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 죽은 자, 태어나지 않은 자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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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21.♡.118.240) 댓글 1건 조회 15,975회 작성일 13-05-10 19:05본문
이번 일지를 빌어 경주 이씨께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자 한다.
5월 7일 밤을 평온히 보낼 수 있었음에 대한 답례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유랑을 다니다 보면 ‘산 자’만이 아니라 ‘죽은 자’
는 물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임신부)가 나를 중심으로 복합적관계의 사슬을 만들고 있
음을 실감한다.
인생을 ‘돈 벌어서 집사고 차사고 결혼해서 애 낳고 여가생활하고 늙어다가 죽는 것’쯤으로
단순화 시키지 않고 볼 수 있는 시야를 기른다면... 통념을 벗어난 시야로 볼 수 있다면...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어지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다면... 삶은 동심원 같은 것임을 알게 된
다.
인생은 내가 나 혼자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동심원에 의해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간섭되는 그런 모양으로 그려 볼 수 있다. 가까이 있는 동심원으로부
터는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고, 거리에 따라 그 영향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개중에 불순
한 파동을 일으키는 동심원이 있다면 그 영향은 피해갈 수 없고, 긍정적 파동은 나의 동심
원을 더욱 선명히 만들어 낸다. 반대로 내가 불순한 파동이 될 수도 긍정적 파동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나라는 동심원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라는 동심원의 힘과 폭은 ‘결정’된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그 파동의 크
기와 질을 ‘선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노장철학에서는 ‘무위’를 요구하고, 불교철학은 ‘내가 없음’으로, 기독교철학은 ‘하
나님에게 전부 맡김’으로 ‘극단적인 수동성’을 요구하곤 한다. 이러한 극단적 수동성은 때론
정도를 넘어 허무, 극단적인 복종까지 요구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 작용의 일부분만
을 이해한 편협한 처사이다. ‘나’는 주체적으로 환경을 바꿔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
문이다.
결국 이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순간, 산 자, 죽은 자,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 영향을 받고
딱 그만큼의 수준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뿐이겠는가? 자연의 모
든 존재했던, 사라졌던, 존재할 가능성이 있던 그것들과 나는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작용해
왔고, 하고 있고, 할 상황이다. 하여 그것은 이렇게 무덤 옆에 텐트를 치고 쉴 수 있도록 터
를 닦아 주신 경주 이씨와의 인연이 감사한 이유이다.
물론 그렇다고 둥글이가 돌아가신 분들께 늘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다음
날 밤에는 남원공설운동장 주변 장례식장 인근에 텐트를 쳤는데, 그곳에서 장례식이 치러지
면 밤새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둥글이의 평정이 깨질 판이었다. 하여 둥글이는 제발 좀 누가
돌아가시지 않기를 빌었다. 태어나서 누가 죽지 않기를 그렇게 간절히 빌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렇게 간절히...
하지만 그것은 둥글이가 결정할 파동이 아니었다. 인생살이 한탄하는 조문객이 왔다 갔다
하는 덕에 둥글이는 밤새 ‘주체적’으로 뒤척거렸다.
...(중략)...
댓글목록
제석S님의 댓글
제석S 아이피 (222.♡.105.160) 작성일
이렇게 글 올려서 카페로 낚시하여,
백수 노숙하는데 필요한 돈을 구걸 하시는건가요???
궁금해서 함 질문드려봅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