많이 들었던 것인데요, 그땐 무슨 소린지 모르고 읽었습니다. '헌신의 길'은 제가 체험하는 것이기에 분명하게 알겠습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에 내 자신을 온전히 던져버리는 것,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자각의 길, 이길은 선생님께서도 어려운 길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네티네티, 내가 아닌 것을 자꾸 부정하다보면 (생각도 감지되기에 물질적인 것이라는),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그것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하고, 또 진아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감각되는 것들을 부정하다보면 더이상 부정되지 않는 그것이 드러난다는 말씀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그렇게 부정해 나가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아직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길, 두번째 길, '각성의 길(자각의 길)'이라 이름붙여 봅니다.
참나는 찾을 수 없습니다. 감각될 수 없기에, 그래서 무엇이 내가 아닌가, 거짓을 거짓으로 보는 것, 내가 아닌 것들을 다 찾아내고 걷어내는 것, 이 육체는 내가 아닙니다. 사실 '나'는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없습니다. 내가 아닌 것들을 다 드러내면 그때 감각되지 않는 진아가 드러납니다.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저는 1961년에 태어나길 작심하지 않았고, 코가 이렇게 벌렁한 모습이길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한 존재가 태어난 것입니다. 임신이 된 것도 우연이고, 임신이 되었을때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태어난 것도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연입니다. 뇌의 복잡한 구조, 세포분열을 하면서 뇌, 신경계, 림프계, 뼈, 근육 이런 것들을 만든 것, 이 기가 막힌 세포분열에 내가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이 생명이 자라고 태어나기까지 내가 참여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엄마가 자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면, 아기가 그 이름을 자기와 동일시합니다.  그러면서 장난감을 빼앗기면 죽을 듯이 괴로워하는데 그때 장난감과의 동일시가 나타난 것이고, 태어나면서 정보가 입력되고, 육체와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면서 이게 나라고 인식되고, 그 이후의 경험이 모두 '나'로 입력됩니다. 육체와의 동일시, 그 이후로 성장하면서 모든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되고 동일시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실 전체를 동일시하면 상관없는데, 부분적으로 동일시합니다. 기쁘고 행복한 것은 좋고, 수치심, 불안은 배척하는 부분적 동일시가 고통을 일으킵니다.

●자각의 길, 저는 지금 새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번 열렸는데, 어떻게 열렸는지를 몰랐습니다. 열려서 다 누리는데, 어떻게 열렸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내가 움직인다고 알았는데, 의식을 잃어버리면 이 몸은 그대로 쓰러집니다. 그렇다면 나를 서있게 하는 것은 '의식'입니다. 움직이는 것,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의식, 생명입니다. 진짜 나는 어떤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전체임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형상, 이름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형상이 없는 근원적인 존재라는,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게되면, 내가 화장실에 가는게 아니고, 한 생명의 움직임, 작용이라는, 육체와의 분리가 오면, 내가 밥을 먹는게 아니라, 그냥 작용이라는, 배고픔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내가 배고픈게 아닌), 오만생각이 들 때, 그것이 내 생각이 아니라, 기억이 만들어 내는 허구일 뿐인데, 그냥 생각과 허상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인....수치심,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 에고는 있지도 않는 그림자, 개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게 하나의 실체처럼 되어버립니다. 내가 위축되고 내가 괴로운게 아니라 그런 현상이 일어날 뿐인데, 내가 그렇다고 하면서 그걸 책임지려합니다. 이게 동일시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생각들은 내가 아닙니다(생각조차도 감지되기에 물질적인 것입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자각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구체적인 존재라는 오해가 참 깊습니다. 그럼 진짜 나는, 그 모든 것이 부정되었을 때 저절로 드러나는 그것이 진짜 나입니다.

●저는 이 각성의 공부를 지금 다시 하게되었는데, 이 길, 끊임없이 동일시를 끊어가는 이 길이 참 어려운 길입니다. 진짜 나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도 있어야 하는, 저는 이 전체를 알지못했는데, 그래서 그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정하나를 만나는 것으로 전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지 않는다면 이 자각의 길을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강의하는 사람이고, 이 자각의 길을 통해 이 앎을 보다 잘 설명하고 싶어 이 길을 갑니다.

●나를 위축되게 하는 이것을 좀더 세밀하게 경험하면 그것이 나를 성장시킵니다. 지금 이순간으로 돌아와서 자기 감정하나를 온전히 만나고 포용하고 수용하면 영원히 자유롭게 되는, 따로 배움의 길을 가는게 아니라, 지금 올라오는 감정을 온전히 만나는 길을 통해 배우게되는 길을 갔으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솟구치는 것, 그것을 살아보고 싶었다.'
자라오며, 끊임없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는 소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기에 거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있는 그대로, 현재의 자신을 단 한번도 위로 받거나,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급급해할 뿐, 제가 하는 이야기에는 잠시도 머물러 있지 못했습니다.(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러는 자신을 보니까요). 제길,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착한 아이를 원했겠지만, 전 지금껏 살아오며, 그런 것들(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진심으로 행해지지가 않았고, 그랬기에 제게 삶이란 타의에 의한, 타인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관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계란 '이해받지 못함과 강요'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단법석>

●죽음직전까지 가는 경험, 그러면, 이게 내것이 아니구나하는 자각이 깊어집니다. 그러면서 삶은 더 진지하고 최선을 다해 살면서도 집착하지 않게됩니다. 저는 대책없는 사람인데,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다 길바닥에 나앉으면, 그때 나앉으면서 살아갈 방도가 생기게됩니다. 그렇듯 생각과 염려를 내려놓으면, 존재가 언제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인간의 기억, 더 오래 살고 더 풍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의 삶을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당신의 표정은 진짜 목마른 사람의 표정인데, 해결하고 싶은 과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저는 항상 지나간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많은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만 줄이면 정말 편하겠다는, 때로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프게되는....

●지금 일어나는 이 일은 문제가 아니고, 이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는데, 그 생각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각이 문제입니다. 올라오는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생각이 많은게 문제이고, 생각만 없어지면 해탈이겠다'라고 하셨는데, 이런 관점이 지금 일어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참 많다 싶으면 내가 또 생각이 많구나하고 자책하는게 아니라, 이 생각을 허용해 주는 쪽으로, 생각을 하다가 그 생각을 빠져 나올 때 내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때 내가 생각을 빠져나와 알아 차릴 때, 미소를 짓거나 혹은 크게 웃어보십시오. 지금 그 생각에 저항하기에 고통이 있습니다. 생각은 매트릭스고 그것이 하나의 실제 세계가 됩니다. 생각에서 빠져 나오고 그것을 알아 차릴 때 크게 웃어주고, 긍정의 마음이 되어주고, 그래 그러면서, 더 마음껏 생각을 허용해주는, 그러다보면 생각이 많아져 어지러워지기도 하는데, 그때 더 어지러워지면 됩니다. 저는 때로 노래가락 하나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반복재생되는데, 이것을 정리하려 하고 애를 써서 어떻게 해야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지금 일어나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 반복되어 돌아가는 것에 '책임질 나'는 없습니다. 그 반복되어 돌아가는 것을 책임지려하는 것이 생각괴의 동일시인데, 그때 생각이 일어날 때 웃어주며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어나는 생각에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일어나는 생각을 허용해주면 생각의 패턴이 보이고, 그러면서 그 패턴이 사라지고 그 생각을 책임지려는 나도 사라집니다. 미소짓는 것, 그것을 시도해 보는 것, 그러면서 자신이 얼른 바뀌기 바라지는 마십시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 사람의 변화도 때가 있습니다. 얼른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웃어주고 저항하지 않는 것, 그렇게 하다보면 때가 무르익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내가 좋아질거야하다 막히게 됩니다.

신발들 틈에서..........

○어떤 대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 같은 공포가 올라오는데, 그때 그냥 그것을 경험하면 되는 것입니까?

●당연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있는 것인데, 당신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각인된 세포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니 '나'가 그 죽음의 공포(나보다 먼저인)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나(에고)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올라오는 것, 그걸 해결하고 싶어서, 그것이 없는 상태를 바라는데, 좀더 탐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포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공포'뿐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합니다. '공포'가 아닌 다른 것에서 해결책을 찾으려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것에서 찾을 때 조금의 마취는 되겠지만 진정한 치료는 되지 않습니다.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는 '생각'에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이게 답이고 해결책인데, 열쇠를 지금이 아닌 밖에서 찾고 또 그렇게 밖에서 찾는만큼 문제는 더 커집니다. 공포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포속에 있습니다. 공포가 유일한 답이라는 이해가 오면, 그것이 힘을 발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공포가 올라올 때 이런 이해가 오면 공포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해결책을 찾으려는 의도를 놓게되고 그러면서 그 공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 이것 아닌 다른 것으로 향하던 눈길이 내려지면, 지금 올라오는 것만 보게될 것이고 또 그것을 더욱 섬세하게 보게될터인데, 그때 그것의 긍정적인 면을 보게됩니다. 정말로 지금 올라오는 것으로 눈길이 향하게되면, 그때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적게 치르고 효과는 많이 보려하는 그런 마음들도 다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올라오는 이게 답입니다. 내버려 두면되는데, 그것을 내버려두지 못하기에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그것을 그대로 못두게 되어있고, 무슨 일이든 하려듭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려하다가 그 시도가 더 이상 않된다는 지점까지 가게되면, 그러면 모든 시도를 놓게되면서 있는 그대로의 것을 만나게되고, 해결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당신의 밑바탕의 마음을 보면 그 공포에 저항하고 그것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보입니다. 그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그것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이걸 기회로 삼고, 뱃속에서부터 나를 끊없이 괴롭히는 이것,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것을 껴안고, 죽음의 공포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잘해왔고,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공포가 답입니다. 그 믿음이 가슴으로까지 내려가면, 그것이 자기자신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이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자각의 길, 그것은 오해와 착각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거짓을 거짓으로 보는 것, 자각을 통해 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이 내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면 진실이 드러납니다. 그 진실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내가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아는 것, 육체가 내가 아닌데 나라고 믿고 착각하고 있었구나하며 온전히 지켜보면 허구가 허구로 드러납니다.

●저는 평화의 삶을 누리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제게 왔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 호기심, 저는 23년동안 강의를 해왔는데, 제 강의에 한계가 왔고, 전체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싶었고, 그러면서 '자각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닌 것으로 부정되고 나면 그때 드러나는 것이 자각이고, 그 자각이 진아입니다. 이 공부는 일반사람이 하기에는 힘듭니다. 이 공부를 통해 통찰이 제게 오면 다른 사람에게 좀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고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습니다.

야마꼬님 입이 쥐었던데요, 맛있는거 해주려고만 하지말고, 우선 자신부터 잘 챙겨드세요 ㅋ~~

여러분들, 환절기 건강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11월, 노란 우산들이 세상을 뒤덥는, 그때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돌도사님의 댓글

돌도사 아이피 (1.♡.227.102) 작성일

감사합니다...^*^...

일혜님의 댓글

일혜 아이피 (211.♡.169.43) 작성일

1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대구모임에 참석하여(그때는 전통 찻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김기태선생님과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강의 시간이 가까워오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마당에 때 이른 매화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졌습니다.
저는 그때의 고요가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지요.
사람들이 많이 오면 더 좋겠지만
사람들이 오지 않아 주어지는 것도 있겠지요.
가지님껜 풍성한 음식으로
저에겐 고요함으로...

토토님의 모임공지글이 좋아
다음 공지글도 기다려지네요.
토토님이 내려 주시는 신맛의 커피도 맛보고 싶구요.

그리고 박가현 선생님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어요.
꽃처럼 피어나던 모습이 제겐 어찌나 이쁘던지요.

야마꼬님
아프면 벌금 받습니다. ㅎㅎ
산청모임이 아마꼬님의 정성어린 마음에 물줄기를 대고 있으니까요.

추석이 지나고
날이 제법 쌀쌀합니다.
마른 바람이 물기를 말려
겨울을 만드는 짧은 순간에
마법처럼 단풍이 들고
존재의 아름다움의 절정
농익은 가을이 우리에게 오겠지요.
쓸쓸함과 막막함, 외로움이 손님처럼 찾아오는 시간
그 시간에
오로지 그것에 있을 수 있는 축복이 오길 바랍니다.

토토님의 댓글의 댓글

토토 아이피 (59.♡.103.209) 작성일

아잉.. ㅋㅋㅋㅋㅋㅋ 커피 내리는 연습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ㅋㅋ

여름가지님의 댓글의 댓글

여름가지 아이피 (117.♡.172.26) 작성일

와인을 생각나게 하는 일혜님~,

기태선생님과 뜻하지 않았던 단 둘의 모임,
그리고 때 이른 매화,
찻집의 따뜻한 온기,
참 고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 잔잔하게 전해지는 깊은 평온.......

그러나~~~
전 좀 못된 구석이 있어요 ㅋ,
더 많이 먹을 수 있어 좋았다고 한건, 고백하자면,
못 오신분들 배아프라고 한거였어요....
제가 생각해도, 전 좀 심보가 나쁜 것 같아요~....

마른 찬 바람이 물기를 걷어가,
단풍이 들고, 과일들은 단맛이 진해지고, 가을이 농익는데요,
저는 마른 기침이 나고, 외롭고 쓸쓸하고,
마음이 말라 뒹구는 낙엽처럼 굳어지네요.
이럴 때 와인 한잔이면 딱~ 풀릴 것 같아요....
가끔씩 일혜님이 가지고 오던 와인 한 병.....

그 와인(와인을 든 아리따운 여인)을 기다리는 사람이 비단 저 하나뿐일까요?!!!~~~~~

독비님의 댓글

독비 아이피 (180.♡.130.121) 작성일

고맙습니다. 긴 글을 쓰시는...

고맙네요, 굳이  가지  않아도....잘  알려주고  싶어 가보련다 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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