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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자는 없다, 다만 조건화된 생각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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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주 (175.♡.115.122) 댓글 2건 조회 5,711회 작성일 11-11-01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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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눈팅만 하다가 문득 같이 나누고 싶은 글이 있어 회원가입을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 속에서의 자유를 가리키시는 김기태 선생님의 말씀은 항상 공감하고 있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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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추구라는 미명하에, 안 그래도 고달픈 사람들을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현혹시켜 금품을 갈취하고 망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사이비들이 판을 치는 와중에도 맑은 샘물같은 원초적인 생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정법이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책'Commentaries on Living Series 3'의 Chapter 12 'There Is No Thinker, Only Conditioned Thinking'을 읽다가 내용이 와 닿는 바가 있어 대화 부분만 제가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가 따로 있어서 구하고 찾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찾고 구하고 있는 자가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치면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것이어서, 처음부터 진리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항상 있는 이대로의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대화를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간단한 것인데도, 망상 속에서 헤맨 세월이 워낙 길다보니 다들 잘 못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긴 글이지만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면 공부에 도움이 되실 것 같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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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자는 없다, 다만 조건화된 생각만 있을 뿐'

그는 나이가 지긋하고 독실하며 지지와 인정을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규칙적으로 북부에 있는 어떤 선생을 찾아가 경전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으며, 지금은 남부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 친구가 저에게 선생님께서 여기서 연속된 강연을 가질 것이라고 일러주었고, 저는 그 강연에 참석하려고 머물렀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으며, 선생님께서 가르침과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견해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란 도와줄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런 도움을 열심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누군가를 추종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명백히 지도(guidance)를 받으려는 욕망은 순응을 향하고 있으며, 이처럼 순응하는 마음은 진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순응하지 않습니다. 쉽사리 믿지도 않을뿐더러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 마음을 이용하여, 제가 찾아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자기인식(self-knowledge) 없이 다른 사람에게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맹목적인 추종일 뿐입니다. 모든 추종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저에게 자아의 심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도움을 구하려고 찾아온 것이, 선생님의 추종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언급하자면 권위의 성립은 실로 복잡한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을 추종한다는 것은 그저 더 깊은 원인의 결과일 뿐이고, 그 원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외견상 누구를 추종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의미밖에 없습니다. 피안(彼岸)에 도달하려는, 그것에 가 닿으려는 욕망이 우리 인간의 추구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성공, 영속성, 안락함, 사랑, 영원히 평화로운 상태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는 한, 반드시 우회하거나 기만적인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추종은 다만 안전을 바라는 깊은 갈망의 징후일 뿐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피안에 도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있는 어떤 배라도 탈 것입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피안이지 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피안이 아니라, 강과 당신이 발 딛고 있는 강둑입니다. 강이 바로 삶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아름다움, 기쁨과 즐거움, 추함, 고통 그리고 슬픔과 함께 하는 나날의 생활인 것입니다. 삶이란 이 모든 것들의 광대한 집합체입니다. 삶이란 그저 어떻게든 지나가야 하는 길이 아니며, 피안에 한눈팔지 말고 당신이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질투, 폭력, 덧없는 사랑, 야망, 좌절, 공포로 이루어진 이 삶이 바로 당신 자신이며, 당신은 또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이 피안, 영원한 것, 영혼, 아트만, 신, 기타 등등으로 부르는 무엇으로 도피하기를 열망합니다. 하지만 즐거움과 고통으로서의 이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시기심에서 자유로워지지 않고서는, 피안이란 다만 신화요 망상이며, 안전을 찾아 헤매는 겁에 질린 마음이 만들어낸 이상일 뿐입니다. 반드시 올바른 기초가 놓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집이라도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

전 이미 겁이 나기 시작하는데 선생님께서는 두려움을 없애주시지는 않고 오히려 더 두렵게 만드시는군요. 제 친구가 선생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했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지한 사람이어서 한낱 허상에 불과한 것 보다는 더 진실한 뭔가를 원합니다. 저도 올바른 기초가 놓여야 한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깨닫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기심으로 인한 갈등은 그것의 즐거움, 고통과 더불어 반드시 내외부적으로 혼란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이런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때에만 마음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모든 행동은 다만 우리를 더 깊은 혼란으로 이끌어 갈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혼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라는 것은 점진적인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혼란은 조금씩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조금씩 사라진다면 마음의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혼란 속에 남아있을 것이며, 혼란이 사라졌던 부분도 곧 다시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이런 혼란을 어떻게 사라지게 할까라는 의문은 단지 당신의 마음이 아직도 피안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일어납니다. 당신은 탐욕과 폭력, 혹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의 전체적인 의미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다만 지금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제거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시기심과 시기심의 결과로 인한 비극에 전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당신은 어떻게 시기심을 제거할 수 있는지를 결코 묻지 않을 것입니다. 시기심에 대한 이해는 완전한 행동(total action)입니다. 반면에 '어떻게'는 점진적인 자유의 성취를 의미하며, 이것은 그저 혼란스러운 행동에 불과합니다.

완전한 행동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완전한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사고자와 그의 사고 사이의 분열을 탐구해야만 합니다.

사고자와 그의 사고 위에 존재하는 주시자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분명 있다고 느낍니다. 언젠가 지복의 순간에 저는 주시자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전통과 수많은 영향들에 의해 형성된 마음의 결과물입니다. 기독교도의 종교적 비전경험은 힌두교도나 회교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특수한 조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기준은 경험이 아니라, 경험자도 경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 것입니다.

삼매(samadhi)상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 말을 쓰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묘사한 것을 당신이 그저 인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고자와 그의 사고를 넘어서 있으며, 그것들 위에 존재하는 주시자가 분명 있지 않습니까? 저는 굉장히 확실하게 주시자가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선 결론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을 끝마쳤다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선생님, 이것은 결론이 아닙니다, 저는 주시자의 실체를 느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알거나 느끼는 것은 당신이 배운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사회와 문화로부터 다르게 교육받은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궁극의 주시자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당신과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강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인 둘 모두는 결국 같은 범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들 모두는 결론과 자신의 조건에 바탕을 둔 경험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생각이 잘못된 것 같지만, 아직 수긍이 가지는 않습니다.

전 당신이 틀렸다고 하거나, 당신에게 무엇을 납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검토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것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책을 읽고 공부한 다음에 저는 주시자와 주시대상이라는 이 문제를 꽤 철저하게 해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눈이 꽃을 보고, 마음은 눈을 통해 꽃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 뒤에는 마음과 눈과 꽃이라는 전체적인 과정을 자각하는 실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자기주장이나 성급함, 독단 없이 이 문제를 조사해 보도록 합시다. 생각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지각대상, 접촉, 느낌이 있은 다음에, 기억에 바탕을 둔 사고가 그것은 장미꽃이다.라고 말합니다.(色受想行識-五蘊) 사고가 사고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고자를 낳는 생각의 과정(thinking process)입니다. 먼저 사고가 일어난 다음에 사고자가 나타납니다. 이와 반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실상임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모든 유형의 혼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고자와 그의 사고 사이에는 좁거나 넓은 경계와 간격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고자가 먼저 생겨났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자, 봅시다. 사고는 자신이 영원하지 못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영속성과 안전을 갈망하게 되므로 사고자를 만들어낸 다음, 사고자를 영속성의 더 높고 높은 차원으로 밀어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고자와 그의 사고, 주시자와 주시대상 사이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간격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과정은 여전히 사고의 영역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주시자가 실체가 아니며, 사고와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영혼, 아트만 혹은 뭐라고 이름 붙이든 주시자는 여전히 사고의 산물입니다. 사고가 주시자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거나, 주시자가 사고를 조정하고 형성하는 한, 주시자는 여전히 사고의 장(field) 안에, 시간의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 어떻게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저도 모르게 이것이 사실임을 보기 시작했고,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단지 사고의 과정만 있을 뿐, 사고자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요? 사고는 주시자와 사고자, 끝없이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교하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검열관을 낳았습니다. 항상 자신의 사고와 싸우며 그들을 지배하려 노력하는 자가 바로 주시자인 것입니다.

좀 더 천천히 진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정말로 이 대화를 통해 제가 가야할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생님께서는 고귀하든 천하든 모든 형태의 노력은 사고자와 그의 사고 사이의 거짓되고 환상에 지나지 않는 분열로 인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노력을 아예 없애버릴 작정이십니까? 모든 변화에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제 그것을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사고자, 주시자, 검열관, 통제자를 모두 합한 것으로서의 '생각'만 존재함을 보았습니다. 주시자와 주시대상 사이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극복하거나 최소한 바꾸려고 노력하는데서 오는 갈등이 있습니다. 이런 노력은 결코 사고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부질없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사고자 즉, 검열관 자신이 바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고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마음의 한부분이 다른 부분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음 그 자체의 지속일 뿐입니다.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을 극복할지도 모르고 종종 극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배적인 욕망은 여전히 다른 욕망을 낳으며, 번갈아가며 승자와 패자가 되므로 이원성의 모순은 계속됩니다. 이 과정에는 끝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순의 제거를 통해서만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사고자와 그의 사고는 단일한 과정이어서,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지속되는 일은 없습니다. 즉, 주시자와 주시대상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시자의 모든 특성은 그의 생각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생각이 없다면 주시자도, 사고자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 여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만약 이해가 단지 언어적이거나 지적인 것이라면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반드시 사고자와 그의 사고가 하나가 되는, 둘이 계합(契合)되는 실질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체험 후에는 단지 생각의 과정만 존재합니다.

생각의 과정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개인적이거나 비개인적, 개인주의적이거나 집단적, 종교적이거나 세속적, 힌두교도나 기독교도, 불교도나 회교도, 기타 등등으로 나아가는 생각의 방향과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회교도로 조건화된(緣起된) 사고만 있을 뿐, 회교도로서의 사고자는 없습니다. 사고는 스스로의 조건화에 따른 소산입니다. 사고의 과정과 길은 불가피하게 모순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순을 다양한 수단을 통해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면, 단지 또 다른 형태의 저항과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저도 최소한 그 점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순과 비극을 낳는 이런 생각의 길은 반드시 완전하게 끝나야만 합니다. 더 낫거나 더 고상한 생각의 방법이란 없습니다. 모든 생각은 조건화된 것일 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고가 끝날 때라야만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고 암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사고는 조건화된 것입니다. 경험들과 기억들의 창고가 되고, 사고가 일어나는 곳으로서의 마음은 그 자체가 조건 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의 어떠한 마음의 움직임도 자신의 제한된 결과들만을 가져오게 됩니다. 만약에 마음이 스스로를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단지 또 다른 패턴을 세우는 것이며, 아마 다르겠지만 여전히 하나의 패턴일 뿐입니다. 마음이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사고의 지속입니다. 아무리 더 높은 차원의 노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사고의 순환, 시간의 순환과 동일한 순환 속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 선생님. 저는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하시지요.

마음의 한 부분에서의 어떤 유형의 여하한 움직임이라도, 시기하고, 야심차며, 탐욕스러운 추구들과 더불어 단지 사고의 지속을 강화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런 사실을 마치 독사를 완전히 알아차리는 것처럼 마음이 전적으로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사고의 움직임이 끝장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낡은 것이 또 다른 형태로 지속되는 것이 아닌, 전면적인 변혁이 있게 됩니다. 이 상태는 말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묘사하는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그저 말로써만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절대적인 '언어 밖의 의미(敎外別傳)'를 정말로 이해했다고 느낍니다. 제가 이해했는지 못했는지는 나날의 삶속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댓글목록

소오강호님의 댓글

소오강호 아이피 (116.♡.158.150) 작성일

크리슈나무르티의 글의 특징은
말이 길고, 복잡하며, 지리멸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읽기가 힘든데,
화법으로 보자면 오쇼 처럼 간단 명료한 화법이 훨씬 우수하다고 봅니다.

이런 크리슈나무르티의 화법을 잘 알고 있기에
하나 하나 곰곰히 생각하기 보다는 대충 훑어보았는데요.

정리하자면,
사고자는 사고가 만든 상(想)일 뿐이며
그렇기에 사고자에 의지하는 명상법은 피로 피를 씻으려는 모순적이고 헛된 것이다.
올바른 명상이란 사고라는 것이 낡은 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말을 하려고 저렇게 복잡한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비원님의 가르침과 닮은 점은
인위적인 명상에 반대한다는 것이며
차이점은
크리슈나무르티는 알아차림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원님은 감정을 끌어앉기를 주장하시는데,
엄밀히 보면, 끌어앉는 다는 행위는 주시자의 행위임으로 크리슈나무르티가 반대하는 것입니다.

장주님 덕에, 오랫만에 K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설탕님의 댓글

각설탕 아이피 (125.♡.248.69) 작성일

생각하는 자가 없다. 다만 조건화된 허상만이 있을 뿐...

-> 아주 간결한 설명이고 핵심을 나타내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오강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피로 피를 씻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켓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초속 약 11키로미터의 속력에
해당하는(중력의 약 일곱배가 넘는) 추력이 필요하다고 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조건화된 생각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생각의 무중력을 경험해야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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