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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 산청(47장. 너 자신을 떠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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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21.♡.250.19) 댓글 3건 조회 10,152회 작성일 15-04-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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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어느날 아침, 맑고 깨끗한 느낌이 너무나 좋아서~~~.
 
석류/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이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 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하늘아래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대구는 벚꽃이 다지고 꽃비가 내리고 있는데 여기 오다보니 아직 벚꽃이 한창 피고있고, 어제부터 제대로인 봄날씨같이 느껴졌습니다. 봄은 왔는데 계속 비가 오고 춥고 해서 봄을 별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어제부터 아! 봄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오늘 여기 산청오는 이길도 정말 기분이 좋은, 봄햇살, 그 눈부신 햇살만 보아도 괜히 기분이 좋은데, 차를 타고오면서 '비로소 본향으로 돌아간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알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밖 봄풍경도 정말 좋은데, 그 말씀도 참 좋아서 오는 길도 무척 행복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만나서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 시간이 비록 한달에 한번이지만 귀한 여행을 하는 시간입니다. 자기 자신으로의 여행, 자기 내면으로 들어와서 진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보물은 우리 안에 있는데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눈이 늘 밖을 향해 있다보니까 미처 자기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 시간이 비록 짧은 한시간이지만 우리 자신으로의 깊이있는 여행의 시간입니다. 40년 50년 살아온 우리 인생이지만 아직 첫발조차 딛지 못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진주와 보물들을 캐내면 이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밖에 있는 것들은 얻었다가 잃고 되었다가 다시 되지않는 상태가 되고 섰다가 다시 무너지기도 하지만, 우리안에 있는 것을 찾으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음마저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멋지고 아음다운 우리자신을 향한 여행, 우리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47장. 너 자신을 떠나지 말라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며,
창문 밖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보나니,
그 나감이 멀면 멀수록 그 앎은 더욱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밝으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나는 누구이기에 너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노자는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산다, 내 인생 내가 산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때가 많습니다. 두루뭉술하고 막연하게 '이게 나야!'이런 어떤 생각속에 살아가는데,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딸이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학교엘 다녀오더니 거실에 엎드려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내어준 프린트물이었습니다. 그 프린트물 제목이 '나는 누구인가'였습니다. 몇학년 몇반, 아빠/엄마 이름, 집주소, 나의 꿈, 아빠가 원하는 나 등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겐 그 제목이 눈에 들어와서 내가 난데없이 제 딸에게 물었습니다. '수진아, 너는 누구야?'하고 물었더니,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이, 너무나 어이없다는 듯이 '아빠, 내가 누구긴 누구야, 나는 나지!'.
 
그 수진이의 대답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나는 나다'를 영어로 말하면 'I am who I am'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야훼, 여호와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하나님입니다. 출에굽기에보면, 모세어머니가 자기 아들 모세를 살리기위해 이집트 나일강에 모세를 강보에 싸서 흘려 보냅니다. 마침 이집트 공주가 떠내려오는 강보에 싸인 아이를 발견해 키우게 됩니다. 모세는 그렇게 해서 성장하게 되고 자기를 어린 시절엔 이집트의 왕자, 파라오의 아들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 형제 람세스와 마차를 타고 이집트를 여행할때는 이집트의 영광만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그 에 신음하고 있는 노예들의 고통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자기는 당연히 이집트의 왕자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자기 출생신분을 알게됩니다. 자기는 이집트의 왕자가 아니라 저 노예 히브리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는 에 다시 이집트를 둘러 보게 됩니다. 자기가 왕자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모든게 이집트의 영광으로 보였는데, 자기 출생신분을 알고나서 보게되니 이집트의 영광이 보이는게 아니라 채찍밑에 신음하는 노에들의 고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침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때 이집트 병사가 채찍으로 그 할아버지를 때리는 것을 보고 그만~하고 외치며 뛰어가 그 병사를 때려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이렇게 도망다닌 세월이 40년입니다. 40년이 걸렸다는 것은, 내가 뭘 어떻게 해 보려는 이 에고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양치기로 일하며 마음이 많이 낮아져 있을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떨기나무에 나타납니다. 모세가 양치기로 일을 할때에 갑자기 떨기나무에 불이 붙습니다. 그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보는데 목소리가 들립니다. '모세야, 모세야, 여기는 거룩한 땅이니 너의 신을 벗으라!'그러면서 여호와를 만나는데 그때 여호와가 말합니다. 노예생활을 하며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가 내게 들렸다. 내가 저들을 구원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는 인도자를 너로 삼고 싶다. 너는 마음이 지고하다. 너는 너의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니 내가 너를 보내겠다. 네가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가자라고!. 마음이 낮아져도 너무 낮아진 모세가 말합니다. 아이고 저는 못합니다. 말을 너무 못합니다하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가 그럼 너의 형 아론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할테니 너는 나의 말을 따르라합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저는 그래도 못합니다.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때 여호와가 말합니다. 그럼 너의 앞에 있는 지팡이를 들라. 모세가 그 지팡이를 들자, 이번엔 다시 내려 놓으라 말합니다. 그 들었던 지팡이를 내려놓으니 지팡이가 뱀으로 싹 변합니다. 그러자 다시 그 지팡이를 집으라 말합니다. 그러고는 이 일은 네가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이 지팡이다. 그러니 가라. 상황이 이쯤되면 모세는 더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모세가 이제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묻습니다. 제가 60만이나 되는 히브리인들 앞에가서 '노예의 시간은 끝이 났다. 우리의 자유를 향해서 가자!, 에굽을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자!'하고 외칠 때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나에게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출애굽의 사명을 준 여호와, 그 여호와가 누구냐라고 물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때 여호와가 말합니다.
 
'I am who I am'이라고 하신 그이가 너를 보냈다하라.
 
자, 그럼, 이 나는 누구일까요?. 이런 모든 의문들은 지금 여러분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나'는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이제 진짜 참나를 찾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참나가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왜 내가 인생을 고통속에서 괴롭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와 까닭은 저절로 찾아질 것입니다. 나, 참나가 누구냐면, 이것을 정확히 표현하면 아침에 눈을 떴다가 밤에 잠들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매순간 경험하는 그게 바로 나입니다. 단순하죠. 우리모두 다 경험하고 있잖아요. 꿈속에서 악몽을 꾸기도 하고 편안해하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하고 잠못자기도 하는 그것, 그 다음에 깨어 있는 동안에는 기분이 좋기도 하고, 산청에 운전하고 오면서 옆에 차가 끼어들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브레이크를 갑자기 잡아서 뒤에 타신분들이 앞으로 쏠리기라도 하면 미안하기도 하고, 하여간 내가 누구냐하면 매순간 경험하는 감정/느낌/생각들, 그 무엇인든, 다시 말하면 '나'는 매순간 경험하는 그순간, 다른 말로 하면  매순간의 지금속에서 경험하는 그것. 다양하겠죠?. 사람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할 때, 어떤사람은 돈많고 편안하고 아주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힘들고 괴롭고 상처투성이 결핍투성이의 가정에서 태어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매순간 매순간 경험한다고 할 때 이 경험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60억 인구의 수만큼 경험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다 다른데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금은 항상 변합니다. 매순간 변합니다. 현재 일어나는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일어났던 상관없습니다.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그냥 그순간 경험하는 그것, 그것 전부가 나입니다.  최근에 박미경샘의 공지글에 봄만되면 봄앓이를 한다고, 편안하던 마음이 갑자기 혼란스럽게되고 뒤죽박죽이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일들이 거칠게 예민하게 일어나서 답답해지고, 초라해지고, 죄책감도 느끼고 불안해지고, 어쨌든 그 순간순간 경험하는 그것이 '나'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매순간의 자기를 경험하고 삽니다. 그냥 그 순간순간 존재합니다. 짜증나면 짜증내고, 그 순간 일어나는 망상이든 두려움이든 불안이든, 뭐든 지금 일어나는 그 전부를 경험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렇게 삽니다. 감각과 욕구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평화롭고 자유롭습니다. 또한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진리고 영원한 자유입니다. 제가 아양아트센터에서 중용을 강의하는데, 첫구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한다. 최근에 중국에서 출토된 문건에 '희노애비지기성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기쁘고/성내고/서럽고/슬픈 이 기운이 곧 성이다. 성이 따로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게 바로 여려분이잖아요. 아침에 일어나 늘 느끼는 이것, 지금 현재 우리가 느끼는 이것, 진리는 항상 지금에 있습니다. '도'도 지금 이순간 현존입니다. 지금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릴때 사랑받지 못한 결핍이 많아서 제 내면에 서러움이 곧잘 있습니다. 뭔가 내면에서 자극이 되면 왠 설움이 그리 일어나는지 꺼억꺼억 울게됩니다. 이 나이에 말입니다. 근데 옛날에는 이게 부끄러웠습니다. 나이살이나 먹어가지고 질질짜고 말이지하며. 그런데 지금은, 요즘은 많이 적어졌습니다만 한동안 내 내면아이를 만나주면서부터 덮고 있던 빗장이 풀리면서 올라오는 것 중에 이 서러움이 이유가 없는데도 무언가에 꽂히면 엉엉울게 됩니다. 그때 한번 울기시작하면 봇물터진 듯이 울게됩니다. 이처럼 슬픔, 지금 현재 경험하는 '희노애비'이게 성입니다. 이 4가지를 이야기해서 그렇지 비단 이 4가지 뿐이겠습니까?. 온갖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인간이 일상속에서 지금 매순간 속에서 경험하는 감정/느낌/생각들을 글로 적어보라하면 바다를 먹물삼고 하늘을 비단삼아도 다 쓰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많을 것입니다. 공자는 또 말합니다.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
이 7가지는 배우지 않고도 잘한다. 기뻐하고/성내고/서럽고/두려워하고/사랑하고/미워하고/욕심내는 이 7가지는 배우지 않고도 잘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비단 이 7가지 뿐이겠습니까?. 불안도 있고, 쉽게 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건 이건데, 이게 '성'이라는 건데, 이 하늘이 명했다는건 이건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망상도 일어나고 잡생각도 일어나고 초라함도 일어나고, 박미경샘에게 선택의 권한이 있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게 내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이것/천명, 이름하여 하늘이 명한 것이다. 저절로 일어난다. 이건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냥 이걸 어떻게 하려하는 나/에고보다도 더큰 에너지와 힘을 가진게 이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입니다. 가운데 그 어떤것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있던가요?. 예전에 전 속이 좀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내었습니다. 내가 좀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그래서 내 안의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려고 애를 써 보았습니다. 성공했을까요?. NO!!!. 겸손의 모양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속은 더욱더 정교하게 교만해졌습니다. '난 너하고 달라!'. 안되더란 말입니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게 되었을까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기심, 탐욕들을 어떻게 내 뜻대로 할 수 있을까요?. 난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들이댄것이죠.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는 그것,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때까지 매순간 경험하는 그것, 왜 제가 중용을 인용했느냐면, 하늘이 명한 것, 이것은 저절로 일어나는데 그리고 이게 성인데, 성은 지금 내가 경험하는 것이고,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이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한다. 그냥 일어나는 이 감정/느낌/생각, 망상, 잡생각, 두려움 이 모든 것 그리고 그걸 따른다는 것은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게 도입니다. 아플때 아프고 무너질때 무너지는게 도입니다. 매순간 있는그대로 존재하는게 도입니다. 왜 솔성(성을 다르는 것)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안따라한다는 이말입니다. 아프면 아프고 무너지면 무너지고 죄책감이 들면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그러면 되는데, 그게 도인데, 그게 깨달음이고 해탈인데, 다른게 아니고 중생 그대로가 부처이고 번뇌 그대로가 보리인데 안따라갑니다. 왜 안따라가냐면 '나는 나다'할 때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때까지 모든 순간이 전부 나라고 했습니다. 나 아님이 없습니다. 나 아님이 없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아입니다. 이것이 나다라고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것, 나 아님이 없음을 이름하여 무아라 하는데, 왜 솔성(성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을 썼느냐 하면, 안따라 가니까, 이게 난데 또하나의 나가 있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자아/에고라하기도 합니다. 그냥 이대로이고 어린아이가 평화롭듯이 우리가 평화로운데, 이게 나인데 이것말고 또 하나의 나가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매순간, 모든 순간 있는 그대로를 판단하고 옳다/그르다 판단하고 정죄하고 취사하는 어떤건 택하고 어떤건 버리고, 조절하고 통제하려고하는 그 나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 나가 생기면서, 자아/에고가 생기면서부터 어린아이때에는 없었던, 만약에 이 자아/에고가 없으면(자기가 자기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려하고, 그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또는 취사하는 것을 통해서 뭔가 더 나은 존재/자기다운존재/깨달음을 추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려고 하는 그 욕구, 바람, 그게 없으면) 어린아이가 평생토록 자유롭고 평화롭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대로 해탈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대로 자유롭게 살면 되는데 왜 이 에고/자아가 생기냐면, 바로 여기서부터 우주의 쇼가 펼쳐집니다.
 
 
이대로 살면 어린아이처럼 평화로울텐데 자아가 생기면서부터 나/너가 분리됩니다. 나/너가 분리되면서 지킬 내가 생기고 되고싶은 내가 생기고, 내가 바라는 나, 내가 원하는 나하면서 이 에고가 점점 커지게 됩니다. 이게 왜 우주의 쇼냐하면, 모든 아이들이 그냥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이 에고/자아, 이 나라고 하는 허구속에 갇혀버린냐 하면 어린아이들은 되어야할 나, 지켜야할 나 없이 그냥 매순간 존재합니다. 그런데 매순간 있는그대로 존재하는 것의 어마어마한 복/기쁨/감사/눈부심/축복 이걸 모릅니다. 낱낱이 다 누리는데, 진리란 따로 존재하지 않고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이 곧 영원이고 지복이고 자기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렇게 모르다가 에고가 생기면서 분리가 옵니다. 분리가 오면 이 작은 자아에 갇히면서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참자기가 가지는 모든 권능과 자유와 평화 진리를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왜 하늘이 이런 쇼를 펼치느냐하면, 냅두면 되는데 왜 에고속에 가두어 버리냐하면, 가두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평화를 잃고, 목말라지고 찾게되고, 지키려고하면서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찾다찾다가 찾아보면 원래 이대로였습니다. 저는 이 자리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다른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구속과 결핍이 싫어서 자유와 평화를 찾아서 떠났습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힘들게 찾아보니 바로 이 자리였습니다. 깨달아보면 본전입니다. 원래 중생은 없습니다. 번뇌는 본래 없습니다. 나는 자유를 추구하는 그 모든 순간속에서 자유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돌아와 보니 본래 그대로 였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이 일상이, 호흡하고 짜증내고 우울하고 이게 얼마나 큰 복이고 자유라는 것을. 옛날에는 내 안에 있는 부족과 초라함을 느끼면 그게 결핍이고 내가 부족하다는 증거였습니다. 못견디었습니다. 그래서 자유와 충만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래 다시 돌아오니까 여전히 경직되고 본전입니다. 석가모니가 그랬습니다. 내가 무상정등각에 이르렀을때 진실로 얻은바가 없다고. 돌아오고 나니까 이 아무것도 아닌 일상, 평범함이, 긴장하고 주눅들고 어쩔줄 몰라하고 눈치보는 이것이, 사실은 이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한 것인데, 이건 부족한 거야, 못난거야, 이건 나다운 것일수가 없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하고 내가 밀어내고 이것 아닌 다른 어떤 무언가를 얻으려고 했기때문에, 소유하려했기 때문에 이것이 결핍으로 보였던 것 뿐이었습니다.
 
인간에게 결핍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만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무언가를 더 채우려하는 그 마음속에만 있지, 나중에 보니까 이 우주의 쇼가 원래 이대로인데, 이대로의 소중함을 모르니까 다 뺐어 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찾게 만들고 그렇게 고생해서 다시 찾아보니까 본전입니다. 그렇게 본전하고 나니까 다시 평범해졌습니다. 아아, 내가 한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구나, 그래서 깨달아보면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은 자도 없고, 깨달음이 뭐 대단한 것인가요?. 원래 이대로인데, 무언가 새로운 것을 얻었습니까?. 도달했습니까?. 이루었습니까?. 아니 그냥 이대로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정말 멋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호흡과 떠나있지 않습니다. 원래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평등합니다. 똑같이 100%주어져 있습니다. 얻어야할 그 무엇이 없고, 만약에 진리라는게 얻어야할 그 무엇이라면 죽어라 찾아다닌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혜택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도가 아니라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권력같은 것일겁니다. 그러나 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입니다. 자, 여기에서 뭐가 문제냐하면 왜 우리는 자아/에고라는 것에 갇혀가지고 고통받으며 목말라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이 에고라는게 누구에게나 다 생깁니다. 나는 매순간 있는 그대로가 나입니다. 그러니까 서있는 나도 나고 무너지는 나도 나고, 강한 나도 나고 약한 나도 나고, 흔들리지 않는 나도 나고 흔들리는 나도 나고, 평화로운 자도 나고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자도 나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순간 올라오는 것이 모두 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나 아님이 없으니까 이 모두가 나입니다.  
 
 성장하면서 에고가 생기면서 이 나를 매순간의 나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려하고 취하고 버림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게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건 나고 이건 내가 아니고, 이 무게 중심이 어린아이일때는 매순간 있는그대로에 존재하다가 점점 자아가 생기면서 에고가 자기주인이 되어버립니다. 이젠 이 에고가 자기라 생각해 버립니다. 자기 동일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몸이 나라고 하는 동일시, 하여간 의식자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자기 동일성, 자기동일화하려는게 에고이 속성인데, 그러면서 이게 내가 되어버립니다. 근데 사실은 이게 허구입니다. 이걸 비유해서 설명하면, 여름철에 평평한 땅에 비가오면, 적당히 오면 그냥 물이 고여있는데, 많이 오기시작하면 빗물이 흐르고 땅이 파이고 고랑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비가 오고 다시 그 고랑으로 물이 더 많이 흐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고랑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땅에 이런저런 삶의 상황, 경험들 이런 것들을 통해, 어떤 자극들에 자꾸 동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제가 태어나 보니까 아버지가 안계시고, 가끔씩 오셨고, 오시면 저에 대한 기대가 많아서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치고 그래서 저는 주눅들고 무섭고 어쩔줄 몰라하고 내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모르게 됩니다. 너무나 무서웠으니까 벌벌떨고 그러면서 그게 자꾸 반복되니까 제가 태어날 때 심약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고, 좀 강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별로 문제되지 않았을텐데, 그냥 그러다 보니까 내 마음에 골이 생긴것입니다. 그러면서 일정한 자극이 오면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되는, 그래서 누가 고함을 지르면 얼어버립니다. 또는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남이 나를 무시하는 듯한 외면하는듯한 느낌이 들면 그냥 긴장해 버립니다. 어떤분은 자기에게 연장자가 말을 놓으면 속에서 분노가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것을 추적해 들어가보니까 과거에 자기 아버지가 엄해서 아이들에게 꼭 말을 높이게 만들고, 그게 아마 억압된 상처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단 이런것 뿐이겠습니까?. 저에게는 진짜 많은 골들이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이고 결핍투성이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존중받지 못한, 받아들여져본적이 없는 그런 존재이다 보니까, 사람이란 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이게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어릴때 사랑받지 못하고 따뜻함속에 있지 못하고 그런 두려움과 고함소리와 내침과 거부에 대한 두려움속에 있다보니까 내 안에는 그런 골들이 많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할때 언제나 이게 올라옵니다. 처음에는 환경으로부터 인격이 형성됩니다. 그렇게 결핍속에 인격이 형성되다보면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라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제가 가장 히들어 하는게 무얼 선택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내 감정을 표현해 본적이 없으니까요. 성장해 가면서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거꾸로 생각해서 처음에는 환경에서 생기는데 나중에는 내가 이렇게 초라하고 못났으니까 사랑받지 못하는게 마땅하지하며 자기탓으로 돌립니다. 자존감 제로에 자신감없고 내성적이고 이 모든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무튼 관계속에서 경험하는 나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가 이제 내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이래가지고는 사랑받지 못할 것 같고 또 거부당할 것 같고, 어쨌든 성장하면서 내 안은 이런 골들로 꽉차 있는데 아무리 다르게 편안하게 하려해도 안되는 겁니다. 늘 비가오면 골로만 들어가게 되니까. 그런데 나는 이런 사랑받고 존중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실제 삶은 그렇게 안되니까, 나를 스스로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이걸 덮고 가리고 숨기게 됩니다. 이걸 고치고 바꾸려하고, 그러면서 사랑받는 존재 인정받는 존재, 남들에게 우러름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나를 만들어 놓고 그 나와 자기동일시를 하게됩니다. 그렇게 남들을 만날때에는 사랑받을  수 있는 만들어 놓은 나를 내보이게 되지만, 실제의 나는 그런 나로 아무리 포장을 해도 실제로 그렇게 안되거든요. 남들 앞에서는 끊임없이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지만 혼자 있을때는 철저하게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지는데, 남에게 잘 보이려고 에너지를 다 썼기 때문에 나를 위해 쓸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어서 만들어 놓은 나와 자기동일시를 하면서 우월감에 빠집니다. '난 너와 달라~'. 그런데 그 속에는 처절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이 자아가 어떻게 생기느냐 하는 것은, 아니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나라고 생각하면서 매순간 내 안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자, 매순간 경험하는 이것이 저는 결핍과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래서 그걸 매순간 경험하는 저는 매번 두렵고 벌벌떨고 우유부단합니다. 나와 같은 상처가 없는 사람은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나는 심히 경험하고 왜곡하고 뒤틀린단 말이죠. 그런데 나는 이렇게 참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나를 경험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결핍과 상처투성이였으니까요. 그런데 눈빛하나에 무너지거나 벌벌떠는 나를 경험하게 되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내가 또 하나의 나를 만들었단 말이죠. 이 에고가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상처투성이인 제가 일상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두려움에 벌벌떨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눈빛하나에 무너지고 긴장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데, 밤에 자면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리고 그렇단 말이죠. 이게 난데 내 안에서는 그런 나를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초라하게 여기는 에고가 있어 이 나의 모든 순간순간들의 감정/느낌/생각들을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받고 싶고 또 거부당하기 싫으니까. 거부에 대한 두려움, 내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받고 환영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매순간 경험하는 나를 내가 판단해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에고가 생겨나게 됩니다. 판단하면서 좋게 생각되고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들은 모으기 시작합니다. 유지하고 지속하려하고 확장하려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에게 거부당했던 것과  비슷한 감정/느낌들은 경험하면 미친듯이 덮고 가리고 숨기고, 이 에고가 계속 나를 판단하면서 취사하고 간택합니다. 이러면서 이 에고가 또하나 착각을 하는게 끊임없이 통제/조절/간택/취사를 통해서 애쓰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바라는 나, 이런 초라하고 못난 내가 아니라 가득차고 충만하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완전하다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 날이 있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 내가 만약에 그런 존재가 되면 다시는 지금과 같은 상처와 결핍투성이를 다시는 경험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모든순간에 어디에서든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겠지라는,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매순간의 내가 아니라 또다른 나를  만든 것입니다. 이게 목표가 되고 도달하려하고 이것을 완전이라 이름붙이고 부처라 이름붙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결핍과 초라함이 너무나 힘들었으니까요. 이런 완전한 존재가 되면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순간에서도 거부당하지 않는 존재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서 남들에게 지혜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존재, 그런 충만한 존재가 되겠지 하는 생각. 이 에고가 하는 또하나의 착각이 뭔가 다른 또다른 진짜 이것, 완전한  이것, 이게 있을거야라는 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자신을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는 가운데 목표를 만들고 그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애를 쓰게 됩니다. 이게 에고가 하는 짓입니다. 사실은 에고의 가장 뿌리깊은 속성이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에 두려하는 그래서 하여간 이런 존재가 되면, 그래서 이전에 자기가 경험했던 모든 결핍과 초라함을 경험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에고가 만들어 놓은 허구에 불과합니다.
 
실제의 나 '나는 나다'할때의 진아는 지금 이순간 매순간 현재입니다. 섰든 무너지든, 아프든 쩔쩔매든 그것입니다.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이 에고가 하는 짓이 또하나 있는데 모양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평화로웠나, 당당했나, 이렇게 하면 하나는 긍정하고 하나는 부정하는게 됩니다. 이게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목표를 만들어서 자신을 계속 닦달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듭니다. '나는 나다'라고 할 때 그 나는 참 단순합니다. 지금 이대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현재에 있을 수밖에 없기때문입니다. 지금 존재하는 것, 매순간의 나가 진짜 나입니다. 깨달음은 이대로입니다. 에고가 살아 있어서, 에고가 주인이 되어서 늘 판단하고 이 나를 이건 중생이다 번뇌다 판단하고 규정하고, 이 에고가 만들어 놓은 완전한 목표를 향해서 가게됩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에도 나는 결코 나자신을 떠나있지 않습니다. 진리, 부처를 떠나있지 않습니다. 실상을 떠나있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일뿐입니다. 다만 판단하는자, 에고가 있어서 이다/아니다, 취사를 하는 에고가 주인이 되어 나를 조절하고 통제함을 통해서 이 에고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니까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이건 아니다하고 자기가 부처이면서도 부처를 구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복된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에고에 속아 살았습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데 에고가 하는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수행하고 닦아야 도달한다는 생각, 에고가 또 하는게 뭐냐면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와 부처, 지금과 미래를 나눕니다.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도달한다는 착각을 또 만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게되는데, 그렇게 노력하는 동안에도 나는 단 한순간도 진리를 떠나있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입니다. 진짜 이대로인데 뭐가 바뀌느냐하면 내가 이렇게 초라하고 결핍된 존재가 흔들리지 않는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허구적 존재인 에고가 점점 약해집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볼줄 아는 힘이 생기면서 에고가 만들어 놓은 이원성이 점점 더 약해지게 됩니다. 약해지면서 매순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닦달하던 그 모든 것들이 허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쉬게 됩니다.
 
이 에고의 힘을 점점 약해지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방법을 몰랐기에 죽어라 닦았습니다. 마조선사가 말했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그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이때 구하는 바란 매순간 느끼는 우리의 감정, 쩔쩔매고 어쩔줄 몰라하는 이것말고, 이건 아냐하며 딴것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에고이고 이 에고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이 마음이외에 다른 부처가 없고'에서 이 마음이 곧 지금 이순간 올라오는 희로애비입니다. 지금 이순간 경험하는 이것, 그것이 죄책감이든 초라함이든 뭣이든 진리는 지금입니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그것이외에 다른 부처가 없습니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좋은 것이라해서 취하지말고, 나쁜것이라 해서 버리지 마라'곧 에고를 따라가지 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에고가 가리키는 바대로 항상 취사선택을 했습니다. 마조는 이런 평화롭고 좋은 것이라해서 취하고 쌓아두려하지 말고, 무너지고 죄책감과 초라함이 든다고 해서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대로가 진리이니까요. 마조가 또 말합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마라.' 무엇을 더럽힌다고 하는가?. 조작하고 취향하는것. 조작이란 이런 초라하고 우유부단하고 쩔쩔매는 이런 것들을 바꾸어서 목표를 향해서(취향)나아가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하나 '곧장 도를 깨닫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도다.'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하지 않고 옳다/그르다하지 않고 취하고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것을 따르는 것을 도라하고, 그게 바로 길인 것을 가르쳐 주는 것, 너 자신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고 가르치는 것 그게 바로 수도지위교입니다. 도를 닦는 것은 지금 내가 경험하는 그 감정의 길을 따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진아/참나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아는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때까지 경험하는 그것입니다. 모양을 따라가니까 나답다 혹은 나답지 못하다로 나뉘지만 진리는 참 단순합니다. 지금입니다.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삼조승찬이 말했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가려서 택하지만 말라.' 그 가려서 택하는게 바로 에고가 하는 짓입니다. 우리는 항상 에고가 주인이 되어가지고 에고가 가리키는 대로 해왔습니다. 그걸 '노예'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고를 진짜 나라고 생각해서 내가 나의 조절/노력/통제/결심을 통해서 완전을 이루려하고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게 우리의 교육이기도 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뭔가를 하고 고치려하는 그 에고가 사라지면서 원래의 진리가 드러납니다. 내가 누구인가?. 무게 중심을 에고에게 내어주지 말고 매순간 경험하는 그것에 두십시오. 이 삶이 축복인 이유는 좀 괜찮아지고 살만해졌는데 봄만되면 안에서 치고올라오는 그것이 평화를 무참히 깨뜨려 버립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삶의 축복입니다. 어느새 내 구미에만 맞고 나를 흡족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성을 짓고 살고 있는 나를 삶이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절이 와서 부수어 버리고, 야~ 네가 쥐고 있는 것은 에고다. 진리는 지금이다. 여기에 있다, 왜 엉뚱한 곳, 너를 살리지 못하고 죽이는 엉뚱한 성에 갇혀 사느냐면 무참히 깨부수어 버립니다. 성경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지은 것으로는 너희 몸을 따뜻하게 하지 못할것이요, 너희가 지은 굳건한 성으로는 비바람조차 막지 못할 것이다라고.
 
내가 내 영혼을 따뜻하게 하려고 튼튼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자유가 올까요?.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자유가 올까요?. NO!!!. 지금입니다. 지금, 그런데 우리는 에고에 너무나 오랫동안 속아 살아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괜찮습니다. 속아 살아왔어도 괜찮습니다. 진실을 알고 돌이키면 됩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가던 길을 돌이키면 됩니다. 에고의 종이었다가 그래서 지금 올라오는 것을 늘 취사선택하는 그걸 내려 놓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때까지 여러분이 경험하는 거기에 좀 주목하면 됩니다. 여러분!, 지키려하면 지켜집니까?. 지키려고 하는 자기가 지켜집니까?. 이게 언제까지고 에고의 놀림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이 지키려는 심리는 요행을 바라는, 치르지 않고 공짜로 어떻게 해보려는 짓입니다. 하늘이 그리 호락호락하겠습니까?. 치를것 다 치르고, 아파보십시오. 그 아픔이 나를 영원으로 인도합니다. 이것하나 건너뛰면 내인생, 에너지를 다 건너 뛰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 거부하면 온 우주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가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내 몸을 다 녹아 내려버릴 것같은 고통을 주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마십시오. 지금을 만나고 나를 만나십시오. 어제 요가를 하는데, 몸을 뒤틀었고 고통이 왔습니다. 근데 강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이라생각하지 말고 조금 낯선 감각이라 여겨라. 무척 힘든 동작을 하는데 곧 지나갈 동작이지만 잠시 거기에 머물러라. 막 힘들어 하고 있는데 그 안에도 평화가 있다. 야, 아주 놀라웠습니다. 초라한 것이 올라올때도 도망가거나 거부하지 말고 거기에 있어보고, 찢기고 피흘릴지라도 내가 달아나지않으리라, 나를 만나리라, 아니 내 안에서 일어났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도 나는 나를 만나리라. 내가 살아있는 것은 내가 나를 나의 전부를 만나기 위함이다. 나는 오직 나를 만날 것이다.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내 구미에 맞는 곳에 가서 집짓고 살지  않겠다. 그 한마음을 일으키면 이 일상속에서 매순간의 경험속에서 알게됩니다. 깨달음은 그냥 자기자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내가 내 안에 서게되면 한 건강한 사회인이 되고, 곧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더이상 내 자신과 싸우지 않게되면 남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어릴때 어린 아이는 나/남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고가 생기면서 나/남이 생겼습니다. 내가 나를 나의 전부를 만나면 상대/너를 진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 소유가 아니라 그냥 존재할 수 있는, 이걸 이름하여 나를 믿는다고 하는, 내가 나를 믿을때에 비로소 남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걸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나를 만남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삶의 비밀과 진실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열쇠는 지금 이순간 여러분입니다. 이 나를 떠나지 마십시오. 경험하고 만나십시오. 이 아무것도 아닌 정말 초라한 이 안에서 영원히 변치않는 진주와 보물을 여러분 스스로가 발견하게 되고 누릴 수 있습니다.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며'. 이문은 지금, 매순간이라는 문입니다. 크게 이야기하면 이 '나'라는 문입니다. 지금 이순간 올라오는 그 문밖으로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노자는 '나가지 않고도'라고 말했지만, 나가지 않아야 알 수 있습니다. 무너질땐 무너지십시오. 괜찮습니다. 무너짐이 간직하고 있는 메시지를 들으려면 무너짐과 하나가 되여야 합니다. 그 '성'을 따라가야 합니다(솔성지위도). 왜냐하면 모양 하나만 떠나면 이 지리멸렬한 중생이대로가 곧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양을 누가 만듭니까?. 바로 에고가 만듭니다. 이걸 다른 각도로 말하면 우리가다 잃어버리잖아요. 진짜 좋은 것을 주려고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진짜 떠나 있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아파하십시오. 혼란스러워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창문 밖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보나니.' 왜냐하면 여러분이 도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입니다. 이름하여 여호와입니다. 그 관념의 무게가 커서 감히 여호와하나님을 붙이려하면 그렇지만, 부처는 괜찮아요. 사람들이 부처에 대해서는 별로 관념의 무게가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하면 난리가 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단지 이름일뿐입니다. 여러분이 천하이고 하늘의 도입니다. 떠나지 마십시오. 나가지 마십시오.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모양하나만 떠나면 이 일체의 상을 떠나는 것 이게 곧 부처입니다. 딴데서 찾지 마십시오. 다만 에고가 만들어 놓은 그 상하나 때문에, 내가 그렇게 찾는 동안에도 한번도 나 아닌적이 없었습니다. 부처를 떠난적이 없고 진리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 나아감이 멀면 멀수록 그 앎은 더욱 적어진다'. 인생이 축복인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예기치 않게 어떤 상항속에서도 나를 찾아온다는, 그만큼 하늘의 자비는 정말 큽니다. 내가 자유할때까지, 모든 것을 내려놓을때까지 진정으로 나자신이 될때까지 쉬지 않는게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밝으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이미 다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만 내가 에고에 속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핍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해야할 목표가 뚜렷이 생깁니다. 진리가 얼마나 멋있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조건속에서 모든 상황속에서 100%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멋있습니다. 창문밖으로, 문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 지금 이순간에 존재해 보는 것, 아프고 힘들고 답답하고 미칠 것같을 때, 그렇게 있어보면 됩니다.
 
이미 부처이신 여러분!. 이미 도달해 있는 여러분!. 이미 깨달아 있는 여러분!. 이미 영혼의 자유속에 살고 있는 여러분!. 생각하나가, 우주가 내게 허락한 그 모든 에너지를 갉아 먹어 버립니다. 오늘 이런 강의가, 깨달으신 분들의 경전의 이야기가 참 감사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자각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전의 말씀들이 여러분 자신안으로 좀더 파고들어가서 일상생활속에서 지금 올라오는 것에서 벗어나려할 때, 그때 그쳐 보는 것입니다. 진실로 매순간 그치면, 이 아무것도 아닌 일상속에서 우리는 그 일상이 주는 자유를  맛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러분 감사합니다.
 
 
 
 
 
아직 홈피가 정상이 아닌듯합니다. 사진이 올라가지 않아 선생님의 글만 일단 싣습니다.
 
 
<질의 응답>
⊙우리가 에고에 갇히는 이유는?
▶진리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무엇을 소유함으로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얻는게 있으면 차별이 있게됩니다. 얻는게 없으니 여기엔 차별이 없습니다. 얻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가르치고 있지만,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누리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깨닫고 나니 그 깨달음이 너무 오묘해서 알아 듣는 이가 없을 것 같아 석가모니는 설법하기를 주저했습니다. 여기서 '오묘하다'는 것은 바로 똥누고 밥먹고, 피곤하면 자리에 눕는 것 이것이 바로 도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비웃겠지만 지혜로는 자는 압니다. 우리 일상 이대로가 도이니,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알아들을 이가 없으니 오묘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이대로이니 어느 누가 그걸 알아듣겠습니까?.
 
▶저는 엄마의 맘을 잘 압니다. 영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오면 제 자궁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치유되면 저의 자궁을 떠나 자기 자리를 찾아 떠납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으면 아이가 금방 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걷다가 뒤로 넘어집니다. 쿵~. 걸으면서 자꾸 꼬꾸라집니다. 그 꼬꾸라짐이 없으면 교주가 됩니다. 한방에 이루는 것, 이런 것은 없습니다. 자꾸 꼬꾸라지며 성장하는 것이 건강한 삶입니다. 그러니 그 꼬꾸라짐은 더이상 꼬구라짐이 아닙니다.
 
 
▶에고는 늘 '내가 했어'가 있습니다. 그게 실은 그만큼 열등감, 결핍이 깊다는 것입니다. 우쭐감이 들면 그것을 아, 내가 그러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게되면, 그렇게 알면서 그것을 허용해줄때 그것이 나를 휘어잡지 못합니다.
 
 
 
⊙이원성을 조금 내려 놓으니 에고가 더 치고 올라옵니다. 자포자기하고 싶고, 너무 골치아프고, 미움/초라함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올라와서 감당이 안됩니다. 이게 언제까지 갈까요?.
 
▶이게 언제까지?, 또오나?. 이 두가지를 버리십시오. '언제까지, 또'하는 이게 에고가 하는 말입니다. 에고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것을 원합니다. 에고가 약해지면 감당이 안되는 것들이 올라옵니다. 이때 두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아 언제까지, 또'하는 마음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지금 이순간을, 진정한 배움을, 보배를 버리는 마음이다. 또 하나의 다른 마음은 '와라!~'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순간을 계속만나면 그래서 지금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 만나게 되면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때 의식의 다른 층이 열리면서 많이 편안해질때가 있습니다.
 
▶선은 점들의 집합입니다.  이점 하나를 빼버리면 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만나면 미래와 과거도 다 만나게 됩니다. 이유를 따지지 말고 그냥 만나면 됩니다. 원인을 따지고, 전생을 알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바꾸고 고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올라오는 것을 만나면 고구마 줄기를 들어올릴 때 모든 고구마가 그 줄기를 따라 다 올라오듯, 거기에 딸린 모든 것들을 보게되고 알게됩니다. 이유를 따지고 묻게되면 그 질문에 한정되어 이해가 좁아져 버립니다.
 
⊙내 삶이 억울한 느낌이 든다.
에고는 항상 특별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 에고가 점차 사라지면 자기삶에 대한 억울함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기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느낌 때문에 바로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섭니다. 그러므로 도를 찾는 사람은 소털처럼 많지만 도를 이룬 사람은 소뿔만큼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에고가 힘들어 하는게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울함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명상이 도움이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원성의 세계에 삽니다. 이것을 강화하는게 사회교육입니다. 이게 모세가 들고온 율법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큰 스님들이 닦아서 가야한다고 말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닦아서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닦아서 가는 것은 에고의 속성입니다. 목표를 정해서 미래어느날 도달하고자하는 것은 에고의 속성입니다.
그냥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냥하기가 어렵습니다. 의도/목적을 두게됩니다. 그리고 결과를 원합니다.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니 명상하지 마십시오. 삶이 곧 명상입니다. 그냥 사십시오. 그냥 살다보면 박미경선생님처럼 봄이라는 계절이오면 더욱 치고 올라오기도 하고, 점점 더 민감하게 안의 것들이 올라옵니다. 그때 피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나십시오. 그게 곧 명상입니다. 삶이 곧 명상입니다.
 
 
⊙분노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 두려움을 회피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분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참아내는 것은 좋게 생각합니다. 분노를 녹여내는 방법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인정하고 긍정하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분노한다'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설명하거나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두려움을 회피한다기보다 분노에 함몰되는 것입니다. 자각 할 수 있으면 참 좋은데, 분노하더라도 함몰되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후회가 따라옵니다. 분노한 이후에 그 다음에 나오는게 후회/반성입니다. 이렇게 가면 다 놓치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난후 그 다음 순간에 '내가 잘못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자가 아니라 화를 낸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시인하십시오. 내안의 분노와 거침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받아들이는게 먼저입니다. 다음 번에는 하지말아야지가 아니라, 다음번에는 그것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보자하는 마음을 내어보십시오.
과거에 내가 어떠했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단순합니다. 일어난 일에 대해서 그대로 인정하고 시인하십시오. 인정하고 시인하고 받아들이고, 다음번엔 어떡하나보자하는 마음을 내어 보십시오. 일어난 감정을 두고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정말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자각의 힘입니다.
 
 
 
비가 내립니다.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참 포근합니다.
이 빗소리에 잠겨 모두들 평안하기를....
 
연초록 산빛이 눈부신 5월에 뵙겠습니다.
 
 
 
 
 

댓글목록

루시오님의 댓글

루시오 아이피 (125.♡.80.1) 작성일

정말 오랜만에 도덕경 홈피에 접속했는데, 바로 여름가지 형님의 후기를 읽네요.
넘 고맙습니다...오늘은 후기를 바로 정독하진 않고, 중간 중간 훑고 있다가...

엄마가 아기를 낳으면 아이가 금방 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걷다가 뒤로 넘어집니다. 쿵~. 걸으면서 자꾸 꼬꾸라집니다. 그 꼬꾸라짐이 없으면 교주가 됩니다. 한방에 이루는 것, 이런 것은 없습니다. 자꾸 꼬꾸라지며 성장하는 것이 건강한 삶입니다. 그러니 그 꼬꾸라짐은 더이상 꼬구라짐이 아닙니다.

라는 기태 쌤의 답변에...울컥하네요. 넘 감동이라서...
내가 지난 군 생활 속에서 나로서 살고 있을 때..잘 자빠지고 있었구나...
잘 자빠짐을...하늘님이 보호주시면서 넘어트려주셨구나...란 생각에 감사함이 들어요..

또...

이게 언제까지?, 또오나?. 라는 쌤의 말씀에....전 최근에...

이게 정만이 형이 말한 내면아이라는 건가? 싶은데...내면아이든 아니든...그건 중요한건 아니고..
무튼 넘 아픈 그 녀석이 자꾸 찾아오는데...
아무리 만나주고, 만나줘도...아픈 그 녀석을 볼 때마다...'옛 날엔 왜 이런 아픈게 오나? 언제까지
오는건가?' 했었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지..과거에 내가 만나주지 않고 내 쳐버린..십 수년을
묵어 곯아터져버린 아픈 내가 계속 오니 만나줄 수밖에...'란 맘으로 있어주다 이 글을 읽으니...

그냥 울컥해버려졌어요...쓰잘데기 없는 소릴 많이 했네요..ㅎㅎ

기태 쌤의 말씀을 전달해 주셔서 넘 감사해요. 전역 전에 꼭 산청모임에 한 번 더 가고 싶어요!
그게 안 되면...올 해가 끝나기전에라도...꼭^^

햇살님의 댓글

햇살 아이피 (175.♡.55.224) 작성일

석류..라는 한 대상을 보고도 저런 절절한 시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참 감탄스러워요.
봄비와 함께한 4월이네요. 벚꽃보다 비를 더 많이 본듯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선생님께서 에고에 대해 많이 말씀하신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글로 읽으니 더 이해와 공감이 깊이 되는듯 합니다.
매번 가지님의 정성이 듬뿍 담긴 후기 덕분에 한번 더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어
감사드려요. 연초록 5월 모임에 뵐게요~^^

돌도사님의 댓글

돌도사 아이피 (210.♡.134.202) 작성일

남에게 잘 보이려고 에너지를 다 썼기 때문에 나를 위해 쓸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화를 내고 난후 그 다음 순간에 '내가 잘못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자가 아니라
화를 낸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시인하십시오.
내안의 분노와 거침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받아들이는게 먼저입니다.
다음 번에는 하지말아야지가 아니라, 다음번에는
그것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보자하는 마음을 내어보십시오.
.............
감사합니다...^*^...
정리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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