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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전시장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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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ra (175.♡.182.40) 댓글 9건 조회 7,276회 작성일 12-02-1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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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해가 바뀌어 나이 오십이 되었다. 그간 한 번도 나이 들어감을 슬퍼하거나 우울해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변화일 뿐이고 숫자놀음일 뿐이었는데, 문득 너무 많이 왔다는 느낌과 시간의 흐름을 깊이 실감하게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강렬하게 속았다는 느낌, 나 스스로에게 완전히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기대하는 모든 것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단지 이것이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실감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이제 곧 진정한 삶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 앞에는 언제나 온갖 방해물들과 급하게 해치워야 할 사소한 일들이 있었다. 마무리되지 않은 일과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끝내고나면 진정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방해물들과 사소한 일들이 바로 내 삶이었다는 것을.”(알프레도 디 수자)
 

II.
며칠 전 오랜 그림 친구의 전시회 디스플레이를 돕게 되었다. 그는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같은 미술학원을 거쳐 오랜 재수생활, 같은 대학교, 같은 대학원까지 비슷한 과정을 함께 한 친구로서, 때로는 이해하고 서로 돕고 협력하거나, 서로 못마땅해 하거나 질시하거나 시샘하거나 답답해하면서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재능에 비해 삶이 잘 풀리지 않아 헤매고 고생하고, 어렵게 전시하고 절망하기도 한, 요컨대 좋은 꼴 나쁜 꼴 서로 알고 지켜본, 징글징글한 녀석이었다.
고3드는 겨울, 미술학원 선생님과 선배들 그리고 학원 친구들과 밀양 표충사 부근으로 1박2일 스케치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날은 무지무지하게 추웠고, 맑고 쾌청했으며, 센 바람 부는 날이었는데, 민박집 농가의 군불을 둘이서 때게 되었다. 이마 우리 둘이 제일 후배였을 것이다. 어두운 마당에서 밤하늘의 그토록 크게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그때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담배를 한 대씩 물고 긴 연기 내뿜으며, 이 친구 문득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별이 되자. 그림에서의 별!” 지금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였지만, 나름대로 그때는 서로 어리고 순진하여, 까닭모를 감동에 젖어 마른 연기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우우 우는 바람소리, 먼데 소나무 숲, 그토록 찬란한 별들, 추위 그리고 바삭바삭 타들어가던 고소한 담배 맛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고2 여름방학, 몇몇의 친구와 술 마시고 장마 뒤끝의 아주 더운 여름날, 냇가로 수영을 간 적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녀석은 수영을 못하던 놈이었다. 이 친구, 흐린 물속으로 점점 들어오더니 내 옆에서 그만 물속으로 쑥 사라지는 것이었다. 당황하여 아무리 찾아봐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 좀 더 하류 쪽에 있던 친구 둘 앞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허겁지겁 세 명이 죽을힘을 다해 건지려고 애썼으나, 힘은 점점 빠지고 숨은 거칠어지고, 그 자리에서 물가로 조금도 옮길 수 없었는데,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변하며 빙빙 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리 밑 거지 아저씨가 멀리서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는 곁에 있던 사다리를 가지고 들어와 친구를 구해주는 것이었다. 인공호흡으로 몇 번이나 물을 토하게 하고 병원으로 녀석을 옮겼다. 훗날 녀석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물에 빠진 자가 사람을 붙들면 다 죽는다는 얘기가 생각나 그 와중에 우리를 잡지 않고 힘을 풀었다는 것이다. 물 먹고 숨 막히고, 그런 상황을 몇 번 되풀이하다가 이제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눈앞의 화면이 갑자기 완전한 순백의 빛으로 바뀌면서 총알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때의 완전한 평화와 안도감, 아무 걱정도 없고 이대로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물을 토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고맙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던 그 이야기는 가끔 술자리에서 과장된 무용담과 전설의 고향 류의 신기한 이야기로 변하여 두고두고 친구들 간에 안주가 되곤 했었다.
디스플레이 중, 극도로 얼어붙은 지금의 미술시장 경기며, 힘든 경제적 상황들을 서로 주절주절 이야기하였는데, 이 친구, 지나가는 말처럼 “그래도 우리는 성공한 거야. 그때 원하던 대로 화가가 되었잖아.” 이 무심코 던진 말이 왜 그렇게 새삼스럽게 들리는 것이었을까? “그렇네. 고등학교 때 꿈꾸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가, 그 화가가 되었네(비록 잘나가지는 않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도 이 이야기가 자꾸 떠오르며 지금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네. 원하던 것들이 이미 이루어져 있네. 어떻게 그걸 까맣게 몰랐지?”
사람 없음을 한탄하지만 사실은 번다한 인간관계를 좋아하지 않아 주변이 단출하며, 적당히 아부하거나 비비는 것을 싫어하니 조직에 몸담지 못했으며, 막연히 돈이 좀 있었으면 하고 생각만 했지 한 번도 그것을 위해 전력투구하지 않았으니 딱 이만큼이며, 수행처를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하여 정신적 허영기가 있으니 이곳저곳 겪은 것이며, 아이를 썩 좋아하지는 않으니 아들 하나로 족한 것이며, 그림 스승이 없다고 탓했지만 사실 더 원했던 것은 수행의 스승들이었고 그들은 적절한 때에 항상 나타났었다. 이것이 나의 삶인 것이다.
 

III.
그때그때 주어진 인연대로 미워하고 좋아하고 의기투합하고 시기하고 배 아파하고, 또는 이해하고 격려하고 한세월 함께 하였다. 돌아보면 그냥 그 순간에 그 일이 있었던 것이고,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일들이 일어났을 뿐이며, 바로 그것이었다.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일어났으며, 조건 지워진 대로 반응해왔음을 안다.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날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을 상기시키며, 니 살리느라고 죽을 뻔했으니 밥 한 끼 사라고 전화해야겠다. 녀석은 무슨 대답을 할 것인가?
 

댓글목록

문득님의 댓글

문득 아이피 (119.♡.6.52) 작성일

아니, vira님!  올해 지천명이시라구요?  저랑 한 살 차이네요!!

전 5~6살은 선배님인줄 알았는데,,,,전 아직도 언제 철드냐고 쥔님께 꾸사리먹고 사는데,,,


저도 늘~~~이제 곧 '진정한 삶'이 내 앞에 펼쳐질 거라고, 펼쳐지리라고 잔뜩 기대해왔었는데

그게 '속은거'였음을 이제사 제우 긴가민가, 그래도 아직 미련은 남고...

어째든 '그때그때 주어진 인연대로' 살아왔고, 살아갈 것임은 분명한 거 같습니다.

(여전히 좋은 인연만 고집하고 바라는 우매함은 못버리겠지만,,,)

서울모임서 다시 뵙겠습니다!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249.66) 작성일

친가의 조기 탈모, 외가의 조기 백발을 닮아...오래되어 보이는 외모 되었음.
자세히(?)보면 어려(?) 보임.
서울 모임에서 뵙죠.

김미영님의 댓글

김미영 아이피 (114.♡.255.78) 작성일

오랜만입니다.님의 글을 호주 외딴 바닷가 동네에서 읽으니 새로운 느낌이예요.^^잘 읽고 갑니다.갑자기 올3월에 40이 되는 제인생을 돌아보게되네용,,,건강하시고 나중에 또 뵈요.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249.66) 작성일

잘 지내시죠?  새털같이 가벼우소서.

바다海님의 댓글

바다海 아이피 (112.♡.66.59) 작성일

비라님 글은 크림을 잔뜩넣은 부드러운 커피맛 처럼

입가에 묻은 커피를 혀로 사알짝~~

암튼...인터넷이 구려서 이제야 댓글 답니다..

덕분에 위로 받습니다..

거봐!  나만 그런거 아니네... 다들 그렇네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249.66) 작성일

올리시는 글, 사진들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그곳에 계실 때 인도네시아 갈 일 생겼으면 좋겠군요.
행복하시길.

마피님의 댓글

마피 아이피 (175.♡.133.159) 작성일

“오랫동안 나는 이제 곧 진정한 삶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 앞에는 언제나 온갖 방해물들과 급하게 해치워야 할 사소한 일들이 있었다. 마무리되지 않은 일과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끝내고나면 진정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방해물들과 사소한 일들이 바로 내 삶이었다는 것을.”(알프레도 디 수자)

이 글귀가 마음에 콱!! 박혀서 며칠동안 계속 맴돌았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루시오님의 댓글

루시오 아이피 (203.♡.21.194) 작성일

비라님 글 읽어보면, 제 또래인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요 문장이 유독 크게 보입니다...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myh님의 댓글

myh 아이피 (211.♡.206.203) 작성일

기대하는 모든 것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 . .
아~~!!!  오직 생각 속에서만 . . . .
. . . . . . . . . . . .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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