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에서.
상처/ 레너드 제이콥슨
만약 당신이 자신에게 상처나 슬픔을 느끼도록
정말로 허용한다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울음일 것이다.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두어라.
눈물을 환영하라.
오래지 않아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이다.
아픔은 그 안에 숨겨진 기쁨을 드러낼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차를 타고 올때 느낌이 지난 2015년 1월은 새해인사하느라고 그렇게 빨리 지나가 버렸는데, 2월이 되고 나니까, 아, 이제야 비로소 2015년 산청강의가 시작되는구나하는 이런 느낌이 듭니다. 또 한해 여러분들과 이렇게 마음을 나누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마음의 진실을 나누고 삶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눈빛도 마주치면서 보지 못한 한달동안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도 하고, 또 매달 만날때마다 노자선생님이 들려주는 같은 이야기인듯하나 사실은 다른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하면서 우리가 살았던 삶의 이야기들도, 마음이 아팠던 편린들도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또 이 한해를 행복하게, 또 이 만남 속에서 성장하는 기쁨도 누리고 느끼면서 2015년 한해도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차를 타고 오면서 날씨가 차기는 했는데, 오늘은 여섯분이 같은 차를 타고 오면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갑고, 히터를 틀어 놓아서 차안의 공기가 따뜻해져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는데, 차를 운전하면서 밖을 보니까, 아,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무슨 소리일까요?.예, 맞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내가 따뜻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차창밖으로 바라보이는 그 광경속에서 금방이라도 새순이 그렇게 돋아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루시오도 오고, 옥경씨도 오고, 못보던 얼굴들이 와가지고 참 반가웠습니다. 오늘도 노자 선생님이 들려주는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 삶, 나라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따뜻하고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덕경 45장. 참나에 이르는 길(마치 모자라는 것 같으나...)
크게 이루어진 것은 마치 모자라는 것 같으나(결)
그 쓰임은 끝이 없고,
크게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있는 것 같으나(충)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것 같고(굴),
크게 정교한 것은 마치 졸렬한 것 같으며(졸)
크게 말 잘함은 마치 어눌한 것 같다(눌).
움직임이 추위를 이기게 하고,
가만히 있음이 더위를 이기게 하나니,
진정 고요함이 천하를 바르게 한다.
'마치 모자라는 것 같으나', 이 제목 뒤에 무슨 말이 따라오겠습니까?. 가득하다, 오히려 충만하고 완전하다. 그런 뜻을 담고 있는데 우리에게 감각되어지는 것은 모자라는 것 같으나 사실은 우리 감각의 잘못일 뿐이지 삶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감각을 따라서, 감각에 매이고 감각에 젖는, 우리의 감각과 생각이 항상 우리에게 바른 진실만을 이야기해 주지 않는데, 우리에게 느껴지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참인줄 알고 감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 같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우리의 감각을 쫓아서 이것은 모자란다는 판단을 해버리고, 여기에 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개념, 감각 너머의 어떤 것들이 실상인데, '마치 모자라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감각너머, 또 우리의 생각너머, 관념너머를 볼 줄 안다면 여러 가지 많은 모자란 것같은 현상속에서도 전혀 모자라지 않는, 모자람에 물들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모자라는 것 같으나 사실은 충만한 그 실상을 노자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더듬어 보겠습니다. 45장 제목은 '마치 모자라는 것 같으나'인데 설명을 위해서 제목을 따로 정해 보았습니다.
참나에 이르는 길.
다른 말로 깨달음, 진리, 영원한 자유, 도, 부처, 또다른 하나는 관념의 크기가 너무 커서 주저하게 되는데,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참나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면 부처가 되는 길, 깨달음에 이르는 길, 도에 이르는 길이란 뜻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가 나일까요?. NO!!!.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나라고 믿기 때문에 삶을 힘들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아를 알면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그러면서도 매순간 늘 내가 있는, '있다/없다'의 차원이 아닌 삶의 자유가 열릴 수 있습니다. 참나, 진정한 나를 알면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한, 그 길을 노자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전에 참나에 이른 사람들의 증언을 먼저 들어보면서 그 의미를 되돌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싶어서 참나에 이른 사람들의 증언 4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깨닫고 나니 도리어 깨닫지 못한 사람과 같다.'
이 말은 다시말해서 본전했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애써서 해가지고선 깨달았는데, 깨닫지 못한 사람과 같다, 깨닫고 나서 깨닫지 못했던 때 모습 그대로, 늘 헤매던 나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꿈꿀때는 꿈속에서 조작한다. 깨달을 때에는 깨달음의 경계가 전혀 없다.' 지공화상.
꿈꾼다는 것은, 삶의 실상을 깨닫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조작한다는 것은, 중생을 부처로, 번뇌를 보리로 바꾸려한다는, 숨을 바르게 하고 생각을 고요하게 하려하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기 마음에 구미에 맞는걸로 바꾸려 하는게 조작입니다. 깨달음의 경계는, 깨달음의 표시가 없다는 말입니다.
'한순간 깨달음에 이를 때에 다만 자기부처를 깨달을 뿐이다.' 황벽선사
자기부처란 본래 늘 있던 나, 부처는 따로 있지 않고 여러분이 부처인데 늘 있어왔던 나를 깨달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따로 한물건도 덧붙일 자리가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너무 힘드니까 도를 닦았습니다. 그래서 깨닫고 나면 확~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제가 무기력하고 쪼잔했었는데, 깨달음을 얻으면 확 빛이 나고, 누가봐도 깨달음의 표시가 나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는 그 속에서 지혜롭고 어떤 순간에도 정답을 말할 수 있는, 궁색하거나 헛갈리거나, 모르겠거나 하는게 하나도 없는 늘 자비가 넘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눈뜨고 보니 본래 그대로입니다. 여기에는 한물건도 보태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참으로 얻은바가 없다.' 석가모니.
진실로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무척 애를 쓰다가 깨달아 보면 바로 이 자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짜증을 내면서 그냥 이대로이면 그럼 뭐하러 그 고생하면서 도를 닦느냐합니다. 뭔가 뽀대가 나고 달라지고 해야, 내가 지금 이순간에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일시에 끝이나고, 당당하고 평화롭게 되어야 추구할만하지, 결국 똑같아질거면 내가 뭐하러 이러나, 뭔가 좀 있어 보여야하지, 그렇게 본래 자리로 돌아오고, 지극히 평범해질 바에야 뭐하려 도를 닦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해보면 본전입니다. 평범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여전히 힘들어 하고 헛갈리고, 짜증도 나고, 덕스럽기는 커녕 바늘하나 꽃을 자리가 없는 자기 마음을 목격하기도 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같은데 같으냐하면, 같아요!, 그런데 같지가 않습니다. 다릅니다. 이게 참 '묘'입니다. 도는 참 묘합니다. 너무나 평범한데 너무나 평범하지 않고,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데 너무나 특별합니다. 참나에 이르는 길, 그 길에 이르러 보면 지금 여러분들입니다. 어떤 청년하나가 라마나 마하리쉬를 찾아갔습니다. 그 청년이 어떻게 하면 참나가 될 수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대답을 합니다. 먼저 자네가 '어떻게 하면 참나가 될 수 있습니까?'하고 묻는 것은, 지금 자네가 내 앞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내 앞에 앉을 수 있습니까하고 묻는 것과 같다고 대답합니다. 참나라는 것은 되거나 안되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참나가 될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아직 참나가 되어있지 않다는 건데, 깨달음/참나는 얻거나 잃는 것이 아니다, 네가 이미 참나다, 난 아직 참나가 아니다,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하는 그 생각 하나만 내려지면, 본래부터 있어왔던 바로 네가 참나다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힘이 좀 빠져야 자기가 제대로 보입니다. 뭔가를 자꾸 찾고 의문하고, 구하려하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참 가치를 모르게 됩니다. 자꾸 힘을 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제가 처음 후기를 쓴다고 카메라를 들이 밀때 어색한 웃음을 지으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서로 낯설었던 것이겠죠. 지금은 일부러 포즈도 잡으십니다. 마치, 후기쓰느라 고생한다, 내가 이정도는 해줘야지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제 팔 내리셔도 됩니다~ㅋㅋ
이제 노자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자꾸 뭔가 특별한 걸 얻으려 하니까, 진짜 특별한 자신에 대해선 눈뜨지 못합니다. 참 아이러니인데 요번에 어떤 분이 글을 올렸는데, 이제야 알것같은, 문득님이 내 강이를 듣다가 '어, 그냥이대로네'하며 쉬어버렸는데, 내가 강의하는 중에 문득님이 '어, 그냥 이대로네'라는 그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듣다가, '맞네, 그대로네'하며 마음을 쉬게 되고, 특별한 걸 구하느라 들리지 않았던 김태완선생님의 설법도 다 들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노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도라는 것은 담백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 보아도 족히 볼만한 것이 없고, 들어도 족히 들을 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꾸 특별한 것을 구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 널부러져 있는 도/자유는 모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보면 '결/충/굴/졸/눌'이 아닌가요?. 뭔가 모자라고 텅 빈 것 같고, 충만하거나 가득차기 보다는 굽은 것같고, 뭔가 부족하고 모자라고 결핍된 것같은, 제가 청주 심우선원에 가서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가, 또 어떤 모습이 깨달은 모습일까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사람의 예를 들었습니다. 이 예로든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깨닫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해보라고 했습니다. 이분은 나이가 50대인데 젊고 잘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늘 운동을 하며 자기동네에 있는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그 길에 언덕이 있는데 좁고 가파릅니다. 어느날은 이 길을 걷다가 보니, 언땅이 녹으니까 비가오지도 않았는데 땅이 풀려 축축했습니다. 아, 봄이 오는구나, 문득 해빙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 가파른 언덕(절벽)이 무너지는게 아닌가하는 상상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점점 더 커져 실재로 무너지고, 그 위에 버티고 있던 바위가 굴러 떨어져 이 사람이 가슴을 짓누르고, 그로인해 이 사람은 죽게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동네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뉴스에 나오게 됩니다. 신원을 확인한 결과 어디에 사는 누구더라하는. 누가 죽다하는 뉴스기사가 나는 장면까지 상상하며 그 길을 걷습니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망상하고 두려워하는 그는 깨달은 사람입니까, 아닙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있는 분들이 모두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또 다른 한사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어릴 때 내면에 상처가 깊어 남과 눈빛도 잘 맞추지 못하고, 자기 아들, 딸과의 대화에서도 쩔쩔매고 어쩔 줄 몰라하고 겁내하는 사람이야기를 들려주었 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도 깨닫지 못했다고 다들 말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어떤 모습입니까하고 물으며, 지금 예를 든 두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하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게 모두 상입니다. 모양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이런 모습이야라고 단정지으며 저런 찌질한 모습을 보인다면 아직 멀었다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란, 부처는 정확히 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금강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무릇 상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만일 상이 상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 말은 곧 상떨어지면 부처라는 말입니다. 대부분 그렇게 판단합니다. 이렇게 상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눈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어떤 상을 가지고 봅니다. 이건 됐다/안됐다, 초라하다/못났다, 늘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뭔가 '이건 아니다, 모자라다'하는 식으로 보이면 자기를 정죄합니다. 이건 진정한 내가 아니구나하며 뭔가를 해야하고, 빈 것을 채워야하고, 굽은 것을 곧게 해야하고, 또 그러기위해 막 애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런 애씀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가 올까요?, 깨달음이 올까요?, 그걸 이름하여 자승자박, 자업자득이라 합니다. 진리가 뭘까요?, 진리란 정확하게 '지금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존'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바뀝니다. 그래서 진아는 무아입니다. 내가 없습니다. 다 나니까, 나 아님이 없으니 이것이 '나'다라고 말할 것이 없는, 이것이 무아입니다. 지금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게 올라온 이 초라한 것도 전부 나입니다. 전부 나이니 특별히 지키거나 버릴 내가 없습니다. 이렇게 전부가 나가 되면 자기싸움/갈등이 끝이납니다. 모두가 나인데 싸울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버리려하고, 마음에 드는건 내 소유로 하려하니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잣대가 있으면, '이건 싫어'하며 버리려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버려지나요?, 저건 좋아하며 얻으려 하나 잘 얻어집니까?. 정말 식겁합니다. 그리고 그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취하려하고 하나는 버리려고 하는 그 마음이 내려지는 걸 이름하여 부처라합니다. 진아라고 합니다. 지금 있는 것, 이 개념이 여러분 가슴속에 팍~꽂히기를. 바이런 케이티는 그것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같은 말입니다. 케이티가 말했습니다. '현실은 항상 친절하다.', 지금 있는것, 지금 있는 것이 잡생각하는 것이고, 망상입니다. 두려워하기도 하고, 때론 쩔쩔 매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그게 진리고, 부처고, 진아고 자유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게 도대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느냐하고 말들하는데, 부처는 모든 상황에서 편안할 것이다라는 그 상때문에 힘드는 것입니다. 그 상이 지금 있는 자신을 부정해버리잖아요. 잣대, 자기를 판단하는 잣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판단하는 잣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스스로를 제약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상들을 통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부정합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해서 자기안에 어떤 것이든 전부를 받아들이면, 곧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내 안의 전체를 받아들이는, 100%를 긍정하면 진정 자기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 토토와 박미경샘~. 무엇인가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토토. 그럴수밖에 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할때, 자기안의 놀라운 힘을 발견하게됩니다. 토토야~, 나쁜 언니들과 오빠때문에 고생했다. 그 대가로 이 오빠는 늘 토토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줄 작정이야~~~.
자기 다운게, 전 예전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못난 것들이 다 사라지고, 항상 충만한 상태가 나답다고, 그래서 초라한 모습을 볼때는 이건 나다운게 아냐하며 부정하며 나다운걸 향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나답다하는 걸 진짜 알고 보니까 난 단 한순간도 나답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이대로 였습니다. 그런데 삶의 모습은 그다지 볼품없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각도로 보면, 예를 들어 혼란스럽고 망상하고, 쩔쩔매는 이거, 이것을 다른 각도로 보면 에너지입니다. 이런 빛깔, 어두운 감정이 올라왔을 때, 사실은 그게 에너지입니다. 모양을 보면 초라한 것이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에너지입니다. 나를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100%에너지로 사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각도로 보면 이 초라함 속에서 뭔가를 배웁니다. 또 그렇게 배우기에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든 것이 에너지 이니까 그냥, 그순간 그순간 존재할 뿐인데, 에너지 소모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서른네살에 깨닫고 나서 제일먼저 확인한게 에너지 소모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힘들게 일했음에도 언제나 처음처럼 항상 기쁘고, 성경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란 말이 있는데, 저에겐 '~하라'가 아니라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십시오. 무너지고 초라하고, 그런데 전체가 에너지이니 에너지 소모가 없습니다. 이 작은 것 속에서 뭔가를 배우고 느끼고 성장하고, 또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비로소 사랑할 줄 알게 되는, 자기를 비로소 믿을 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없는걸 있다, 있는걸 없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초라하고 외소하고 볼품 없습니다. 근데 내면을 들여다보면 무한의 에너지, 가리고 택하는데서 오는 에너지 소모가 없고, 이 작은 자기('결/충/굴/졸/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자기는 알게됩니다. 자기는 초라하고 무너지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판이 바뀐 것입니다. 절대로 무너질 수 없는 판위에 서 있다는 걸 자기는 압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받아들여본 사람은 자기는 결코 약해질 수 없는, 무너질 수 없는 사람인걸 압니다. 한없는 약함속에서 조차도..... 이렇게 자신의 모든걸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에 대해서 손가락질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손가락질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할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초라함을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위대한 걸 받아들인 것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받아들임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됩니다. 자기자신을 받아들인 것 밖에 없는데 그렇습니다. 나를 다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진정성이 나타납니다. 옛날에 내가 멋있게, 잘나 보이려 노력할 때에는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없는걸 있다하고, ~인체하고,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아무것도 아니고 볼잘 것 없는 '결/충/굴/졸/눌'이게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사람들은 다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딴 것을 구합니다. 이것은 너무 비어있으니까, 자기가 힘있게 살아야 하는데,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여기 '결/충/굴/졸/눌'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딴데서 구하고 채워서 그 힘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아,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려운 길입니다. 이런 '결/충/굴/졸/눌'한 모습을 다른 각도로 이야기하면, 결핍되어 있고, 쓸데없는 망상이라하고, 내가 나이가 55살이면 좀 자비롭고 지혜롭고 이러면 좋을텐데, 때로 그럴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해가지고, 쪼잔해질때도 많고, 남이 잘못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되고, 작은 것에 화를 내지를 않나, 자비는 커녕 바늘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만큼 되기도 하고, 섰나 싶으면 휘적거리고 제대로 걷나하면 넘어지고, 삶이 참 어눌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초라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시인하고, 자기자신에게 정직하고, 있는 걸 있다하고, 없는걸 없다하고, 이런 초라한 자신을 껴 안음으로써 고통이 오면 그 고통을 받고 무너질땐 무너지고, 그냥 이순간에 존재하다 보면, 이걸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이 나를 받아들이고 나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럴 수 있으면, 이것이 크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이 강의를 통해서 정말 애틋하게 여러분들에게, 참 이것 하나만큼은 전달해드리고 싶다, 감각하게 해 드리고 싶다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은 다 이렇게 초라하잖아요. 그리고 그때 그냥 이거다, 이것이 가슴에 팍~와 닫기를. 살다보면 그렇습니다. 자꾸 초라한 자신을 외면하고 딴걸 구하려하고 채우려하는 그런 몸짓을 느낀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강의가 여러분들 가슴속에 살아 있으면, 아, 그냥 이것이다. 그냥 이것이다하며 설령 죽더라도 벗어나지 않으면, 생짜배기로 나 자신을 만날때까지는, 민낯으로 나자신을 만날 때까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그래서 그렇게 있어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있어보면 알게됩니다. 그냥 나일뿐이지 이 '결/충/굴/졸/눌'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고 택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그렇게 외면하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늘 찾던 그것이라는 것을, 찾는 이자가 바로 그자라는 걸, 내가 도달하고자하는 목표가 바로 지금의 나라는 걸 알게됩니다.
이걸 알 수 있는 길이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은 항상 변하는데, 우리는 항상 '결/충/굴/졸/눌'한 상태이니까 그걸 벗어나지 않고 경험하고 아파하고 껴안고 눈물흘리고, 그래서 은산철벽에 갇혀서 찢기고 피흘리고 고통받으면 그때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지금 있는 것 이외의 것을 구하는 마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되면서 경험하는 것은 별것 아니지만, 정말 큰충만과 자유와 자기다움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또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비로소 나누는 삶을, 쓰임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냥 이것, 여러분이 그 순간 경험하는 이것, 누구나 우울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도입니다. 배째라!, 내가 이것을 껴안는 것으로 죽으면 즉으리라, 넘어져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내게 자유를 줍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못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하면 끝입니다. 지금 현재 실재하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데,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는걸 구합니다. 그래서 없는 걸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되는데, 왜 우리가 여기에 사로잡히는지 하나의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실은 착각입니다. 지금 내가 잘못된게 아닙니다. 이대로 부처입니다. 쩔쩔매고, 대인공포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이대로인데 뭐가 잘못되어 있냐면 자기를 바라보는 눈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언데르센 동화의 미운오리새끼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오리엄마가 둥지안에서 알을 부화하고 있었습니다. 다 부화되었는데 한개의 알이 부화되지 않고 남아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할머니오리가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더라, 그거 니 새끼 아닌가보다, 버려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내 둥지안에 있는데 기다려보자하며 있어보니까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게 됩니다. 그게 미운오리새끼인데, 그 미운오리새끼는 어쩌다보니, 오리의 알틈으로 들어가게된 백조의 알이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 아직 캠코더를 작동하는게 미숙하기만 합니다~~.
사람이(스스로 생각하기엔 삐뚤어진 감정, 사악한 감정, 절대 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감정을 품고 있어서 매우 나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감정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드러낼 수 있다면, 그러고서도 이해받고 공감받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치유된다. 자기 존재에 대한 '근원적 안정감'을 느껴본 사람은 변한다. 편해지고 너그러워 진다. 치유의 마지막 종착역에서 결국 얻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다. 정혜신.
도둑질 그만 두고 나서도 주네(프랑스 소설가, 도둑질로 수차례 구속됨)는 때때로 친한 사람들의 물건을 훔쳤다. 기묘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주네는 거의 물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배를 채우기위해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은 그의 행동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받아들였다. 도벽조차도 긍정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자 마침내 주네는 도둑질을 그만두었다. 오카다 다카시.
이 미운 오리새끼가 바로 우리 자신인데, 오리과의 새끼들은 알을 깨고 나오면서 제일먼저 보는 대상을 자기 엄마라 생각하게 됩니다. 이 미운오리새끼가 알을 깨고 나와서 제일 먼저 그 오리를 보게 되니 그 오리가 바로 엄마가 됩니다. 그리고 주변에 어린 자기 오리형제들을 보게 됩니다. 이 미운오리새끼는 태어날때부 자기가 한 마리 오리로 태어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태어나면서 자기가 한 마리 오리라과 생각하게 됩니다. 어릴때는 잘 뛰어 놀다가 성장하면서 오리사이에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왜냐하면 백조는 목이 길고, 덩치가 크고 깃털도 새하얗습니다. 그에 반해 오리들은 목이 짧고 덩치도 작고 깃털도 누리끼리합니다. 그러니 자기 혼자만 이상한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이상한 소문이 나고 미운오리새끼는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주변에서 하는 말이 너는 참 희한하게 생겼다. 괴상망측하게 생겼네, 아니, 우리 조상중에 이렇게 생긴게 없는데, 너는 고양이가 확 물어가 죽였으면 좋겠다, 우리 집안의 수치다, 심지어 어떤 오리는 이 미운오리새끼를 쫓아와서 목을 확 깨물면서 온갖 해코지를 다 합니다. 이 미운오리새끼는 이러면서 위축되고 상처받게 됩니다. 사랑도 못받고, 주변으로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판단과 말을 듣게됩니다.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거꾸로 되는데, 처음에는 환경탓이었는데, 나중에는 내가 잘못생겼으니까, 내가 못났으니까 저들로부터 비난받고 상처받고 내침을 당하지하며 자기탓으로 돌려버립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정말 태어나지 말아야할 존재, 엄마는 왜 나를 이렇게 못생기게 태어나게 만들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도 불행덩어리이고, 그러면서 혼자 늘 쓸쓸하게 다니게 됩니다. 늘 하늘을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병신같이 태어났는지, 호수위를 지나가다가 호수에 비친 자신의 긴 목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며 징그럽게 여기고, 그래서 결국 죽어버리려하다가 한순간 마음을 돌이킵니다. 죽을때 죽더라도 내가 이렇게 불행한 것은 이상하게 생겨서 이니까 내가 한 마리 완벽한 오리가 되면, 내가 저들과 같아지면 지금 이렇게 못생겨서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메마름을 극복할 수 있겠지. 그래서 완벽한 오리가 되려고, 참나가 되려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노력을 하게 됩니다. 목을 당기고 단식을 통해 몸집을 작게 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못생김으로 인해 받은 외면과 상처로인한 그 절박한 깊이만큼 노력을 하게 되고, 지금은 누가봐도 완벽한 '오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를 못했습니다. 이 새하얀깃털, 그래서 늘 혼자 쓸쓸히 있었던 늪으로 가서 밤새도록 오리처럼 누런깃털을 만들려고 처절하게 뒹굽니다. 그리고 누가봐도 한마리 완벽하나 오리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제 끝났다, 나는 이제 비로소 완벽한, 자유와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완벽한 오리의 모습으로 자기 오리무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눈빛을 보니까 옛날 그 병신같은 오리였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오리들이, 야, 니가 무슨일이냐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오리들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그때 예전에 자기목을 물며 해코지했던 그 오리가 씩~ 웃으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몸짓을 합니다. 그래서 따라가는데, 그 오리가 작은 개울을 건너 건너편으로 갑니다. 이 미운오리새끼는 자기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아 아무생각없이 그 오리를 따라 작은 개울을 건넜더니, 자기가 어제밤 하루종일 뒹굴며 물들였던 그게 싹빠지고, 새하얀깃털이 그대로 드러나 버립니다. 그렇게 미운오리새끼기가 개울을 건너오자마자 주변의 모든 오리들은 배를 하늘로 향한채 깔깔거리며 꼴갑떤다고 병신같은게 하며 비웃어 버립니다. 그때 미운오리새끼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됩니다. 자기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단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기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는, 그리고 주변 오리들의 비아냥거리고 손가락질하는 그 속에서 그만 '으-악~'하며 몸을 부르르 떱니다.
그리고 그 순간 쑥~하며 하늘로 날아 버립니다. 그렇게 하늘로 날면서 갑자기 전혀 다른 눈이 열립니다. 비로소 자기를 자기로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자기가 주변의 오리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아직 백조인지 모른채 말입니다. 어, 내가 하늘을 나네하며 놀라게 되고, 좀더 날개에 힘을 가하고 그래서 점점 더 자유롭게 날게되고, 주변에서 비아냥 거리고 손가락질하던 오리들도 그순간 눈이 휘뚱그레집니다. 이렇게 미운오리새끼는 하늘을 힘차게 날면서 비로소 자기를 자기로 보게됩니다. 그러면서 서쪽 하늘에 무리지어 날아가는 백조무리를 보면서 그 날개짓에 더욱 힘을 가하면서 한마디 합니다.
'나는 자유다'
미운오리새끼는 태어나는 순간 엄마오리를 보면서 자기는 한마리 오리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 미운오리새끼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자기자신을 오리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자신의 전부가 '결/충/굴/졸/눌'이게 됩니다. 이게 자기가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속에 깊이 습득된 어떤 기준과 잣대가 있지 않습니까?!!!. 인격완성이니 깨달음이니 뭐니, 그 목표, 그 기준때문에 지금의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설명을 하니까 그렇지, 나도 모르게 무의식속에 깊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미운오리새끼는 오리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바라보니 자신이 병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통스럽고, 괴롭고, 삶전체가 불행입니다. 살다보면 어릴때 환경에 의해 상처받고 주눅들고 어쩔 줄 몰라하게 됩니다. 남들 의식하고 눈치보게 되고,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자, 그런데 이게 나의 잘못입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본능적으로 자존감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이런 자신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추구하고 도를 구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지만 내가 삶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결/충/굴/졸/눌'이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잡생각과 망상하는 이게 잘못입니까?!, 진정한 자신을 모른채 오리의 관점으로 바라본 미운오리새끼는 진짜 잘못되고 징그러운 존재입니까?!.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미운오리새끼는 오리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쩔쩔매고 눈치보는 것도 뭔가 잘못되었고, 그래서 저렇게 되면, 사랑받지 못한 이 모습에서 이렇게 좀더 채워지면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내가 어릴 때 한번도 받지 못한 사랑을 받을 존재가 될 것이라 생각을 하고 그쪽에 목표를 두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오리의관점에서 나(미운오리새끼)를 보게 되어있단 말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운오리새끼가 자신을 잘못 보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떨고 눈치보면 그것은 그냥 그럴뿐입니다. 그리고 그게 부처입니다. 그게 자유고 그게 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나를 스스로 짓밟습니다. 어릴때는 환경이 나를 짓밟지만 나중에는 내가 나를 짓밟습니다. 자기를 자기가 부정하고 외면해 버립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쪽은 외면한채 지금없는 밖의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와 진리는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강의가 필요한 것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 눈하나를 주기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믿지를 못하니까, 초라하고 쩔쩔매는, 남들 눈치보며 어색해하는 그런 모습을 이건 아니지 하는데, 그게 절대 모자라는게 아닙니다, 그거 괜찮은겁니다, 그거 껴 안으십시오.그리고 그렇게 하면 좀 아픈데, 아프면 됩니다.
*루시오가 오랜만에 찾아왔습니다. 거의 1년만에. 그동안 도덕경사이트에 글도 많이 올렸고, 7월이면 제대하게 됩니다. 루시오의 글을 읽으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 자신이 자극되고 더욱 분발해야지하는 결심을 하게됩니다.
루시오야, 아직 어색하지만 반가웠어, 없는 시간 내서 모임에 와주어서 참 고맙고, 제대하는 그날까지 무사안전, 아무튼 다치면 너만 손해야~~ㅋ. 올 여름은 시간이 없을테고, 겨울즈음에 루시오에게 맛있는 거 사주고 싶다~~
오늘 오면서 제가 진짜 애틋했었습니다. 아, 어떻게 하면 단박에 지금 즉시로 나타난는 이 자유를 사람들에게 누리게 할 수 있을까? 지금 자기가 경험하는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해줄까?.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 이외의 그 어떤 답도 열쇄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려줄 수 있을가?. 진짜 딴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지금입니다. 이게 자기에게 와 있으면, 자기가 '결/충/굴/졸/눌'이런 것들을 경험하면 딴데를 보잖아요. 에이 또 이러나하며. 그런데 이런 얘기가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으면 눈을 그 초라한 쪽으로 두게 되어 있습니다. 진주를 얻고 싶으면 진주가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보배를 얻습니다. 진주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지금 여러분안에, 매순간 여러분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 느낌, 생각들이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낱낱이 보배이고 진주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눈을 돌이키기 시작하면 그래서 자기안의 것들이 감각되기 시작하면 점점 힘을 얻게 됩니다. 자기를 주욱 보게 됩니다. 이 비유를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농부가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데 곡괭이에 뭔가가 걸리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이게 뭐지하고 보니 '진주'입니다. 이 사람이 그 진주를 보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게됩니다. 여기서 '자기소유를 다 팔아'는 '결/충/굴/졸/눌'에서 밖으로 가려는 몸짓을 정지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노력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그 마음을 내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소유를 다팔아 산 밭으로 가서 다시 그곳을 파게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파고 또 파도 온통 진주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향해서 여러분 자신안에서 올라오는 그 감정을 보기시작하면 계속해서 보입니다. 동전의 뒷면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건 버릴것이 아니고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나를 정말 자유케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이라는 것을,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건 파면 팔수록 그 끝이 없습니다. 그 귀한 진주가 매순간 여러분 안에서 올라오는 '결/충/굴/졸/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도 참 결핍이 많습니다. 그리고 참 여리고 심성이 착합니다. 이 분에게는 비난과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이분은 참 예쁩니다. 예쁘다보니까 늘 예쁜 자기가 되려하고 예쁜 자기를 지키려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옆자리의 동료가 업무를 힘들어하면, 도와주지 않으면 뭔가 욕을 들을 것같고, 죄책감이 느껴지고 그래서 도와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자꾸 도와주다 보면, 결국에는 그런 일들이 전부 자기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걸 거절도 못하고, 어쩔줄 몰라하고, 싫은 소리도 못하고, 내가 거절의 말을 했다가 상대방이 기분나빠하면 어떡하나하는, 아무튼 이분 삶이 이러했습니다. 또 집에 가면 혼자 있다보니 외롭고 어떻게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점점 그러다보니 결국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잠깐 짬을 내가지고 병원엘 다녀오게 됩니다. 그렇게 병원진료를 받고 직장에 오니까, 마침 그사람이 필요했더지 '어디갔었어?'하고 옆사람이 묻게 되고, 이 말을 듣고는 다음부터는 병원에도 가지 못하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하고 누구보다도 많이 일하고, 주말도 없이 토요일에도 나와 일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아주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고상하고 예쁜 모습을 지키려하고, 그러다가 결국 이분이 쓰러지게 됩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스트레스많이 받으시죠, 다른데는 아무 이상이 없고, 그냥 쉬세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쉴수가 있나, 병원에서 지어준 약 먹어가면서 혹시 비난 받을까봐 몸은 아파도 끊임없이 일을 하게 됩니다. 결국은 그러다 두번째 쓰러지면서 병원에 실려 가게 됩니다. 그리고 입원하게되고 어쩔 수 없이 병가를 내게 됩니다. 그후로 1주일 정도 집에서 쉬게 되는데, 혼자 방을 따뜻하게하고 누워 잠을 자다 꿈에 등이 하도 시려워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을 뜨니까 자기 몸은 아래에 있고 영혼은 위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순간 깜작놀라게되고 내가 죽었나 이러면서, 그 짧은 순간에 자기인생의 뒷면을 싹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자니까 예쁘게 보이려고 많이 사놓아둔 옷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는 몸을 빠져나왔으니 죽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하길 아이고 입지도 못할 저옷, 죽으면 그만인데 내가 뭐하려고 저렇게 많은 옷을 샀나, 또 있다/없다, 예쁘다하는 것에, 죽으면 그만인 허망한 것에 매달려 있었구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분은 예쁘고 우아하고 고아하고 이런게 있었는데, 처자들 혼자 사는 방은 좀 어지럽습니다. 그렇게 이분이 자기방을 보니 참 어지러운 겁니다. 이 분이 그 순간에도 생각하길, 나중에 사람들이 정리정돈하고 깨끗하게 살줄 알았더니 이렇게 더럽게 살아가지고, 아이고~하는, 자기가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죽었으니까, 자기의 더러운 몰골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면 어이할까하는, 그 순간에도 그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남들에게 거절하지 못해 쩔쩔매고하는 모습들, 아,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죽어버리면 끝인데,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었는데, 그저 아닐땐 아니라고 했으면 되었는데 왜 그러지 못했는지하는 그런 모습들을 다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항상 예쁘게 보이려고 했는데 그것도 허망하고, 내가 참 많이 잘못 살았구나, 지킬 수 없는 걸 지키려고 하는, 아무것도 아닌 걸 지키려고 너무나 애를 썼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으로 그렇게 아는 것과 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서 자기 몸을 치료하고 있는데 직장에서는 이제 그 분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다른 사람을 구하려 하다 구해지지 않으니까 이 분에게 다시 전화하게 됩니다. 아무리 사람을 구해도 구할 수가 없다. 웬만하면 다시 출근해라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 전화를 받고 몸은 아파죽겠는데 거절을 못하니 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얼마나 무섭냐면 몸을 다 굳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젊은 사람이 몸이 다 굳어버리니까 걷는데 제대로 걷지 못하고 어기적어기적 걷게 됩니다. 자기가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어서 길을 건너가는데, 어기적거리니까 빨리 걸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늙은 사람의 심정이 그렇게 이해가 되더랍니다. 아픈 사람의 심정도 이해가 되고, 약한 사람의 심정도 이해되고, 또 하나는 항상 예쁜 모습을 보였고 보여야 되었는데, 이젠 어기적어기적 걸을 수밖에 없으니 예쁘게 보이고 싶어도 그게 안되는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도 그걸 지키려 합니다. 어떻게든 예쁘게 보이려합니다. 그런데 하다하다 안되니까 결국 그것도 포기하게 됩니다. 다 내려놓게 됩니다. 이분이 지금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잘살고 있고 완전히 꽃피었습니다. 너무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거절할땐 NO하고, 자기는 몸이 아파도 일을했고 그래야 인정받고 칭찬받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젠 안해도 됩니다. 나 죽으면 그만이라는 그것을 한순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몸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건 친구집에 놀러갔었는데, 다음날 아침 친구남편이 출근하면, 자기는 먼저 일어나 단장을 해서 단아한 모습을 보여야 되고, 절대 막 자고 일어난 추한모습을 보여선 안됩니다. 항상 그러던 사람이었는데 그때는 그저 자고 일어난 그 모습 그대로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얼핏 망가진 것 같은데, 굉장히 편해지면서 주변사람들로부터도 정말 편해졌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오늘도 따뜻한 밥상과 마주합니다. 이 따뜻한 밥상을 마주할때는 뭔가 괜시리 뿌듯해지고 만족스럽습니다. 산청모임이 5년넘게 이어오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치유받을 수 있었던 근간에는 야마꼬님 부부내외의 숨은 힘이 있기때문입니다. 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결/충/굴/졸/눌'이 올라오건든 그 자리에 있어라, 머물러라 하는데, 때로는 하늘이 참 희한하게 일하기도 합니다. 지키려고 지키려고 하는데 지킬 수 없도록 몸을 때려버립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입니다. 자기를 만나고, 자기를 경험하고, 자기를 껴안고, 자기편이 되어 주고, 자기를 기다려 주고, 자기를 사랑하십시오. 조건붙이지 말고 나를 껴안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으로써 이 초라하고 못난 내면의 것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우십시오. 이것을 껴안을 때 우리는 성장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초라하고 못난 '결/충/굴/졸/눌'은 여러분을 영원토록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 찾아오는 하늘의 전령사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고, 지금 매순간 있는 그대로의 것들에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발을 동동거리면서 추위를 이기고, 가만히 있으면서 더위를 이기고, 그리고 가만히 있는 것이 천하를 바르게 한다. 이 천하는 '나'라고 하는 천하입니다. 이 천하를 진정으로 바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미 바르게 되어 있기때문에, 쩔쩔매고 어쩔 줄 몰라하고 망상하는 이 모양이 진짜 바른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바르게 되어 있기에 바르게 하려는 몸짓을 정지하면 바름은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것을 노자는 무위라고 말을 합니다. 일상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더욱더 자유롭게 되는 여러분이 되길 바라면서 이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덕경 식구여러분!, 설은 모두들 잘 보내셨습니까?!.
올한해 우리 도덕경 식구들이 마음의 짐을 덜어 더욱 평안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원하는 모든것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봄이오는 소리가 들리는 2월을 넘어,
봄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산수유 노란빛깔 가득한 3월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