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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빚 / 이희중

작성일 09-01-1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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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abo (222.♡.102.188) 조회 4,95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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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빚 / 이희중


그때 내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그 책들을 읽으려 할 때

그 산을 오르기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그 사람들과 어울릴 때

곁에서 당신들은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삶은 결국 내가 그 책을 읽은 후 어두워졌고

그 산을 오르내리며 용렬해졌으며

그 사람들을 만나며 비루해졌다

그때 덜 자란 나는 누구에겐가 기대야 했고

그런 내게 당신들은 도리 없는 범례였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그 말을 해야 했다면,

누구한테선가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했다면

그 누구는 필경 당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신들은 늘

말을 아꼈고 지혜를 아꼈고 사랑과 겸허의 눈빛조차 아꼈고

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한테도

謝過와 謝罪의 말없이 침묵하였다

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불이 자랐다

이제 말하라, 수많은 그때 당신들이 내게 해야 했던,

그때 하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들을 흑백의 풍경으로 얼어붙게 한

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을 더 늦기 전에 내게 하라

아직도 내 잠자리를 평온하게 할 것은,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었으나 당신들이 한사코 하지 않은 그 말뿐



이희중의 「말빚」을 배달하며...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린 것이 후회가 되고 말빚으로 남아 있지요. 그런데 꼭 해주어야 할 말을 제때에 하지 않은 것도 커다란 말빚이라고 시인은 단호하게 말하는군요. 충고자의 무례보다 방관자의 침묵이 더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이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후로는 충고를 아끼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이 누군가에게 약이 된다면, 그 말을 해주어야 할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불행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자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정작 말해야 할 자들은 침묵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문학집배원 나희덕-


Old Romance - violin,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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