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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 살아 있는 도를 말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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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19.♡.254.123) 댓글 2건 조회 6,966회 작성일 11-07-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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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아제'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이를 만난 후에 쓴 글입니다,
이곳 싸이트에는 없고, 바라보기, 도란도담 등의 싸이트에서 글을 올리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길에서 뵙고 쓴 글입니다,

과연 어떤 이들이 이 '망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 과연 누가? 어떤 조직이 현재의 자본

과 권력지향의 세상의 흐름에 저항해서 이 세상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인간과 자연이 조

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낼런지... 내 인생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처음에 나는 사회복지 전공하면서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복지 체제 자

체가 너무 보수적이고 미온적이었으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활동만 잘하면 만사 땡이라고

여기는 안일함에 빠져있음을 보게 되었다. 또한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에 대한 진지

한 고민 보다는 그 ‘결과’를 땜빵하기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에만 집중하는 그 관점이 근본

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그보다 조금 더 급진적인 활동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고, 시민사회운동에 눈을 돌렸

다. 이 활동은 환경파괴, 빈익빈부익부, 반인권, 반민주 상황에 맞서서 이러한 부조리를 생

산해 내는 사회구조를 직접적으로 개선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부조리

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외부의 적에 대해서만 비판할 줄 알았지, 자기 성찰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여차 하면 변심했고, 이권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버렸고, 서로 패권을 얻기 위해서 끊임없는 분열을 택했다. 하여 자기 성찰이 없는

이들에 의한 사회의 변화에서 희망을 찾는 것 역시 한계가 있음을 보았다.



그 후로는 보다 심도 깊게 고민했다. '과연 어떤 인간들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권력과 자본에 맞서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고민의 결과 내 눈은 종

교인을 향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들을 처음 접할 때까지는 그들이야말로 이 ‘망할 세상’을

살려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구원자였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망할 세상의 구원자 역할을 할 수 있다기 보다는 이 망할세상을 만들어

내는 주역이었다. 기독교나 불교나 그 주류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철저히 자본과 권

력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럴싸하게 사랑과 자비를 떠벌릴 뿐 기실 이 지독한 위선과 독단의

화신들이 이 사회를 망가트리는 주역 이었던 것이다. 물론 극 소수 정말로 헌신적이고 경건

한 믿음을 믿고 있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를 따져봤을 때, 차라리 종교가 없는 세

상이 좀 더 세상 살이의 희망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거듭된 실망의 와중에 또 한 부류의 특이한 신념을 가진 인간들을 접하게 된다. 이

들은 노자-장자의 후손들이자 석가의 동반자이고 예수의 정신도 일부분 포괄하고 있지만,

딱히 종교라고 할 수는 없는 그 어떤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중심적

가치는 ‘도’였다.



이들의 ‘앎’이 소중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이들이 추구하는 ‘비움’과 ‘있는 그대로’의 가치가

‘조금이라도 더 개발하고’,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지려는’ 현대사회의 가치에 정면으로 배치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에 환호했고, 이들의 힘을 통해

서 현대 자본-권력 지향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할 어떤 힘이 뿜어져 나오기를 희망했었다.

하지만 이들 또한번 나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들의 이론은 너무도 그럴싸하고 거창하다보니, 아무런 실행을 안하고 입으로만 씨

부리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충만?됨에 있었다. 그들의 가치는 초월론, 관념론, 회의론, 허무

론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이상이 빚어내는 정신적 충만성이 차고 넘치는지라,

그러한 앎을 주저리다 보면 삶속에서 실천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는 듯했다.



둘째는 그들의 지독한 주관주의-유아론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들어찬 초월, 관념,

회의, 허무적인 가치들을 주저 없이 최고의 가치로 매김하면서, ‘내 자신만 비우거나 깨달으

면 만사 땡이다.’는 류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빠져있었다. 이에 따라서 사회문제에 대한 고

민과 실천의 필요성을 자신들의 뇌에서 제거함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이기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들과 수도 없이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그것은 치유되지 않는 종교적 맹신(‘나’라

는 종교)에 빠져 있음을 확인했고, 그들로부터의 희망을 회수했다. 다만 그들 중에서 극소수

부류가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를 하나의 연관 속에서 다루고 있음에 근근이

관심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도사상’을 현실 사회의 문제에 가장 적절히

접목한 한 인간을 만나게 되었다.



‘아제’라는 아이디를 쓰는 이 인물은 내가 ‘도’를 읊어대는 인간들에게 바랬던 최적의 것을

머릿속에 구축하고 있는 이였다.



그는 우선 강직한 인물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여겨서 학교를

그만뒀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먹고 살 일이 막막해서 그 후에 시험에 통과해 행정공무원을

하다가 그 속의 부조리에 치를 떨어 좀 괜찮을까 하여 다시 교육공무원으로 이직했다고 했

다. 하지만 그나마 좀 온전한 가치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교육분야에서도 갖은 부조

리를 접하고 그 혼탁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책상 뒤집어엎고 나왔다고 한다.


그것은 공적인 분노였다. 다른 이들처럼 적당히 세상에 타협해서 한평생을 보내면서 거창한

'인생의 비밀'을 떠벌려 댈 수 있으련만 그렇게 살기에 그는 이미 ‘개인성’을 뛰어넘은 상태

였던 것이다. 하여 올바른 세상을 꿈꾸는 이로서 첫 발을 그리 자기 밥그릇 내던지는 것으

로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닌 세상의 ‘중심’이었기에 그에 걸 맞는 행동

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었다.



어떤 일을 대충 하지 않고 그야 말로 혼신의 힘을 쏟아서 행하는 그의 추진력은 20대 중반

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한 ‘도’를 공부하는 자세에서도 드러나는 듯하다. 그는 ‘도’를 얘기하

는 조직과 단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 들어가 수련하기 시작했고,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 하는 엄청난 갈망은 누구보다도 빠르고 집중적으로 그들이 가진 앎을 빨아들였다고 한

다. 특히나 그의 치열함은 단순히 주변부를 기웃거리면서 어깨너머로 보고 익히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핵심으로 파고들어 그들 앎의 진수를 빨아들이는 길을 택했다. 가령 그

는 대순진리교 등의 조직 등에 들어가서도 직접 수련했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집중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빨아들이는 그의 능력은 누구보다도 명증하

게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들의 허와 실을 간파하게 만들었던 듯하다. 이러한 자신감이 붙자

어느 때 부터인가 그는 그 모든 앎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어우려트려 ‘도’를 찾기 위한 자기

여행을 시작을 시작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머리의 뚜껑이 열려 무의식이

해방되고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이 눈에 보이는 족족이 정신에서 재편되는 특이 현상도

이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의 끝에서 그는 ‘진리와 도’를 설법하는 거룩한 ‘선각자’가 되어서 그를 추종하는 이

들에게 깨달음을 전수해주곤 했다고 한다. 10수년 전에 신문에 칼럼까지 올라갔으면 그 업

종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인물였던 듯하다.

...

자.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이는 작금에 난립해 있는 수 많은 ‘도 사이비’ 이야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이다.



그는 여느 ‘도인’들이 그러하듯이 거창하고 초월론적이며 관념적인 깨달음을 주절거리면서,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삶을 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득도해서 거룩한 선각자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의 허상을 성찰할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통수 맞는 경험’은 그의

삶을 180도 돌려놓았고, 그 후로는 사이비교주 흉내 내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인생을 걸고 연마해온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포기 했을 수 있었던 그는 참

무던한 인간인 듯 했는데, 그렇게 통렬히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때가 지금으로

부터 10년 쯤 전이고 보면, 그에게서는 여느 ‘도’운운하는 이들에서 보이는 ‘거만’함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 과연 ‘그때’ 그는 무엇을 깨달았던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의 허상]과 [삶과 괴리된 앎의 허망함]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네 삶에 역동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그 어떤 실질적이고 생동감있는 작용

을 만들어내지 않는 그 모든 가치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존재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를 그가 뼈저리게 각성한 결과였다. 그는

이러한 앎을, 관념과 개인주의의 극단(사이비교주)으로 치달았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과정에

서 그 누구보다도 체험적으로 깨달았던 듯하다.



이러한 ‘연기적 역동성’을 사이비 교주들은 ‘시공이 하나로 얽히고 모든 존재가 연동되는’

대단히 거창하고 고차원적인 어떤 현상으로 ‘설법’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앎과 삶이 하나

가 되고, 이해와 실천이 삶의 장에서 하나로 어우러져야 함으로 강변한다.



그렇기에 사이비 교주들은 높은 교단에 앉아서 끊임없이 거창한 얘기에 대한 ‘주석’을 달면

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현혹시킬 방법을 찾지만, 그는 그러한 연기적 역동성을 현실로 만들

어내기 위해서 교단에서 내려와 위아래 없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그 앎을 실현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렇기에 그는 여느 사이비교주들이 하는데로 ‘내 밑에서 배워봐라’가 아니라, ‘연

대가 중요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에서는 ‘도’ 좀 했다는 이들로부터 보이는 자만과 한 끝발 내리 깔고 타인을 대하

는 교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소탈한 동내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가 평

이하게 쏟아내는 일상에 대한 말 속에 그 ‘도’의 원리가 녹아나 있었다.



여느 사이비교주들이 그야말로 복잡하고 초월적이며 관념적인 이론을 떠벌리는 통에 이를

접하는 이들은 ‘무조건 믿고 추종’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과는 달리, 그의 이야기는 현실 속

에서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이었고 검증 가능한 것들이었다. 이로 인해서 그의 ‘권위’는 하락

할망정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인식은 사실성을 더해간다.



재미난 사실은 그가 검증과 비판, 분석이 가능한 ‘현실의 삶에 적용이 가능한 앎’을 강조하

는 이유가, 그 자신이 스스로 빠진 함정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와도 일맥이 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는 ‘도’를 읊조리는 누군가가 그것을 읊조릴만한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를 살피는 기준으

로 ‘오류수정’ 능력이 있는지 아닌지를 살핀다고 한다. 이것은 실로 그 자신이 ‘도인’들이 치

닫는 엘리트코스를 끝까지 가서 사이비교주 비슷하게 했다가 그 잘못을 ‘성찰’하고 길을 되

돌아 올 수 있었던 바로 그 방법이었다.



그 오류수정의 능력은 바로 논리적 사고능력인 것이고, 현실의 삶에 적용이 가능한 것인지

를 합리적으로 살피는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단순히 ‘바른 앎’을 찾는 것으로 그

치지 않고, 바른 실천을 하고, 바른 연대를 하고 바른 개혁을 위한 고민으로 이어지고 있었

다.



멋지게 보이지만 결국은 뜬구름만 잡는 이야기, 대단히 아름답지만 기실은 허무의 이야기,

현란하지만 곱씹어보면 죽음의 이야기들이 세상에 난무해 있다. 그는 그 부조리를 누구보다

절실히 경험한 이로서 이에 맞서서 살아있는 도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스스로 얘기한

다. ‘도’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고, 다만 내 자신이 세계속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정확

히 알고 그렇게 잘 작용하는 것’이라고...



앎과 실천, 나와 세상, 인간과 자연의 연동적 관계를 그만큼 명증하게 설명해준 이를 이전

에는 대하지 못했었다. 이에 도판에 대한 작은 희망이 솟아난다.



그는 사이비교주 활동을 과감히 끝낸 후 자숙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그 앎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서야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우선은 어줍짢은

‘사이비교주’들이 헛소리 떠벌림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그 입을 틀어막는데 소일

꺼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비롯한 세상의 부조리를 개선하고 인간이 잘 살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연대를 준비하고 있단다. 그래서 우선 현실감각을 기르기 위해서 세상을 찾

아 나설 필요를 느끼고 있단다.



그가 그 전의 영광(사이비교주)에는 관심이 전혀 없음이 분명한 것은 그가 ‘연대’를 생각하

고 있음에도 드러난다. 사이비교주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은 ‘주도자’ ‘지도자’이기를 원할망

정 결코 평등한 이들 사이의 ‘연대’를 말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이다.’ ‘나는 우주이다.’ ‘지금 이순간이 완벽하다.’ ‘내 자신만 찾으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거창한 말만을 씨부리는 수많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난립하는 ‘도판’

에서 그가 그 허상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내친김에 세상의 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혁명의

단초를 찾아내기를 염원한다.



자신감에 넘쳐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많이 체험하고 알고 있지만 여전히 젊은 그와의 만남

은 그야말로 인생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댓글목록

검비님의 댓글

검비 아이피 (218.♡.225.9) 작성일

거침없는 글들 ...
이렇게 긴글을 찬찬히 끝까지 읽은것도 처음인듯..

도’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고,
다만 내 자신이 세계속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렇게 잘 작용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세상엔
거창한 말만을 씨부리는 수많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난립하기도 하고
혁명의 단초를 찾아내는 일에 가깝게 있는 둥글이님 같은 분도 함께 공존하는 겁니다
맨날 이쁜 것만 보면 얼마나 그것또한 지루한 일이겠어요?
님의 가슴 답답증도 이해가 되지만...
변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꽃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늘 데끼님이 말하더구만요 ..
잘 읽고 생각하고 갑니다 ^^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83.♡.236.40) 작성일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몹시 급하긴 한데, 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세상돌아가는 꼴을 볼라면... 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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