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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구도 실패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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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규 (211.♡.35.238) 댓글 10건 조회 5,573회 작성일 06-11-0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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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해오(解悟)를 끝까지 깨달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에고는 다시 또 이렇게 교묘한 변명을 해 댈 가능성이 있다. “‘고정된 자아’란 게 애당초 없는데 어디다 대고 진실을 갖다 붙일 것인가?”라고. 이런 자는 이미 천석고황(泉石膏肓)[=못 고칠 병]에 걸려버린 자이다. 이런 자는 부처님도 구할 수가 없다고 선사들은 누누이 경고하고 있다.


아, 이 땅에 지금 부처 사태(沙汰)가 난 것 같다. 이런 해오자들이 저마다 싸이트나 회상(會上)을 열고 ‘심리안정술’을 깨달음이라고 속이며 영업을 하고 있다. 그들은 현재의 자신이 그 어떠하더라도, 그것을 본래의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수용하기만 하면, 현재 모습 그대로 바로 천국에 직행한다고 달콤한 말로 속삭인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돈오법(頓悟法)[=단박에 깨우치는 길]이라고 자부하면서…. 이들의 법문에 감동된 무리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얻게 된 심리적 해방감을 깨달은 자의 대자유로 착각하고, 자칭 무애행(無碍行)[=어떤 행위를 해도 마음에 걸림이 없음]을 뽐내며, 꼴리는 대로 살아가면서 청정한 수행자들을 비웃는다.

맙소사. 해탈이 ‘여기가 바로, 그리고 이미, 거기이다.’란 강의로서 그토록 간단히 성취되는 것이라면 일찍이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을 가르치신 부처님은 너무 요령이 없는 우둔한 분이셨다. 오직 “구(求)하는 그 놈이 바로 그걸세.”라는 도리를 요리조리 알아들을 때까지 재미나게 설명하면 될 일을 구도자로 하여금 사랑도 못하게 하고, 술도 못 먹게 하고, 오직 누추한 옷을 입은 채 구걸[=탁발(托鉢)]로 연명하며, 평생을 내면만을 응시하며 살아가게 하였으니 그 죄 또한 오히려 얼마나 크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들은 또 언필칭(言必稱) 언하대오(言下大悟)[=말 한마디에 대번 깨침]를 말한다. 그러나 화두를 들고 의정(疑情)[=의문 덩어리]이 꽉 차 사유(思惟)가 단절된 채로 성성(惺惺)함이 이미 오래인 수자(修子)가 눈 밝은 스승의 한 마디에 깨어나는 것과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다가 “아하, 이것이로구나!”하고 해오한 자의 언하대오가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오직 눈 밝지 않은 엉터리 스승만이 그런 자를 인가(印可)하며, 사제(師弟)가 서로 한 통 속이 되어 달을 보고는 해를 보았다는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삼생(三生)을 아는 것이 삿된 길인가?


넷째, 깨달으면 삼생(三生)을 통찰하는 지혜가 열린다고 했는데 나는 왜 전생(前生)을 비롯한 사후의 삶에 대해, 영혼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까막눈인가 하는 의문이 늘 있었다. 이것도 “그런 초능력들을 가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모습[=부처성품]을 부정하는 분별심의 발로이다. 이런 분야는 분별심을 내린 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하며 넘어갈 때도 있었으나 풀이 죽으면 역시 “이것은 본성에 닿은 자라면 저절로 알게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안 쓰는 것과 모르고 못 쓰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라는 흔들림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윤회(輪廻)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다. 그 원리가 인과응보(因果應報)․자업자득(自業自得)임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결국은 어느 땐가 각인된 정보에 의해 일어난다는 원리이기도 하다.

피아노 교습이라고는 단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아동이 연주하는 소리만 들으면 한 치 오차도 없이 건반을 두들겨댄다든지, 한번도 배운 적도 없는 한문을 3세 아이가 거침없이 읽어내어 이웃을 놀라게 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거니와, 이런 현상들은 윤회와 업식(業識) 이론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의식세계를 통달한 진정한 각자라면 의식세계에 원인을 둔 일체의 고통을 치유하는 도리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을 의왕(醫王)이라고도 하는 까닭은 중생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의 근본원인을 알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열어줄 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실제로 그 전생을 통찰하신 혜안으로 중생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해주는 장면들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하다못해 구병시식(救病施食)[=불교에서 빙의된 영을 떼어 천도시키는 법] 전문가들도 의식(意識) 요법을 통해 중생들의 갈 길을 열어주고 고통을 덜어주는데 한 몫을 한다. 그런데 소위 돈오(頓悟)를 했다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그렇게 깜깜해서야 되겠는가? 그들은 깜깜할 뿐 아니라 그런 능력을 폄하(貶下)하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런 태도는 ‘신 포도 이론(Sour Grape Theory)’[=자기가 얻거나, 할 수 없는 대상을 까뭉개버림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는 심리작용]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법문을 통해 현실의 무게에 찌든 환자의 심리적 짐을 내려놓게는 한다. 그렇다. 분명 한 자락 심리적 시원함은 줄 수가 있다. 심리치료 효과가 극대화 되면 더러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의식의 변화는 물리적․신체적으로도 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유능한 해오자들이 현재를 혐오(嫌惡)함으로써 생긴 질환을 설득을 통해 현재의 조건을 수용하게 함으로써 치료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필자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기대할 수가 없다. 전생 문제나 빙의(憑依) 등으로 일어나는 질병들은 그들의 능력 밖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능력 있는 제령(除靈) 전문가라면 단칼에 그들을 치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오자들은 의왕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실은 의왕인 부처가 아니라 부처라고 착각하고 있는 중생인 것이다. 이들이 일반 중생들보다 오히려 더 위태로운 까닭은 자기도 속고, 끝내는 남도 속이는 업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이다.


사도(邪道)와 정도(正道)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나는 사도와 정도의 분기점이 아주 명확하게 보인다. 그렇다. 그 중심이 아직 에고의식에 있어서, 그 작용에 여전히 끄달리는 자가 이 에고의식을 교묘히 보전․확장해 나가는 길은 사도(邪道)이다.

에고가 한껏 확장된 자는 천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자신이 우주의 주인인양 자처하거나, 초능력으로 추종자들을 모아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종교집단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은 본래 신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상념의 집중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초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포장해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여전히 에고의식에 끄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중생이다. 이런 자는 바로 자연이 심판한다. 그가 한 말은 반드시 그에게로 되돌아오고야 마는 것이다.


정도는 고통으로부터의 영원한 해탈(解脫)을 지향하기 때문에 반드시 본성을 증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상념의 중단을 위한 수행이 필수적이다. 이런 수행의 대표적 행법들이 '위빠싸나'[=관법(觀法) : 호흡이나 생각 등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수행법]나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들고 의심을 극대화 해 나가는 참선 수행법] 같은 것들이다.

신의 이름이나 부처의 이름을 염송(念誦)하더라도 염송하는 자신을 지켜보는데 중심을 둔다면 그것 또한 관법수행의 일종이다. 그러나 의지(依支)하는 마음으로 부른다면 이는 옳지 않다. 의지심(依支心)이 극한에 가면 '그의 에고가 기대(창조)하는 신'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참 신으로 착각하여 자신이 그의 대리자인양 날뛰지만 최후에는 그 신이 그를 배신하게 된다.

위기에 처한 모세가 산에 올라 절박한 심정으로 신의 도움을 청했을 때 ‘여호와’ 신이 응감(應感)하였다고 한다. 유대민족만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여호와신이 과연 참 신일까? 보라. 여호와는 유대민족에 대적하는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노인에서부터 갓난아이까지, 심지어 육축의 새끼까지도 잔인하게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생명을 도륙(屠戮)하여 자신에게 번제를 바치게 하고, 잘못 바치면 이를 잔인하게 벌하기도 한다. 혹 다른 신을 섬기기라도 하면 질투의 화신이 되어 징벌한다. 이런 신이 과연 공의(公義)의 신인 창조의 주 하나님일까? 신이 인간과 다름없는 인격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 신이 인간의 에고의식의 창조물임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죄인이지만 절대자인 ‘구세주’를 믿음으로써 구원 받았다.’라고 믿는 믿음은 과연 정도(正道)일까?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세주를 통한 구원’ 이란 시나리오로 이루어져 있는 이러한 믿음은 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알고 있는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에고의식의 판단으로 바깥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대저 종교인들이 믿고 있는 각양각색의 교리들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에고의식이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창조물이다.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에고의식이 그것이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세주 신앙은 그를 믿기만 하면 영원한 천국생활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에고로 봐서는 상당히 수지맞는 거래다. 거래의 결과 심리적 해방과 평화가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안은 본성에 닿음으로써 오는 영원한 평화가 아니다. 에고의식은 그대로 있다. 다만 에고의식이 절대자를 상정하고, “주께서 다 해결해주신다.”라고 믿을 뿐인 것이다. 에고의식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미세불안이 끊임없이 올라와 믿음을 흔드는 현상이 온다. 그들은 이것을 ‘시험 들었다.’고 설명하지만 시험이 오면 바로 흔들리는 평화가 어찌 참되다고 할 것인가? 믿음의 뿌리가 에고의식의 판단에 의한 거래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본성에 닿은 자, 에고의식의 뿌리가 잘린 붓다의 평화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심리적 해방감을 구원이라 여기고 거기에 안주해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해오자와 매우 비슷하다. 에고의식이 남아있기 때문에 때때로 올라오는 미세불안으로 ‘시험’에 들거나 또는 ‘암흑’이 찾아온다는 현상도 똑 같다. ‘전능한 주님이 구원해주신다.’는 상념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시험을 물리치는 것이나 ‘암흑도 본성이다.’란 상념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암흑을 물리치는 것도 매우 비슷하다. 이 양자는 또 에고의식의 밑창을 뚫고 본성에 가 닿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닮았다.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 평화에 머물게 한다는 점도 닮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해탈정도(解脫正道)가 아닌 것이다.

해오자와 이들의 차이는 오직 한가지다. 해오자의 평화는 ‘이것이 곧 그것이다.[=’차안(此岸)이 곧 피안(彼岸)이다‘=’극락이 곧 여기 이다‘]’란 한 생각에서 오는데 비하여, 구세주 신앙자들의 평화는 ‘그분이 약속했기 때문’이란 한 생각에서 온다. 즉 ‘평화’와 ‘나’ 사이에서 구세주 신앙자는 ‘그분’이란 중보적 존재가 필요하고, 해오자는 그런 중보자조차도 전혀 필요가 없다는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이 양자의 공통적인 효과는 심리적 안정이다. 믿음[=생각] 하나로 인해 마음의 모든 짐들을 가볍게 내려놓게 되니 해방감이 오고, 상념[=믿음]의 강도에 따라 뜨거운 기운이 몰려와 병이 물러가는 기적도 일어난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행운아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과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로 잠시만 얘기해 보면 이들의 에고의식이 불신자(不信者)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끄달리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상념’들에 의한 평화를 ‘거짓 평화’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어떤 구세주 신앙자들의 에고의식은 때로는 엄청나게 증폭되어 “내가 바로 신이다. 예수, 부처, 마호메트도 내가 보낸 나의 부하들이다.”, 내가 바로 우주의 주재자(主宰者)다. 나는 세상을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다. 나는 태풍의 진로도 마음대로 바꾼다., “내가 바로 재림주이다.”, “내가 바로 말세의 마지막 종이다. 나는 늘 예수와 대화 하고 있다.”라는 착각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대통령 아들이란 자가 그 아비의 빽을 믿고 점점 가관(可觀)으로 날뛰다가 마침내 대통령 행세를 하는 현상과 매우 비슷하다.

나는 비록 에고의식의 작용이 죽 끓듯 하지만 이 또한 본성(本性)의 작용이니 분별심(分別心)을 내려놓은 자에게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라는 해오자들의 믿음도 이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가장 크고 좋은 것을 단번에, 공짜로, 얻게 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이 양자는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실인즉 그들은 에고의식의 간교한 술수에 속고 있다.

해오자들은 흔히 ‘육조단경’[=육조 해능대사의 법문집]에서 육조(六祖)가 한 '나는 에고의식의 작용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을 자못 애용하고 있다. 그러나 증오(證悟)한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과 해오(解悟)한 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과는 천지현격(天地懸隔)의 격차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육조는 이미 본성으로 중심 이동을 한 상태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그의 에고의식은 이미 뿌리가 잘린 상태다. 그것은 다만 흔적만 남아있다. 그는 이미 어떠한 에고의식의 작용에도 조금도 끄달림이 없는 동중정(動中靜)의 경지를 얻었다. '나는 에고의식의 작용이 죽 끓듯 한다.'는 그의 말은 바로 이런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끄달림 있는 이 상태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라고 해석한다면 오해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어느 해오자는 깨달음이 무어냐는 질문에 대해 ‘에고의식의 작용이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보라. 이 대답이야말로 해오자의 살림살이를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그는 “끄달리는 것 자체도 본성작용 그 자체이므로 끄달림은 더 이상 끄달림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생각과 믿음으로 그가 마음의 일시적 위안은 얻게 될 수가 있겠지만 구도자의 목표인 일체고(一切苦)로부터의 해탈은 절대로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 자신에게 속고 있거나,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심이동을 위한 수행을 부인한다면 이는 해탈정도가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에고의식이 여전하고, 욕망이 그를 삼키는데도 이를 불성(佛性)의 발휘로 여기거나 자신은 절대자의 빽으로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면 이는 자신에게 흠뻑 속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의 에고의식은 이미 자신이 불성(佛性) 또는 신(神)이란 상념으로 엄청 확대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무엇이든 이 상념으로 합리화해버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비판의 소리도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비판자를 ‘마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심지어 불륜행각을 벌이고, 재물을 편취하는 파렴치행(破廉恥行)을 하면서도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도 못 느낀다. 그들은 스스로 양심에 화인(火印)을 찍어버린 것이다. 혹 불안이 올라와도 그 불안조차 과거의 습이요, 자연현상쯤으로 치부해버리니 대체 무슨 약이 그를 치료할 수 있겠는가?

“나는 뺄 수도 박을 수도 없는 부처이기 때문에 나의 행위는 전적으로 온전하다. 왜냐하면 부처에게서는 오직 부처의 행위만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큰소리치며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자의 에고는 이처럼 교활하다. 너무나 교활하기 때문에 경험이 일천(日淺)한 수행자는 이들이 대자유(大自由)를 얻은 도인으로 착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해오자 자신도 처음에는 자신의 에고의식에 속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엉터리 무애행(無礙行)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사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가 본성으로 중심이동이 되어있는지 또는 중심이동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도 중심이동을 하지 않고, 참된 수행자를 비웃으며, 남도 그런 수행을 못 하게 막는 자들이 저지르는 폐해가 실로 엄청나기 때문에 선사들은 이를 거듭거듭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맺으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버리게 되었는가? 나는 정겨운 도반님들께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슬프다. 내가 어느덧 그대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인가? 나 또한 그대들처럼, 또 그대들과 어울려 인간본색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면서 막 사는 재미를 누렸던 것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제 나는 이 말들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의심과 혼란 속에서 방황해 온 내 정신세계가 점차 안개 걷히듯 분명해지면서 나와 그대들의 위험한 모습이 내 눈앞에 드러나 버렸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그대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경우에 처하면 그냥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말을 뱉어내었으니 다시 주어 담을 수는 없다. 나는 또 구도자로서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삶이 나를 그리로 재촉하니 어쩌겠는가? 다만 그렇게 떠날 뿐이다.


좋은 추억을 남겨준 여러분 모두에게 안녕을, 여러분 마음속에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끝】

댓글목록

rpqhdl님의 댓글

rpqhdl 아이피 (61.♡.21.184) 작성일

오리지날 환자 위대한 탄생 !
누구하고 많이 닮으셨구랴 !

그리하여님의 댓글

그리하여 아이피 (203.♡.145.114) 작성일

윤회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저의 체험 기록을 말씀드리자면)

이 개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윤회는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다만, 본성이 중심으로 지속적 다양한 개체로 나투어 체험의 기록을 거두는 윤회를 말하겠습니다.

전생이라는 기억(배우지도 않은 피아노 치기 등)도
이전의 본성이 거둔 저 개체의 체험 기록이 의식의 빛을 통해 이 개체에 전해 지는 것일 뿐,,,,,,,
그래서 전생이라는 착각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은 본성이 다양한 개체로 나투어 그 개체의 체험(삶이란 이런거야,,인간이란 이런거야,,사랑이란,,
미움이란,,,깨달음이란 이런거야,, 등등 )의 기록을 만들는 장입니다.

이동규 님이 올린 글 내용 또한 글쓴이(한 개체)의 체험 기록입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63) 작성일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정말 '마니마니' 구도하신 분의 집중력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여러모로 동감합니다.
'돈오'만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든지...
'고정된자아'가 (결코 없다)고 하면서 완전한 허무주의에 매몰된 이들에 대한 지적까지 말이죠.

그런데 궁금합니다.
님은 나름대로 또 구도자의 길을 가시려고 노력하실 터인데... '밥'은 먹고 사시겠죠.
다른 사람의 '밥'의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뭐 제가 '밥'의 문제만 중요시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대충 이 '물질적 필요'의 문제에 대해서 답변하는 방식에 따라서 대충 상대방의 모습이 보여서요.

암튼 계속 구도하시길...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63) 작성일

제가 님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해서 이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님은 다른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내리 까는 특이한 재주를 가지셨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요.
님이 저의 글에 대해서 이런 글로 댓글 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해서 마음을 내려 놓지 못한 제가 스스로를 두둔하려고 변명을 하면 '논쟁'이 되어서 님은 더욱 실랄하게 저를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동규님 같은 분이 님의 글에 댓글을 다시리라고 생각합니까?
다시한번 이양반의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가 보십시요.
이양반이 님의 글에 댓글을 다시리리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동규님은 아마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을 님과 같은 분이 포착하지 못했을가요?
아뇨 님은 그것을 '알고도'... 이동규님이 댓글을 보나 마나 할 것인지를 알고도 이런 무턱댄 비난성 글을 쓰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동규님이 님께서 쓴 댓글을 보던 말던... 저 같은 사람이 님께서 쓴 댓글을 보던 말던... 그것은 님과는 별로 상관없는 그것인 듯도 싶습니다.

왜냐하면 님은 그냥 '이런 소리'를 막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죠.
아닌가요? (아님 말구 ㅠㅡ)

초반에는 못 느꼈는데... 과연 저런 류의 말들이 누구를 향해있는지요.
진지하게 숙고해서 한번 댓글 주십시요.

둘긍이님의 댓글

둘긍이 아이피 (61.♡.220.20) 작성일

짝짝~짝짞짞~짝짞짞짞~짞짞~~~~와~~~

밥삽님의 댓글

밥삽 아이피 (203.♡.145.114) 작성일

밥만 먹고 똥을 누지 않으면 속이 썩어서 다른 음식은 못먹어요~

먼저 먹은 음식찌꺼기로 꽉차 있는데 다른 음식 들어갈 공간이 있나~

그래서 똥을 누고 속을 비우라는 의미요~

속을 먼저 비워야 맛나는 다른 음식을 먹어보죠~

밥~밥타령만 하지 말고~

납작이님의 댓글

납작이 아이피 (58.♡.114.88) 작성일

그냥 놔 둬요.
항시 밥만을 따지시는 분인것 같아요.
자기 기준에 세상을 맞추려 부단히 애쓰시는 당글이 님인것 같아요.
그래도 가끔은 재미도 있네요.워낙 소란스러뤄 그렇긴 하지만.
그분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항시 내 말이 맞다로 끝나더군요.
논쟁을 해 봐야
피곤만 할 뿐.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63) 작성일

위에 쓴 저의 글이 질문을 한 것입니까? 제 주장을 한 것입니까?
제 말이 맞다고 떠벌려댄 것입니까? 이해를 청한 것입니까?
무엇이? 님들에게 다른 사람의 글을 모두 '잘난체 하는 것'쯤으로 여기게 만들까요?

정저지와님의 댓글

정저지와 아이피 (211.♡.100.213) 작성일

대단한 통찰력.. 이십니다.
감사드립니다.

one step님의 댓글

one step 아이피 (125.♡.5.48) 작성일

나는 이동규 님의 글에 대하여 무어라 댓글을 달만한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 rpqhdl' 님의 빈정대고 야유하는 댓글은 참 실망입니다.  반론이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자기 논리를 전개해 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마치 시비라도 걸고 싸움이라도 거는 듯한 댓글이어서 제3자가 보기에도 기분이 얹잖아집니다. 서로 생각과 지견이 다르더라도 서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것이 우선 밑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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