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오래된 기억을 만나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vira (110.♡.249.22) 댓글 8건 조회 7,168회 작성일 11-06-05 14:12

본문

<오래된 기억을 만나다.>

1.

인사동에서 옛 도반을 만나기로 한 날이라 약간 서두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271번 버스를 타기 위해 골목골목을 지나 예식장 옆을 지나치는데, 어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폐지 수집하는 사람을 힐끗 보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다!’ 20여년 전의 모습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허름한 차림새, 야구모자, 목에 건 수건, 약간 사시(斜視)끼가 있는 눈과 리어카와 절뚝거리는 다리,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 살이 쪘다는 느낌... 뒤돌아보니 초여름의 쾌청한 날씨 속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2.

20여년 전, 지금은 까페와 주점과 이런저런 식당과 옷가게들이 빽빽이 들어선 극동방송국 앞 주택가의 반지하실에서 산 적이 있었다. 그곳은 천장은 낮았지만 꽤나 넓은 편이었는데 자취방 겸 작업실, 또는 친구들과의 술판이 벌어지는 여인숙 기능까지 겸한 곳이었다. 그즈음 몸마음이 꽤 피곤했던 상태였던 것 같은데, 마당에 풀어놓은 집주인의 강아지마저 은근히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아보지 못한 천덕꾸러기인 이놈은 아무나 보면 잇몸까지 드러내고 짖어대기 일쑤였는데, 확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 들면 귀신 같이 알고 도망가곤 하는 것이었다. 집주인 꼬마아들마저 ‘미친 개’라며 미워하던 놈과의 신경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어느 날,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짐 정리를 하게 되었다. 몇 년째 끌고 다니던 고물 흑백TV와 책 가지들을 대문 밖으로 가지고 나갔을 때 마주친 얼굴. 가끔 학교 갈 때 지나친 적이 있던 폐지 수집하는 청년이었다. 내 또래 아니면 조금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리어카를 끌고 마침 골목 끝집인 내 쪽으로 온 것이었는데, TV와 책, 잡동사니를 싣고 웬 횡재냐 하는듯한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몇 번이나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먹다만 빵을 꺼내 먹으며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왠지 모를 연민으로 한참이나 서있었으며 나의 피로가 엄살이나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비닐봉투 속에 눌러져있던 반쯤 먹던 빵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었다.

3.

시간이 흘렀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만그만한 삶의 고통과 아픔과 어둠을 겪고 살아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올 때 가끔 그 빵이 생각나곤 했다.

국민학교 때, 항상 빵점만 받는 약간 지능이 낮은 친구가 있었는데, 정말 착한 아이라 친하진 않았으나 은근히 좋아했던 것 같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 진학을 하지 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고등학교 또는 대학시절 가끔 듣게 되는 그의 소식은 아버지 농사일을 돕고 산다고 하였다. 삼십대 중후반 내 삶이 온통 어둡고 힘들었을 때 전해들은 그의 소식은 비닐하우스 농사로 웬만큼 살림을 이루어 아이 딸린 과부와 결혼해 재미나게 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빵점짜리 시험지와 그의 순한 웃음과 가난했던, 까만 얼굴과 땀투성이의 그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시절의 내 삶에 비추어 어떤 희망을 그에게서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이 지나고, 그의 자살소식과 과부댁이 재산정리를 하여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씁쓸했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리어카를 끌고 폐휴지와 고물을 모으고 다니는 싸구려 빵의 사내도 삭막한 서울에서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그런데 그가 살아있다! 씩씩하게! 리어카를 끌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20여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절뚝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며... 버스 속에서 인사동 가는 내내 나 역시 그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음을 알았으며, 그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고 살아있어 주었음에 참으로 반갑고 감사하였다. 그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오래오래 기도했다.

저는 다리로 굳건히 서시라.

사시 눈으로 밝게 보시라.

죽어도 죽지 말고 사시라.

댓글목록

꽃씨님의 댓글

꽃씨 아이피 (110.♡.211.117) 작성일

단편소설을 읽은 듯...

꽁트라하기엔 넘 진지한 기억들...고맙습니다^^

결국 중요한건...

얼마나 서로에게 적절한 시기에 등장하는가...일겁니다

미친듯이 끌리고 죽도록 사랑해도

서로에게 적절한 시기가 아니고,

기가막힌 타이밍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요?

서로에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서로의 인생에 자연스레 등장해 주는 것.

그래서 서로의 누군가가 되어버리는 것.

그게 운명이자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잠깐 스쳐간 ..기억속에 머물렀다가..앗! 하고 나타나준...

그 인연을 위해 굳건하기를 기도하시는 님의 마음씀이 ...

자꾸 자꾸 생각나서 ...그냥 지나치기 힘들게 합니다.

살아주고 잘 버텨준 감사한 인연들을 위해 ..조용..차분...기도합니다 _()_

aura님의 댓글

aura 아이피 (220.♡.255.40) 작성일

vira님 글 잘 보고 갑니다. 글이 예술입니다.
내면의 쓰레기를 열심히 줍는 거지 왔다갑니다.... _()_


원석(原石)

정진규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 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원석(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여 모르실까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부자(富者) 외로움 부자(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부자(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여름가지님의 댓글

여름가지 아이피 (220.♡.240.24) 작성일

와, 참 따뜻한 글........

님의 따스한 마음이 와 닫는 듯 하네요....

오늘 지는 저녁 석양이 가슴시리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조금 서글프고, 눈부시지 않고, 아름답고 그리고 왠지 모를 평화로움......

오솔기님의 댓글

오솔기 아이피 (58.♡.98.32) 작성일

저를 위한 기도 군요.^^

수수님의 댓글

수수 아이피 (182.♡.165.252) 작성일

저는 다리로 굳건히 서시라.

사시 눈으로 밝게 보시라.

죽어도 죽지 말고 사시라.

아멘~

정리님의 댓글

정리 아이피 (123.♡.61.222) 작성일

아주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는 듯...마음 한 켠이 쏴하게 저밉니다.

사랑이...마치 눈 앞에서 서성거리는 거 같아요...

vira 님의 따듯함이 모니터너머까지 전해져 오네요..

우리님의 댓글

우리 아이피 (14.♡.240.211) 작성일

글로 뵈니 반갑습니다. 따스합니다.

無心님의 댓글

無心 아이피 (121.♡.7.136) 작성일

그래요


절지 않아도 저는 것처럼 살고

밝은 눈으로 헛짚어가며

죽지 않아도 죽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반쯤 남은 빵을 권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ㅋ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Total 6,216건 91 페이지
자유게시판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966 공자 7502 11-06-08
3965 일혜 5356 11-06-07
3964 왕풀 5471 11-06-06
3963 서정만 5834 11-06-06
3962 꽃씨 5550 11-06-06
3961 산하 5889 11-06-06
3960 정리 14204 11-06-06
3959 aura 7243 11-06-06
3958 화평 5204 11-06-06
3957 꽃씨 5495 11-06-06
3956 말돌이 12568 11-06-05
열람중 vira 7169 11-06-05
3954 왕풀 5271 11-06-05
3953 aura 5593 11-06-04
3952 공자 7532 11-06-04
3951 꽃씨 8072 11-06-04
3950 수수 6491 11-06-03
3949 꽃씨 5289 11-06-04
3948 왕풀 4886 11-06-03
3947 꽃씨 12357 11-06-04
3946 우니 7116 11-06-03
3945 aura 5016 11-06-03
3944 서정만 5918 11-06-03
3943 아무개 5073 11-06-03
3942 김영대 6819 11-06-03
게시물 검색
 
 

회원로그인

접속자집계

오늘
8,209
어제
16,777
최대
16,777
전체
5,107,497

Copyright © 2006~2018 BE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