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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1. 산청모임(68. 하늘과 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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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83.♡.203.138) 댓글 0건 조회 7,007회 작성일 17-01-15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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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 억눌려 있는 잠재성과 기억이 바로 그림자다. 그림자는 우리 안에 잠재된 또 다른 인격, 또 다른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측면들이 묻혀 있는 쓰레기 매립지인 동시에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이 보관되어 있는 일종의 지하 금고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자아의 본성에 속한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에 있을 뿐이다. 그림자는 신화에서 종종 괴물이나 용으로 등장한다. 그림자는 우리가 무의식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연으로부터 올라와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자를 마주하기 두려워하며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지 않는다. <조지프 캠벨>

안데르센은 자신이 관찰한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동화로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주옥같은 그의 동화들 중엔 '그림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그림자가 주인을 떠나 더 강한 존재가 되어 주인을 살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도 제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모습을 보지 않으려하고 외면해 버리는, 그래서 그것이 그의 무의식으로 밀려나버리는, 다른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은 행위를 뻔히 아는데도 그 자신만은 그 사실을 모르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데요, 이런 분들의 공통된 특징은 주변 사람들과 소통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하고 시인하는게 정말로 정말로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올라오는 것을 시인하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2017년 1월 오늘 강의에서, 비원 김기태)


●삶이란, 자기가 누구인가를 보다 깊이, 또 정확히 알게되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영원한 것은 여러분 자신을 떠나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깊이만큼 삶은 참 자유롭고, 풍요롭고, 또 즐겁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은 일단 제껴놓고, 불충분하고 부족하니, 밖에서/지금이 아닌 미래에서 찾는데, 영원한 것은 결코 지금 여러분을 떠나있지 않습니다. 지금 없다가 나중에 얻는 것은 전부가 가짜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참된 것들, 마음의 평화, 나다운 삶, 행복, 이것들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지 않고 왜소하지 않습니다. 아, 나라는 존재가 이런 존재였구나!를 이 시간을 통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덕경 68장. 하늘과 짝하다

훌륭한 장수는 무력을 쓰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사람은 맞서지 않고,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자신을 낮춰 아래에 둔다.
이를 일컬어 다투지 않는 덕이라고 하고, 사람을 부리는 힘이라고 하며, 또한 이를 일컬어 하늘과 짝한다고 하니, 
예로부터의 지극함이다. 

●하늘과 짝하다는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다. 하늘의 이치와 하나가 되다, 자기자신(참나, 진아, 진정한 나)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이치는 곧 우주자연의 이치입니다. 생로병사, 모든 자연현상,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의 변화, 여기 산청에 오면 늘 듣게되는 장닭 우는 소리, 아침이 오고 저녁이 되는 것, 달이 차고 기울고 또 그로인한 밀물과 썰물, 오늘 갑자기 추워진 날씨,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땅이 봄이되면 부드러워지고 온갖 생명들이 그 부드러운 흙을 뚫고 올라오는, 죽어있는 듯이 보이던 마른 가지에서 연초록의 새싹이 돋아나는, 또 봄이면 동물들이 짝짓기를 하느라 바쁘고, 까치들이 집을 짓고, 제가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매과의 새가 짝짓기를 하고 서로 집을 짓는데, 부지런히 집을 짓다가 어느순간 수컷이 나무가지에 앉아 한가로이 빈둥거리고 한숨이나 쉬고 있으면, 그걸 본 암컷은 화가 나서 수컷위로 날아가 수컷을 막 쪼고 꾸짖는 것 같은, 그러면 수컷은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이는, 사람과 사는 모습이 똑 같습니다. 이것도 또한 우주자연의 이치입니다. 원앙새는 호수에 사는데, 둥지는 산속 나무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만들어 새끼를 낳고 기릅니다. 자기 가슴의 털을 뽑아 둥지를 만들고 알을 품습니다. 그러다가 밖을 잠시라도 나가려고 하면 둥지의 알을 털로 살포시 덮어주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새끼들이 때가되어 부화하면 어미가 나무에서 땅으로 뛰어내려 새끼들을 짹짹하고 부르면 새끼들도 덩달아 뛰어 내립니다. (삶의 첫출발에서부터 '용기'가 필요하고, 이들이 살아가면서 또 얼마나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게 될까요라고 나레이터가 의미있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물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이것 또한 하늘의 이치입니다. 모든 것이 자연현상이고, 그 어떤 것도 우주자연의 이치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도 우주 자연의 이치 속에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우주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겨울 냇가로 사진을 찍으로 갔는데, 이게 제 바지에 자꾸 엉겨붙어 저를 성가시게  했는데요, 자꾸 엉겨붙어 성가시게 하는게 보배라고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아버지를 용서할까?
                       <딕 로리>

어떻게 우리는 아버지를 용서할까, 혹 꿈속에서?
우리가 어릴 때 늘 홀로  버려둔 것을, 
아니면 영영 버리고 떠난 것을?
아무 화를 낼 이유도 없는 때에 불같이 화를 내어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하거나, 불안에 떨게 한 것을?
엄마와 이혼해서, 혹은 이혼하지 않아서?
너무 지나치게 애정을 가져서, 아니면 문을 닫아 버리거나,
벽을 사이에 두고 말을 하거나, 아예 침묵하거나, 혹은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해서?
(................)
만일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하고 나면,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가슴속엔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천불이 난다'하며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치며 분노를 내뱉는 모습을 보이셨고, 아버지를 알콜 의존증으로 만든 것도 바로 그 증오와 분노였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불안에 떨며 보고 자라다, 사춘기쯤, 난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고, 그 다짐은 아버지가 밥드시는 사소한  모습까지 부정하는 극단적인 증오로 이어졌습니다. 전 결국 증오를 상속받았고, 아버지의길을 반복해서 걷는, 거기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윤회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 삶의 첫 번째 역설입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으로 정확히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가게되는......
 그리고 그 증오의 길은 결국 이곳 산청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저를 끊임없이 찾아오는 마음의 고통을 직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지속적으로 반복되던  마음의 윤회/고통이 하나하나 끊어져 나갔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결코 다가서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내적성찰의 길을 '증오'가 안내했습니다. 그러니 이게 제 삶의 두 번째 역설입니다. 역설이 역설을 낳고 그 역설이 저를 진리의 문턱으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이제 진리의 문턱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순전히 저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그러니 저는 나쁘다고 규정지어진 것을 나쁘다고 단정지어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좋은 것이라 말해지는 것을  마냥 좋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안에 있는 우주 자연의 이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턱수염이 나고, 잠이 오고, 배고프면 먹고, 똥싸고 오줌누는, 주름살, 늘어가는 것, 이 늙어가는 현상도 참 묘합니다. 숨, 호흡하는 것, 한시도 멈추지 않는 심장의 박동, 정자가 난자를 찾아가고 수정이되고 그것이 엄마배에 안착하고, 소화기관이 있고 두뇌가 있는 아기로 자라나는 것, 그렇게 다 자라고 나면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허파로 호흡하게 되는 충격, 그 충격이 아이에게는 굉장히 크다고 합니다. 또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귀로 듣고, 울대가 울리며 말을 하는 것, 배가 고프면 울고 그러면 엄마가 반응해 젖을 먹이는, 육체가 자라고 성장하고 늙어가는, 그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우리가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갑니다. 단 한순간도 우주자연의 이치를 벗어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밥상위에 오르는 반찬, 밥 한알 조차도 우주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겐 '마음'이 있습니다. 쓰라림, 아픔, 우리 몸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동하는데, 우리  마음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속성은 예측불가능에 있습니다. 어제 편안하게 잠을 잘 잤는데, 중간에 깨어 화장실에 다녀온 후 자리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오만  생각이 찾아오는 것,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온갖 생각들이 다 일어납니다. 내 온 마음이 죽끓듯 일어나는, 이 속성자체가 통제가 안되는데, 이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 살 수 없고,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모든 권능과 사랑과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늘과 짝해있으니까요. 우리는 이미 영원히 안락한 집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이미  부처입니다. 여러분이 찾는 근원의 것을 여러분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자유속에, 완전한 충만, 생로병사도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평화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때그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이 에고(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이 참 신비롭습니다. '에고'라는 것은 하나의 착각/생각일 뿐입니다. 자꾸자꾸 반복되어서 경험되는, 하나의 감정, 느낌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이게 마치 진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고, 그래서 그것과 동일시되면 '나'가 형성됩니다. 반복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하나의 실체가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어릴적 엄마가 돈을 주고 심부름을 시키면 심부름을 가다가, 길에서 마주치는 동네 형들이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줘 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돈을 남에게 함부로 주었다고 엄마가 나무라고, 그것이 반복되면 남에게 함부로 돈을 주어선 안되는구나 하는게 형성되는, 이렇게 이분은 초등학교 저학년때까지 '나'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괴롭히면 아 그런가보다 하다가, 머리카락을 뽑으면 더 심하게 괴롭히니까 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이렇게 '나'는 자신의 재산과 신체를 지키게하고 계획하게 하는, 그것이 생겨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와달리 늘 부모로부터 거부당했던 사람들은 경험들이 또다른 모양으로 형성됩니다. 남의 눈치를 보게되고, 긴장하고 벌벌떠는. 처음에 비가 내리면 땅에 그대로 흡수되어 흔적이  남지 않지만, 흡수되는 양 이상으로 비가 내리면 그 빗물은 흐르게 되고, 그렇게 흐르면 땅에 골이 파이게 됩니다. 이제 다음부터 내리는 비는 모두 그 골을 통해 흐르게되고 그러다보면 그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에고이고, 기억의 집적이고, 생각의 집적입니다. 자꾸 반복되어 형성된, 패턴화된 것으로, 자동적으로 상대를 대하고 상황에 반응합니다. 
 이 '나'라는게 생기고 나서도, 마음자체로는 여전히 기뻤다, 슬펐다하는, 이 '나'가 형성되고 강화되더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은 자기 역할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나'를 떠나있지 않습니다. 에고 자체가 일정한 느낌, 경험을 되풀이 하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형성 자체가 굉장히 협소하고 제한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에고는 '동일시'를 잘합니다. 제한된 태생을 가지고 있고 동일시를 잘하는 이게 나중에는 주인 노릇을 하고 마음의 작용을 해석하고 존재의 주인 노릇을 하려 듭니다. 
 이 제한되고 실체가 없는 '에고'의 눈으로 마음의 작용을 보기에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이 에고의 태생자체가 제한되어 있기에 전체성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패턴화되고 제한된 시각을 지닌 에고로 볼때 늘 불충분하다, 완전하지 않다, 또 자기와 자기 아닌 것으로 분리를 합니다. 자기 동일시를 잘해서, 기쁘고/당당한 것은 동일시를 통해 '나'를 지키고 확장하려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때 '나'아닌 것이 생겨나게 되고, '나'아닌 것은 배제를 통해 자신을 지키려 합니다. 패턴화되고 제한된 것으로 보기에 이것은 보다 완전한 자기를 찾아가게 됩니다. 흔들리고 부족해 보이는 것은 평화가 아니야하며, 보다 더 완전한 쪽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언제나 평화로울텐데하며 부족한 자신을 고치고 조절하고, 무엇인가를 미래에 얻으려하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미래에 가서 완성하려드는, 이게 모두가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지울 수 없는 첫 번째 인상은 태어나는 순간이다. 허파가 작동을 시작하기 전에 신생아는 질식의 느낌과 충혈로 인하여 짧은 시간 동안 공포에 사로잡히는 체험을 한다. 이러한 현상(숨막힘, 혈액순환의 장애, 현기증, 또는 일시적 의식상실)은 갑작스러운 공포를 느낄 때마다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어머니가  모든 것을 예상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세계가 아기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정확히 상응하지 않는 상황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분리과정에서 오는 그 무시무시한 첫 충격의 인상, 즉 출생의 충격이 다소간 강렬하게 다시 활성화된다. 어머니의 이미지가 아기의 의식 속에서 점차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할 때, 그 이미지는 이미 행복의 느낌만이 아니라 위험, 분리, 무서운 파괴의 환상과도 연결된다. <조지프 캠벨>

이 세상 그 누구도 상처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격과 공포로 조건지어지는 존재가 되고, 그것은 우리의 두뇌에 '각인'됩니다. 그렇게 각인된 충격과 공포는 일정한 조건이 되면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우리가 그것을 회피하는 행위를 하는 한 그것은 복리식으로 증가(가토 다이조)됩니다. 그러니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그 충격과 공포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찾아올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껴안고 파고들어 그 조건지어진 것을 부수어 버림으로써 우리는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마음은 어쨌거나 자기 역할을 다합니다. 긴장하고, 쫄고, 흔들리는, 자기가 만든 목표를 참나와 동일시해서 참나가되기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는 중에도 이 마음은 자기 역할을 다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그렇게 하는게 지금 참나를 떠나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매순간 경험하는 이게 진아입니다. 그런데 에고가 생기면서 그것을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조절하고 통제함으로써 바꾸고 고치려듭니다. 쩔쩔매는 것이 진리인데, 에고가 그것을 고치고 바꾸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에고가 가르치는 대로 부족을 충만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집을 떠나면서 집을 구하는, 이미 부처가 부저되려고 하는, 파도 하나하나가 이미 바다입니다. 여러분은 바다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에고는 자기가 근원과 분리되어 있다고 착각해서 근원을 찾아갑니다. 이 끝없이 목마를 수밖에 없는 길을 착각 때문에 그렇게 갑니다. 영원한 충만속에 있으면서도 충만을 찾아 떠나기에 목마르게 됩니다. 이렇듯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중에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을 빼고 없애려하는 것이 전쟁이고, 이 전쟁은 끝이 없습니다. 

●'훌륭한 장수는 무력을 쓰지 않고', 훌륭한 장수는 깨달은 자입니다. 하늘의 이치는 중생 이대로 보리입니다. 그러니 지킬 나, 적이 없고 그렇기에 무력을 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에고가 생기면 지키려 들고, 소유하려 들기에 무력을 쓰게 됩니다. 

●초라함이 올라오면, 아직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하며 자신에게 화를 내게 되는데,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내지 않는다', 초라함은 화를 낼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겨야될 대상입니다. 그것이 나를 살립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쓰라림, 고통, 찢기는 듯한, 그런데 그 찢김이 상처를 영원히 치유합니다. 상처를 만나는 것은 '절대'를 만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만난다는 눈부심을 잘 모릅니다. 자기를 만나본적이 없기에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너무 쉽게 자신을 버립니다. 지금을 버린다는 것은 영원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만난다는 것은 죽을때까지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의 보잘것없는 것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려들면 정말 하루종일 이야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적을 잘 이기는 사람은 맞서지 않고', 나와 나아닌 것을 에고가 만드는데, 에고가 없으니 나와 나 아닌 것이 없고, 그러기에 애초에 적이 없습니다. 이 순수한 있음, 모든 것이 나입니다. 맞서 싸울 적이 없습니다. 에고가 없고 순수한 있음만 있는, 그래서 조절하고 통제하려 하지 않기에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자신을 낮춰 아래에 둔다'고 합니다.
 
●내 마음에 쏙 들게 자신을 잘 다스리는 방법은, 그 다스리려는 것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제한된 에고가 보기에 무질서해 보이는 것, 그것이 질서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늘과 짝해있고, 우주의 지혜와 사랑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 마음, 진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지금입니다. 기쁨이 오면 그것을 즐기십시오. 괴로움과 절망이 오면, 그때가 기회입니다. 그 고통과 절망이 나를 진리로 이끄는 전령입니다. 내가 떠난 적이 없는 근원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전령입니다. 진아는 지금 있는 것입니다. 결핍, 초라함이 왔을 때, 에고는 내가 너무 모자라다하면서 그 자리를 튀어 나가고 자신을 정죄하는데, 그짓을 하지 않는 것, 무엇인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에고는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결핍이 왔을 때 열심히 수행하는게 아니라, 그냥 그대로 있는 것, 그것이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못믿으니까 자꾸 지금을 바꾸려고 합니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벗어나려 자꾸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하고 약속하고 만나는데, 그 행위를 멈추고 외로움 속에 있는 것, 그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 것, 그렇게 내가 나를 정직하게 만나면, 있는 그대로를 만나면, 이 에고가 옅어지고 점점 사라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처들이 진실로 얻을 수 있는 자그마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원래 이대로이니  얻을만한 그 무엇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으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매순간 존재하게되면 일상이 달라지고, 신비와 기적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 일상속에서 하늘과 짝하는 것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 붙는다/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김지하>
습지에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밟힌 풀숲위로 번지는 물기처럼 내 내면에서 올라오는 분노, 뱉어내고 뱉어 내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분노, 그냥 나로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나'를 끊임없이 강요당한, 내 고유한 자율성을 침해당한 것에서 오는 분노가 상상이상으로 뿌리가 깊고 큽니다. 아주 오랫동안 쌓여온 차갑고 단단한 분노에서부터 지금 막 올라온 산뜻하고 온기가 있는 분노에 이르기까지, 그 갖가지의 분노들을 만나고 내 안에 풀어 놓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당위'를 만나면 그 당위를 부셔 버리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부셔 버리고, 그것이 비록 무게있는 관계일지라도 그 관계를 부셔 버립니다. 그 무엇도 나를 구속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무엇에도 나를 가두어두지 않겠다는 듯이.....


<질의 응답>

●제가 아는 분이 있는데, 이분은 아버지가 시장이었습니다. 시장이면 집이 당연히 잘 살았을텐데, 시장인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를 못하시는 분이었고, 늘 재산을 거지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안이 가난했고, 엄마가 자식들을 맛있는 반찬으로 배불리 먹일 수 없었고, 늘 밥한그릇에 가장 한종지가 자식들의 식사였습니다. 식사가 이렇다보니 자식들은 늘 투정을 심하게 부렸는데, 이분만은 그런 식사에도 불평없이 조용히 밥을 먹었고, 이런 모습에 엄마가 '넌, 참 어른스러워'하며 칭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 칭찬으로 인해 '나는 늘 어른스러워야 해'하는 것으로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삶을 살게됩니다. 그러면서 삶이 참 불행해져 버립니다. 결국은 입이 돌아가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너는 참 어른스러워'하는 칭찬에 갇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보게되면서 삶이 치유되게 되는데, 이분에겐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엄마 말을 참 듣지 않고, 엄마가 꾸짖으면, 탕탕 무엇인가를 치면서 삔질삔질한 모습을 보이고, 또 어느날엔 이분이 딸에게 차 한잔 가져다 달라고 말했는데, '내가 왜 해야해!'하는 대답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딸에게 직선으로 다가가선 딸의 뺨을 '철썩' 때리게 됩니다. 이분은 절대 누군가를 때릴 사람이 아니고, 또 자신이 누군가에게 뺨을 맞아보았기에 절대 자신은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분인데, 그렇게 딸에게 '못된년!!'하면서 뺨을 때립니다. 그런데 참 묘한게 다음날 그 딸이 자신의 뒤로 다가와 껴안으며 '엄마,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이 해서는 안될 짓인지를 알면서도 하게되는, 자신의 행위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하는,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딸의 경우가 그러했고, 엄마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매가 그것을 바로 잡았고, 딸은 그것을 고마워한 것입니다.)


●강물이 흐를 때 밑에 돌부리가 있으면 거기에 물보라가 일어납니다. 그게 없으면 강물은 자신이 흘러가는 것도 모르는데, 그 돌부리가 있음으로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고, 그 물보라를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또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돌부리에 걸릴 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은데 실은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게 됩니다. 박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저는 관계속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저는 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유지도 못합니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보단, 이사람은 이게 문제고 저 사람은 저게 문제야하며 관계를 끊고, 그리고 '나는 혼자가 좋아', '나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사람이야, 그러니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없어', '난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고 수행하는 사람이야'하며 관계를 잘맺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얼마전에는 저 사람들은 약삭빠르고, 정치적이라고 판단했었는데, 어느순간 그분들이 그냥 참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제가  관계맺기를 두려워하고,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고 빠져나가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구나, 내가 항상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었구나, 상대방이 나를 내치기전에 내가 먼저 상대를 내치는....그런 자신....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화살이 꽂힐 과녁이 없을 것이고 괜찮을 것인데, 내가 상대방에게 사과할 때 내 자존심을 상해하는 그런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결핍이 많으면, 즉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면, 야단을 맞으면, 그 아이는 자기가 거부당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 후배중에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스펙이 대단한 사람이 있는데, 이 친구가 학교에서 전교 2등을 하고 집에가도 아버지에게 칭찬한번 받지 못하는, 그게 이 친구에게 결핍이 되는데, 늘 자신이 부족해 보이는, 억압이  많고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부족하다'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한참 멀었어~~'하는 건데, 긍정적인 면에서 보자면, 한 명의 개체가 보다 나은 존재가 되려 노력할 수 있는 큰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관계에서 벗어나서 그 결핍을 외면하려하기 보단, 관계속에 들어가서 그 결핍을 느끼고 자신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 부족함을 통해 자신을 조금더 직시함으로서 성장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관계', 지금껏 살아오며 제대로 관계를 맺어 본적이 없는, 진심으로 관계를 맺어본적이 없는, 자신이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그런 자각을 통해 '관계'속으로 돌아올 수 있는, 관계라는 삶의 숙제속으로, 그 관계를 통해 배울 수 있는게 너무 많습니다. 관계를 외면하고 혼자있을 때보다 훨씬 힘들어질 수 있겠지만, 그 관계속으로 들어가 보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그 관계속에 있어보면 그 속에서 배움이 있게되는.... 늘 평화롭기만을 원하면 삶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삶은 늘 배움입니다. 같은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고통, 결핍, 힘겨움을 통해 정말 많이 성장하게 됩니다. 치를 것은 치르고, 져야할 짐은 지는 것을 통해, 관계속으로 들어와서 관계를 통해  배우고 성장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고 말하시는데, 그렇게 말하기위해 108배, 명상, 기타 수행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완전하다는 것을 알기위해 그런 수행의 과정이 필요하지않습니까?, 내 안에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지금 이순간이 완전하다는 것을 피부로 온전히 느끼기위해서 무엇인가 수행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묵언수행이라는 것도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모두 보기위해서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방법을 찾으면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호흡, 위파사나를 통해서는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대로 부처입니다. 그러니 무슨 방법으로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길없는 길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천국에 있는 사람이 천국을 찾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현재가 싫어서 다른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을 힘들게 하는게 무엇입니까?, 지금 이곳이 당신에게 천국이 아닌 이유를 말해 보십시오.(솔직해 집시다).........(이분은 이곳이 처음이고, 조금 어색하셨을테고, 당연히 자신의 두려움을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부부을 결국 말하지 않으셨고, 다만 자신이 화를 잘 지켜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화가 올라왔을 때, 그것이 한참 진행되고나서야 알게됩니다. 화가 올라오면 거기에 머물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것에 머무는 첫경험을 해야 감을 잡고 그곳에 머물 수 있을텐데, 그 경험이 없으니 화가 한참 진행된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일을 없애려하지 마음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없애려고하지 일을 없애라고 하지 않는다.'
'일'은 화/분노이고, '마음'은 분별심입니다. '놓치지 않고 지켜 보아야한다'는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런 전제가 없으면 잡거나 놓치거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도 깨닫기전에 놓치지 않고 지켜보려했고 그렇게 하면 할 수록 자꾸 놓치게 되었고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는 제 자신을 완벽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된게 아니라, 지켜보려고 하는 그 놈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에겐 '지켜보는 자'가 없는 '지켜봄'만 있습니다. 저에겐 놓침과 놏치지 않음이 같습니다. 남자들은 자꾸 잔머리를 굴립니다. 그래서 제가 '저는 목말랐기에 그 고생을 했고, 온갖 수행을 했고, 노력을 했고, 결국 노력과 수행을 통해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력과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하고 말을 하면, 남자분들은 그래도 그런 수행과 노력을 했기에 깨달음을 얻지 않았냐고 말합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분들은 선생님은 그런 수고와 노력을 통해 깨달음이 그것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걸 말해주고 계시니, 그것만 쭈욱 빨아버리면 되는 것이구나 하고 받아들입니다. 그 여성분이 진실로 지혜롭습니다. 진리는 가서 도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분노를 억압하려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려 하는데, 그래서 이것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데, 방법으로는 결코 갈 수 없습니다. 지켜보려하는 한 절대 지켜볼 수 없고, 그렇게 자꾸 지켜보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인간의 의식이란게 참 묘합니다. 지켜보려 노력할수록 자꾸 놓치게 됩니다. 노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려하는 것 모두 에고의  짓입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혜는 세상이 정한 가치에 무게를 두지 않고, 어리석은 자는 주변 사람과 소통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 감정에 함몰되어 버립니다. 제 의식수준에서는 받아들이는게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파사나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제 행동하나하나를 지켜보며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남편의 불합리한 요구에 맞서 필요한 말을 할 수 있었고, 삶이 늘 불안했는데 지켜보는 순간 불안이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받아들이는게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고, 해나가고 있는데, 잘 하고 계십니다.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그냥 모른채로 가십시오.또 '애쓴다/애쓰지 않는다'하는 그런 구분도 내려놓고 지금 자신이 가는 길을 그냥 가 보십시오. 지켜보는자가 처음에는 조금 효과가 있지만, 나중에 힘들어지게 됩니다. 결국은 '지켜보는 자'가 사라집니다. 그럴지라도 당신의 길을 한 번 가 보십시오. 


○해외여행을 갔다가 귀국하자말자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북받치고, 너무나 슬펐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슬프지만은 않고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제가 놀고 싶은 것 다 놓고 그래서 집에도 늦게 들어가는, 그래서 개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고, 그것이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을 때 그 개가 생각나고 늘 제 발목을 잡는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서 한달이면 한달 떠나 있고 싶기도 한데, 그러면서 제가  즐겁게 웃고 놀았던 그때 개가 죽었다는게 너무 죄스럽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다 저를 욕할 것같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 때문에 항상 발목을 잡힌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한편으로 안도감이 드는데, 그러면서 개가 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제 안에 있었던게 아닐까하는, 또 내가  생명하나도 제대로 잘 돌보지 못하는, 내 가슴이 너무 메마른게 아닌가하는, 속이 시원하면서도 불안한, 비난받을 것같은 두려움, 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자책이 계속 올라오면 한 번 계속 자책해 볼까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여기에 다시 나왔습니다. 

●저는 김선생님이 너무 인간적이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놀다가, 슬픔이 오고, 자책감이 오고, 속시원하기도 하고, 비난받을 것같은 두려움, 온갖 감정들이 오고가는, 이 마음은 여기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과 같습니다. 김선생님은 자기안에 일어나는 감정을 진솔하게 잘 드러내십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개가 죽은 지금, 어딘가를 가서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한 1주일 정도는 어디 깊숙한 곳에 쳐박혀서 슬퍼해야할 것같은데, 저는 누군가를 진솔하게 만나고 사랑하고 하는게 없는것 같습니다. 

●김선생님의 말을 들으면,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이고, 이대로 굉장히 자유롭고 행복한데, 이것 이외에 뭔가 당위, 마땅히 해야하는 무엇인가를 붙잡는 것 같습니다. 모범답안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지금 올라오는 것을 100%살지 못합니다. 

(제 이해가 부족하고 빠뜨리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이 글만으로는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배우길 원하시는 분은 직접 오셔서 질문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정확하고 바른 길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잠에서 깨어라
잠든 네 가슴에 친절을 베풀어
광활한 빛의 벌판으로 데리고 가라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하피즈>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길 바라며....


2월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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