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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재연되는 좌우익의 싸움을 보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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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규 (211.♡.35.238) 댓글 0건 조회 4,939회 작성일 06-11-09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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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재연되는 좌․우익의 싸움을 보며



2006. 11. 3 이동규

holydog@hanmail.net


아직도 계속되는 6.25


필자는 1948년생이다. 해방공간의 처절했던 좌우익의 투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어버이 세대들로부터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던 그 처신 난감했던 민족 분열의 비극적 시기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자란 세대이다. 그리고 그 분열의 절정인 한국전쟁에서 선친(先親)을 잃은 희생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비극적인 전쟁의 고통을 희생자의 가족이 아닌 자가 어찌 알 수가 있을까? 전쟁미망인이신 어머니께서는 50여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친의 편지뭉치를 끌어안고 종종 남몰래 울고 계신다. 그 애끓는 슬픔과 이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고통은 당사자가 아닌 자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선친과 21세에 혼인하셔서 23세에 사별하셨으나, 직장 등의 사유로 실제로 함께 사신 것은 불과 1년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애닯고도 애달픈 일이 아닌가?

필자의 선친은 무덤도 없이 가셨다. 전쟁 통에 시신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어머니 평생의 한(恨)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손수 보훈처로, 현충원으로 여러 차례 알아본 끝에 늦게나마 대전 국립현충원 충혼탑에 선친의 위패를 봉안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선친의 흔적을 이렇게나마 남길 수 있게 된 데 대하여 마지막 소임을 다하신 양 무척 다행스럽게 여기신다.

당신께서는 지금도 선친께 편지를 쓰신다. 그리고 봄․가을 현충탑 참배시에는 정성스레 장만한 제수를 진설하시고는 그 편지를 눈물로 읽어내려 가신다. 필자는 선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래서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그다지 애절하지 않다. 그러나 현충탑을 참배하면서 나도 모르게 통곡이 터져 나오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한(恨) 많은 일생과 선친을 향한 애절한 사랑이 너무나 안쓰러워서이다.

선친께서 돌아가실 당시 필자는 세 살짜리 재롱둥이였다. 선친께서는 28세란 젊디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처자식을 차마 뒤로하고 가신 것이다. 그런 연유로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내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신다.

선친께서 외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외갓집 송사(訟事)에서 우연히 법정변론을 하시게 된 까닭이라고 한다.(당시 선친께서 어떤 자격으로 법정 변론을 담당하셨는지는 필자도 모른다.) 법정에서 변론하시는 그 늠름한 모습과 정연한 언변에 탄복하신 외조부님께서는 선친을 당장에 사윗감으로 점찍으시고는 매파(媒婆)를 놓아 혼인을 성사시키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늘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그리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을 훌륭하게 갖추신 선친에 대해 “니는 느그 아버지 따라 갈라믄 택도 없다.”라고 하시며 지금도 경외(敬畏)스러워 하신다. 외조부님께서는 이런 선친을 사위 중에서도 가장 크게 기대하고, 사랑해주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선친께서 생존하셨다면 아마 장관 이상 고위직도 충분히 기대할만한 인물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토록 아까운 분이 그렇게 요절하고 마신 것은 다 가운(家運)이 기운 탓이라고 원망하고 계신다. “살아 있었으면 집을 크게 일으켰을 양반인데 가운이 그뿐인 기라.”고 하시면서.

선친께서 25세의 나이로 장가를 드셨을 때의 직업은 경북경찰국 소속 경찰관[경위]이셨고, 돌아가실 때의 마지막 계급은 경감이셨다.(현충탑에는 총경으로 추서되어 있음) 결혼 후 선친께서는 곧 경찰 특대생으로 뽑히시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재학하시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고시공부에 착수하시는 한편 경찰 간부 양성을 위한 교재로서 ‘경찰학원론(警察學原論)’이란 책을 번역하시어 거의 다 완성하신 단계였다고 한다. 선친께서 돌아가신 후 누군가가 이 원고를 받아갔다고 하는데, 어머니께서는 아마 책이 그 사람 이름으로 출판되었을 것이라고 하시며 한스러워 하신다. 선친의 필체는 지금 필자가 보아도 정말 달필(達筆)이시다. 이런 선친께서 생존하셨더라면 아마도 조등양명(早登揚名)하셨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선친은 원래부터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계셔서 당시 영어는 물론 5개 국어(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에스페란토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셨기 때문에 집에는 어학 배우려는 학생들이 심심찮게 드나들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UN군이 들어오자 선친께서는 미5공군 사령부의 통역관으로 급히 픽업되시어 미군 사령부에 파견 근무를 하시게 되었는데, 아군이 북진하게 되자 미군을 따라 평양에 가시어서 그만 참변을 당하시고 말았던 것이다.

선친 별세 후 어머니께서는 처녀 시절 봉직하시던 초등학교 교사 직분으로 다시 복직(復職)하시어 외아들인 필자를 기르셨다. 필자는 어머니의 극진하신 사랑 속에, 비록 셋방살이를 전전하긴 하였지만, 그 시대 또래들이 겪던 가난의 고통을 크게 겪지 않고 자랐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의 최후에 대해서만은 늘 궁금하였다. 그러다가 필자의 나이 40대 중반이 되었을 무렵 선친의 최후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분을 수소문 끝에 마침내 만나 그 최후에 대한 전말을 다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증언자는 당시 대구대학에 재학 중이면서 견습통역관으로 선친의 평양행에 동행하셨던 김○○라는 분이시다.

두 분은 1950년 11월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평양으로 갔다고 한다. 평양에 가보니 인민군은 이미 그 지역 전장에서 패주(敗走)한 뒤였고 미5공군의 캠프는 평양 선교리(혹은 순안?)비행장에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저녁, 캠프생활에 무료해지신 선친은 그분에게 평양 시내 구경도 하고 선술집에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분의 짐작에 의하면 선친은 그 전날 이미 시내를 돌아보고 술집도 알아두신 것 같았다고 했다.(증언자는 그 전쟁 통에도 술집이 영업 중이었다는 게 신기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총포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상황에서 외출을 주저하는 그에게 선친은 시내는 이미 다 평정되었으니 염려할 것 없다고 하시면서 거침없이 앞장을 서시더라는 것이다.

두 분이 수복한 평양거리를 걷다가 바야흐로 어떤 골목길로 접어들게 되었을 때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몇 발의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고 한다. 더럭 겁이 난 그에게 선친은 “총소리야 전쟁터에서 항용 들을 수 있는 법이니 겁낼 것 없소.”라고 하시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셨다고 한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또 총소리가 났고, 두 분이 다른 골목길로 막 접어드는 순간 눈앞에는 방금 총에 맞아 죽은 한국 민간인의 시체가 서너구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놀라서 고개를 쳐들자 저 만치에서 가해자인 듯한 미군이 술에 잔뜩 취한 채 권총을 들고 서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즉시 두 분에게 손을 들라고 명령했고, 두 분은 명령을 따랐으나, 선친은 우리는 적이 아닌 한국경찰이라고 영어로 말씀하시면서 품속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이려는 순간 그만 미군이 권총을 발사해버렸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총격에 의해 선친이 먼저 쓰러지시고, 그 분 역시 다음 총격에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당시 어머니께서 사건 전말을 들으신 기억에 의하면 그 곳이 평양시내 ‘동문서점’ 앞이었다고 한다.)

왼쪽 어깨 부근에 통증을 느끼면서 충격과 출혈로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가는 가운데 그는 바로 옆에 쓰러진 선친의 비강(鼻腔)으로부터 피가 고였을 때 나오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는데, 한참 후 누군가가 자신의 눈에 후레쉬를 비추면서 “이 사람은 살아있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선친의 안위(安危)부터 물었더니 한국군 헌병이 “그 사람 걱정일랑 말고 당신 걱정이나 하시오.” 라고 하면서 자신을 야전 병원으로 후송했다고 한다.

그 후 5공군 소속 미군 대령이 문병을 왔길래 선친도 당연히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그는 선친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미군 장교가 “Captin Lee는 참 안됐다. 그는 두부 관통(shot through the head)으로 사망했다.”라는 너무나 놀라운 소식을 전하더라고 한다. 그는 이때만큼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짧은 시간 선친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그는 같은 학생 신분인데도 선친이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자기같이 못난 자는 살아남고, 선친같이 훌륭한 분은 요절했다며 못내 탄식하는 것이었다.

‘선친의 시신을 찾지 못해 무덤이 없다.’는 말을 듣고 그는 아무리 전시(戰時)지만 가족과 주소지가 분명한데 미군이 왜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아해 하였다. 전시(戰時)이기도 하겠지만 미군이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동기에서 시신을 유기해버리지 않았을까 추측되는 대목이다. 총격을 가한 미군에 대한 정보로 그는 그 미군이 평양지역에 낙하했던 공수여단 소속(표식을 본 것 같다고 함)이었던 것 같으며, 아마도 전쟁공포증에다 만취까지 한 정신이상 상태에서 저지른 짓일 거라고 추측하는 것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1발의 총격으로 선친은 허무하게 가셨다. 그리고 졸지에 미망인(未亡人)이 되어버리신 어머니께서는 평생을 그토록 애절한 그리움 속에서 살아오게 되신 것이다. 아, 인생사(人生事)란 정녕 이렇게도 허망하고 야속한 것이던가? 증언을 해주신 그분은 언젠가는 그의 혈육이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무척 반가와 하시는 것이었다.


분단의 고통 반세기…누가, 왜?


필자가 이처럼 가족사를 공개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를 좀 생생하게 느껴보시라는 의도에서이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전쟁이 왜 일어났던가? 그것은 바로 국제역학적으로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국내적으로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아서 터진 결과이다. 이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지도 어언 50여년이 넘어 그 처참했던 비극이 이제는 까맣게 잊혀질만한 이 때에 이 땅에 다시 좌[진보]․우[보수]익 대립이 되살아나서 최근에는 각각의 시위군중들이 한 장소에서 충돌 직전의 험악한 상황을 보이는 등 그 끔찍했던 해방공간에서의 비극이 재연(再燃)될 듯한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 땅의 원로 세대들은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그들은 이 나라의 건국과 자유수호의 과정에서 이미 이 같은 신산(辛酸)의 고통을 체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민족이 역사의 교훈을 이리도 쉽게 잊어버리고 같은 비극을 되풀이 하려 하는데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하는 듯하다.

반미자주(反美自主)를 주장하고 있는 좌익인사들은 혹 필자에게 “당신은 선친을 학살한 미국을 당연히 철천지원수로 미워하겠지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망스럽겠지만 필자에게는 미국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물론 그 미군은 필자의 선친을 살해했고, 그의 범죄행위로 인한 우리 가족과 가문의 희생을 필설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필자의 마음에는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 증오의 감정이 없다. 왜 그럴까?

필자의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전쟁터라는 특수상황이다. 만행을 저지른 미군의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민군대가 패주하고 난 뒤의 평양 시내에는 민간인으로 위장한 인민군들이 남아서 미군을 저격하는 사건이 잦았다고 한다. 그 미군도 전우가 저격을 받아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았을지 모른다. 이로 인해 그는 전쟁공포증에 사로잡히게 되고, 폭음(暴飮)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의 눈에는 민간인 복장의 모든 한국인들이 다 게릴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 유추해보면 그 역시 불행한 또 한 사람의 전쟁 피해자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필자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일 것이다.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사를 관찰한 끝에 필자는 인생사란 ‘언젠가 자신이 뿌린 씨앗을 거두는 한바탕의 연극’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실력 있는 역학자(易學者)는 필자의 조실부(早失父) 사주, 어머니의 청상(靑孀) 사주, 선친의 요절(夭折) 사주를 읽어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찌 이를 우연이라 할 것인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이치가 아니라면 이런 사주를 가진 3인이 우연히 한 가족으로 만날 수는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만일 필자가 한국전쟁에서의 미군의 역할에 대한 가치평가를 논하려 한다면 이런 사적(私的) 감정들은 다 배제해야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누가, 왜, 이 저주스런 전쟁을 일으켰던가 하는 문제이어야 한다. 미군 개입의 정당성 여부는 그 다음에 다루어야 할 문제이며, 그 개입이 우리 민족에게 과연 무엇을 가져왔던가를 냉정하게 따져본 뒤에 판단해야 할 사항이다.


한국전쟁 발발(勃發)의 직접적인 책임이 김일성주석과 스탈린 그리고 마오쩌뚱에게 있다는 것은 이제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여태까지도 북침(北侵)이라고 우기고 있는 북한의 주장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꼴과 같아졌다. 소련으로부터 나온 비밀자료들은 이 전쟁이 김주석이 주청(奏請)하고, 스탈린이 재가(裁可)하였으며, 마오쩌뚱이 후원(後援)을 약속한 가운데 일어났던 것임을 이미 만천하에 밝히고 있는 것이다. 김주석은 종주국(宗主國) 소련의 허락 없이는 결코 단독으로 전쟁을 도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김주석이 전쟁을 일으킨 동기는 말할 것도 없이 전 조선의 공산화이다. 필자는 그의 동기가 다만 그의 지배야욕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그는 공산화가 우리 민족이 잘 사는 길이라고 확신했고 그리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다소의 희생을 각오하고 이를 추진했을 것이다. 만일 미군의 개입으로 전쟁의 피해가 그렇게 심각하게 따를 줄 알았더라면 아마도 전쟁 아닌 다른 방법으로 공산화를 추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참담한 전쟁을 일으키고, 골육을 서로 증오하게 만든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굳게 믿었던 공산사회도 20세기말에 이르러 한갓 백일몽임이 증명되고 말았으니 그 실수를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전쟁에 미국은 왜 개입했던 것일까? 대한민국 정부의 구원 요청도 있었겠지만 그들도 국익에 맞지 않았다면 결코 파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한국전쟁은 미국의 국익과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 당시 미국은 자유를 제한하고, 특히 종교를 박해하는 공산주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는 국제정세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산세력의 확산을 이 한반도에서 막아야 되겠다는 결심으로 참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50대 이상의 국민이라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번영이 그 때 미군이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우리의 자유를 지켜준 덕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비록 일부 병사들의 일탈된 범죄행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미군 전체의 고귀한 희생까지 폄하(貶下)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다 만행(蠻行)이 아니고, 다 희생(犧牲)이 아니지 않은가?


수년 전 모 교수가 만일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인민군이 한반도 전역을 석권하여 통일을 하는 데에는 채 2개월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은근히 미군의 개입을 원망하는 듯한 발언을 한 바 있다. 당시 남북의 군사력은 북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국군은 연전연패하고 있었으니 그의 말은 틀림없이 맞다. 그러나 만일 공산통일로 우리 민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면 미군의 개입은 불행한 일이지만 통일 이후의 삶이 질곡(桎梏)이 되었을 것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미군 개입의 정당성 여부는 공산화된 김주석의 나라가 현재의 대한민국보다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었겠는가의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있게 된다. 이 시대는 이미 여기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오늘날 편향된 시각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면 아무도 김주석의 통일조선이 오늘의 대한민국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남과 북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체제 경쟁이 공산진영의 판정패로 끝난 것은 기지(旣知)의 사실이다.


만일 한국전쟁이 인민군의 승리로 조기 종료되었더라면 우리민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까? 우선 전쟁 직후에는 아마도 수백만명이란 민족 구성원이 전쟁 범죄자, 지주․자본가, 친일부역자 등의 명목으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럼 그 이후에는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을까? 필자는 결코 그렇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사회는 아마 귀족(당원)-평민(일반인민)-천민(반동분자와 그 가족)으로 이루어진 신(新) 신분사회의 멍에를 오래토록 짊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혁명이론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런데 아마 이것도 다가 아닐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권력에 심취한 김주석은 영구집권책으로 자신 및 그의 일족들을 신성가족(神聖家族)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사회는 숨조차 자유롭게 쉴 수 없는 봉건신정사회(封建神政社會)로 전락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북한사회가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우리민족에게 행운이겠는가? 양심적인 진보세력조차도 차마 이런 모습을 우리 민족사의 발전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한국전쟁 당시 공산화 안 된 것이 우리로서는 천만 다행한 일이라면, 미국은, 적어도 한국전쟁에서 우리에게 한 역할만 두고 본다면, 우리에게 고마운 일을 해준 것이다. ‘미국이 통일을 방해했으니 미국은 우리의 철천지원수다!’라는 말은 전쟁을 일으켰던 공산주의자들이나 할 소리이지 미국의 개입으로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할 소리는 결코 아닌 것이다.

지금 좌파는 민족자주(民族自主)외세배격(外勢排擊)을 말한다. 단어 자체야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한 때 철수한 바 있던 미군을 다시 이 땅에 불러들인 것은 누구였던가? 그것은 바로 김주석이 일으킨 남침전쟁 때문이었다. 남침이 없었더라면 철수한 미군이 이 땅에 다시 올 이유가 없었다. 외세(外勢) 외세 하지만 북한에 진주해 있는 기간을 이용하여 이북에 재빨리 실질적인 공산통치를 실현시키고, 남침용 무기들을 대량 제공해준 소련도 외세이긴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 종주국 소련의 지원과 부추김 때문인데 어찌 미국만 외세로서 비난할 수가 있겠는가?

필자는, “공산주의에 문제가 있다면 자본주의에도 상대적으로 똑같은 크기의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결코 공산주의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가 가진 자의 피를 혁명의 대가로 요구하고, 강제적인 평등을 실현하자는 데 문제가 있다면, 자본주의는 자유를 빌미로 한 대(代)물림 기득권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폐단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병폐들을 해결하는 것은 오직 가진 자들을 죽이고, 사유재산을 없애는 길뿐이라는 마르크스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무엇인가 문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피의 혁명을 통해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던 국가들이 또다시 불평등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공산사회가 이상적이었다면 왜 인민들이 봉기하여 붕괴시켰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정권을 잡은 공산당의 횡포는 지주․자본가들의 횡포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북한은 결코 공산주의사회라고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사회라고 본다. 이것이 과연 필자만의 생각일까?

가진 자들의 횡포에 분노하는 열혈한들에게 공산주의 이론은 복음(福音)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주석도 아마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으로서, 그리고 독립운동의 이념으로서 이 이론을 사뭇 감동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의 도움으로 권력의 맛을 보게 되면서 그는 점차 권력의 절대화를 획책하게 되었고, 마침내 공산주의 북한을 일개 사이비종교집단(似而非宗敎集團)과 같은 ‘봉건신정사회(封建神政社會)’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게 되었으리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죽은 후 지금까지도 신(神)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의 통치행각은 결코 ‘인민의 어버이’의 그것이 아니다. 알려진 대로라면 그의 호사(豪奢)는 제왕의 그것을 능가할 듯하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가 과연 차등 없는 사회의 실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정의의 사람’이며, 인민들의 진정한 ‘어버이’였던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지금 북한에선 3세대째의 수령 세습사업이 치밀하게 추진되고 있다하니 이제 북한은 명실상부한 세습왕조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이 ‘봉건신정왕국(封建神政王國)’을 만든 창시자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순수한 공산주의자라면 그의 이런 실수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해야 마땅하다. 필자도 북한이 순수한 사회주의국가로서 전진하고 있다면 이를 별로 비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의 호치민 같은 청빈한 지도자를 갖지 못한 이 땅의 좌파들은 매우 불행하다 할 것이다. 호치민은 신격화(神格化) 같은 개인 우상화 책동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김주석은 스탈린에게 공을 세우고, 조선을 온전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전쟁을 도발하였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진실이다. 오늘날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으로 정당하게 평가하자는 교수가 있어서 온 나라가 시끄러워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일하기 위한 전쟁이란 의미에서 그 교수가 말한 바 ‘통일전쟁’이란 표현은 틀리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가 굳이 ‘통일전쟁’이라고 부르는 뜻이 이 전쟁을 성(聖)스러운 통일전쟁이라고 보는 데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 전쟁을 시작한 김주석의 동기를 정당하게 본다는 뜻이다. 공산주의자라면 몰라도 공산당이 외세의 도움을 받아 전 조선을 지배할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 우리 민족에게 미증유의 고통을 안겨 준 이 전쟁을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부르자는 데에는 이 땅에 거부감을 느낄 사람이 너무나 많다. 특히 이 전쟁의 피해를 직접 겪은 원로세대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아마 통분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의 모 교수는 또 “해방직후, 좌우익의 대립이 시끄러웠을 무렵 만일 남한 인민들이 스스로 정부를 택하게 하였다면 단연 좌익정부가 탄생했을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요구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짓밟았다. 즉, 외세(外勢)가 간섭치 않았더라면 조선 인민은 공산체제를 택했을 것이다.”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이 주장은, 그러니까, 현 대한민국 정부는 결코 태어나서는 안 될, 그 태생부터가 반민주적인 악인(惡因)을 가진 정부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만일 해방정국에서 충분한 시간만 주어졌다면 필자도 공산주의자들이 마침내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선전․선동술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것이어서 억압받고 배고팠던 민중들이 그들의 선전․선동에 세뇌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가정(假定)이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대한민국 출생의 당위성(當爲性)을 다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알다시피 다수 인민들이 지지했음직한 공산 통치는 세계의 도처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실패로 마감되었다. 세계에는 자유선거로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던 정권조차도 불과 몇 년 만에 인민들에 의해 버림을 받고 만 사례 또한 적지 않다. 이처럼 다수 의사가 언제나 현명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진 독재형 지도자의 결단이 인민들에게 더 이로움을 주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대한민국 탄생의 사례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적어도 북한 인민이 된 것보다는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탄생 과정에 다소간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볼 때는 대한민국이 북한에 비해 다행스레 태어난 정부라는 사실을 마땅히 긍정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것을 긍정할 수 있다면 해방공간의 그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국체(國體)로 하는 대한민국정부를 어렵게 탄생시켜낸 초대대통령 이승만박사의 결단과 영도력은, 그의 실정(失政)들과는 별도로, 높이 평가해주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어쨌든 우리는 그분 덕에 지금 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식민지 국가의 청년으로서 독립의 한을 품고 미국에 건너간 지 불과 5년 만에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의 3개 명문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보기 드문 천재였다. 그는 영어 연설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한편 미국 조야(朝野)에도 적지 않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카리스마는 미 군정 최고 책임자들조차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그가 좌익과의 합작(合作)을 강력 종용하는 미 군정 당국과 정면으로 대립해 가면서까지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탄생시켜 낸 것이 바로 이 나라 대한민국인 것이다. 그는 실로 미국인들보다도 더 지독한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였다.

비슷한 시기에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의 이 행운(幸運)을 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공산정권들이 성난 인민들에 의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난 후 철의 장막 저 편에서 우리가 본 것은 ‘인민의 낙원’이 아니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전인민의 거지화’ ‘빈곤의 평등화’, 그리고 ‘절망의 동토(凍土)’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절대선(絶對善)이 과연 있겠는가마는 우리는 적어도 공산주의 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보다는 대한민국이 더 살기 좋은 사회라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시점에 서 있다고 본다.


지난 10년 동안에 수백만명의 인민을 굶어 죽게 만든 정권이라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정부는 벌써 사표를 내었어야 마땅하다. 고사(古史)는 군왕(君王)들조차 자연재해가 겹치고, 흉년이 계속되면 그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한 때가 있었다고 전한다. 배가 고파 탈출한 자기 백성들을 국경을 넘어가 코를 꿰어 되잡아 와서는 잔인하게 공개처형하는 정부는 이제 ‘인민의 정부’라고 할 수 없다.

원래 공산사회는 생산의욕의 감퇴라는 치명적 문제를 태생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은 여기에다 수령 일족의 호사(豪奢)와 신격화(神格化), 과도한 군사우선 정책, 그리고 충성분자에 대한 특혜 등 엉뚱한 곳에 막대한 예산을 낭비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만 사회이다. 지금 이 절대 권력의 부패로 말미암은 인민들의 고통은 필설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도로서, 힘없는 인민들은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꼼짝달싹 못한 채 그저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참혹한 처지이다. 북의 권부는 미국과 남녘의 친미주의자들에게 이 고난의 이유를 전가(轉嫁)시키고 있지만 배고픈 인민들이 언제까지 이들의 선전에 속아줄지가 이 정권의 데드라인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남녘에는 이러한 북의 권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소위 주사파(主思派)들이 암약하고 있고, 친북인사들 또한 적지 않아 보인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보다는 인민공화국의 정통성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은 비난하지만 북한이 먼저 실질적 정부를 갖춘 것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 삼지 않으며, 한국전쟁의 해석에 있어서 전쟁을 일으키게 만든 소련의 군사지원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고, 오직 미국의 개입에 대해서만 외세가 민족통일을 방해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또 북한의 인권 및 체제문제는 북한내부의 문제이며, 핵․미사일 등은 북한의 주권에 관한 문제라는 북의 주장에 동조하는 한편 북의 비참한 인권상황과 남쪽을 겨냥한 핵과 미사일이 란 심대한 위협은 애써 외면하려 한다.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그 생각의 바탕에는 소수의 재산가들이 다수의 민중들[=노동자, 농민]을 지배[=착취]하는 사회보다는 다수 민중들이 소수의 반동[=지주, 자본가]들을 지배하는 사회가 훨씬 민주주의에 가깝다는 보편적 신념이 깔려 있다. 그들은 역사를 지배계급(가진 자)과 피지배계급(못 가진 자) 사이의 투쟁으로 보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민중의 역할과 투쟁에 특히 주목한다. 이런 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인민공화국을 대한민국보다 더 정의로운 조국으로 호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이들은 북의 현 정권이 남한 동포들에게 별로 호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교육계에도 이런 인사들이 있어 국민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보다는 북한사회를 긍정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통일에 도움이 된다고 보며, 학생들에게 ‘반미자주의식’을 노골적으로 심으려 노력한다. 외세인 미국을 쫓아내야만 우리민족끼리 통일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볼 때 미국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자들은 모두 정신 나간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지금 대한민국의 신세대는 빠른 속도로 ‘반미=자주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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