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과 후천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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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명도abcd (1.♡.209.58) 댓글 0건 조회 8,233회 작성일 13-08-04 10:00본문
요즘 본의 아니게 자유게시판에 자주 이상한(?)글을 올려 이 쪽 분야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요즘 도빨(?)이 좀 받아서 그 기운이 빠지기 전에 자주 쓰니 양해 바라겠습니다~ (여기 코너가 경전읽기 여서 또, 편하게 씁니다)
도빨하니까, 기도빨(발)이 생각나는데, 우리나라 기도발은 산 중에서도 바위산이 잘 받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계룡산, 가야산, 금강산, 설악산, 북한산이고 지리산도 좋음. 그리고 다른 데도 많이 있는 즐로 압니다.
각설하고, 명리학(命理學)은 10세기 무렵에 그 체계가 완성되었는데, 주역은 적어도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여 왔다. 그 역사를 보면 주역이 사주보다 약 1500년 이상 앞선다.
그러므로 주역은 동양 역술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가 있으며, 주역사를 대강 보면 세가지 분야로 분류가 되는데, 첫째는 점서(占書)로서의 기능인데 이 노선을 보통 상수학(象數學)이라 한다.
주역의 8괘와 64괘는 일차적으로 형상(象)으로 나타나고 이 형상은 숫자로 환산된다.
예를 들어 건괘(乾卦)는 1이고, 태괘(兌卦)는 2, 리괘(離卦)는 3, 진괘(震卦)는 4로 표현하는 식이다.
점을 치기 위해서는 상(象)과 수(數)에 치중해야 하는데, 주역의 원래 목적이 점을 치는데 있었고 상수학적 입장이 가장 원조이다.
중국 송대(宋代)의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이 대표적 인물인데 그의 저서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상수학적 입장에서 우주변화를 설명한 명저이다. 그러나 정이천(程伊川)을 비롯한 宋代의 신유학자들은 소강절의 학설을 너무 거창하고 어려워 이해를 못하였다.
그래서 신유학자들의 어록을 모아놓은 '근사록(近思錄)을 보면 유독 소강절의 어록만 빠져있다.
괴상하다고 여기고 빼버렸지싶다 .ㅎ
흥미로운 것은 19세기 한국의 민족종교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것이 '후천개벽'인데, 그 어원의 원조가 소강절로부터 유래하였다.
후천개벽의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별로 빛을 못보다가 일본에서도 주목 받지 못했고 유달리 조산에서만 각광받고 유행하였는데, 조선조의 계보를 보면 화담 서경덕(1489~1546)이 소강절의 노선을 계승하여 토정 이지함(1517~1578)으로 어어지고,
(그 밑에 '격암유록'으로 유명한 남사고도 화담의 제자) 그 다음 전라감사를 지냈던 이서구(1754~1825), 그 다음 연담 이운규(?~?)선생(전주 이씨로 세종의 18대손 담양군의 13대손, 흥선대원군과도 친밀했음) 밑으로 계룡산의 김일부(1826~1898, 정역의 지은이) 그 다음 그의 영향을 받아 동학의 수운 최제우(1824~1864)-경북 경주 현곡이 고향(용담정이 지금도 있음)으로 동학운동 때 대구 달성공원에서 처형됨, 울산에 공부했던 유허지가 있음)
그리고 전남 영광 모악산의 강증산(1871~1909, 증산도 창시자), 익산 원불교의 소태산 박중빈(1891~1943)대종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전환기에 한국에서만 유달리 후천개벽설이 민중들에게 파고 들었는데 이유는 아마도 한국인들이 그만큼 변화과 개혁에 대한 갈망이 강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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