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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 산청모임(75장. 영혼의 자유에 이르는 길)

작성일 17-07-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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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83.♡.203.138) 조회 7,26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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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컸었요, 한달만에, 저번달에는 눈도 못떴는데, 제가  밥을 먹는데, 녀석들이 슬금다가와 제 다리를 물었습니다. 꽤 아프더라고요, 계속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가물었다가 모처럼 비가 오는, 이 좋은 날, 이렇게 많이들 와주셔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게 되어 기쁘고 반갑습니다. 제가 언젠가 별장(?)을 가지게 되면 큰 통유리로 밖을 볼 수 있는, 지금 밖에 비가 오고, 그래서 만물이 기뻐하는 설레는 분위기 속에서 오늘 하루 여러분과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헛되거나 불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고통, 상실, 슬픔, 두려움 이것들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한쪽면으로 보면 오지말아야 할 것이고, 거부해야할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저 깊숙한 존재의 근원에서 오는 진정한 감사와 기쁨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결핍을 좀더 기다려 주고, 밀쳐내거나 저항하지 않으면, 고통과 결핍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75장. 영혼의 자유에 이르는 길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윗사람이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굶주린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이 유위로써 다스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렵다.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이 더 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대저 오직 삶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삶을 고귀하게 하려는 것보다 낫다.

산청도덕경모임은 다른 곳보다 특별함이 느껴지는데요, 그 특별함을 맛있는 식사로 담아내는 분이십니다. 야마꼬님~~~


●옛날 중국의 주나라 세법에 '철법'이 있습니다. 수확량의 10/1을 현물로 나라에 바치는 제도입니다. 나라가 평화로울 때는 이 세법이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개인 백성들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고 전쟁이 벌어지고, 그래서 백성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주나라는 철법을 그대로 시행했고, 백성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법을 얼마나 지독하게 시행했는지 흉년이 들어 세금을 내지 못하면 그 딸을 잡아갔고, 딸이 없으면 아내를 대신 잡아갔습니다.


●이 75장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은 임금을 위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위정자가 해야할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장이라고 평가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의미만 보면 그런 평가가 맞고, 바른 정치의 길을 제시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해석하면 우리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경전의 글은 그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읽고자하면 이 글의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글의 이면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진실, 영혼의 자유에 이르게하는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위정자/윗사람은 여러분 자신, '나'라는 존재입니다. 백성은 내면의 백성, '나'안에 있는 백성입니다. 우리 내면의 백성이 참 많은데, 그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려서 완벽하고자 하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백성이 올라오면 늘 다스려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항상 같은 말을 하고, 23년간 같은 약(?)을 팔아오고 있는데, 우리 마음은 항상 변화하고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은 늘 춤을 추는데, 영혼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제가 똑같은 약을 팔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진리는 늘 우리 안에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유는 이 순간 드러나 있는데, 그걸 모르니 찾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 지금 경험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기쁨, 성냄,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헛헛함, 채워지지 않는 느낌, 외롭기도 하고, 내 영혼의 자유가 오기 전에는 다 외롭습니다. 잡생각이 일어나고, 또 지금 비가 내리는데, 빗방울 소리가 제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제가 어릴적에는 비닐로 만든 우산이었고, 저는 그 비닐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 순간순간 오는 설렘, 우리 안에서 경험하는 마음의 온갖 것, 이것들은 너무나 변화무쌍합니다. 그 미세하고 작은 것들을 섬세하게 살펴보면 정말 다양한 것들이 오가감을 봅니다. 갑작스럽고 느닷없는,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윗사람이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항상 기쁩니까? 기쁨은 잠깐이고 오히려 슬픔이 더 길지 모릅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고 곧 우울과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기쁨이 우울로 넘어가고 변하려 할 때 기쁨을  계속유지하려 애를 쓰고, 평안속에 있다 예기치않은 상황에 긴장으로 변하려하면 평안을 유지하려 애를 씁니다. 이미 에너지는 슬픔, 긴장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그런 자신을 다그치고 비난합니다. 이분은 '긴장', 긴장하는 것 하나만으로 삶이 힘들었는데, 앞에 나와서 발표할 때 긴장하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쥐어뜯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금을 많이 걷는 것입니다.

산청모임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다른 존재, 토토님.... 산청모임을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시작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그 어떤 감정도 내버려 두지 않는, 허허로운 가슴을 내러벼 두지 않고 그것을 채우려드는, 자신을 어떻게 쥐어짜든 쥐어짜서 평화로운 자가 되려합니다. 기쁨과 사랑이 사라져가면 그것을 지키려고 자신을 쥐어뜯고,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완전한 '나'가 되려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결핍이 없고 충만한 존재가 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할 때 백성들은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내 안의 백성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긴장상태에 놓입니다. 그렇게 삶이 늘 목마르고 메마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애를 씁니다. 여기 20년, 25년 도를 닦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불안하면 편안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삶이 곧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 온갖 수행을 하는데, 이처럼 수행은 온갖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척/체를 하고, 몰라도 아는 척하고, 그래서 주목받고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수행과 삶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은 모두 허허로움을 채워서 충만한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에서 같습니다. 그러나 온갖 수행, 노력, 애씀이 진정으로 자신을 충만하게 채워주었던 적이 있습니까? 자꾸 무엇인가를 하려 드니까 이게 잘 안 다스려 집니다.

 저는 겸손한 사람이 되려고 무진장 노력했는데, 그로인해 저는 더 정교하게 교만해졌습니다. 이게 정말 잘 안됩니다.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다스리려 합니다. 저는 남을 사랑하려 무진장 노력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수없이 봉사를 했는데, 그러면서 나는 이런사람이야하며 끊임없이 떠벌렸습니다.

 이처럼, 내면의 백성들은 아무리 죽여도 결코 죽지 않습니다. 원인은 모두 윗사람, 바로 '나'입니다. 나라는 에고가 원인입니다. 이 '나'가 자꾸 무엇을 하려 하니까 삶이 괴로워집니다. 이 백성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 내면의 백성들은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나타나서 그저 자기일을 합니다. 깨달음은 에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백성 이대로가 자유이고 해탈인데, 사람들은 허허로움이 올라오면 여기에는 자유가 없다여기고, 그 허허로움을 믿지 못해 다른 것으로, 윗사람이 자꾸 다른 것으로 바꾸려 합니다. 미래로 가는 목표를 내려놓고, 지금 현재에 있는, 외로움을 끝내려면 외로움속에 있어야 합니다.


●'대저 오직 삶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삶을 고귀하게 하려는 것보다 낫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믿어주고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 결론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잘못된 것은 매순간 올라오는 내면의 백성이 아니라, 윗사람, 에고, 관념, 오해, 착각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게 참 많습니다. 자신에 대해 잘 모릅니다. 나에는 진짜 나(실재의 나, 진아)와 가짜 나(내가 생각하는 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나, 누구나 다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들어가 질문해보면 대답을 잘 못하는데, 그 가짜 나는 형성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택권 없이 그냥 태어났고, 자라온 환경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환경은 흐름속에 있습니다. 편안하고 자애로운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결핍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누구의 책임도 없습니다. 내 선택을 넘어서 있습니다. 한 존재가 태어납니다. 태어난 개체는 어떤 성향이 있고, 환경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특정환경에서의 경험, 사랑받고 평화로운 환경이 주어지고 그게 반복되면 그 사람은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을 때, 억압받고 자신의 감정이 무시되는 환경이라면 어린아이는 내가 잘못되어구나하고 위축되고, 그 환경이 반복되면서 그것이 경험과 지식으로 집적되면서 '나'가 형성됩니다. 이런 반복되는 경험속에서 정체성이 형성되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결코 탄생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단지 탄생하면 이것을 '나'라고 믿을 뿐입니다.


●엄마뱃속에 편안하게 있다가 아이는 탄생의 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폐를 통해 호흡하게 되고, 분리를 경험하는, 그렇게 태어나면서부터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심지어는 엄마뱃속에 있을 때조차도 편안하게 있지 못하고 거부당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뱃속에서 거부당하고 태어나서도 거부당하는, 아이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눈치보고,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면 자신을 편안하게 하는 느낌은 쥐려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에는 도망가려 하는게 형성되고 이게 반복되어 생기는게 '나'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것에서 자동적으로 도망가려 합니다. 무엇인가를 취하고 버리려듭니다. 그런데 안에서 마음에 드는 것만 올라오는게 아니라, 눈치보고 불안해하는 그런 것들이 더 많이 올라옵니다. 이 에고는 형성된 것이고, 이 형성된 지식의 집적물의 마음에 드는 것만 내 안에서 올라오지 않습니다. 에고가 원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의 흔들거림이 찾아옵니다. 에고는 펄펄 살아있는 것으로써 찾아오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질서를 참지 못하고 질서를 찾습니다. 늘 흔들리지 않고 평안과 평화만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이 에고가 자꾸 손을 댑니다. 자꾸 노력하고 애쓰면 뭔가 충만한 것이 있을 것 같으니까, 미래에 모든 것을 다 투영해 놓습니다. 그리고 그 투영해 놓은 것은 힘듦과 고통은 다 빼놓은 모습인데, 세상에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아이덴터티, 이것은 과거 지식과 경험이 반복되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체는 여러분이 선택하지 않았고, 또 이 몸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쉽게 믿어 버립니다. 이 몸은 내가 아니고,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고, 이 마음도 내가 아닙니다. 그럼 나는? 이 몸과 마음을 있게 하는 어떤 근원, 실재, 본성, 이 근원에서 일어난 두가지 현상이 몸과 마음입니다. 진짜 나는(진아, 진리)오고 가는게 아니고, 변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이 실재가 어디에 따로 있느냐? 아니 지금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여러분이 의식을 잃어 버리면 이렇게 서있고, 제 말을 듣는게 가능하겠습니까? 이렇게 듣고, 앉아 있고, 서있게 하는게 '의식'입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의식입니다. 모든 생각, 느낌, 감정,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의식입니다. 예전에 강에서 고기를 잡을 때 강물을 전기로 지지면 물고기가 의식을 잃고 떠오르는데, 그래도 이것은 살아 있습니다. 의식을 잃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의식이 돌아오면 모든 작용이 가능합니다. 몸이 스스로 움직입니까?, 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의식이고, 이 의식은 전체인데, 이 전체에서 몸이 올라옵니다. 몸과 마음은 죽지만,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더라도 그것에 속지 않습니다.


●나는 과거의 지식과 경험의 집적물인데, 내 안에서 올라오는 내면의 백성을 이 죽은 과거의 집적물인 에고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손을 대면 댈수록 내면의 백성은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내 마음이 일으키는 대로 내면의 백성을 손대지 마십시오. 허허로움, 무료함을 손대지 마십시오. 이 헛헛함이 에고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슬픔이고 두려움이지만, 이것은 저 깊은 근원에서 올라오는 무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올라오는 것은 내 영혼의 자유를 위해 올라오는 것입니다. 에고의 입장에서는 꼴보기 싫은 것이고 명백히 멀리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이것을 어떻게 하려는 것을 내버려 두고 그것을 무한히 허용하고 받아들일 때,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어디에도 결핍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제거하려 들기에 메마르게 됩니다. 눈을 떠야합니다. 이 일상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느낌을 온전히 경험할 때 무한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저 오직 삶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삶을 고귀하게 하려는 것보다 낫다'. 그 무엇도 베려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벨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십시오.

여인숙

(잘라루딘 루미)


인간이란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취하고 버리는게 아니라, 만나고 경험하고, 결핍을 거부하지 않고 진정으로 껴안을때  선물로 받는 것이 영원한 충만입니다.

산청모임을 특별하게 하는 또다른 존재 안수, 왜냐? 가장 고참이니까 ㅋㅋ, 안수가 삐딱한 부분이 있었는데, 언젠가 부터 바뀌어 가는걸 느낍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안수는 모임에 오랫동안 나오고도 늘 손님같은 역할이라 때로 눈총을 받았는데, 이젠 손님이라기보단 주인이되어 자신의 일을 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또 제법 어려운 말을 합니다. 잘 이해가 안될때도 종종있어요. 암튼 뭔가를 본것 같고, 그리고 자기삶의 주인으로 서고 있는게 느껴집니다.



<야단법석>

○저는 열등감이 많아 여기저기 찾다가 결국 이곳으로 오게되었습니다.(파주에서 무려 새벽 3시에 일어나 산청으로 오신분)

○아들은 아프고, 노후자금도 잃고,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었는데, 지난 몇년간 시달리며 가끔 지금 이순간을 만나고,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다시 느끼고 그러면서 지난 문제들이 해결되었습니다. 노후자금도 다시 돌려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아들은 다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눈에 보이는 것에 여전히 급급해하지만, 늘 지금 이순간으로 돌아가려 하고, 지난 고통이 내게 필요했던 일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 에고에 금이 가게되는, 또 내가 자기비난이 심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쪽팔릴 때, 그것에 머물러라 하셨는데, 그런 것을 자꾸 경험하려 하는데, 쉽지만은 않습니다. 제가 어릴적부터 수치심, 두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초등학생때부터 단체생활을 하는게 힘들었습니다. 입학식날 사람들이 많은 것에 놀라 집으로 그냥 돌아온 기억, 사촌형 결혼식날 집안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에 놀라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잔칫날인데 맛있는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사람들 많은 곳에선 제가 참 피곤해하고 힘들었습니다. 직장생활도 사람들이 참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을 참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제가 40중반부터 억눌렸던 감정이 올라오고,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그 분노를 아내에게 풀어내고, 신체이상이 오는, 그래서 그것을 극복해보자하는 마음을 내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열쇠는 자기 자신이고, 결국은 자기자신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감추고 달아났던 그 자리, 그것이 드러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것같은 두려움,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원래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걸 깨달을 만큼 지혜롭지 못합니다. 또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그만큼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똑같은 문제로 떨 수밖에 없는 자신, 돌이키면 됩니다. 그리고 돌이키기위해서는 자기가 명확히 어디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곳이 아닌, 여러분 자신, 여러분 내면.... 인생에 시간은 없고, 늦었다하는게 없습니다. 만나기 꺼려했던 자신을 만나기 시작하면 피가돌고, 온기가 돌아오게 됩니다.

 내가 이 문제로 너무 힘든데, 이 문제만 없으면 살겠다하는데, 사도바울도 그랬습니다. 늘 허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허리만 아프지 않으면 힘있게 전도를 할 수 있겠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이미 족하다', 아프지만 그 아픔을 받아들일 때, 그 아픔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열등감을 싫어하는데, 그래서 열등감을 내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열등감속에 있습니다. 열등감속에 있는 진정한 미소를 만나야 합니다. 자기자신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비가 많이 내렸지만, 그 어느때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떤 문제가 자꾸 반복된다는 것, 제가 3주정도 계속 우울했습니다. 같은 문제가 자꾸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제가 그것이 너무 지겨워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가짜의 나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선생님이나, 김태완선생님, 바이런 케이티 모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쪽팔림속에 있어라, 열등감속에 있어라', 그런데 거기에 주체가 있는 이상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 '나'가 남아 있으면 그것은 계속될 것같은, 그리고 이 반복이 너무나 지겨워졌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주체에 대해 의심해 보기로 했습니다. 모든 생각과 괴로움의 바탕에는 '나'가 있고, 제게 아직 '나'가 있고,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다 부질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라는 것을 의심해 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두려움이 많았던게 결국 이 몸을 온전히 하려고 했던 것에 있었습니다. 결국은 이 몸뚱이를 보존하기 위해서 였더라고요. 이 몸이 주체가 아닌데 아무런 의심도 못하고, 이게 나인줄 착각하고 그래서 돈을 더 모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내가 한 것이라 생각하고, 내가 죄책감에 빠지고, 또 바이런 케이티의 책을 읽다가 잠깐 명상이 되고, 모든 것이 동시에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혼란이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참된 질서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속고 삽니다. 제가 지리산 토굴에 있을 때 이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체험했었는데, 그러면서 세상사람들이 다 속고 살고 있구나하는 것을 알면서 크게 웃었습니다. 여러분이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이것, 몸은 스스로 못합니다. 의식을 잃어 버리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그러면 '나'는 무엇입니까? 의식이 없으면 그 무엇도 성립되지 않고, 그저 숨만 쉬는 시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누군가 툭치면서 일어나라하면 눈을 뜨는 것은 '의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움직이고 걱정하고 망상하고, 몸의 동작 그게 의식인데, 의식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의식은 잊어버리고, 그 의식이 만들어낸 영상에 집착합니다.

 너무나 몸과의 동일시가 깊기 때문에, 그 동일시에서 잠시 벗어나 내가 의식이구나, 이 의식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하는 것을 알았다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닫히게 됩니다. 주의깊게 살펴보고 관찰하고, 그러다보면 동일시가 온전히 떨어지고, 의식자체만 남을 때, 몸/마음과는 상관없는, 사실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가 착각을 일으킵니다.


○저는 작은 것에도 '나'가 붙어 잇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좀더 섬세해지고, 그 작은 것에도 '나'가 붙어 잇는 것을 보게되면, '나'라는게 떨어지고, 근원에 가까워지는, 결국은 아주 섬세하게 자신을 만나가는, 아주 작은 것들을 계속 만나 가는 것일듯 싶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 생각, 감정, 느낌, 이 모든게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나가다 보면 진실을 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영상에 속아 그게 진짜인줄 알고, 그런데 제가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이젠 까먹고 동일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앗, 이것이구나하는 것을 보게되면, 그것을 일러 '견성'했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동일시가 계속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계속해야합니다. 의식이 계속 공부를 시킵니다. 그러다보면 본래면목을 만나게 되는데, 이 영상이 가능하려면 빛, 스크린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보게되면 이때 그 어떤 영상에도 흔들리지 않게됩니다. 이 공부를 하려면 처음에는 애를 쓰게되고 노력해야하지만, 나중에는 저절로 되게됩니다. 누구에게나 다 주어져 있고, 뒤로 돌이키기만 하면 됩니다. '회광반조', 어떤 선사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요, 모든 것이 오직 의식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다.', 모든 작용, 의식 없이는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의식을 여러단계에 걸쳐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고, 손의 움직임, 이 동작이 가능하려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의식이 없다면 이 행동이 가능하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맹장수술을 하기위해 마취를 했는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수술을 했고 저는 깨어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고나서, 수술한 내장은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데 그게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의식이 있어야 고통도 있습니다.


●도가 무엇입니까? 따뜻한 물을 마실 때 따뜻한 줄 알고, 찬물을 마실 때 찬 줄을 아는 것이 도입니다. 이때 그것을 누가 압니까? 손바닥을 탁치면 누가 그 소리를 듣습니까? 육체 스스로는 알 수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 이것도 의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의식이 있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게 의식입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육체와의 동일시가 너무 깊어서 그러는데, 모든게 의식입니다. 그런것을 통해 앎이 깊어지면 생각, 느낌, 동작에 속지 않게됩니다. 그러나 그 착각이 너무 깊기에 이 동일시에서 벗어나기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조금 의심하면 점점 그 자리가 밝아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목표가 있었는데, 그게 사라지고, 그러면서 우울이 찾아왔습니다. 열정적으로 해야할 것이 없어 권태로웠고, 그 권태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권태가 올라올 때 그것을 느껴보니, 그렇게 하다보니 괜찮더라고요. 그런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느껴주고 인정해주게 되었습니다. 이런 나를 그동안 참 구박해왔구나, 그러면서 상처받은 나를 그냥 느껴주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올라온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이고 신선한 것입니다.


○저는 이론적으로 문외한이고, 잘 모르는데, 50이 넘어가니까 저절로 평화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냥 저절로 감사합니다. 그저 평화스럽고 감사합니다. 나이 드는게 좋은 것이구나 느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고통속에 있으며 곰삭다보면, 제 스스로 질적변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애쓰지 않았는데, 가벼워지는, 고통속에서 숨막혀했을 뿐인데, 삶속에서 어떤 질적 비약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차를 타고 오고가다 당신을 보면서 그런 것들을 느꼈습니다.


○어릴적 자기표현을 못해서 분노가 생겨났는지? 아니면 약간의 우울증이 있어서인지, 그때는 아무튼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큰 소리가 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동창모임에 나가야되나 말아야되나?, 또 동창모임에 글을 하나 썼는데, 그것을 비난받고 10일정도 고통스러워하는.....

우심님, 먼길 오시면서 귀한 선물까지 가지고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박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확실히 선택하길 원하면서,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지금'을 외면합니다. 사람들은 분명하길 바라서 지금 올라온 선택하지 못하는 것을 건너 뛰려하는데, 그때, 지금을 받아들여, 선택하지 못하는 자신을 더 허용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을 더 허용해보면, 모양은 분명한 선택이 없으니까 지리멸렬해 보이지만, 사실 선택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마음을 그치는 것이고, 선택하지 못해 헷갈리는 것이 존중받은 것이고, 그때 그 밑에 있던 소중한 것이 올라옵니다. 그 모름을 깊이 허용해 주면 됩니다. 기회는 항상 있고, 좀더 헷갈려보면, 그때 어떤 여백, 안도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너무 사랑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혹은 저렇게하면 사랑받을거야하며 머리를 굴렸습니다. 저는 제 감정이 억압당했고, 감정을 표현해 보지 못했기에, 머리를 굴려 척/체를 했습니다. 인정받으려고 무척 노력했고, 칭찬을 많이 들었지만, 그 댓가로 저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지리산 토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도 좋은 직장을 버리고, 순수하고, 진실만을 추구한다고 자신을 떠벌렸습니다. 그러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 한없이 떠벌리는 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냉혈한인 나, 가슴이 서늘한 나를 보게되었습다. 이런 철벽가슴이면 진리를 깨닫는게 불가능하다, 안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러면서 단 하나라도 진정으로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남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았었고, 그 병이 깊어지다보니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지경에까지 내몰렸었고, 그것은 지옥이었습니다. 이런 몸짓이든 저런 몸짓이든 그 바탕에는 '의식'이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던, 전생부터 얼마나 많은 업장이 쌓이더라도, 예전에 제가 지리산에 있을때 당신의 업장은 지리산보다 더 두꺼워 해탈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신은 길을 잘못 들어선것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업장도 한순간에 다 날아갑니다. 삶은 언제나 기회입니다. 자기에 대한 이해,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 달리하는 것, 선택을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허용하는 것 그것도 기회입니다.

 저는 한번밖에 없는 삶을 진실하게 살고 싶었고 노력했는데, 어느날 끝없이 잘난척하는 자신을 직면했고, 그것이 저를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정확하고 진실하게 직면하면 바뀝니다. 진실의 힘은 이처럼 강렬합니다. 내가 이렇게 억지를 부리고, 내가 내 자신을 또 쥐어박았구나를 정확히 보게되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와 반성으로는 인생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선생님, 오늘 질의응답 시간에 잠시 들은 살아온 이야기들, 참 고생하셨습니다. 그 고생한 분을 제 가슴으로 한번 안아 드릴게요......


진짜 스승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만나십시오.





네, 진짜 스승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만나가겠습니다.


무더위가 작열하는 8월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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