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눈이 한번 많이 온날 무조건 카메라를 들고 들로 나갔습니다. 차가운 그 느낌이 참 분명하고 좋았습니다. 물론 계속 있었으면 얼어죽었을 테지만요~~~.
'봄이 그냥오나!, 꽃샘추위를 두어 번은 겪어내야 봄이오지.'
엄마생각
(기형도)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누구나 엄마를 늦게까지 기다려본 적이 있을텐데요, 저에게도 그런 기억이 자주 있습니다. 엄마를 기다리며 1부터 100까지 세어보기도 하고, 곧 오시겠지 오시겠지하며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내에 오시지 않으면 또 자꾸 시간을 뒤로 미루어가며 기다리던 어두컴컴한 기억들......이런 엄마에 대한 기다림을 잘 표현한 시입니다.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읽다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상장을 종이배로 접습니다.(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이 부도나서 아버지는 뇌졸증으로 드러눕고, 엄마와 누나는 가족의 생계때문에 공장으로 일하러 가고 없는, 집에는 자기를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또 상장을 받아왔다고 기뻐칭찬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배를 개울에 띄워 보냅니다. 그 종이배를 띄워 보낼때 그 아이가 띄워 보냈던건 아마 상장으로만든 종이배만은 아닐 것입니다.
엄마라는 병,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어떡해서든 그 빈공간을 채우려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내면이 아닌 밖으로만 향할 때, 그래서 자기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혹은 어떤 이념, 종교를 통해 그 빈공간을 채우려하고 사랑받으려할 때 그것은 파괴적이 됩니다. 자신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까지도 파괴해버리는....
*사진 촬영에 가장 협조적인 두분입니다^^. 다른 분들은 본좀 받으세요~~~
●안녕하십니까? 설은 잘 보내셨습니까, 지금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오면서 바라본 짙은 안개와 봄비 오는 풍경이 마치 동양화, 수채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와서 날씨도 풀리고.....그런데 오면서 어느 분이 '봄이 그냥 오나!, 꽃샘 추위를 두어 번은 겪어 내야 봄이 오지'하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우리 삶도 고난과 시련을 통해 더 성장하게 되고 자유를 향해 좀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여튼 봄비가 좋고, 봄이 오는 소리가 좋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기 여러분과 눈빛을 마주하고 따뜻한 마음을 함께 나누며 노자선생님의 경전을 통해 마음공부를 할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57장.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이루는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군사를 움직이며, 일없음(無事)으로 천하를 얻는다. 내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이로써이다.
천하에 꺼리는 것이 많으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나라는 더욱 혼미해지며, 사람들에게 기교가 많으면 이상한 것이 더욱 많이 생기고, 법령이 밝아지면 도적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백성은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은 저절로 바르게 되며,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하고자 함이 없으니 백성들은 저절로 질박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無事)도 모든 것을 이루는' 이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모든 것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삶이 늘 불안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묻습니다. '삶의 자유, 충만, 행복한 삶이 제 삶에서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지는 날이 올까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이미 다 이루어져 있으니 이루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제 대답에 그분이 참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의아해 하셨는데, 다 이루어져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일까요?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 마음에서 이루고 싶은 것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영혼의 자유, 영원히 변치 않을 평화, 다시 무엇을 보탤 필요가 없는 진정한 만족, 행복,깨달음, 마음의 안식, 사랑. 이런 것들은 이미 다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것들을 맛보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말했습니다.
'내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러 보니 진실로 얻은 바가 없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다 이루어져 있으니까, 처음부터 다 이루어져 있었으니까요.
●또 석가모니가 말합니다.
'모든 것들은 다 깨달아 있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묻습니다. '훌륭한 가문의 아들과 훌륭한 가문의 딸들이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마음을 내었을 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석가모니가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일체의 중생을 내가 다 구제하겠다라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라고. 그런데 실제로 중생을 구제해 보면 단 한명의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 깨달아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군사를 움직이며'
'올바름, 기이함....'.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 데에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이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이 뭐냐? 일없음(無事)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無事할 때 천하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천하'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내가 나를 얻으면, 내가 내 자신위에 우뚝 서게 됩니다.
●'천하에 꺼리는 것이 많으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우리 마음에 꺼리는 것, 곧 피하고 싶거나 싫어하는 것이 많으면 우리 영혼은 더욱 빈약해지게 됩니다. 여러분 마음안에 꺼리는 것, 피하고 싶거나 싫어하는 것엔 무엇이 있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면 당사자가 무척 힘들어지는 '미움', '속이 좁은 마음', '게으름, 이중성, 욕심, 질투, 초라함, 불안, 두려움, 공포, 외로움, 약함 혹은 지나친 강함(완고함), 흔들리는 것, 공황장애' 등 등. 우리 마음 안에서 꺼리는 것이 많으면 우리의 영혼은 더욱 가난해지고 찌그러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것들을 싫어할까요? 이것들은 뭔가 좀 아닌 것 같고, 초라해 보이고,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은. 이게 다 우리 마음의 분별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둘이 아닌데 둘로 나눠서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리려는 그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을 읽어 보면, 주인공이 어느날 박수근의 '나목'그림을 보게됩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벌거벗은, 말라비틀어진 고목이 그려진 그림을 보며 충격을 받습니다.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고목'을 그린 화가의 심정은 얼마나 황량할까하며 말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주인공이 성숙해졌을때 박수근 화백의 전시회를 가게됩니다. 거기에서 박수근의 그림을 다시보게 됩니다.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고목으로만 보였던 그 그림이 실은 겨울이라는 시련을 견디며 잔뜩 웅크린, 봄에의 향기, 생명을 간직한 나목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그림을 보며 느꼈던 황량함은 박수근 화백이 아닌, 바로 자신의 상처였음을 깨닫습니다.
●이 분별심이 우리 마음의 허구이자 신기루입니다. 있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평화롭고 지혜롭게 살고 싶은데 이런 초라한 것들이 내 안에서 올라와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니 이런 것들을 자기 삶에서 빼어내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노자는 그렇게 하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깨닫기전 저는 제가 참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못나고 평범하지 조차 못한 제 자신이 꺼려졌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꺼리는 이런 못나고 초라한 것들을 다 빼버리고 나면 그때에야 진정한 풍요가 제게 올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갔습니다. 목숨까지 내어놓고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그 끝에 도착하고 나니, 못나고 초라하다고 여겨 빼버리고 싶어하던 그게 사라진 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도달하려는 그놈, 꺼려하던 그놈'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경에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의 율법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은 여인을 예수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렇게 예수에게로 끌려갈 때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더러운년 퉤, 추악한년 퉤'하며 온갖 모욕과 수모를 겪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묻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다. 모세의 율법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때 예수가 말합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이 말에 아이에서부터 어른들까지 모른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 돌아가고 여인만 홀로 남게됩니다.
이때 여자가 자기를 끌고 가던 주변 사람들에게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했습니까? 아니요, 그냥 끌려갑니다. 묵묵히 자신의 모욕과 수모를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마음속에 꺼리는 것에 대해 여러분들은 비난하고 돌을 던지고 침을 뱉습니다. 꼭 그와 같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런 못나고 초라한 것들 때문에 내가 나답지 못해, 이것만 없으면 내가 정말 행복해질텐데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 여인을 비난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사라졌다는 것은 여러분 마음 안에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 분별심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힘들게 하는 이런 못나고 초라한 것 때문에 내가 나답지 못하게 된다고 착각합니다. 그 못나고 초라한 것을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자는 그게 아니라 그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無事, 그냥 있는 그대로 있어 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 안에서 지금 일어나는 분노, 불안, 질투, 초라하고 못났다고 여기는 그것 그대로 그냥 두어 보라는 것입니다. 오직 가리고 택하는 마음만 내려지면 모든 것이 통연히 명백해집니다.
●진짜로 이런 초라하고 못나 보이는 것엔 자유가 진정 한 톨도 없는 것일까요?
석가모니가 말합니다.
'진리, 부처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다'
이런 것들이 올라올 때, 그게 나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꺼리지 않으면 알게 됩니다. 그것들을 나라고 인정하고 시인하고 받아들이면 그때 온전한 쉼, 안식, 평화가 저절로 나를 찾아옵니다.
●'백성들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나라는 더욱 혼미해지며,'
마음에 꺼리는 것을 빼버리고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가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이로운 기물'입니다. 결심하고, 추구하는 모든 방법들을 말합니다. 그 방법들이 많으면 '나라는 나라'는 더욱 혼미해지게 됩니다.
*감각
(랭보)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 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속으로.
편안하면서도 잔잔한, 특별한 것이 없음에도 행복을 느끼는 지금의 제 감정과 느낌에 가까운 시입니다.
●'사람들에게 기교가 많으면 이상한 것이 더욱 많이 생기고,'
제가 지리산토굴에 있을 때 잠깐 볼일이 있어 대구에 나왔다가 제가 좋아하는 장예모감독의 영화가 새로 개봉해서 그 영화를 봤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전에 근무했던 선생님께서 저를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와서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본 장예모감독의 영화이야기를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한분이 제게 '김선생, 그 영화봤어?'하고 묻습니다.(이때, 제 머리는 세상에서 연산속도가 제일 빠르다는 USA의 슈퍼컴퓨터보다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습니다. 내가 영화를 봤다고 하면, 아니, 나는 지금 수행자인데, 수행은 하지 않고 영화나 보러 다닌다고 날 비난하지 않을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 대답은 분명해졌습니다.) '아뇨'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한번 시작된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상대의 눈치를 살살 보아가며 이런저런 궁색한 거짓말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기교이고, 이상한 물건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깨닫고 나서 다시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이발을 하러 간다고 세수도 하지 않고 편안한 체육복 차림으로 그대로 이발소로 가서 이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제게 자신이 찾는 아파트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제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묻습니다. '여기 안사세요?'(그때도 제 머리는 슈퍼컴퓨터보다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아니, 여기에 산다고하면, 여기에 사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냐고 비난하겠지?, 그리고 이 비난이 저는 두려웠습니다.)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뇨, 여기 살지 않는데요'하고. 그런데 그 사람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계속 저를 봅니다. 차림이 어디 딴 데서 온 사람의 복장이 아니라, 여기 가까운 데 사는 사람의 복장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나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저는 제 자신이 한 거짓말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비슷한 경험인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깨닫기전 저의 경험은 궁색한 거짓말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제가 그런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직 수행자다운 모습을 지키기에만 급급해했고, 내가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을 숨기기에만 급급해 했을 뿐, 말도 안되는 짓을 하면서도 제자신이 그런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경험은, 제가 내가 그런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금방 탈로 날 거짓말을 하는 내 자신에게 혀를 내 둘렀습니다. 그런 거짓말을 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저는 정말이지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더욱 비워지고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거짓말하는 나를 통해 무엇인가를 하나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이 위대하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분별심 하나만 내려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 하나만 내려놓으면 됩니다. 노력과 결심을 통해 이루려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됩니다. 지금 올라오는 느낌과 감정을 정직하게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베드로와 가롯유다는 둘다 큰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재판을 보러갔다가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세번이나 저주하며 예수와 자기와의 관련을 부정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그러했음을 알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통곡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인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가롯유다는 은돈 30냥에 예수를 팔아버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합니다. 자롯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법령이 밝아지면 도적이 많아진다.'
결심하고 다짐하는 것,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 그렇게 하다보면 없으면서도 있는 척, 했으면서도 아닌척하게 됩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상처와 결핍들은 나를 자유케 해주려는 하늘의 전령사들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이 올라올 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있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밝아집니다.내가 다 받아들였으니, 지키고 감출 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또한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그렇게 사람을 살리고도 살렸다가 없는, 사랑을 주고서도 주었다가 없는, 다하고서도 한바가 없게 됩니다.
●깨달아보면 알게 됩니다. 본래 이대로라는 것을. 한마음 돌이켜 뭔가 이루려하고 변화하려 하기전에, 한번 기다려주고, 나를 초라하게 하는 그것으로부터 배워 나가는,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배우고, 감사하는 복된 삶이 되길 바랍니다.
*겨울방학 내내 혼자 특별할 것도, 특별한 생각도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 저녁 5시쯤 되면 등산을 갔습니다. 이게 저의 유일하다시피한 외부활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지?', '오직 진실을 원한다', 오호, 저도 제법 그럴듯하게 되어 가는 듯 싶습니다.
<질의응답>
○죄를 짓고 싶지 않지만 '죄를 짓는 나'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율법을 준 것은 너희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니라 너희로 하여금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정말 지키려고 마음을 낸 사람은 결코 지켜지지 않음을,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적당히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적당히 지키고 노력하며 산다는 것을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보다 정직하게 인정하고 시인해야하는데, 적당히 '~척'하며 슬쩍 넘어갑니다. 그러고는 남들에게 가차 없는 비판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제가 제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상대방에게도 요구합니다. 또 그러면서 갈등합니다.
●내게 안되는 것을 내가 남에게 요구하고 또 남을 판단까지 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보고 자신의 공부로 삼아야 합니다. 또 갈등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되려하지 말고, 자기자신의 갈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사람, 자기 갈등을 통해 좀 더 자신을 주목해 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직이 무엇입니까?
●정직은 거짓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거짓으로 인정하고 시인하는 게 정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직을 '거짓이 없는 것'을 생각해 거짓말을 하고서도 아닌척하며 자신을 속이고 남들까지 속입니다.
○한동안 저는 선과 악이 따로 없다고 여겼습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이니하며 행동을 참 무례하게 많이도 했습니다. 이런 저의 행동을 그동안 참아준 친구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저는 아직도 선과 악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닌다. 저는 교사입니다. 학생들이 잘못했을 때 꼭 나무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학생들 지도나 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게 옳고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별심을 지우라하는데 어떻게 해서 분별심을 지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행착오와 잘못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행착오나 잘못을 하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 시행착오와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으면 됩니다. 그 배움을 통해 성장하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중학생때부터 수행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수행처 중에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수행처를 돌아다니고, 수행을 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되는구나!하며 정말 재미있게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순간 자신을 돌아보니 자기삶이 엉망진창이 되어있더랍니다. 이분은 하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보았고,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신은 '망나니짓을 너그러이 봐준 친구들이 고맙다'고 했는데, 그렇게 한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자기나름의 큰 시행착오를 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를 배웠고 그로인해 이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남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분명하고 확실한 선택을 해야한다는 그것을 내려 놓으십시오.
'어떤 모임에 있을 때 누군가 나를 해칠 것 같은 공포가 있습니다'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공포가 있습니다. 강변을 산책하다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리면 예민해지고 불안해지고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뒤에 발자국소리를 내는 그 사람이 나를 칼로 찌르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포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공포를 느끼면서 이런 공포가 내게 일어나선 안되는데 하는 그 요구가 문제입니다. 그런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려하지 마십시오. 얼른 공포가 없는 사람이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한 사람이 되려는 요구를 내려놓고, 지금 올라오는 그 공포를 통해 배우십시오. 내 평화를 찢고서 올라오는 그 공포를 내치지 않으면 그것이 전하는 정보와 자신의 상처를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애매모호하고 흔들리는데, 그것을 내침으로써 그러지 않는 존재가 되려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그 '모른다'는 사실을 내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전하는 수많은 정보와 지혜를 배우십시오.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이런 모호함 속에서 손에 잡히는 확실하고 귀중한 것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몇년전에 당신이 이 집에서 저를 가르칠때 내가 어리석어서 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래도 한 가지는 기억해요.
'무대에서 속일 생각 마라'
'관객들은 항상 네 마음속을 들여다 본다'
-조셉 고든 레빗주연의 '하늘을 걷는 남자'중에서......-
하하하, 맞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속일 생각은 정말 말아야겠습니다. 거짓말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속이고 상대방을 속이고, 결국엔 속였다는 사실마저도 속여버리는(잊어버리는)... 고립만 남게됩니다.
○초라함에 대해.
●49세, 제가 경명여고에 있을 때, 내면 아이가 올라왔습니다. 깨달은 자에게 내면이라니!, 어째든 저는 경명여고에서 3년동안 내면아이를 치루었습니다. 어린 학생의 눈빛하나에 무너졌고, 교장선생님의 '식사했어요?'라고 묻는 말에 내가 도대체 어찌해야할지 몰라 혼비백산했습닌다. 말끝을 흐리지 않은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그런시간을 보내며 저는 제가 도덕경강의를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못난 내가 도덕경 강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힘든 시간들 속에서도 여전히 도덕경 강의를 계속해 나가며 강의속에서 힘들다하며 내가 겪고 있는 내면의 이야기들을 다 했습니다. 그러면 반응이 참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을 하며 나가고, 어떤 사람은 저놈의 비참하단 소리좀 안했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힘들어서 왔는데 저사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나도다 더하구나,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구나하며 위로받기도 합니다. 그때 그렇게 내면아이를 치르면서 육체적으로도 힘들어 갑상선 항진증까지 와서 살이 쭈욱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내게 오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죽어라 힘들어하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제 수업시간에 늘 자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교사라면 당연히 자는 아이를 깨워야하지만 저는 무서웠습니다. 깨울 때 그 학생이 화를 내며 '아, 씨발'하면 어떡하나, 혹은 깨울 때 그 학생이 나를 거부해서 나를 떠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깨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렇게 제 수업시간마다 자는 그 학생으로 인해 너무나 비참했기에 어느 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용기를 내서 그 학생을 깨우고 말리라 다짐에 다짐을 하고선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수업시간에도 여전히 그 학생은 자고 있었고, 저는 두려움에 떨며 손을 들어 그 학생을 가리키며 '저~저~(벌벌떨며)'하다가 불현듯 제 자신의 내면아이를 보아버렸습니다. 어릴적에는 아버지에게 거부당하고, 성장하면서는 제 스스로 짓밟고 거부했던, 꽁꽁 얼어붙은 두껍디 두꺼운 얼음장밑에, 쭈구리고 앉아 양무릎을 감싸고 웅크리며 벌벌떨고 있는 그 아이가 보였습니다. 그 순간, 아, 이 아이라면 삶의 매순간마다 긴장하고 벌벌 떨 수 밖에 없겠구나 하며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작은 것들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납득이 되었습니다. 퇴근하려 차에 키를 꽂는데 '내가 지옥속에 와있구나!'하는 말이 툭 흘러나왔습니다. 정말 저는 지옥속에 와 있었습니다만, 그 어떤 것 하나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섬세하게 모든 것들을 다 치루었습니다.
저는 깨닫기전 세상 모든게 원망이었고 저주스러웠습니다. 34살에 깨닫고 나서는 모든게 감사했는데, 49살 내면아이를 치루고나선 그 감사의 깊이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안절부절 못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자면 제 자신의 존재가 통째로 거부당한 것 같고,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교실문을 열고 나오면 꺼억꺼억 눈물이 나고, 또 그 눈물을 학생들에게 보일 순 없으니 운동장쪽으로 난 창문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그 세월을 3년간 치루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초라한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초라함'하니까 일혜님이 생각납니다. '누가 내게 왕의 대접을 해준다 하더라도 지금 내게 올라오는 이 초라함과 바꾸지 않겠다.' 제가 펜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너무 안이쁘게 그렸다고 나무라진 말아주세요~~~~(참고로 실물은 그림보다 훨씬 예쁘답니다ㅠ)
○차문을 열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그 속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뒤에서 욕하는 자신을 봅니다.
●내가 내 자신에 닿아있으면 궁시렁거리고 뒷담화하는 게 사라집니다. 어쩌면 당신은 누군가를 욕하는 것을 진정으로 없애고 싶은 게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을 뒤에서 손가락질하다보면 그렇게 하는 내 자신이 고통스럽고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여기에 좀 더 집중하고, 남들을 손가락질하는 자신을 정직하게 만나가다 보면 그것은 끝이 납니다. 그렇게 그것을 섬세하게 보게 되면 다른 문제들도(공포) 저절로 보게 되고 점차 풀려나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축복인 이유 중 하나가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9번을 못 보더라도 한번만 바로 보게 되면 그것은 무척 큰 것입니다. 또 그렇게 자신이 그러하고 있구나를 알게 되면, 그냥 단지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끝이 나고 질적인 비약이 옵니다. 목마르다 목마르다하면서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리산은 참 큰 산입니다. 골이 깊고도 많습니다. 그 많은 골골마다 도사들도 참 많습니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좀 하다보면 얻게 되는 게 있습니다. 그걸 하나 얻고 나면, 그것을 쥐고 그것으로 남들을 가르치려 듭니다. 영적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유롭고 싶으냐, 정말로 영혼의 자유를 원하는 그 마음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끝장낼 수 있습니다.
○내면의 갈등
●갈등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태풍과 쓰나미가 오면 그 피해가 막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관점으로보면 바다가 한번 격렬하게 뒤집히게 되는거고 그러면 그때 정말 많은 양의 산소가 바다에 공급됩니다. 그래서 바다를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와같이 내게 갈등과 균열이 올 때 그것을 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게 되고 삶은 더욱 풍요롭게 됩니다. 그러니 얼른 갈등을 없애서 평화로운 사람이 되려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병
●세상에서 고치기 어려운 병이 '내가 옳다'라는 병입니다. 계란 껍질은 병아리로 부화할 때까지만 필요하지 그것을 넘어서면 그것은 오히려 생명을 상하게 합니다. '내가 옳다'하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 속에는 여러 결핍들이 있고, 또 옳은 그것이 한동안은 자신을 지켜주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황과 여건이 바뀐 속에서도 계속 지속된다면 오히려 자신을 죽입니다.
○오늘의 포인트는?
●'너 자신이 되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자신을 통째로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내면에서 올라오는 것중에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꺼려하는 그것을 그치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 자신을 통째로,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고 그렇게 만나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끝이나고 평화롭게 됩니다. 그렇게 평화가 오면, 그 평화는 흘러 넘치게 되고, 그 흘러 넘치는 평화가 남을 돕게 됩니다.
이제 곧 새학기가 시작됩니다.
제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들이 때때로 올라옵니다.
어려움에 처한 제 모습이 간혹 꿈에 보이기도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동안의 잘못들을 바로잡을 기회가 제게 오는 것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산수유꽃 노랗게 피어나는 3월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