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미티가 고독한 사진가 숀을 찾아 히말라야로 간다. 마침 숀은 아직껏 보지 못한 눈표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눈표범이 카메라 안으로 들어왔다. 숀은 그저 눈표범을 바라볼 뿐 사진은 찍을 생각은 하지 않는데.....
월터 : 언제 찍으실거예요?
숀 : 가끔 안찍을 때도 있어!. 정말 멋진 순간엔.... 나를 위해서.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냥 이 순간에 머물뿐이야.
월터 : 머문다고요?
숀 : 그래, 바로 이순간......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여러분, 9월 산청모임에서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 가을 햇살이 너무 좋습니다. 그 가을햇살을 좀더 보고싶어서인지 일혜님도 제게 '선생님 오늘은 강의를 너무 오래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꽃으로님은 다음달이 되면 누렇게 익은 가을 들판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하며 좋아했습니다. 이와같이 사계절이 우리 가까이에 있기에 때마다 느낄게 많고, 무얼 하거나 하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이런 햇살에 가슴벅차하고 감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습니다.
여러분, 세계는 하나이고 전체입니다. '하나', 사실 이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 큰 유리컵에 화분을 하나 넣어둡니다. 이것을 어둠속에 놓아두면 이 화분의 꽃은 살까요?, 이번엔 이 유리컵속 화분을 밝은 햇살아래 놓아두면 살까요?. 두 경우 모두 죽게 됩니다.
그럼 이번엔 큰 유리컵에 쥐를 넣어 어둠속에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 빛 속에 놓아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시 둘 모두 죽게 됩니다.
조건을 바꾸어 유리컵에 화분과 쥐 둘을 넣어 어둠속에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게됩니다. 그럼 빛 속에 넣어두면?. 살게 됩니다. 쥐가 호흡하며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그 이산화탄소를 가지고 식물이 광합성작용을 해서 다시 산소를 배출하게 됩니다. 이런 작용들로 인해 둘은 모두 살게 됩니다.
사실 '꽃과 쥐'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꽃과 쥐는 현상적으로 엄연히 다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세상 모든 동물(인간까지)들이 호흡하면 그것을 식물이 받아들여 광합성작용을 하고 그로인해 산소를 배출하고, 우리가 다시 그것을 호흡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선 식물이 필요합니다. 아니 단지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 관점을 우주로 넓혀 봅시다. 지구에 달이 있어 밀물과 썰물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는 태양주위를 공전하고 축이 기울어진 채로 자전을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사계절이 생겨나고 밤과 낮이 있게 됩니다. 이런 우주의 작용으로 식물들이 자라고, 또한 동물들이 호흡할 수 있게됩니다. 식물들은 단지 광합성작용만하는게 아니라, 수증기를 허공으로 내 보내고, 그것이 구름이 되며, 그 구름은 비가 되어 우리가 마시게 되는 순환구조를 형성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 우주 전체가 하나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먹은 밥과 반찬, 양파, 마늘 한 조각, 고추 그것들이 우리들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전체 우주가 움직입니다. 마늘 하나를 재배하기 위해 전체인 우주가 하나가 되어 작용하는, 즉 그들이 있음으로 내가 있고, 그들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서로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이 모두가 하나의 움직임, 끊이지 않는 하나의 작용인 것입니다.
이 우주가 있음으로 내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분리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전체이며 하나입니다. 거대한 바다에서 파도가 치더라도 파도가 바다와 분리되어 있지 않듯, 우주가 지금 이순간 이 육체를 통해 이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주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그 근원을 찾게 합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이건 나야 라고 생각하고 김기태란 이름을 붙입니다. 그로인해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 여기게 되면, 우리의 존재자체에 근원적인 불안이 생깁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근원을 찾아 떠나게 만듭니다. 13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그리워하고 찾게끔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만날때에야 비로소 근원적 불안이 끝이 나게 됩니다.'라고 .
그 근원을 향한 목마름으로 인해 근원을 찾아보면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구나,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새롭게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착각속에서 목마르고 방황하다가 헤매다가, 아! 나는 본래 분리되어 있지 않구나, 내가 본래 근원이구나, 내가 처음부터 이미 이대로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갈증은 끝이 나게 됩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이대로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늘 나와 함께 호흡했지만 알지못했던 그 진실 하나에 눈 뜨면서 '아!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구나!', 내가 본래 바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방황과 갈증은 끝이 나게 됩니다.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던 오늘의 푸른 하늘....
예전에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 '개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뚜렷이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데, 최시형이 가족들과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바다에서 조개를 줍고, 고기와 낙지를 잡았습니다. 그런 장면에서 최시형의 딸이 최시형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왜 우리가 살기위해 저들을 죽여야 되지?.'
'얘야, 그것을 우리가 먹기위해 저들을 죽인다라고 표현해선 안된다.'
'하눌님이 하눌님을 먹여 살린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우리 내면으로 돌려 우리 또한 '하나'라는 진실에 눈뜨게 되면 즉시로 방황과 갈증이 끝이 나게 됩니다.
39장. 하나를 얻은 것들.
옛적에 '하나'를 얻은 것들이 있으니,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평안하며, 신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가득 차며,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살고, 임금은 하나를 얻어서 바르게 다스리나니, 그리 되게끔 한 것은 '하나'다.
하늘이 하나로써 맑지 못하면 갈라질 것이요, 땅이 하나로써 평안하지 못하면 쪼개질 것이며, 신이 하나로써 신령하지 못하면 그 신령함이 그칠 것이고, 골짜기가 하나로써 차지 않으면 마를 것이며, 만물이 하나로써 살지 못하면 소멸할 것이요, 임금이 하나로써 바르게 다스려 고귀하지 못하면 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까닭에 임금은 스스로 고, 과, 불곡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음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명예롭고자만 한다면 오히려 명예가 없어지나니, 아름다운 옥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거칠거칠한 돌처럼 되라.
청(淸)
(맑고) |
녕(寧)
(편안하고) |
령(靈)
(영험하고) |
영(盈)
(가득차고) |
생(生)
(생겨나다) |
정
(正)(바르게) |
귀하고 높은 것 |
렬(裂)
(찢어지다) |
발(發)
(쪼개지다) |
헐(歇)
(다하다) |
갈(竭)
(목마르다) |
멸(滅)
(소멸하다) |
궐
(蹶)(넘어지다) |
천하고 낮은 것 |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이 어느 마을을 지나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에 돌을 얹어 놓고 비는 모습을 보고 말합니다. '너희가 믿는 신은 멀리 있지 않다. 뭔가 부족하다는 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도 아니하며, 너희가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호흡하며 기동한다. 만물은 그 하나를 얻어서 산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므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만물은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난 것이 없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았으니,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입니다. 곧 우리가 근본이요, 근원이며,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실상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 실상을 알기만 하면, 그 실상이 지니는 권능과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존재로서 영원히 에너지가 상실되지 않으며, 가장 낮은 자리에 자신을 둘줄 알게 됩니다. 요한 1서에서는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하나'임을 알게 되면, 내 가슴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에고는 사라지고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는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해야 이미 하나인 우리가 그 하나임을 알 수 있을까요!!!. 그 길이 지금 이순간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모든 건 지금 이순간 다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지 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그것을 여러분께 밝혀 드리겠습니다.
프랑카드 앞에서.... '종교밖으로 나온 성경'은 저의 세번째 책입니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저를 음양으로 후원해주신 분들께 두 권씩 보내 드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오강남 교수님께도 보냈는데, 어제 오강남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성경을 저처럼 바라보는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야 한다며, 책이 너무 좋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겠다는 고마운 말도 했었습니다.
책을 출간하고 나면, 작가들은 다시는 그 책을 읽지 않습니다. 교정을 하게 되면 자신의 책을 수없이 다시 보게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사뭇 느낌이 다릅니다. 출간 전에 수없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이 출간되어 저에게 왔을때 다시 정독을 했고, 또다시 깊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사실 이 책을 쓰기위해 1년 6개월 동안 전국의 강의를 접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쓸 것을 쓸 수 있어 너무 감사하고, 오랫동안 저의 책을 기다려 주신 분들께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거울을 통해 우리의 육체를 볼 수 있듯,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게 하는 참 좋은 책입니다. 성경을 기존의 기독교적 관점, 종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성경 본래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쓰면서 그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않았고, 제 가슴에서 나오는 것을 썼습니다. 제 책을 통해 다른 많은 분들이 성경을 보다 새롭게 보게 되고, 행복해지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성경 전체를 밖이 아니라 안으로,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이 천지창조를 밖으로 해석해서, 세상의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이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 안에서 매일 매순간 일어나는 창조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 우주는 정말 어떤 것과도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머리속 지식이나 막연한 공감과 추측으로 머물러서는 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바로 이 하나임을 깨달아서 삶-마음이 질적인 변화를 얻어서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서 밝아지면, 안과 밖이 하나가 됩니다. 전 옛날에 그것도 모르고 소경이 길을 갈 때 더듬게 되듯,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먼저 구했었습니다. 깨달음을 밖에서 구하고, 어떤 사람에게서 구하고, 책에서 구하고, 어떤 방법에서 구했었습니다. 명상을 한다거나, 뭘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NO!!!
그 전체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노력하고 애쓴다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했기에 깨달으려 한다는 것을 전제로하는 행위입니다. 이 구조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습니다. 이미 근본이고 이미 하나입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여러분 앞에 서 있는데, 지금 이렇게 서 있으면서 여러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눈 뜨기 전에 제 삶은 늘 ‘렬(裂)(찢어지다, 분열되다), 발(發)(쪼개지다), 헐(歇)(다하다, 그치다), 갈(竭)(목마르다), 멸(滅)(소멸하다), 궐(蹶)(넘어지다)’ 했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눈빛 하나에,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에, 내가 뭔가 친절을 베풀었는데도 그가 거절하는 것 같으면 거기에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마음이 좀 평화롭다가도 항상 깨어지고 갈라지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이 24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숨이 컥컥 막혔습니다. 또 잘 때에는 한없이 가위에 눌려 힘들어 했습니다. 제가 이랬던 것은 항상 남들을 의식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꿈꾸었던 것은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땅을 한발짝이라도 내디딜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전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남들을 의식하면서, 걸음걸이조차 남들에게 멋있어 보이려 했습니다. 한번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없을땐 자연스럽게 있는데, 버스가 스윽 오면(지나가는) 폼을 딱 하니 잡았습니다. 저 버스 속에 있는 사람 누군가가 이런 나를 보면서 '저기 멋있는 사람이 있네.'라고 생각하겠지 하며 폼을 잡았습니다. 전 언제나 그랬습니다. 늘 목마르고 갈라졌습니다. 언제나 툭치면 마른 먼지가 일어날 만큼의 영혼의 상태, 있는가 싶으면 사라져 버리고, 섰나 싶으면 무너져 버리고, 제대로 걷나 싶으면 휘적거리고 늘 넘어졌습니다. 아무튼 전 제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고귀하고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든든하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전 항상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마음에 드는게 하나도 없고, 보잘 것 없고, 초라하고, 아, 난 내가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몽땅 다 바꾸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자다가 너무나 괴로우니까, 내 머리를 쪼개어 그 속에 있는 뇌를 꺼내 흐르는 물에 훌훌 헹구어 다시 머리에 집어 넣는 상상까지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괴로웠기에 전 ‘청(淸), 녕(寧)(편안), 령(靈)(영험하고), 영(盈)(가득차고), 생(生)(생겨나다), 정(正)(바르게)’ 이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하면 아주 작다<칼릴 지브란>
오늘 도덕경의 기라성같은 '수수'님이 오셨습니다. 아리랑님이 오늘 모임에 오실때 괜히 3년전 수수님이 선물로 준 묵주를 손목에 차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묵주를 차고 모임에 왔는데, 수수님이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의 인식 너머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정말이지,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작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입니다. 동전은 양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마음은 항상 삶을 평면으로 봅니다. 어떤 틀, 신념, 상처 이런 한정된 것들로만 봅니다. '영험하다'는 게 뭐냐하면, 눈이 입체가 되는 것입니다. 희한하게 옛날에 봐왔던 것과는 다르게 보이고, 있는 그대로(입체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험하다는 것입니다.
'가득찼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해 보면 텅비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채우려고 했었습니다. 너무 비어있다고 생각했으니, 채워서 충만해지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채울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왜 채울 수 없느냐면 비어있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아니 비어있습니다. 텅비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채우려 하지 않기에 영원히 비어 있지도 않습니다. 영원히 부족해지지도 않습니다.
'바르다'하는 것도 어떤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삶이 비로소 두발로 우뚝 서게 되는, 내 감정에 대해 내가 책임질 줄 알게 되고, 칭찬과 비난에 대해서도, 내가 그들에게 휘둘리는게 아니라 그것(칭찬과 비난)에 대해서도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곧잘 이야기하는 툭 치기만 하면 먼지가 풀풀 날리고, 마른 모래를 씹는 듯한 인생, 아무튼 전 그런 느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닦았습니다. 수행하고 절제하고 단식하고 무엇인가를 한없이 했습니다. 넘어가고 극복함으로써 도달할 줄 알았는데 눈떠보니 그 생각이 사라져 버리고, 그저 낮고 천한 것 그대로인 것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하고 높은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릴 때 우주는 하나라고 그랬습니다. 햇살, 물, 동물과 식물, 모든 것들이 있음으로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밥상을 보면 그냥 밥을 먹는다고 하지만, 우주가 나를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듯이, 곧 하나가 춤을 추는 것입니다. 생멸의 춤, 흥망의 춤, 실상을 알고 나면 얻고 잃음과 높고 낮음과 삶과 죽음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냥 '하나'인줄 알기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밖의 것은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안으로 들어와 바라본 우리 내면도 하나입니다.
저는 이 우주와 상관없는 독립적인 존재로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나와 너가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파도가 바다와 분리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바다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로서 존재하지만 근원은 바다인 것입니다. 내가 근원으로부터 나온, 감각적으로는 개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하면 아주 작다<칼릴 지브란>
우리는 이미 근원에 닿아 있고, 하나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근원과 하나라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근원, 하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생각, 감정, 느낌들도 근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번뇌 그대로가 보리이다'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경험하는 감정들을 보면, 우리 모두 똑 같습니다. 대단하고 벅차고, 뭐 이런 것들이 올라오는게 아니고, 했니 안 했니, 저는 많이 하고 나는 적게 했다느니, 그러다 가끔 기쁨도 올라오고, 오늘 같은 경우, 햇살이 눈부셔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것들이 참 그렇다는 말이죠. 저는 온갖 쓸데 없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또 눈빛 하나에도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이
‘렬(裂)(찢어지다, 분열되다), 발(發)(쪼개지다), 헐(歇)(다하다, 그치다), 갈(竭)(목마르다), 멸(滅)(소멸하다), 궐(蹶)(넘어지다)’하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 하면, 이 하나하나가 다 하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모양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예를 들면, 내안에서 미움이 올라올 때, 사랑과 용서가 나와야지 왜 미움이 나오냐며 그 미움을 밀쳐 내는 것). 이걸 다른 각도,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주가 에너지입니다. 생각과 감정도 에너지입니다. 이 전체가 에너지 덩어리입니다.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움과 사랑이, 당당함과 불안이, 에너지 빛깔만 다르지 같은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모양으로 따지면 취하고 버릴 것으로 나누어 버립니다.
'내가 만약에 근본과 하나가 되었다면 절대로 남들을 의식하거나, 움츠러 들거나,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근원에 닿아있지 못하기에 지금 현재 이렇게 초라하고 못난 모습들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구나'하는 생각이 틀렸습니다. 내 안에서 어떤 모습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근원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뭐냐면,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거부하지 않고, 취사선택하지 않는 것(무위), 그렇게 하면 스스로 알게 됩니다. 자신이 본래 하나이며, 지금껏 단 한순간도 그것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곧 그것이라는 것을(I am That).
*가을 코스모스같은 수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일은 고통을 덮어 묻어 버리는 일이 아니라, 펄펄 살아서 심장에 박힌 가시의 아픔을 견디는 일입니다.'-수수-
천상천하 유아독존. 여러분이 가장 존귀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안에서 올라오는 그 모든 것들도 가장 존귀합니다.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건 귀하고 저건 하찮아'라고 판단하지 말고, 또한 무엇인가를 하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게 됩니다. 진리는 노력하고 수행해서 얻어지는게 아닙니다. 얻으려는 노력은 그것이 지금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지금 없으니까 얻으려고 하지!'하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100% 전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호흡하고 기동합니다.'라고. 아멘입니다.
단 한순간도 우리는 그것, 하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움직이고 말하고, 고민하고, 우울해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며, 공황장애에 사로잡힙니다. 이 모두가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루미가 말했습니다. 인간은 '여인숙'이라고. 한번은 우울이, 한번은 초라함이, 한번은 좌절감이 손님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다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이 내 안에 있는 장롱과 살림살이를 몽땅 휩쓸어가 버리는 한 무리의 슬픔일지라도 그 하나하나를 정성껏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줄 저 너머에서 오신 손님들일지도 모른다고......
내 친구가 공황장애에 걸렸었는데, 비행기를 탈때, 그 비행기 문이 닫히기만 하면, 거의 죽을 지경이 됩니다. 호흡이 가빠오고 신체가 경직됩니다. 밤이면 잠도 자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죽으면 안되는데, 처자식은 누가 먹여 살리나부터 시작해 오만가지 걱정을 다하고, 그래서 병원에도 가보고 해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해보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증세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숨이 가빠오고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상황을 누구에게 호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새벽). 그렇게 그렇게 하다가 그 상황이 너무나 힘들어졌습니다. 더는 어찌해볼 수 없는 순간 '그래 죽자'하고 탁 놓아버립니다. 어떻게 하려고 발버둥치는 그 마음을 내려놓아 버렸습니다. '죽자'하는 순간 내 친구는 저항하는 마음을 놓아버렸고, 그것으로 인해(아이러니 하게도)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저항하는 마음을 놓아버림으로써 공황장애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삶이 온통 다 바뀌게 됩니다. 그 순간 공황장애 하나가 열렸지만 사실 그 안에 있던 전부가 열린 것입니다. 이 말을 제식으로 말하면, 공황장애가 '하나'입니다. 삶의 그 어떤 모습이든, 아! 내가 이런 상처 때문에, 과거에 내가 상처받아서 지금 이런 모습이야 하며 과거로 돌아가는데, 전혀 과거로 돌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전생으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이것, 이것이 전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만 하는 것은 간택하는 것, 취사선택하는 행위를 하지 말고 100% 그 순간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무너질 때 100%무너져 보십시오. 그렇게 무너져 본 사람은 압니다. 자신이 절대로 무너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무너지지 않으려 하니까 절대로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째로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내 안에서 올라오는 어떤 것들도, 공황이든 강박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이 위대한 것입니다.
제가 대구 메토도스 학술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느날 한분이 오셨습니다. 힘들어 하면서 자신은 시어머니가 미워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의 삶을 보면 어려서부터 모범생이었습니다. 항상 반듯하고 성적도 늘 탑이었습니다. 칭찬이 자자하고, 더군다나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미움을 용서로 바꾸려 애를 쓰고, 기도하고, 미워하는 자신을 탓했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을 만나 상담하면 늘 '자매님 기도하세요!, 용서하세요', 또는 '네가 교사로서 신자로서 미워하면 되겠니!'. 전부 미워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신앙도 그렇고 기도도 그렇고,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봐도 도저히 되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게 온 것입니다. 어떻게 해도 안되었고, 그러면서 자기를 인도해 줄 누군가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워해라, 100% 미워해라, 미움이 올라올 때 어떤 것도 막거나 저항하지 말아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어라, 진정한 용서는그 미움 속에 있다. 이 미움을 용서로 바꾸고 미움을 사랑으로 고치려고 하면 괴로움만 당한다. 절대 당신은 용서할 수 없다. 용서의 모양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되지 않는다. 힘들겠지만 맘껏 미워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말이 그분 가슴으로 팍~ 들어갔습니다. 그 후로 1년반만에 그분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 말이 정말 지독하게 미워했다고 합니다. 운전하다가도 시어머니가 떠오르면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그 미움을 조금도 제어하지 않으며 100%허용했다고 합니다. 정말 처절하게 미워했습니다. 그렇게 억압하던 감정들을 허용해 주었습니다. 가로 막던걸 치워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미움이 치고 올라옵니다. 그때 미움 하나만 올라올까요?. 아닙니다. 그동안 억압되고 눌렸던 곁가지들이 마치 고구마 하나 캐어들면 줄기를 따라 다른 고구마들이 모두 따라 오듯 온갖 것들이 다 올라옵니다. 비로소 내 안에서 무시당하던 존재가 존중받은 것입니다. 그분은 그 모든 것들을 처절하게 만났습니다. 미움만 허용한게 아니라 자기안의 온갖 것들을 다 허용해준 것입니다.
*사람은 약해도 사랑을 받는다. 약하면서 강한 척하기 때문에 미움받는다.<가토 다이조>
그러면 그렇게 허용하는게 쉬웠겠습니까?. 미움을 허용하니 속이 시원했겠습니까?. 아니요. 정말 괴로웠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목격해야 하는 고통. 그런데 그분은 그걸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만나가면서 그분은 다 바뀌게 됩니다. 그분은 시어머니를 측천무후(중국의 악독하기로 이름난 여황제)에 비유했습니다. 그 측천무후는 지금도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는데, 그렇더라도 지금은 그게 전혀 자기안으로 들어오지가 않고, 설혹 들어오더라도 깊이 들어오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비소로 아닌걸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힘도 생기게 됩니다. 그것 하나를 허용해주면서 삶의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알아가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미움'이었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불안, 무기력, 상처로 인한 왜곡 등, 모든 것들이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주눅든게 많고,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합니다. 누군가 저를 외면하는 듯한 눈빛만 보이면 덜컥 겁이 납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제가 달라진 것은 이 모든 것들이 그저 하나라는 것을 알고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자연은 계속 변화합니다. 때로는 태풍이 불고, 때로는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기도 합니다. 제 안에서도 똑같은 것들이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참 자유롭고 조화롭고 평화롭습니다. 애써서 수고하지 않는데도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