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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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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피 (175.♡.133.159) 댓글 6건 조회 6,524회 작성일 12-02-2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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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의 실험을 끝낸지도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수년간 뭔가를 찾고, 끊임없이 피하기만 했던 나에게 두달간의 실험은 분명 큰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저번주 토요일 부로 내 인생의 큰 짐이었던 시험이
어쨌든, 일단락이 되었다.
 
실험 이후 두달, 다시 공부를 한 기간들.. 역시 나는 나였다..ㅋㅋ
실험하면서 아무것도 안하면서 인터넷도 끊고, TV기타 방황요소(?)들도 끊었어서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이제 내가 맘먹은대로 놀때 놀고 일할때 하고가 될려나?
인터넷이나 책이나 먹는거나 다른걸로 도망가진 않겠지.... 라는 기대..
그치만.. ㅠㅠ
그 후 두달의 시간이 빨리 간 만큼 복구(?)도 빛의 속도로 되어서
허전하면 스마트폰 만지작 만지작.. 도덕경 홈피 들락날락..
시험 전날까지 웹툰을 챙겨보는 기염을 토했다..

무책임 대장, 피하기 대장, 합리화 대장..
이런 이름붙이기가 너무 완벽하게 잘 하려는 나의 자학인 면도 있지만
두달 동안 힘들지 않으려고, 책임지지 않으려고 정말 교묘하게 도망치는 순간을 많이 마주쳤다.
공부의 힘듦에 대해 가장 먼저 올라오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탓들..
순간적으로 불안하거나 두려움이 오면 곧바로 '어떻게 하지'->'계획과 대책'으로 넘어가는 습관..
(후에 보면 이 계획과 대책은 임시 방편인것을 티를 내듯 대부분 제대로 실천된 바가 없고...
당연히 불안과 두려움은 또 온다..)
초라한 내 모습이나 우쭐대려는 마음에 대한 아픔이 올라오면 '다음부터 ~~하면 돼, 안그래야지'로 싸악 무마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느끼는)어색한 마주침에 시린 마음을 떨쳐내려 '쟨 누구누구랑 친하니까'부터
'지금은 내가 공부하니까 그래. 바쁘지만 않으면~'부터 십수년간 써먹던 레퍼토리들..
그리고 그런 변명들을 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픈 마음들을 마주쳐야 했다.
 
무엇보다 제일 많이 놀라고 아프고 두렵고...
지금도 두려운건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아직도 하는), 실제의 나보다 엄청나게 거대한 나를 매일매일 마주하는 일이었다..
남들보타 몇배는 더 '특별하고 잘나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고 사려도 깊고 특출난 재능을 가진
단지 비운의 가족을 만나 조금 빛바랬지만 수퍼스타가 되어 사람들의 주목과 사랑을 한몸에 받을 나.
내가 하는 일 내가 겪는 일상은 다 특별하고 나는 정말 잘났고 그렇기때문에 나는 피해자일 뿐이고.
그러니까 늬들(부모님, 가족, 친구들..)은 나에게 복종해야해!
라고 내가 그러고 있더라..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하는 말과 몸짓들 모두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내가 원망하기만 했던 가족들에게도..
그리고 나한테도.. 조금이라도 저기 썰풀어놓은 나와 다른게 오면 닦달하고 두렵고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 있는사람 없는사람 꺼내다가 비교하고 열등감에 바닦을 긁다가
공부가 좀 잘 될것 같으면 '나 진짜 천재 아냐?'라는 하늘을 찌르는 우월감에 기분 좋다가.
 
계속 남들과 비교하고 있는데, 계속 그럴수 밖에 없어서
그만 둘 수가 없어서..
내가 나라고 믿고 산게 실제의 나보다 너무너무나 커서 내가 압도당한 나머지
내 자신이 쓰레기 같고 벌레 같다는 느낌이 올라 오는게..
무엇보다 내 인생의 팔할이 공부라.. 그 거대한 나를 지탱하고 있는게 '공부'라서
공부할때마다 한글자한글자 읽을때마다 뭔가가 계속 의식되고 지치는것이
도서관에서 계속 속으로 느껴지고 아파했던 것이었다..
 
내 마음속에 내 삶에 내가 일순위가 아니고, 남의 인정이 더 중요하고 눈치를 본다는게
너무 슬펐고 슬프다..
시험 떨어지면? 내 인생 어쩔래? 라는 생각이 올라올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건 부모님 얼굴, 친구들에게 쪽팔릴거. 남들에게 초라해지기 싫다는게 먼저 오고..
내가 봐도 얼척 없는 우월감과 맨틀이라도 뚫고 지나갈 열등감을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는 휑한 마음이 아프다..
 
어쨌든, 그렇게 두달을 보내고 시험을 봤고
공부하면서 중간중간 느꼈던 그 거대한 내가 진짜 나라는 나는 좀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보기좋게 망쳤다.
말이 보기 좋게지.. 솔직히 좀 내가 꼴통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 못봐서 눈물도 안났다.
내 눈앞의 숫자,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라..
왜냐면, 그동안 나는 내가 못본 시험은 단한번도 직면하고 인정해보고 아파해본적이 없었다.
 
내 어린시절이 기억나는 아주 어렸을때.. 그때부터, 나는 공부를 잘하는, 잘 해야만 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때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봤었다. 늘 다 맞거나 하나 틀리거나 했는데
어느날 공부를 안해가서 70점을 맞은적이 있는데 그때 너무 쪽팔리고 두려웠다..
쪽팔린건 애들이 놀릴까봐..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무서운건.. 아빠한테 혼날까봐.. 난 그 시험지가 아빠에게 들킬까봐 며칠을 불안해하다가
결국 재래실 화장실에 몰래 노트 통째로 버렸던게 생각이 난다..
그날 이후로 '낮은 시험 성적'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를 먹을수록 커졌고
고등학교때도 대학교때도 고시공부 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성적이 못나오거나 공부가 안되면
늘 '다음'으로 미루고 다른 핑계를 어떻게든 찾았지 그것을 직면해본적이 없었다.
내가 내 생각만큼 특출나거나 머리가 좋거나 노력을 안해도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그 사실을 절대로 용납할수가 없었고, 두려웠다. 내 모든걸 잃어버릴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실험을 하면서 그 가리고 덮어두고 핑계대던 성적들이,
미래로 한없이 미루면서 매일매일 힘겨워하던 내가..
공부를 좀 많이 못할..수도..있는...내가.......(이 말이, 좀 두렵다 아직도)
그게 오히려 나였다는걸 살짝 봤고
두달동안 다시 공부하면서 만나고, 시험을 보고.. 어떻게 변명할수도 없는 결과를 보니..
할수 없기에 변명을 안하니.. 좀.. 이틀동안 어쩔줄 모르고 혼란스러웠다.
조금 살것 같기도 하다..
고향집에 와서 가족들을 보는데
공부를 안하면 못하면 죄인 같았고 동생들 앞에서도 공부 잘하는 누나로 항상 근엄함과 가오를 잡고 그랬는데..
안그래도 될것 같으니 좀 편하다. 실패의 아픔도 있지만 시원하기도 하다..
 
시험은 죽쒔지만 두달동안 난 열심히 했다..
힘들지 않으려고 도망칠때마다 힘들어 보려 했고, 힘들었고
무엇보다 어차피 안될거 이런거면 대충 하거나 포기하거나 했을 내가
실패할걸 알면서도 하루하루 대충하려는 마음 포기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힘든 마음과 함께 하면서
그래도 시험장 나올때까지 결정에 책임 지려고 했으니까..
아, 나한테 열심히했다고 글자쓰는거조차 이렇게 마음이 떨리는 나지만..
매일 넘어지고 깨지고 안힘들려고 안간힘쓰지만.. ㅠㅠ
그래도, 도망치다가도 다시 올걸 나는 안다.
그리고.. 개강 전까지라도 좀 쉬고 싶다....
찔리지만 시험에 대한 반성보다는 좀 쉬고 놀고 싶은게 진심이다..ㅋㅋ

댓글목록

vira님의 댓글

vira 아이피 (110.♡.249.209) 작성일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내려놓고 푹 쉬시길.

루시오님의 댓글

루시오 아이피 (203.♡.21.194) 작성일

와...긴 글이다. 그래서 안 읽었어요는 훼이크구요ㅎㅎㅎㅎ (어느 사이트든지 장문의
글이 있으면, 꼭 첫 번째 댓글에 달리는게 요런 글이죠?^.^)

마피님의 글을 다 읽었습니다^.^ 비라 선생님 말씀처럼 푹 쉬시길 바래요.
저도 마피님 글에 여럿 공감되네요. 늘 잘해서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싶고, 그래서
늘 노력하고 다듬는거...그러다 어쩌다 한 번 저평가되어 나락으로 떨어져 좌절하고 다시
노력하는 싸이클. 진짜 피곤하고 짜증난데...그래도 또 노력하고 애쓰려는 저의 모습을
보면 좀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다 딱 한 번 남들 앞에서 쪽이 팔려보면...편해지기도 하구...
에고..댓글로 횡설수설 했습니다. ^.^;

마피님 글로 잠시 제 마음을 돌아봤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사랑합니다^.^

ps: 실험 뒤의 초고속 복구는 무한공감이네요ㅎㅎㅎㅎ 전 실험 뒤에 컴퓨터 화면을 보니
배경화면이 요지경 세상에다 타자 타이핑도 적응이 안 되고 속도도 느리고...근데 얼마만에
이전처럼 복구가 되었는지 조차 모를정도로 빨리 복구되었습니다ㅡ.ㅡ;

서정만1님의 댓글

서정만1 아이피 (211.♡.70.158) 작성일

자기목소리를 내는건 큰용기를 필요로 하는것같아요~
자신으로 서가는 과정이 쉽지않음을 인정하는모습이
가슴에 와닿는것같아요~저도 조금자라고 넘어지고하면서
그런글에 끌리더라구요~평범해지는게 그런자신을 인정한다는게 정말좁은문이더라구요..동지가 한명더생긴것같아요
동지라하니 좀그렇고 친구.동료. 그런 동질감~^ ^
마피님 힘들어도 마피님 혼자가 아니라고 위안되길바래요~
마음으로 언제나 응원할게요~아~언제나는 아니구~ 가끔
저도 먹고살기힘드니 가끔만 할께요ㅜㅡ

아리랑님의 댓글

아리랑 아이피 (1.♡.72.2) 작성일

마피야 ~ 귀한 글을 읽게 해주어 고맙다.

봄처럼 따뜻함이 곳곳에서 손짓하네

이젠 봄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러면 어김없이 꽃들이 고개짓을 하겠지

마피야 늘 건강하렴...

꽃으로님의 댓글

꽃으로 아이피 (183.♡.212.36) 작성일

마피님.. 지금쯤.. 열심히 놀고 계시죠? ㅎㅎ
서울 모임때 봐요^^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아이피 (119.♡.114.245) 작성일

사랑하는 슬기야
  정말 정말 애愛썼다!
  진심으로 너에게 박수를 보낸다!
  고맙다....

  그리고 이젠 "시험에 대한 반성보다는 좀 쉬고 놀고 싶은 게 진심이다..ㅋㅋ"라고 네가 말했듯
  모든 걸 내려놓고 푹 쉬고 또 쉬고 마음껏 놀으렴~~~
  야호~~!!!

  "열심히 한 그대, 쉬어라! 놀아라!!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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