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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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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ra (110.♡.248.59) 댓글 5건 조회 7,066회 작성일 12-12-1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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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네 번째의 개인전에 '굴원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몇 점의 작품을 제작한 적이 있었다. 존재의 자리를 상징하는 의자와 '어부'라는 시에 나오는 나룻배 이미지를 결합한 것과, 외롭게 우뚝 서서 풍상을 견디는 송전탑을 그린 것이 그것이었다. '북명의 물고기', '귀를 씻다', '새'시리즈와 함께 나름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였다. 개인적으로 전시장에 들러 작품에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은 꽤 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판매로는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질병처럼 되가져온 그림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작업실 한 쪽 구석에 쌓아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분노를 꾹꾹 누르고 통음에 젖는 것이었다. 아마 그즈음 고결한 성품과 능력을 가졌으나 세상과 조정으로부터 배척당하여 추방당한 굴원과 나를 꽤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재능 있으며, 진정성을 가지고 작업하는 화가이다. 그런데 세상과 미술계는 이러한 나를 몰라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럴듯한 배경을 가졌거나, 유학을 갔다 왔거나, 어떤 통로로든 화랑, 미술잡지, 평론가와 친분이 있거나 무리지어 다니거나 하는 작가들에게만 관심을 가진다. 에잇 더러운.니기미..." 운운하며 참 열심히(?) 좌절하고 맹렬하게(?) 술 마시는 것이었다. 자기가 믿는 바대로 소신껏 살아가는 신념형 인간인 그에게서 우리가 잊고 외면하고 지낸 어떤 빛나는 정신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도 그러한 모습이 있음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며 그리고 과장하며. 14여년의 시간이 흘러 옛 팸플릿을 다시 넘기며 '어부'라는 시를 떠올린다. 그때는 굴원에게 한마디 충고를 해주고 사라지는 어부가 무시무시한(?) 내공의 소유자이리라 짐작했지만 그 깊이나 넓이를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어부'를 경탄어린 시선으로 다시 보며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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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漁父) - 초사]
 

굴원이 추방되어
강가에서 노닐 때
연못가를 거닐며 읊조리는 모습
얼굴은 초췌하고
그 모습은 바짝 말랐네.
 

어부가 그 모습을 보고 묻기를
그대는 초나라의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무슨 일로 이런 곳에 오셨는지요 하니
굴원이 말하길,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만이 깨끗하고
모두들 이재에 취해 있는데
나 홀로 맑은 정신이어서
이렇게 추방된 것이오 하니
 

어부가 말하길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함께 잘도 살아가던데
세상사람 모두가 혼탁하면
어째서 그 흙탕물 속에 끼어서
그 물결 높이지 않으시고
모두들 이재에 취해 있으면
왜 술 찌꺼기를 짓씹으며
그 밑바닥 술을 안 마시고서는
구태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함을 드러내시어
추방당하시었소.
 

굴원이 말하길, 내가 듣자하니
방금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서 쓰고
갓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는데
어찌 이 내 깨끗한 몸에다가
먼지 낀 더러운 옷을 걸치겠는가.
 

차라리 저 흐르는 상수에 몸을 던져
물고기 창자 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이렇게 백옥같이 흰 몸에
세속의 먼지를 묻힌단 말인가.
 

어부가 슬며시 웃음을 머금고는
뱃전을 두드려 가면서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련만
창랑의 물이 흐리니
내 발이나 씻을 수 있으리
그렇게 노래하고 가버려서는 다시는 말을 나눌 수 없었네.
 

 

아마 그는 지금 여기 이것에 완전히 깨어난 현자이리라. 반면 '고결함'이나 정치적인 '좌절감'과 동일시된 굴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그 것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간에-에 결국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한 때 그러한 그를 지켜야 할 어떤 것을 위해 초개같이 몸을 던진 그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흘러 어부의 관점으로 변해버린 나를 발견한다. 매순간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사는, 살려고 하는.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댓글목록

만허님의 댓글

만허 아이피 (14.♡.152.11) 작성일

지금 여기서

이글을 읽을수 있어

지금 난 참으로 행복 하구나_()_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248.101) 작성일

덩달아 저도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하얀민들레님의 댓글

하얀민들레 아이피 (125.♡.7.3) 작성일

참 멋있는 글이네요!
기개높은 굴원에서 어부로...
그것은 삶과 시간과 연륜이 주는
재미있고도 자연스러운 관점의 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248.101) 작성일

나날이 새롭기를 기원합니다. 한 해 잘 마무리하시길.

느티낭님의 댓글

느티낭 아이피 (117.♡.11.176) 작성일

vira님의 진솔한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림을 그렸어요. 옛생각을 하며 에잇...니기미 앞 문장에 팍팍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vira님의 변화... 그 어떤 멋진 그림을 떠나 감동입니다.
그 변화 세상 여기저기에 조용히 가 닿을것입니다.앗! 여기에도 도착했네요.고맙습니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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