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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개똥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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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ra (110.♡.249.111) 댓글 4건 조회 7,100회 작성일 12-07-2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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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기차의 화장실은 밑이 뚫려있어 내용물(?)이 바로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있는 구조라, 더운 여름날 철교 아래에서 미역 감던 우리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쨍쨍한 맑은 날, 빗방울 같은 것이 흩뿌려지거나하면 허겁지겁 잠수를 했으며, 우당탕거리며 지나가는 열차의 뒤꽁무니에 감자를 먹이거나 욕을 퍼붓곤 했었다. 낄낄거리던 친구들의 표정, 행동들, 물소리, 더운 날씨들이 기억난다.
학교를 가려면 집 앞 약간 언덕진 철길을 따라 20여분 걷다가 다시 논길을 따라 40여분을 걸어야만 했다. 모내기 전 써레질을 끝낸 무논 사이를 걷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들판 가득 하늘이 비친 논 사이를 걷노라면 물위를 걷는 듯한 느낌, 약간의 현기증, 개구리 소리, 저 멀리 탈곡기 소리. 어느 여름날, 그날은 어쩐 일인지 혼자서 학교를 가게 되었다. "시냇물 흘러서 가면 넓은 바닷물이 되듯이..." 흥얼흥얼 유행가를 부르며 걷다가 문득 철도 레일과 침목 사이에서 잡풀과 뒤엉킨 넝쿨 사이의 10원짜리 동전만한 참외를 발견한 것이었다. 아직 푸르고 어린 조그만 놈. 참외를 먹은 어떤 이가 기차에서 볼일을 보고 아래로 떨어진 그것에서 미처 소화되지 않은 씨앗이 싹이 터 열매를 맺은 것이다! 다행히 그놈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학교에 늘 함께 가던 친구들이 그날따라 없었음을 얼마나 다행스러워했던가. 그날부터 조마조마한 긴 기다림의 시간으로 돌입했다. 학교를 오갈 때마다 다른 친구들이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곁눈질로 슬쩍 보고 녀석이 익기만을 기다렸다. 영원같이 긴 시간이 흐르고... 아라가야 고분 쪽으로 놀러가자는 친구들의 제의를 아침 자습 문제를 칠판에 적어놓고 가야한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논길을 가로지르고 철길을 허겁지겁 달려와 드디어 어린아이 주먹만한 노랗게 익은 참외를 딸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의 열매는 달디 달았으며 조금씩 아껴가며 녀석을 맛보았다. 그 만족감, 행복한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 단맛에 대비되던 꼭지 부분의 강렬한 쓴맛도.
세월이 흘렀다. 그날의 개똥참외보다 훨씬 크고 달고 빛깔도 좋은, 계절을 앞선 참외들이 흔한 시절이 되었다. 비닐하우스에서 과학적으로 관리 재배된 놈들이라 인분을 거름삼아 땡볕에서 자란 것들보다 훨씬 위생적이고 보기도 좋지만 왠지 어린 시절의 개똥참외를 먹는 것 같은 만족감은 덜한 것이었다. 뭔가 2% 부족한 느낌이랄까.
II.
고교시절부터 객지생활을 시작하였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대학시절부터 시작한 서울생활은 어떤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춰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낯선 스타일의 인간관계와 일로써 만나게 되는 더 낯선 어색한 관계들, 한결같이 적당히 예의바르고 지켜야 할 선을 지키고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는 술자리들, 그리고 헤어지면 서로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관계. 잘 재배한 비닐하우스 속의 깔끔하고 샛노란 비슷비슷한 크기의 참외 같은, 가공된 세련됨 같은 것. 시간이 갈수록 뜨거운 여름날의 그 개똥참외 같은 펄펄 살아있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주어진 개성 그대로,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존재하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 같은.
III.
하얀 진액이 흐르고 먹으면 졸음이 쏟아지던 상추, 고무타이어 냄새가 나고 빨랫줄에 말리던 고추장과 깨가 듬뿍 발린 가죽나무 잎들, 겨울날 수확이 끝난 밭에서 찾아낸 배추뿌리, 신맛이 나던 싱아, 까마중 열매, 가시나무의 쓰고 시던 탱자, 삐삐라고 부르던 삘기, 감꽃, 사루비아 꽃의 단맛, 그 모든 것들이 그립다. 울며 쫓겨 다니게 하던 사나운 거위들, 우리를 뛰어넘어 마당을 휩쓸고 다니던 거대한 흑돼지, 조그만 도랑에서 흔하게 잡을 수 있던 가물치, 장어, 붕어, 미꾸라지들, 감나무 높이 날아오르던 힘이 펄펄 넘치는 토종닭들까지도.

댓글목록

문득님의 댓글

문득 아이피 (119.♡.6.52) 작성일

우와,,,한 편의 어린시절 만화영화를 보는 듯 합니다!
최근의 본 '그린데이'가 생각나네요.
이 모임엔 어찌이리도 따뜻한 글들을, 섬세한 기억과 묘사로 잘 들 표현하시는 분들이 많은지요...

저는 서울촌놈이라 그런 아련한 기억과 추억들이 없어서 늘~~~아쉬움 속에 살았었었죠!
어린시절 가끔 부모님따라 시골에 가면 물갈이한다고 피부병이 생겨서 고생하고, 수영을 할 줄 아나,
나무를 보면 아나, 꽃을 보면 아나,,,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시골 방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도 이상하고, 마당에 닭과 돼지, 소 등을 키우는 것도 신기는 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자연과의 교감이 너무 그리워, 또한 도시 생활이 너무 지겹고 힘들어 용기를 내
귀촌이란 걸 했는데,
환경은 내가 구한 환경이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해결 되지 못한 '숙제'들로 무거운 상태입니다.

'숙제가 곧 답'임을 알면 해결되겠지요?

날이 많이 덥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면서 하시는 '일'도 잘시길 바랍니다!!

너무 따뜻한 글 입니다....

꽃으로님의 댓글의 댓글

꽃으로 아이피 (14.♡.77.225) 작성일

어.. 귀촌을 하셨어요? 첨 알았네요.^^

꽃으로님의 댓글

꽃으로 아이피 (14.♡.77.225) 작성일

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저의 어린시절은 하루종일 친구들과 밖에서 얼음땡, 숨바꼭질, 달리기를 하며
뛰어 놀았었죠..

김미영님의 댓글

김미영 아이피 (175.♡.40.191) 작성일

Vira 님의 글은 한편의 영화 같습니다.어떤 종류든 내면에 잊고있던 한 풍경이 되살아나 막 움직이기 시작합니다.님의 개똥참외.....아 솔직히 누군가의 똥에서 자라난 거라 생각하니 ㅠ,.ㅠ;;;;(맛에 공감못해 지송,,나름 X세대라 ㅋㅋ)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웠던 감꽃이 떨어지던 1980년대 초반의 한적한 시골 마을의 뒷마당, 무덤가에 피던 할미꽃,미꾸라지 잡던 개울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곳 풍광이지만 이제 마음이 때가 묻어서그럴까요.부동산 가치로만 환산하게 됩니다.쎄미도 한국이 그립다고 가끔 한국 산천 사진을 들여다봅니다.아마 한국에서 마음으로 따뜻한 사랑을 받아서 그런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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