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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에릭슨(심리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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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개천 (124.♡.44.12) 댓글 0건 조회 7,159회 작성일 11-06-1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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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생애는 참 독특하고, 환자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너무나 열려 있어 호감이 가는 분입니다^^ 최면이라는 부분과 심리학이라는 부분은 저도 어색합니다. 하지만 아름답게 인간승리를 하신 분이라 생각되어 어떤 블로그에서 옮겨서 소개해봅니다!


밀턴 에릭슨의 생애와 업적 (MILTON H. ERICKSON, M.D.: 1901-1980)


에릭슨은 의료 최면 분야의 세계 최고의 전문가이다. 그는 그의 최면에 대한 저작들은 권위있는 내용으로서 주로 최면유도 기법, 최면적 경험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하는 실험적 작업, 최면사- 피험자의 관계의 본질에 대한 탐색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는 혁신적인 치료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독특한 심리치료적 접근을 꾀하였다. 오랫 세월동안 그는 형식적인 최면 유도를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는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치료 방법을 개발해왔다. 그는 최면치료자로서 스스로를 정신의학자요 가족카운슬러이기도 하였다. 그는 의학 학위와 심리학 석사학위를 동시에 취득하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정신의학회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및 미국심리학회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의 회원이다. 또한 그는 미국정신병리학회 (American Psychopathological Association)의 회원이기도 하도. 유럽, 라틴아메리카 및 아시아의 여러 최면 단체의 명예회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미국임상최면학회 (American Society for Clinical Hypnosis)의 초대회장이었고 그 학회의 저널을 창간하고 10년간 편집장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1950년 부터의 그의 전문적인 삶은 아리조나 주의 피닉스에서의 개업의로서의 생활과 미국과 외국으로의 최면에 관한 강의와 세미나를 주최하기 위한 여행으로 이루어졌다.


<출생과 성장>

그는 네바다주의 오럼 (Aurum, Nevada)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족들이 위스콘신의 농장에 정착하였을 때 왜곤을 타고 동부로 여행을 해본 소수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최면에 대한 관심은 위스콘신 대학교 (University of Wisconsin)의 학부 학생시절이었다. 그는 유명한 행동주의심리학자인 클라크 헐 (Clark L. Hull) 교수의 최면 시범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헐 교수의 피험자 한 명을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초청하여 최면을 걸어보았다.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를 최면사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피험자로 삼게 되었다. 동료, 친구들, 그리고 여름 방학동안 아버지의 농장으로 돌아갔을 때는 가족들에게 그렇게 하였다. 그 다음해 가을에 그는 헐 교수가 주최하는 최면 세미나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서는 그의 최면 경험을 검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삼년 째가 되는 해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최면 걸 수 있게 되었고 결국에는 여러 가지 최면 실험을 하였으며 의과대학 및 심리학과의 교수들에게와 멘도타 주립 병원 (Mendota State Hospital)의 직원들에게까지 최면 시범을 보이게 되었다.

콜로라도 종합 병원 (Colorado General Hospital)에서 의학학위를 받고 또 콜로라도 정신병원 (Colorado Psychopathic Hospital)에서 인턴쉽과 특별 훈련 기간을 마친 후에 그는 로드 아일랜드 주립 병원 (Rhode Island State Hospital)의 정신의학자로 취직을 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930년 4월에 그는 워세스터 주립 병원(Worcester State Hospital)의 연구직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주임의 지위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에 그는 미시간주의 엘로이즈 (Eloise, Michigan)로 가서 웨인 카운티 종합병원(Wayne County General Hospital and Infirmary) 정신의학 연구 및 훈련부의 소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웨인 주립대학교 (Wayne State University)의 대학원 교수 및 의과대학의 조교수가 되었다. 요컨대 그는 동시에 미시간 주립대학교 임상심리학과의 객원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엘로이즈에서 대부분의 최면 실험을 집중적으로 하였고 정신의학 전공 레지던트들에게 특히 유용한 최면에 관한 아이디어들을 발견하였다. 그가 의대생 뿐만 아니라 정신의학자들을 훈련할 때는 환자를 관찰하는 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최면사로서의 훈련 경험이 그러한 능력을 증진시킨다고 믿었다. 그의 비범한 관찰 능력은 전설적이다.

그는 17세때부터 소아마비로 인해 침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 그는 아무런 신체적 감각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침대에서 팔이나 다리의 위치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느낌만으로 손이나 발 또는 발가락의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는 신체적 움직임에 대해서 예리하게 인식하기 사작하였다. 후에 그가 의과대학에 갔을 때 근육의 성질에 대해서 배웠는데 그 지식을 소아마비가 자신에게 남긴 근육을 적절히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데 사용하였다. 그렇게 하는데 1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는 신체적 움직임에 대해서 극도로 예민하게 지각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사람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신체적 움직임을 사용하는데 그러한 움직임들은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의사소통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그는 피아노 연주자가 연주를 잘 하는지를 소리로서가 아니라 손가락의 움직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건반을 터치하는 손가락의 힘이나 부드러움을 보고서 그가 얼마나 피아노 연주를 잘 하는지 짐작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음조를 구별할 수 있는 청력이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의 소리로 피아노 연주자를 평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그의 치료에서는 장점으로 활용되었다. 왜냐하면 의사소통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음조를 구별할 수 없는 귀먹음 장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소리의 억양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은 곧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말의 내용에 마음을 덜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색맹이기도 하였다. 그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색은 자줏빛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줏빛 넥타이와 스포츠 셔츠, 파자마를 착용하였고 카펫과 화장실 벽을 자줏빛으로 장식하였다.


그는 치료를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도록 돕는 방법으로 설명을 하였고 자신의 생애를 그렇게 하는 일에 바쳤다. 1919년에 그가 소아마비에 걸렸을 때 그는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리 근육을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몇 시간 동안이나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은 실패를 하고 결국 몇 년 동안이나 목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위스콘신 대학교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하여 앉아서 일을 하는 통조림 공장에서 일을 했다. 일 학년을 마친 후에 그는 여름방학 동안에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서 햇볕 속에서 많은 운동을 해보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다. 커누 여행이 충분한 운동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그는 6월에 17피트 즉 약 5m 정도의 길이가 되는 커누로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수영복과 작업바지를 입었으며 모자 대용으로 머리에 두르는 매듭달린 손수건을 착용하였다. 그는 커누를 물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다리의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겨우 몇 미터 정도밖에 수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름 항해를 위해서 마련한 물품으로는 작은 콩 자루, 쌀 자루, 약간의 취사도구정도였다. 그리고 2달라 32센트의 돈을 소지하였다. 이 정도 수준에서 그는 6월에서 9월까지를 매디슨 호수에서부터 시작하여 야하라 강, 록 강, 미시시피강으로 하여 센트루이스 북쪽 몇 마일 지점에 이르기까지 항해하여 다시 일리노이 강으로 해서 매디슨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강에서 잡을 생선을 먹었고 강둑에서 과일을 따먹었고 미시시피 강에서는 농작물을 수확하였다. 그 농작물 중에는 미시시피 강을 오가는 배의 선원들이 버린 감자 껍질들도 있었다. 그리고 실수로 버려진 감자나 사과도 있었다. 여름이 끝날 때까지 그가 여행한 총 거리는 12,00마일 정도가 되었는데 그동안에 그는 별다른 돈이나 식량 없이 그리고 커누를 움직일 수 있는 다리의 충분한 힘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여행은 보통 사람에게보다도 에릭슨에게는 더욱 어려웠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적으로는 요청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도록 주변 상황을 조정하는 일을 잘 했다. 그는 자신의 커누 여행에 관련하여 말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재미있다. 그는 다른 고깃배로부터 크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 내에서 노를 저어갔다. 나는 크게 몸이 그을렸고 매듭이 있는 손수건을 머리에 둘러썼기 때문에 근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그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큰 소리로 그에게 질문을 하곤 하였다. 그러면 그는 위스콘신 대학교의 의예과 학생인데 건강을 위해서 커누 여행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러면 어부들은 낚시는 어땠냐고 물어보았고 그때 그는 아직 별로 잡지를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거의 틀림없이 어부들은 이야기를 다 마치고 헤어질 때 그에게 고기를 주곤 하였다. 결코 그 스스로가 고기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어부들이 메기를 주려고 했으나 그는 항상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메기는 아주 비싼 것으로 그들의 생계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메기를 거절하면 어부들은 다른 고기들을 미시시피 농어를 두 세배나 더 주곤 하였다.

강을 따라 가다 보면 댐이 나오게 되어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커누를 댐으로까지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이 경우에 비록 그가 커누를 댐에까지 옮겨갈 수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가 댐 주위에 항상 있는 낙싯대가 있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올라가곤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학 공부를 위하여 준비해간 독일어 책을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그에게 모여들어 그를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는 어떤 이들이 그에게 도대체 그 낚시대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묻곤 하였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면서 커누가 댐 위로 운반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스스로의 노력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으로 그는 하계 커누 여행을 완수할 수 있었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가 학교로 되돌아왔을 때 그는 폐 활량이 6인치나 증가하였고 일마일 거리 만큼이나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새벽부터 어두울 때가지 강물을 거슬러 4마일이나 노를 저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커누를 댐에까지 끌고 갈 수가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인 1952년에 그는 또 다시 의학적으로 드문 케이스인 소아마비 증세를 경험하였다. 이 증세는 오른쪽 팔과 측면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도 일년 이내에 그는 두 척의 커누를 사용하면서 보다 고난도의 아리조나 산의 하이킹을 감행하였다.


그는 주로 건강 문제 때문에 미시간의 엘로이즈를 떠나서 아리조나주의 피닉스로 옮겨갔다. 그는 독특한 환경에서 개업활동을 하였다. 즉 그가 환자를 치료한 사무실은 방이 세 개 딸린 벽돌집이었으며 주변에는 좋은 이웃들이 있었다. 환자 대기실은 바로 집의 거실이었기에 환자들은 늘 8명의 자녀를 포함하는 전체 가족들에게 노출되었다. 그는 책상, 몇 개의 의자, 책장이 들어갈 정도 크기의 사무실에서 환자를 보았다. 사무실 벽에는 90대까지 생존했던 부모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여기 저기에 가족의 기념품들이 널려있었다. 이 사무실은 그의 명성에 비해서 너무도 소박한 것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편리를 제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의 젊은 제자 한 사람이 피닉스 시내에 개업 사무실을 차리고자 하였는데 스승의 사무실보다 더 나은 것으로 할 수 없는 형편 때문에 한 때는 그에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자신이 처음 개업했을 때는 겨우 테이블 한 개와 의자 두 개가 있는 정도로 지금보다 더 형편없는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개인치료활동 외에도 자택에서 부인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미국 임상최면 저널’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Hypnosis) 을 편집하는 일을 포함하여 많은 전문적인 활동을 수행하였다. 부인 엘리자베스 (Elizabeth Erickson) 여사는 남편과 함께 여러 가지 활동을 함께 하였다. 그 가운데는 남편과 공동 논문을 집필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녀는 웨인 주립대학교의 심리학과 학생 겸 실험 조교로 있을 때인 1935년에 남편을 만났고 1936년에 결혼을 하였다. 에릭슨은 이때 이미 3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혼한 상태였다. 그들은 결혼 후에 5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전처 소생의 자녀를 합하여 모두 8명의 자녀를 양육하였다.


에릭슨 박사는 최면과 치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부인과 자녀들의 예를 들곤 하였다. 비록 그는 지방에서 개업하고 있었지만 많은 환자들은 먼 곳에서 왔다. 심지어는 뉴욕이나 멕시코 시티에서 까지 비행기로 오는 환자들이 있었다. 그는 말년에는 횔체어를 타고 다녔다.


위스콘신의 밀워키에 있는 Stephen de Shazer와 그의 동료들은 소위 해결중심치료를 개발하였다. 이 방법은 환자의 결점보다는 그의 장점에 초점을 강조하는 치료법으로 아주 적극적인 에릭슨의 방법에 해당하였다. 이것은 정신병리학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자의 장점을 되살려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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