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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산청모임후기(44장. 진정한 만족은 어떻게 오는가?)

작성일 15-01-1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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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21.♡.250.19) 조회 8,861회 댓글 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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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고양이/김주대
 
새벽
아버지의 칼을 피해 도망치던 어머니처럼
고주망태 아버지의 잠든 틈을 타 잽싸게 칼을 숨기던 형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녀석의 그림자
돌아보면 모든 속도가 슬프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비록 한달만이지만 해가 바뀌고 또 해가 바뀌었다는 느낌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뵙는 얼굴들이 모두 예뻐지고 고와지고 밝아져서 참 좋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바뀌어 질수록, 나무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크게 자라고 더 많은 가지를 뻗고 꽃을 더 많이 피우고, 그늘을 더 많이 드리우며 점점 그 역할을 더 크게 하듯이, 우리의 영혼과 삶도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계절이 바뀔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더 많이 깊어지고 밝아지고 성장하고 배우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더 풍요로워지고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지고 덕스러워지고, 향기가 나고 그래서 나무에서 작은 새잎이 봄에는 파릇파릇하게 피었다가, 여름에는 짙푸르게 되고, 가을에는 노랗게, 빨갛게 너무나 예쁘게 단풍들었다가, 제때가 되면 툭하고 아무런 미련없이 자기 역할을 다하고 떨어지듯이 우리 인생도 우리 몸을 벗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자라고 성장하고 배우고 자기를 더 많이 알아가고, 자기 자신에게 좀 더 깊이 닿고, 그럼으로써 성장한만큼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참 좋았다!'는 한마디 남기고 죽게 됩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갔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 여러분들 더욱더 건강하시고 바라는 모든 일들이 다 넉넉히 이루어지는 풍요롭고 감사하고 행복한 한해가 되길 바라면서 늘 해왔던 것처럼 오늘도 노자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지금 여기,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안과 밖 그 모두에 있는 아름답고 눈부신 보물들, 어디에나 있는 그 기쁨들을 캐내어 가지는 귀한 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있는 것을 사랑할때, 고통은 끝납니다. -바이런 케이티-
 
 
 
44장. 진정한 만족은 어떻게 오는가?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귀한가?
내 몸과 재물, 어느 것이 소중한가?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인가?
이런 까닭에 애착이 심하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
 
누구나 만족하기를 자기 삶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게 살다가 가기를 바랍니다.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것은 한번 만족하게 되면 영원히 만족하는, 만족했다가 꼬꾸라지는 것이 반복되는게 아니고 한번 해결되면 영원히 해결되는, 한번 만족하면 영원히 만족하는 그 길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진정한 만족, 영원히 만족하는 이것을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해탈, 해탈은 어떻게 오는가?, 이 해탈이라는게 뭐냐면, '니르바나' 즉 번뇌의 불이 꺼지다, 마음의 모든 구속과 굴레가 떨어지고, 고통과 괴로움이 끝이 나서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영원히 괴로움과 굴레가 풀어졌으니까 삶이 만족스럽고, 만족스러우니까 자유롭고, 자유로우니까 행복한 것이죠. 해탈은 어떻게 오는가?이렇게 해도 좋고 같은 말인데,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가?, 그리고 또하나 같은 말인데, 진리는 어떻게 오는가?, 사실은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한, 해탈은 어떻게 오는가?, 누구에게나 어찌하면 근본적인 의문, 갈증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내용중에도 나오겠지만, 그 진정한 만족은 밖에서부터 오지 않습니다. 밖에 있는 그 무엇을 내가 아무리 많이 가진다고 해서 진짜 만족한냐?,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만족은 밖으로부터 오질 않습니다. 밖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건 우리 안에서부터 온다는 건데, 이 안에서부터 온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요?.
 
해탈은 어떻게 오는가라고 말하니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언젠가 제가 한번 말씀 드린적도 있는데, 불교 선종의 신심명이란 책을 쓴 3대 승찬스님과 4대 도신스님입니다. 도신스님이 14살때입니다. 어느날 승찬스님이 기거하는 방문을 드르륵 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도신스님이 승찬스님께 묻습니다.
 
도신 : 스님, 부처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승찬 : (오호, 요놈봐라, 어린놈이...)야 이놈아 네 마음은 어떤거냐?
도신 : 잘 모르겠는데요.
승찬 : 야 이놈아, 네 마음도 모르는데, 부처님 마음은 알아서 무얼하려고?.
승찬 스님의 이 말은, 진리는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 있지 않다. 부처님 마음이 따로 있지 않다는, 우리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승찬스님의 질문을 알아 듣고 도신스님도 빙그레 웃습니다. 그 미소에 승찬스님이 기특하기도 해서 '야 이놈아, 네가 무얼 알았다고 빙긋이 웃느냐?', 그 질문에도 도신스님은 빙긋이 웃을 뿐이었습니다. 승찬스님이 다시 묻습니다.
 
승찬 : 또 할말이 있느냐?
도신 : 스님, 해탈은 어떻게 합니까?
승찬 : (어허, 이놈이...)야 이놈아 누가 너를 묶었더냐?
 
해탈이라는게 마음의 모든 구속과 굴레 묶임으로부터 벗어나서 영원한 자유에 드는 것이까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도신 : (얼떨결에) 아뇨, 안묶였는데요?!!.
승찬 : 묶여 있지 않는데 왜 다시 해탈을 구하느냐?!!.
 
도신스님은 승찬스님의 이 말을 들으면서 확 풀어지게 됩니다. 그리곤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걸 보고 승찬스님이 말합니다.
 
승찬 : 이젠 됐느냐!! 
 
 해탈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만족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묶여있지 않은데 왜 해탈을 하냐면,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만족을 구한다 그러면, 만족할 수 있는 조건과 상황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되면, 도달하면, 깨달으면 어떤 존재가 되면하고 조건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되려고, 또는 그런 상황으르 만들려고, 부족하고 못났다고 생각되는 자기를 만족할 수 있는 존재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미래 속에서 이루어지리라 생각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NO!!!. 해탈과 만족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질적인 변화를 통해서 옵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의 질적인 변화란 무엇인가요?. 이것은 또 어떻게 오는 것일가요?,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이 삶속에서 어떻게 누리게 될 수 있을까요?. 이제 그 이야기를 노자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어가 보겠습니다.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내 몸이 더 귀하다고 여러분이 방금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몸과 재물,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내 몸이 더 소중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삶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진리는 원래  이렇게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쉽게 대답을 하건만, 우리의 삶은 과연 그렇게 쉬운가요?. 내가 있고 명성과 재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삶을 살면, 명성과 부가 없으면 '나'는 없고, 무가치한 패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 내가 있어야 명성과 부가 있게 되는데, 우리 삶에선 이게 거꾸로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젊어서는 몸을 바쳐가며 돈을 벌고, 명성과 부를 추구합니다. 그것 없으면 안돼, 그게 있어야 내 삶이 확정되고, 자유롭고 행복하고 인정받고 남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게되하며 애를 쓰고, 이렇게 쌓아둡니다. 그런데 늙으면, 몸을 버려가며 건강을 해쳐가며 얻었던 그 명성과 부를, 그렇게 애를써서 벌었고 쌓아두었던 그 부를 다 바쳐가며 건강을 지키려합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 몸한번 망가지니까 그동안 벌어 두었던 것들이 다 소용이 없고, 젊어서 벌어 놓았던 것을 다 뱉어내는 경우를 정말 많이 보게 됩니다.
 
내 몸이 있고나서 명성이나 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걸 단순히 좋은 글귀정도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알면 밖에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있고/없고, 얻고/잃고, 살고/죽고, 높고/낮고로부터. 왜냐하면, 내가 있고나서 삶이 있게되고, 내 삶이 있으니 성공과 실패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만 보게되니 그 속에서 '나'는 없게됩니다. '나'가 있으면 실패로부터도 배우고, 성공으로부터도 감사할 줄 알게되는데 내가 없고 성공과 실패만 있으니까, 실패하면 삶이 끝장나고 죽게됩니다. 실패하면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실은 하나도 잃어버린게 없는데, 실패했어도 난 여전히 여기 있는데, 누구에게나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이 진실하나만 '진실로' 알아도 삶은 참 가벼워집니다. 누구나 대답할 수 있고 알고 있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경우를 참 많이 봅니다. 노자의 두번째 문장처럼 심히 애착하고 자꾸 큰 대가를 치루는 길로 갑니다. 또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망하는, 우리 삶속에서 이런 경우를 참 많이 경험해서 더 말할 필요도 없는데 두가지만 더 말씀드려봅니다.
 
예전에 조선일보에 났던 기사입니다. 지방대학(대구에있는)을 나온 어떤 청운의 꿈을 품은 청년이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게되는데, 면접담당관이 하는말,
 
'촌에서 왔네?!!'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아닌데요, 저는 대구에서 왔는데요'
'으흥, 대구는 촌아닌가?'
지방대학을 나왔다고 무시한 것이죠. 그 청년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지방대학 출신의 한계를 생각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짜 열심히 일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도달하면, 많은 것을 갖추면 남들이 우러러보고 무시하거나 깔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 청년은 지방대학 출신으로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정말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많은 세월이 흘러갑니다. 청춘을 바치고, 주말도 없고, 하루일과가 끝나더라도 회식에 가야하고, 참으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그러면서 40, 50이 넘어갈 즈음, 어느 누구도 자신을 바라볼 때 무시하지 못할 지위와 부를 이루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참 어쩔 수 없기도 한데, 그 청년은 부를 쌓고 지위가 높아지면서 사람이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고개가 굳어지고, 차가워지고, 나는 이루었단 거죠. 아래 사람을 대하는 것도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되어버립니다. 이처럼 성공가도를 달리던 어느날 갑자기 배가 아프게 됩니다. 바쁘니까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그 통증이 점점 심해지니 동네 병원을 찾아가게 됩니다. 거기의사가 정색을하며 당장 큰 병원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큰 병원을 찾아갔는데 거기에서 위암판정을 받습니다. '암'이라는 말자체가 무섭지 않습니까?. 위암판정을 받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설마설마'하게되고 그러면서 갑자기 이 분의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위암판정을 받고 수술날짜를 잡고, 아무튼 세상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죽음'이란 단어를 생각하게 됩니다.수술날짜를 잡고, 또 수술하기 전에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는데, 수술이 잘못되어 죽게 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그 내용의 서약서를 보면서,
 
'아, 내가 결국은 죽기위해서 이토록 몸부림을 쳤던가!!!'
 
그러면서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쭈욱 떠오르는데, 아, 내가 잘못살았구나, 너무나 헛되게 살았구나,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내게 모든 걸 가져다 줄줄 알고 무조건 달려왔는데, 그래서 곧 잡을듯했는데 '죽음'이라니, 그러면서 막심한 후회와 한탄을 하게 됩니다. '심히 집착하면 크게 대가를 치르고, 많이 쌓아두면 크게 잃는다.'는 노자의 말씀처럼 또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인가?'는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사인을 하고 수술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사람 마음엔 이미 죽음이 왔습니다. 너무나 허무하게, 마취를 하는 그 순간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아, 이제 죽는구나....그러면서 수술을 하게 됩니다. 위장을 절개하고, 그런데 위암이 아니었습니다. 물혹이었던 거죠. 그래서 수술은 간단하게 끝나게 됩니다. 마취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주변에서 말소리가 들리고, 아내로부터 오진이었고 수술이 간단하게 끝났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참 이사람 입장에선 어이없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 순간 참 묘한 감정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고 회복되면서, 아 내가 진짜 죽은것이 아니고, 한번의 해프닝이었구나하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면, 이 사람 마음이 실제로 한번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건 동전의 양면이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앞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 죽음을 경험하면서 동전의 뒷면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강진만에서....
지금의 난, 내가 잘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남에게 지금의 나보다 잘 보이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 보이는게, 내 자신의 진정성, 힘이라는 걸 알아갑니다. 당혹스러울 때 난 당당하게 당혹스러워합니다. 무엇인가 두려워질때 난 당당하게 두려워 합니다. -여름가지 ㅋㅋ-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시지프스'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지프스가 제우스에게 죄를 짓고 커다란 바위를 뾰족산 정상에 올려 놓으라는 벌을 받습니다. 그 버거운 바위를 억지로 억지로 해서 산정상에 딱 올려놓으면 그 순간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립니다. 참 무의미한, 그러면 내려와서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 천형이고, 어찌보면 우리 인생같기도 한데, 끊임없이 노력해서 올려 놓으면 굴러 떨어져 버리는, 무한히 반복되는 무의미한 그것인데, 여기에서도 시지프스는 두 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위를 올려 놓고 굴러 떨어지면 또 굴려 올리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며 무한히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로인해 허무속에 빠져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마음은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고, 다시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시지프스가 내려가잖아요. 내려가는 그 사이에 바위를 올리는 동안에는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새들의 소리가 들리고, 하늘이 보이고, 그래서 그 흥겨움에 춤을 출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건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허무속에, 한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좀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각도가 달라지면, 똑같은 다람쥐 쳇바퀴도는 듯한 일상속에서 전혀 처음처럼, 언제나 새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행복은 저 멀리 있는게 아닙니다. 어떤 존재가 되고, 깨달음을 얻어서....NO!!!, 바로 여기, 우리가 느낄 줄 알고, 볼 줄 알고, 모든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내 가슴이 딱딱하게 굳어있고, 느낄줄 모르고, 들을 줄 모르면 모든건 무의미하고 똑같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슴이 어린 아이의 살같이 뽀송뽀송하면, 죽는날까지 우리 가슴이, 느낄줄 아는 마음이 굳어지지 않으면 딱딱하지 않으면, 각질이 되지 않으면, 아, 삶도 죽음도 '신비'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감사한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 나오는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정말 그렇습니다. 이분에게 그 해프닝은 동전의 양면을 보게합니다. 다시 회복되고 회사에 출근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지위가 자기를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프닝을 겪고 나서는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는 사람이 됩니다. 행복은 높은 지위에 있지 않다는 걸, 높은 계단에 올라서더라도 오히려 더 불행할 수 있다는 걸 알게됩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자기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조금도 알지 못했던, 그냥 열심히만 일하고, 지키고 이루어 내고, 남들과 나와의 관계만을 생각했는데, 눈이 확 바뀌니까, 지위는 높은데 그 지위 높음에 매이지도 않고, 늘 권위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고 하던게 바뀌어서, 운전기사를 뒤에 두고 차를 타기보다는 걷기도 하고, 모든게 감사하게 생각되고, 느낄 줄 알게되고, 아, 행복은 이룸/이루지 못함, 높고/낮음,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아침에 출근할때도 예전에는 회사입구에서 다른 사람들이 '오셨습니까?'해도 '난 니들하고 격이 달라!'하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회사에 들어가는데, 경비가 자기를 보지 못해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 경비에게 인사를 하게됩니다. 그동안 잘계셨냐고하면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한번도 묻지 않는 질문들을 시작하게 됩니다. 예전엔 결재를 받을때면 '이것도 한거야!!'하며 호통치기 일쑤였는데, 그래서 늘 쌀쌀하고 다른 사람들이 긴장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결재내용은 보지도 않고, 먼저 사람을 보며 '어떻게 잘 지냈습니까?'하고 묻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온기가 품어져 나오고, 그런 모습들이 회사에 소문이 퍼지면서 처음에는 좀 아프더니 맛이 갔구나 이랬는데, 그 한사람이 따뜻해 지면서 회사의 분위기가 다 바뀌게 됩니다. 참, 아름다운 삶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죠. 노자가 그랬습니다. '애착이 심하면 크게 대가를 치르고...'그래서 대가를 치루었습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게 뭐냐면, 다 잃었습니다. 다 잃을뻔 한거죠. 병이 걸리면서 다 잃어버릴뻔 했는데, 그 잃음이 그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준 것입니다.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인가?'정말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은 진짜 입체적이고, 알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사성어 '세옹지마'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여간,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인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또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부가 아들을 하나 두게 됩니다. 젊어서 이 부부의 남편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이 외동아들을 어머니 혼자서 키우게 되는데, 이 어머니가 생각하기를 아마 어릴적 상처가 많았던 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없이 아들을 홀로 키워야되니까, '애비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안 듣게 하려고, 강하고 훌륭한 아들로 키우려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애착이 심하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란 말처럼 참 알 수 없는게, 이분의 입장에선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게 진짜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고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정말 그렇게 하게 됩니다. 애가 길을 가다 넘어지면, 다가가 꼭 품어주면 되는데, 아들을 접촉하고 감싸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일어나, 강해야되!'하며 매정하게 아이를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런 엄마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어리니까 엄마 뜻대로 강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크고 서른이 넘으면서는 관계가 점점 더 멀어져버립니다. 엄마는 혼자서 애를 키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그런데 그 결과가 뭐냐는 거죠. 한집에 둘이서 같이 살지만 서로 대화도 없고, 서로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이게 엄마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대화를 시도하면, 아들은 오랫동안 쌓여온게 너무 많아서 대화자체를 거부했습니다. 아들이 늦으면, 엄마가 기다리는데, 전화를 해도 받지도 않고 연락도 없고, 그러다가 아들이 들어오면 엄마는 좋아서 아들에게 다가가는데 아들은 그런 엄마를 외면하고 말도 못붙이게 합니다. 엄마는 이러는게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일을 할 때 아들을 위해 일한다는 기쁨이 있었는데, 이젠 일하면서도 가슴이 아프고, 그러다 이 엄마에게 암이 오게 됩니다. 암이 늦게 발견되어 벌써 3기가 넘어서서 위태롭게 됩니다. 나중에 이 엄마가 하는 말이 뭐냐면, 이제 곧 죽어가는데 이 아들하고 대화를 한번 꼭 해보고 싶었답니다.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딱 한마디 있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정말 미안했던 겁니다. 나는 저 아이를 잘 키우려고 정말 애를 썼는데 결과적으로는, 정말 자기가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아무튼, 엄마는 병이 더욱 심해지게되고, 그러던 어느날 아들을 병실로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의 손을 잡고 딱 한마디 하게됩니다. '미안하다, 아들아!'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아들도, 뭔가 무척 마음이 복잡했겠지요. 그러나 그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엄마가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하는 말에 같이 눈물이 터집니다. 그러면서 둘이가 부둥켜 안고 웁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아들이 엄마에게 하는 말이, '엄마, 조금만 더 살아, 조금만 더 살아, 내가 엄마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를 줘!'하면서 아들이 엄마를 위한 마음을 내게 됩니다. 이러면서 아들의 마음이 확 바뀌어 버립니다. 늘 엄마를 위하고, 엄마를 위해 살게됩니다. 이 이야기의 말미에 엄마가 하는 말이, '암이라는 녀석이 참 고맙다, 그녀석이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아들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었겠나?!, 그 암이란 녀석 때문에 아들을 만났고, 아들과 가슴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비로소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암이 참으로 고맙다!.'고, 하여간 노자는 말합니다.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인가?'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가릴려면 확실히 가려야지ㅋㅋ.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낼때 비로소 다른 사람과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있다.
-용기를 내어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매달려 있을 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약하디 약한 자신'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과시하면 열등감은 복리 방식으로 증가해 간다.(행동은 그 배후에서 동기가 되어 있는 사고방식을 강화한다.)
-가토 다이조-
 
 

 
또한 이 말도 분명히 맞습니다. '애착이 심하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이 문장을 보면 '지금 이러하면 언젠가 미래엔...'이렇게 되잖아요. 말하자면, 애착이 심하면 미래 언젠가 큰 대가를 치른다. 많이 쌓아두면 미래 언젠가 크게 잃는다. NO!!!, 그렇게 하지 말고, 지금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지금 이 진실, 진정한 만족을 알게되면, 내 마음 안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모르는 동안에 치루어야 할 그 많은 아픔들을 지금에서부터 치루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진실을 지금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냥 존재할 줄 아는, 우리 마음속의 질적인 변화를 지금 맞이하는, 다시 말하면 애착이 심하면 나중에 대가를 치르는게 아니라 지금에서부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많이 쌓아두면 나중에 잃는게 아니라 지금에서부터 잃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나중에 그 사실이 드러날 뿐인 것이지. 지금 이 진실, 마음의 질적인 변화가 오고, 삶의 실상을 알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나누며 살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지금 우리 마음안에 질적인 변화가 오게 할 수가 있을까요?.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족한 줄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이렇게만 읽으면 '그래 맞아!'하고 끝이 납니다. 그냥 하나의 좋은 교훈, 공감으로만 끝이 나고 맙니다. 그래서 정작 내가 삶을 살아갈 때 노자의 말처럼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좋은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를 듣고, 아, 참 좋은 내용이네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진짜 내 삶이 바뀌는, 다시 매이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는, 지금 내 마음에서 질적인 변화가 와서 감사하고 행복하게 사는게 중요합니다. 도니 깨달음이니 오만가지 아야기를 다해도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저번에도 한번 말씀 드린 것 같은데, 인도에 끼란바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끼란이란 사람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평범'입니다. 진짜 눈떠보면 지극히 평범해집니다. 이 끼란은 15년동안이나 오쇼 라즈니쉬를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마음을 냈으면, 아무튼 자기가 생각할 때 가장 소중한게 깨달음, 진리입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자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대부분을 깨달음을 얻으려는 데 쓰게 됩니다. 그래서 늘 아쉬람에 가서 오쇼의 발밑에 있게 됩니다. 또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아주 값비싼 유향으로 예수의 발을 자기의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 싯겨주었던 막달라 마리아(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하며, 그 돈이면 불쌍한 이웃들을 참 많이 도울 수 있을텐데 이게 무슨 짓이냐며 꾸짖습니다. 이때 예수가 말합니다. 그가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녀가 내 장사를 지낸다. 제자들이 이해하라 수 없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불쌍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오래 있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심정으로 이 끼란이라는 사람은 오쇼의 설법을 듣고 오쇼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렇게 오쇼를 따르며 지복을 느끼고 자기의 삶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오쇼가 미국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늘 오쇼를 따라다니던 끼란이 이번엔 무슨일인지 오쇼를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 남게 됩니다. 비록 오쇼는 없지만 자신이 늘 자리했던 아쉬람의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있어보니, 처음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메말라 갔습니다. 불안해지고, 허허롭기 시작하고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알게됩니다. 누군가가 있음으로 해서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지는 것은 가짜다. 아,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구나, 나는 항상 스승의 진리의 빛아래, 늘 그 말씀을 들으면 내가 진리가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참 15년동안 헛짓했구나하며 집으로 갑니다. 정말이지 있다가 사라지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영원한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끼란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가 깨달음을 추구하느라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밥을 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등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오쇼가 아쉬람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듣고도 오쇼를 보기위해 다시 아쉬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끼란은 집에 머물렀고, 일상사를 살다가 깨어납니다. 깨어나서는 오쇼가 알던 그 자리, 늘 오쇼를 통해 듣기만 했던 그 자리가 자기의 삶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냥 행복했고, 자유스러웠는데 희한한건, 세상의 이치가 그러한데, 꽃이 피면 어디에선가 알고 벌과 나비가 날아오듯이, 청소만하던 끼란에게도 어느날부턴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끼란의 설법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면, '족한 줄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를 읽고서 그래 많이 집착하면 많이 잃고,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으니 만족하며 살자하고 생각하지만 진짜 살아가는 삶속에서 그게 되느냐 말이죠. 중요한건, 공감과 공명, 아참, 좋은 말씀 들었다, 혹은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하고 다짐하는게 아니라, 질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직접 바뀌어서 다시 갈구하지 않고, 다시 목마르지 않고, 다시 메마르지 않는 존재, 늘 찾고 구하는 자에서 누리는 자, 나누는 자로 바뀌는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진실, 인류이 역사상 수없이 많은 인생의 흥망성쇠를 통해 알게된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밖으로부터 채워지는 것으로는 나를  진정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 정말 그렇습니다. 솔로몬의 경우, 역대 이스라엘 왕들가운데 최고의 부귀와 영예를 누립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 아들대에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진짜 그가 행복한 것 같고, 지혜로웠던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속성 자체가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결코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에 있다는 건데 '안'이란게 뭐냐면, 이제 직접적으로 우리 자신의 질적인 변화, 우리 자신의 삶의 변화로 들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그것 자체로 의미있는 이야기였고, 공감되고, 아, 맞아하며 무릎을 쳤지만, 내 삶의 직접적인 변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이제 내 삶의 직접적인 변화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물과 명성은 보이는 것 곧 밖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진리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에도 안과 밖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는 우리 자신을 채울 수 없다는 건데, '명성과 부'는 분명 밖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게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내면에도 안과 밖이 있는데, 사실 안과 밖이란건 없지만 이렇게 이름지어 구분해 봅니다. 우리 내면에서 '안'이 무엇이냐면, 현존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있는 것', 그리고 우리 내면에서 '밖'은 '지금 없는것', 그래서 지금 없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것, 또는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과 밖을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밖으로부터 채우려하고, 이미 이야기했지만, 그런 행위, 곧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우리 내면의 안과 밖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럼 안과밖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박미경선생님의 이야기이자, 햇살님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곧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햇살님은 엄마뱃속에 있을때부터 거부를 당했습니다. 엄마가 그때 상황이 많이 힘들었는데, 당연히 뱃속의 아이를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았을거란 말이죠. 그냥 무관심했고, 사실 뱃속의 아이는 그 사실을 압니다. 엄마의 감정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됩니다. 생각보다는 우리의 감각, 느낌이 더 직접적입니다. 아무튼 뱃속의 아이는 뭐가 뭔지 모르지만 불안을 느낍니다. 또 세상에 나오니 딸이라, 할아버지가 또 딸이냐며 냉대를 합니다. 이처럼 햇살님은 태어나면서부터 거부를 당하게 됩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따뜻하게 안기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이게 참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 근본불안을 안고 태어난 것이죠. 그래서 그 삶이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박미경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치 않았던 어머니의 임신, 한마디로 귀찮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죠. 아이는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는 그 느낌을 안은채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두 오빠가 이 여동생을 참 많이 구박했습니다. 여동생을 때리고 늘 하는 말이 '이 바보야!, 이 병신아!', 사람이 늘 이렇게 당하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자기가 진짜 바보이고 병신이고 등신인줄 알게됩니다. 늘 거부당하고, 그것에서 오는 결핍, 그게 참 크다는 거죠. 그리고 부모는 늘 부부싸움을 하고, 특히 아버지는 한량이라, 늘 장구치고, 술을 마시고, 이러면 동네 사람들에겐 환영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족의 생계는 책임지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엄마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는데, 그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 가족의 생계를 다 책임져야하니 그 불평이 다 자식들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은 늘 긴장하고 경직되고, 주눅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오늘도 어느 분으로부터 문자가 왔는데, 그분이 절대로 벗어나고 싶어하는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게 열등감입니다. 할머니가 집안 형편 때문에 아버지 공부를 시키지 않아 아버지가 무학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그게 천추의 한이 됩니다. 나중에 커서도 술만 먹으면 할머니붙들고 그때 왜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냐고 원망하고, 그러면 할머니는 또 이 손주를 붙들고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끝모를 열등감이 이분에게 그대로 오게 됩니다. 이 아이는 어릴때부터 아빠가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아빠라는게 부끄럽고, 또 자기집이 작은 철물점을 하는데 그게 너무 부끄러워, 혹 친구와 길을 같이 걷게되고 그 철물점 앞에오면 그 철물점은 자기집이 아니게 됩니다. 친구를 속여야하니까요. 이 열등감이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합니다. 이분의 삶은 너무나 열등했기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삶은 반대방향으로 향하게 합니다. 자기 집안도, 자기집도, 모든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우니까 반대로 간거죠. 대단한 학벌, 대단한 직업, 커다란 집, 아무튼 이분은 그렇게 내 달렸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었습니다. 잠시라도 들키면 자신의 삶이 마치 끝장나는 거처럼. 그분은 그렇게 사는게 너무나 힘들어서 손을 뻗은게 영성이었습니다.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열등감으로 인한 것들이 다 보상될 것 같은, 그래서 보란 듯이 다른 사람앞에서 당당히 서면서 '이게 나야'하는, 그러나 이게 전부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다 저와 인연이되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딱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열등감이다. 그리고 그 열등감이 곧 당신이다. 그것 안만나려고 하지말고, 돌이켜라, 자신을 만나라.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시간이 흐르고, 통화를 했는데, 그때 자신이 마치 무엇인가를 알았다는 듯이 말을 하더라고요. 그러나 열등감 반대는 우월감입니다. 그니까, 무슨 깨달음과 이해가 온다든가 하면 '난 됐어~'하는, 무엇인가 이룬 사람인것처럼 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전화하면서 그분을 많이 때렸습니다. 눈물이 쑥빠지도록 때렸습니다. 아닌건 아니다는 거죠. 근데 어제 문자가 왔는데, 그때 저를 때려 주어서 고맙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자에는 다른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그 열등감이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이분은 외적으로는 굉장합니다. 그런데 그 열등감이 찾아오면 늘 그것을 피한거죠. 그렇게 늘 피하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왔습니다. 그때 그분이 어떠했냐면, 양팔이 쑥 빠지는 것 같고, 오장육부가 하염없이 내려 앉는 것 같은, 제가 그 느낌을 압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게 없더라!'하며 그냥 무방비 상태로 열등감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열등감이 사라지고 지금은 다른 마음으로 와 있습니다. 그 한순간 무방비 상태로 있으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냐면, 박미경선생님 같은 경우는 늘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까, 늘 야단맞고 병신소리 듣고, 그러면서 공부를 하고 해서 지금은 학교 선생님으로 계시지만, 그때 받았던 상처와 결핍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겠으니깐 그걸 해결하려고, 또 이렇게 초라하고 못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또 거부당할까봐 또 상처입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끊임없이 숨기고,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려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 앞에선 '~인척'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성쪽으로도 손을 뻗었는데, 그러면서 여러 체험도 하고 기쁨도 느끼다 보니까 거기에 우월감이 붙게 됩니다. '난 니들하고 달라~'하는,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속성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렇게 20년동안 도를 닦았습니다. 그런데도 해결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인연이 되었고, 지금껏 해왔던 것과는 정반대로 했습니다. 다 버려라, 자유를 향한 모든 몸짓을 버려라, 멈추어라, 정지해라, 수행도 버리고, 기도도  다 버려라.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를 실험했습니다. 박미경선생님은 고맙게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한달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험을 통해 깨어나게 됩니다. 박미경선생님이 산청모임 공지글을 올리는데 그 공지내용을 다들 보셨지요?!!.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살아오며 언제가 제일 행복했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겠다. 비록 해야할 묵직한 일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난 참 행복하다. 끊임없이 배워가고 성장해간다는 표현을 했는데, 지지난번에 모임에서 설거지하시는 박미경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요즘 어떠세요?. 그러자 너무 아무 문제가 없어 문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초에 박미경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왔는데, 배우고 성장해가는 기쁨속에 있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뭔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존재가 되었다. 늘 끊임없이 배워 나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참 감사하다는. 자, 제가 왜 박미경선생님 예를 들었냐면, '안과 밖'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우리 내면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안'은 현존, 지금 있는 것, '밖'은 지금 없는 것, 내가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인데, 박미경선생님의 결핍속에서 그 주눅들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만들어졌을 그 심성을 한번 보자는 것입니다. 보자면, 자신감 없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주눅들고, 두렵고, 무섭고, 겁이많고, 또 이런 사람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결핍되고, 못나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로 살아갈 수 없으니까 자기가 원하는 자기를 따로 만듭니다. 사랑받고 인정 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그래서 만드는게 뭐냐면, 이런 지금 있는것과는 반대인 모습, 그래서 턱없는 우월감에도 사로잡힙니다. 또 이런 사람에게 우월감이란 뭐냐면, 남들에게 멋있게 보이고, 또다시 거부당하거나 상처받거나 하지 않기 위해서 멋있게 만들었는데, 이렇게 산다는 것은 남들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건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혼자 있으면 게을러지고 무기력해 진다는 것입니다. 아, 이 이야기들은 전부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참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지고, 삶이 참 우울하고.....
 
저의 첫째 엄마의 딸이 있습니다. 그 누님과 1주일에 한번씩 만나고 있는데, 파킨스병으로 하체를 전혀 쓸 수가 없어서 제가 한번 만날 때마다 누님 발을 한시간 동안 주무릅니다. 그러면서 그분 연세가 올해로 83세이니까, 혀까지 굳어 가지고 말을 잘하지 못하고, 하더라도 제가 잘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가를 하시면, 제가 다리를 주무르다가도 일어나 입에 귀를 대어야 합니다. 그러면 몇마디 알아들을 수 있는데, 우리 누님의 말을 들으면, 엄마와 아빠가 늘 싸웠다고 합니다. 첫째 엄마 성품이 굉장히 깐깐했거든요. 또 아버지는 남아선호사상이 있어가지고 아들들은 다 대학을 보냈는데,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의 결핍과 학교에 가더라도 아버지가 돈을 안주니 학용품을 사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쪽팔리고, 그 어린 아이가 겪었을 마음의 창피, 그리고 집에만 가면 부모님이  싸우니 늘 우울해가지고, 아무튼 누님이 학창시절 기억난건 오직 '땅'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늘 우울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으니까요. 다시 박미경선생님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핍과 그런 상황, 형편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 '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이게 박미경선생님이고, 지금 현재 박미경선생님 안에서 일어나는 현존입니다. 이게 굳이 표현하자면 '안'입니다. 사람이란 그렇잖아요. 이런 모습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거죠. 곧잘 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런 심성이 형성되는 것은, 처음엔 환경으롤부터 옵니다. 부모가 싸우고, 아버지가 무책임하고, 이 속에서 어린 아이가 무얼 알겠습니까?, 태어나 보니 그런 환경이고, 그 속에서 자신감없고, 주눅들고. 처음에는 환경과 부모로 부터 옵니다. 상처는 그렇게 옵니다. 나중에 성장해 가면서 이게 거꾸로 됩니다. 내가 이러니까('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 사랑받지 못하지 하며 전부 자기책임으로 돌려버립니다.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여간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은 '안('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이라는 말이죠. 즉 현존, 지금 있는 것입니다. 매순간 일어나는 건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 같은 거죠.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원래는 환경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나중엔 바뀌어서 내가 이러니까 사랑받지 못하는거야 하며 자기 책임으로 돌려버립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가지고 내가 이래서('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 사랑받지 못하니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당당함/우월감/자신감/말을 잘함/편안함/용감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내가 이래서 거부당했으니까, 내가 다른 존재가 되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 받을 수 있는 내가 되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 '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 이게 현존입니다. 자기에게 지금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없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지금 있는 것 때문에 내가 거부당했다고 생각하고 이래가지고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늘 자신감이 없고, 늘 두렵고, 늘 불안하고, 이러면 안될 것 같으니까, 이런 존재가 아닌 지금 있는 것이 아닌, 이런 쭉정이 같은 초라한 자신을 무언가로 채우려고 합니다. 지금 없는 것을....왜냐하면 지금 이것 때문에 내가 사랑받지못하고 거부당했다고 생각하니깐, 거부당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존재가 되려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는 너무 초라하고 볼품이 없으니까, 이런 것이 아니라 가득찬, 충만한, 반듯하고 분명한, 이런 것들로 나를 채우고, 내가 이런 것들을 얻으면, 이런 것들('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 때문에 늘 거부당하고 초라하고 볼품없이 살아왔는데, 이렇게 되면, 충만되고 행복하게, 남들 보란듯이 살아가겠지 하고는 이 '안'('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을 팽개치고, '밖'(당당함/우월감/자신감/말을 잘함/편안함/용감함), 지금 없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보세요. 이건('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 너무 못나고 초라하고 볼품 없으니까, 이것 때문에 늘 다른 사람들 눈치보고, 주눅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지금 없는 이것(당당함/우월감/자신감/말을 잘함/편안함/용감함)으로 채우면, 이런('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존재이기에 받을 수밖에 없었던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은 다 끝이 나고 정말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갈 것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는 살아갈 수 없어 저리되면 훨씬 더 나을 것 같은거라. 이게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늘 결핍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가 충만해지면, 결핍속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과 거부가 끝이 날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밖에서부터 구하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없는 데서 자신감을 찾고, 열등감에서 당당함을 구하고, 주눅에서 힘있는 삶을, 두려움에서 평화를, 지금 자신에게 있는 이외의 것을 밖에서부터 찾고자 합니다. 밖에서 내게 없는 것들을 구해서 채우면 쉼이, 자유와 만족이 올 것 같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밖으로부터 구합니다. 그러기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눅들고 자신감이 없으면, 자신있는 척,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그 방법중의 하나가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손해는 안보니까. 또 뭔가 이야기를 하더라도 영성의 세계를 알았으니까, 남들과 이야기를 할때도 그런 고상한 이야기를 하고, 또 그걸로는 부족하고 안되니까 수행으로 갑니다. 깨달음으로 갑니다. 지금 없는 것,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도 결국은 '밖'입니다. 내가 얻고 싶은 것입니다. 이래서 괴로웠으니까, 이걸 얻으면 될 것 같잖아요. 정말, 충만해지고, 당당해지고, 평화로워지고 그래서 끊임없이 밖으로부터 구하는데, 아까 노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명성과 내몸, 제물과 내몸 어느 것이 더 귀하냐?. 우린 알았습니다. 몸이 더 소중하다는 걸.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는 절대로 나를 채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고, 또한 이미 우리의 삶으로부터 전부 경험했습니다. 자, 이때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그게 단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질과 명성만이 아니라, 내 안 내면에서의 밖도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박미경선생님 같은 경우는 채울 것 같으니까, 노력을 좀더하면, 수행을 하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는 등 맛도 봤으니까, 조금만 더 밀도 있게 하면 될 것 같으니까, 끊임없이 밖으로부터 구하다가 어떻게 저와 인연이 되어서 밖을 잡으려하는 그 손목을 제가 끊어버린 것이죠. 제가 차마 많이 잘라냈습니다. 예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른 눈이 너를 실족케하거든 빼내어버려라. 신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천국가는 것이 온몸을 가지고 지옥가는 것 보다 더 났다. 너의 오른발이 너를 실족케하거든 잘라내 버려라. 여기서 이 눈을 빼내어 버리라는 게 뭐냐면, 눈이 현존, 지금 있는 것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아니라, 지금 없는 것 속에 답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눈을 빼내어 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본 것입니다. 내가 찾고 구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없고 저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그 눈을 빼내어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압니다. 진정한 만족은 마음의 질적인 변화에 있지 이런 존재에서 저런 존재로 변화하는, 상태가 바뀌는게 아니라는 것을. 전적으로 마음의 질적인 변화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 할뿐이지 깨달음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니 달려가는 것입니다. 잡으려고 확~하고 달려갑니다. 그러면 저는 그 발목을 잘라버립니다. 그렇게 박미경선생님처럼 제가 자르면 잘리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잘리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리는 듯 하다가 또 살아납니다. 아메바같습니다. 그래서 하여간 잘랐습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뭐냐면, 오늘 제목을 '진정한 만족은 어떻게 오는가'로 했지만, 처음붙인 제목은 '나는 누구인가'였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좀 큰 제목이어서, 사실은 같은 맥락인데,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무언가를 채워서 충만해지는 비어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대로 완전합니다. 정말입니다. 머리털끝하나, 새로운 지위, 새로운 어떤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내 삶이 달라지는게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나를 모르니까 자꾸 채우려고 합니다. 지금 없는 것으로 채우려하는, 그래서 하여간 그채우려는 마음을 자르는건데, 밖으로부터 오는것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채울 수 있을 만큼 비어있지 않기때문에, 꽉차 있거든요. 그래서 박미경선생님이 채우려는 손을 막고 잡았습니다. 자 보세요. 진정한 만족은 어떻게 오는가?, 마음의 질적인 변화는 어덯게 오는가?, 자 그 손을 자르고 나니까, 이게('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남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박미경선생님같은 경우는 무척 힘이 들었죠. 이게 싫어서 저리로 갔는데, 잘리고 나니까 답답하고 무료하고,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고 점점 밖을 보던 눈이 자기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만 이것만 바뀌었습니다. 자 다시한번 말합니다. 자신감없고, 열등감 이게 정말 정말 끔찍한 것일까요?, 정말 나쁜것일까요?, 정말 우리 인생에서 경험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눈을 이리로('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 돌이키지 않고 이렇게(당당함/우월함/말을 잘함/편안함/용감함)바라보니까 그렇습니다. 자신감있고, 충만하고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그 마음이 그 초라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눈을 빼보세요. 자 보십시오. 마음이 벌써 미래에 가 있습니다. 지금 없는 것, 내가 바라는 것, 깨달음, 저기 가 있으니까, 저렇게 되고 시펑, 지금 있는 이것은 싫어, 너무 초라하고 너무 비참하고, 이 마음이 이렇게 추구하다보니 저기(미래)에서 지금의 초라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눈이 이쪽('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으로 안 와있어. 늘 저쪽으로 가 있기에 지금 여기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밖을 바라보던 내 눈을 잘라버리고 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제야 있는 그대로이 그것,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한 것이죠. 보세요.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서 이게('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 달라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너무 싫었는데, 이 열등감이 너무너무 싫었는데, 이것에 주목해보니 이 안에 있는 천갈래, 만갈래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아, 내가 이렇게 힘들었구나,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았구나, 비로소 자기를 만나기 시작합니다.자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저주스럽던 그게 저주가 아니라, 그냥 너무 불쌍하고, 아 그런데도 지금껏 잘 살아온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점점점점 안으로 눈이 향하게 되면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이해하고 납득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비로소 만나기 시작합니다. 이게('열등감/초라함/비참함/대인공포/두려움')싫어서 끊임없이 깨달음을, 만족을 찾다가 그것을 끊어버리고 자기자신을 만나면서 이해하고 납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주눅이 들고, 내가 왜 이렇게 무서워했는지를. 내가 왜 이렇게 발을 땅에 디디지 못하고 그 하나하나가 힘들었던 전체의 삶이 다 이해가 되게 됩니다. 이해가 되면서 비로소 자기를 껴 안습니다.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언젠가 박미경선생님이 말했습니다. 깨달음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어, 도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어. 맞습니다. 필요없습니다. 진짜..... 그냥 이대로인데, 이 중생의 마음 그대로가 붜인데, 번뇌 그대로가 보리, 색 그대로가 공, 일점일획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입니다. 자, 그럼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마음의 질적인 변화죠. 사람이 그렇습니다. 상처와 부족 결핍, 그 속에 있으면 싫습니다. 있어본 사람은 압니다. 제 34년 인생 전체가 결핍덩어리였습니다. 너무나 괴로웠습니다.박미경선생님 이야기가 꼭 내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너무 싫었습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괜찮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그래서 지금 있는 이것을 버리고 없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막 결핍을 메우기 위해 찾고 찾다가, 찾고자하는 그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기 빨강이 있습니다. 빨강이 빨강일 수 있는  이유가 딱하나 있습니다. 다른 색깔이 있을때입니다. 그런데 오직 빨강만 있으면 빨강은 빨강일까요?, 색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게 너무 싫습니다. 결핍이니까, 그래서 저 충만을 구했습니다. 자, 충만을 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결핍속에 있습니다. 그때 '결핍'이 있을까요?. NO!!!그냥 나만 있게됩니다. 아프고 힘들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그런데 옛날에는 그게 죽을 듯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참 원망스러웠는데, 아니야

댓글목록

햇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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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메모 하시더니 이렇게 글을 올리시려고 그러셨군요.^^
덕분에 복습이 너무 잘 됩니다ㅎㅎ
 애 많이 쓰셨어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름가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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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햇살님,
산청모임이 바로 어제일 같습니다.
뵈었을때 아침햇살처럼 순수하고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작업 멘트임ㅋ).
마치 오랜친구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주욱~ 그럴것같은.

<진행중~>이라는 표찰은 아직 글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 표찰이 사라졌을때 다시한번 읽어주세요~.
아, 사진방에 사진도 있으니 감상하세요~.

햇살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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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여름가지님
작업 멘트 잘 날리시는데요ㅋㅋ^^
일단 접수합니다ㅎㅎ 앞으로도 꾸준히 부탁드려요^^
어떻게 저 많은 내용을 기록하고 올리셨는지 대단하십니다.
별 영양가없는 제 말도 예쁘게 포장도 잘 해주시고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뵈어요~^^

여름가지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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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님,
제가 김기태선생님의 말씀처럼,
~인척의 대가, 포장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러니 예쁘게 포장을 잘 할수밖에요~~(농담)

햇살님, 모임에서 하시는
한마디 한마디 소중하게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정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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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가지님의 정성스런 후기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여름가지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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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정만씨, 늘 감사하게 후기를 읽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아, 오늘은 서울모임.
정만씨의 맛깔나는 서울모임 후기도 기대하겠습니다.

루시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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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선리플, 후감상 찜~ㅋㅋㅋㅋㅋ

와 근데 여름가지 행님의 후기는....언제나 정성이 듬뿍!!! 최고!!^^

2월엔 산청모임 꼭 갈거니까(외출 일자도 결재 맡았슴당, 푸하핫!)

그 땐, 이 루시오의 면상을 한 장 찍어서 꼭 후기에 실어주십쇼!ㅋㅋ

수고하셨습니다.

여름가지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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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주환아, 니가 뭘좀 아는구나, 이 냉정한 사회에선 무조건 선불이징~~~
댓글안다는 사람들은 전부 공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 아냐 ㅋㅋ
2월 산청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주환이의 면상이 참 멋진데, 그중에서도 훤한 이마가 제일 좋더라.
이마를 집중적으로 공략할 거니깐,
이번엔 머리가 아니라 이마에 무스를 바르고 오길^^

박미경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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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제가 이런 멋진  말들을 했던가요? ^^
여름가지님의 정성에 감사드려요~~~^^

여름가지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여름가지 아이피 (121.♡.250.19)
작성일

예, 박미경샘~~~,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말에 힘(에너지)을 싣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박미경샘이 하는 말들에서 힘이 느껴져 듣는내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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