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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작업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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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ra (110.♡.249.22) 댓글 11건 조회 7,167회 작성일 12-05-2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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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대학원졸업 후 친구들과 공동 작업실을 운영하던 시절, 30대 초반의 의욕 충만한 때라 이대로 열심히 하기만 하면 곧 무엇인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참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근근히 아르바이트하여 모은 돈을 재료비에 몽땅 써버려도 별로 아까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고질적인 마음의 습관이 있었으니,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기쁘지가 않은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부실함, 미진함과 막연히 이것이 아니다 라는 느낌은 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어렵게 개인전을 열고 전시장에 그림이 걸렸을 때, 덜떨어진 자식 시집보낸 것처럼 아슬아슬한 느낌과 눈 밝은 사람들이 작품의 허술함과 세계 없음을 꿰뚫어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빨리 전시기간이 지나가기를 바랐으며, 허겁지겁 다음 작업을 구상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작업실로 되가져온 그림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처박아두거나 함량미달의 작품들을 서둘러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긴 시간을 그러하였다.
II.
몇 년 전, 서해 간월암에 잠시 머물던 때, 주지스님과 함께 노은사스님을 만나는데 동행한 적이 있었다. 한때 힘도 좀 쓰고 말술을 마셨다는 노스님은 스님이라기보다는 조폭두목 같은 걸걸한 말투와 골격을 하고 있었다. 3배를 하고 이런저런 대화 중 직업을 묻길래 화가라고 대답하였다. “화가라... 마음을 그리는 화가가 되시게...” 늦은 밤, 소나무언덕 지나 물이 빠져 길이 열린 암자로 돌아오며 마음이 복잡하였다. 마음을 그린다, 어떻게? 미니멀아트처럼 무수히 반복하여 칠한 흰 캔버스 그대로 걸거나, 여느 선화들처럼 원을 휘갈겨 그리거나 알 듯 모를 듯한 선 몇 개를 긋고는 마음을 그렸다고 강변한다?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그림을 그려놓고는 그럴듯한 설명을 갖다 붙이는 것을 아주 혐오하는 내가 아니던가? 물론 나도 예전에 그러했지만,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 파도소리 가까운 방에 누워 오래 뒤척였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문득, 노스님의 낚시질에 걸렸다는 느낌이 왔다. 이런 영감탱이 같으니라구, 우리의 삶 자체가 마음 안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거늘 어느 것 하나 마음 아닌 것이 있는가? 부족한 것이든, 덜떨어진 것이든, 내 마음 자체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 그림 아니던가? 부실하고 미진하고 막연히 이것은 아니야 하던 그것이 내 마음 그대로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런, 제기럴 영감탱이. 그랬다. 항상 막연하게 내 속에는 아직 표현되지 못한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림을 대하는 자세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닮아있을 수가.
III.
최근 한 며칠간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 멍하니 앉아있거나 이런저런 책을 보거나 그림에 한두 번 손대다 그치기를 반복하였다.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있지도 않는 검열관을 의식하는 눈치 보는 그림, 유명한 대가들, 잘나가는 선배들, 남의 냄새가 조금씩 묻어있는 그림을 그려왔다는 생각, 그리하여 앵무새처럼 남의 목소리나 흉내내며 내 것인양 해왔다는 생각, 스스로를 밧줄로 옭아매고는 답답하다고 징징거렸다는 생각과 함께, 나 아닌 요소를 깎아내고 깎아내어 뼈만 남았을 때 비로소 내 그림으로 서겠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그러자, 나는 양 새끼가 아니라 사자라는 자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 나는 나를 길들이려는 어떠한 것도 거부한다. 나는 양 새끼가 아닌 사자다!
레너드 제이컵슨의 책 ‘현존’에 묘사된 한 여인의 외침이 생각난다. 어릴 때부터 항상 남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다 자신을 잃어버려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 받던 여자, 문득 깨어나 자기를 길들이려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외침, 선언, 사자후. “Fuuuuuck yooooou!"

댓글목록

수수님의 댓글

수수 아이피 (69.♡.189.211) 작성일

“Fuuuuuck yooooou!"

하하하 비라님
속이 후련합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남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다 자신을 잃어버려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 받던 여자, 문득 깨어나 자기를 길들이려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외침, 선언, 사자후. “Fuuuuuck yooooou!"

오늘은 왠지 종일 "FUCK YOU"하며 실실 거리고 싶어집니다

욕이 참 진실합니다 (*)


" 노스님의 낚시질에 걸렸다는 느낌이 왔다. 이런 영감탱이 같으니라구, 우리의 삶 자체가 마음 안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거늘 어느 것 하나 마음 아닌 것이 있는가? 부족한 것이든, 덜떨어진 것이든, 내 마음 자체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 그림 아니던가? 부실하고 미진하고 막연히 이것은 아니야 하던 그것이 내 마음 그대로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런, 제기럴 영감탱이. 그랬다. 항상 막연하게 내 속에는 아직 표현되지 못한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림을 대하는 자세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닮아있을 수가."

나를 표현 하는 창작의 세계에서도 틀 속에 짜인 틀을 넘어
자기의 숨으로 호흡하는
 반란의 꿈을 삶으로 살아내는 탱탱한 젊은 영혼을 어제 만났습니다

자, 마음껏 들이키고
마음껏 내품읍시다
내 숨을 !

우리님의 댓글

우리 아이피 (14.♡.240.191) 작성일

와우~  멋찌다. 짱!!입니다.

지안님의 댓글

지안 아이피 (118.♡.73.144) 작성일

제 자신에게 끝임없이 외치는 소리
"free me~~~"
늘 마음 속에 새겨진 '잘' 이라는 글짜를 떨쳐내고 나니 조금 자유로워졌습니다.
내속에 아직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맘껏 향유하시길....

김미영님의 댓글

김미영 아이피 (175.♡.20.34) 작성일

님의 글은 아껴서 조금씩 읽습니다.숨도 천천히 쉬면서요,,,은은합니다.
제가 부부싸움하다가 쎄미한테 FUCK YOU !라고 소리지르면 쎄미가 기뻐하면서 달려와 묻습니다.
"WHEN?"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126.64) 작성일

흐흐흐. when?

마피님의 댓글

마피 아이피 (211.♡.251.39) 작성일

계속 읽게 되는 글이에요- 마치 마음을 서서히 물들이는듯한...

저도 같이
Fuuuuuuuuuuuuuck yoooooooooooooou!!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126.64) 작성일

마피님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매순간님의 댓글

매순간 아이피 (120.♡.118.151) 작성일

한편의 모노드라마 ^^

내면을 이리도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얘기하시는지... 너무 부럽습니다.

현존 책 감명깊게 읽었는데 말씀하신
그 부분은 정말 기억에 남네요

윤회에대한 부분이 깊어서
조금 읽다가 망설여졌던 책이기도 합니다.

꽃으로님의 댓글

꽃으로 아이피 (183.♡.212.36) 작성일

ㅋㅋ 제기럴 영감탱이 ~
왜 제 속이 시원하죠?

만허님의 댓글

만허 아이피 (14.♡.152.11) 작성일

어떤 틀속의 굴속에서 바같세상 힐긋 힐긋 곁눈질 하시다,

삭풍을 온몸으로 맞으려 광야에 우뚝 서신것 박수 보냅니다,

오직 님만이 표출할수있는 마음을 켄버스에 옮길 그때가 도래 했나 봅니다,

이후에 나올 님의 작품이 갑자기 보고픈 생각이 간절합니다,^_^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126.37) 작성일

앗! 부담스럽습니다.그렇다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그림이 나오겠어요?
스스로의 마음가짐 문제겠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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