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죽은 날
페이지 정보
작성자 둥글이 (1.♡.196.131) 댓글 1건 조회 15,982회 작성일 13-05-20 11:44본문
여수 시청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여성 두 명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띈다. 한 여
성은 언니라고 칭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어떤 거창한 얘기를 꺼낼 기색이고, 언니라는 이는
듣지 않으려고 딴정을 피운다. 몇 번 손사래를 쳤지만, 동생뻘 되는 여성의 집요함에 마지
못해 귀를 연다. 아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듯싶었다.
“옛날에 두 명 사람이 살았데. 한사람은 부자고 다른 사람은 그 부자에게 구걸해먹고 사는
거지였는데. 그런데 부자는 부족한 것이 없어서 오직 자신만 믿고 살았는데, 거지는 하느님
을 믿었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신분의 차이가 났지만, 이들이 죽고 나서 부자는 지옥에 가
고 가난한 이는 천국에 갔어. .... 그런데 부자는 불지옥에서 그야말로 물 한 방울... 물 단한
방울도(강조) 마실 수 없는 그런 목마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요약해보자면 불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예수 믿으라는 얘기이다. 나중에 동생뻘 되는 여
성이 사라지고 나서 언니가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다음날(부처님 오신
날)에 지인과 함께 절에 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 불교신자인 듯 했다. 동생뻘 되는 여성은
아마 언니가 ‘마귀’에 빠지지 않고 ‘천국’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자 했던 듯 했다.
어떻게 이렇게 ‘동생뻘’되는 여성이 보인 것과 같은 ‘독단의 형이상학’이 가능한가? 그것은
‘일천한 사고력’에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죽음에 대한 두려움)’, ‘감상주의’, ‘집단무의식’
이 결합된 결과이다. 물론 내세 자체를 믿는 것을 일천한 사고력의 결과라고는 할 수는 없
지만, 마치 과학적으로 밝혀진 이야기인 마냥 천국-지옥 이야기를 늘어놓고 그 끝에 상대방
의 감동 먹은 표정을 기대하는 그 모습은 그들의 독단의 정도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들이 말하는 ‘천국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검증할 능력이 없기에 그에 대해 내가 논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천국을 가기 위해서 올인 하는 덕에 현실은 지옥이
되어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국 티켓’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직 예수믿음
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때문에 사회적 형평과 정의가 세워져야할 최소한의 활동
도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몫만큼의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이들이 바글거
리는 세상에 건강할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러한 사회적 책임 문제의 필요성을 얘기할라치면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라질 먼지와 같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영생의 문제다.”는 개껌씹는 소리나 하곤 한다.
특히나 그따위 소리를 하는 이들 일수록 하루 세끼 자신의 아가리에 밥을 쑤셔 넣는 일은
잊지 않고 통장 잔고와 이자 계산하는 것은 성경 읽는 만큼 열심히 하곤 한다. 한술 더 떠
서 수구기독교론자들은 자본과 권력을 대변하며, 빈자-약자에 대한 구조적 탄압과 환경파괴
사업(각종사회복지정책, 이라크전쟁, 4대강사업)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나서기까지 한다.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악덕고리대금업자보다 더 악덕스럽다. 그 하느님은 작금의
‘사회적 약자와 환경이 착취되는 구조’의 개선을 위한 문제를 제기하라고 명하지도 않고, 기
껏 눈에 보이는 가난한 거지에게 빵한쪼가리 쥐어주는 수준으로의 사회적 선을 베풀면 만사
땡이라고 설법하기 때문이다. 반면 매주 일수를 찍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에 대한 충성
을 맹세하지 않으면 등에 칼을 꽂을 것임을 그의 말씀에 기록까지 하셨다. 그렇기에 그러한
‘독단의 형이상학’에 빠진 이들은 지옥불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보험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흉폭 잔악, 새디스트적인 특성은 ‘하느님의 본질’이 아니라, 현대 한국사회에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상당수가 만들어낸 하느님의 모습일 것이다.(기독교 자체가 독단의
형이상학이라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한국인들의 상당수가 기독교를 그리 만들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런 하느님을 만들었지만 불교도들은 조금 더 신뢰할만한 부처상을 가
지고 있을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나 불교나 똑같은 독단과 아집의 형의상학
으로 자신들이 믿는 신을 구축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 ‘독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독교보다는 불교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그것이 다만
기독교처럼 (망치 가져다 불상을 파괴하는 등의)물리적 공격성을 띄지 않을 뿐이지 (주류)불
교의 독단성이 신도들에게 주는 해악은 기독교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나마 기독교는 ‘성경’이 있어 그 믿음을 믿는 사람들의 이해가 오만가지로 분열되어 있지
는 않다. 가령, ‘하느님의 세상’이 ‘천국’인지 ‘현실’인지에 대한 해석이 양분되어 있기는 하
지만, 그러한 논의 자체가 무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회의주의에 기반을 둔 불교는 ‘이해의
기준’이 없다. 경전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경전을 해석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고 이러한
해석의 다양성은 기독교처럼 탄압의 대상이지도 않다. 이렇기 때문에 종파는 물론이고 각
종파내의 스님들 간의 생각도 천차만별여서 이들 사이에 어떤 이해에 대한 합의에 다다르기
가 어렵다. 우스갯소리로 스님들이 산 속에 사는 이유는 길에서 만나면 서로 자신이 옳다고
싸워야 하기 때문에 마주치지 않으려는 이유라고도 한다.
이들의 상당수는 사이비 교조수준의 독단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교묘한 포장을 덮고
있는 이유로 독단이 아닌 것으로 착각되어진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그게 무슨 소용이 있
는가?’ ‘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을.’ ‘삶은 덧없는 것이네...’라는 류의 ‘인생 통달한’류의
거창한 얘기들을 와일드하고, 폼나게, 진리를 체득한 이의 모습으로 설법하곤 한다. 그런 이
유로 이들의 주장에는 독단적 주장(예수천국 불신지옥 류의 독단)이 들어 있지 않은 듯하
고, 오히려 그러한 주장들까지를 부정하는 듯하기에 어떤 최상위의 지혜인 듯이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회의’와 ‘허무’에 대한 광신일 뿐이다.
그들은 불교에서 말해지는 ‘무상’의 의미를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교차하기에
잘 작용하기 위한 방편의 현상’으로 이해하지 않고, ‘아무의미 없음’으로 뒤바뀌어놓아 현실
적 실천을 못하게 길을 막아 놓았다. 또한 ‘나의 없음’을 죽은 자, 살아있는 자, 태어날 자들
간의 끊임없는 소통의 과정에서의 능동적 작용의 의미로 파악하지 않고 그야말로 ‘허무’의
그것으로 수렴시켜서 ‘아무고통 없도록’ 해탈, 열반만을 꿈꾸게 만들어 놓기도 했다. 기실
그들의 그럴싸한 이야기의 포장을 걷고 나면 그 속에는 회의와 허무에 대한 광신이 도사리
고 있다.
이는 불교전반을 비판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사회적 실천을 등한시 하면서 인생통달한
사람마냥 그럴싸한 얘기만 떠벌리고 있는 ‘독단적 형의상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독단
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앞서 상당수의 독단적 기독교인들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해보면 된다.
“당신은 하루에 세 차례 아가리에 밥을 쑤셔 넣는가?... 그렇다면 왜 다른 이들의 밥의 문제
에 관심 갖는 것(사회적 실천)에 대해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이에 대해서 그들은 우물쭈물 하면서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내가 정확히 철저히
깨달은 후 선정을 베푸는 것이 중요하기에 우선 내가 정확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따위
의 얘기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 당신도 깨닫기 전까지는 밥 먹지 말라”고 되갚아주면
된다.
이렇게 ‘나’로 부터 사회-자연과의 작용을 거세시킨 ‘독단적인 개인주의’에서는 아무리 통찰
해 봐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집밖에 없다.
불교교리가 이러한 수준에 이른 이유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는 과정과 정
확히 그 궤를 같이 한다. 그 당시 떠오르는 종교는 지배층이 서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전략
의 일환으로 교리를 탈색시키는 와중에 ‘주체성, 사회적실천성’을 거세했던 것이다. 권력자
들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권력에 아부하기 좋아하는 어용학자들이 교리를 재편하
고, 권력에 충성하는 종교지도자를 수장으로 세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탈색된 교리는 서
민들의 정신에 자연스럽게 삼투된다.
이것이 기독교와 불교(노장사상도 마찬가지)가 작금에 힘없는 서민, 파괴되는 환경을 대변
하지 못하는 침묵의 교리(독단적 개인주의)에 빠져서 궁극적으로 ‘권력자들이 원하는 (침묵
하는)민중상’을 만들어 주고 있는 현실을 말해준다. 그 차이라고 할 것 같으면 기독교에서
‘천국’을 향하던 의지는 불교에서는 ‘무심’을 향해 있을 뿐이다.
석가가 태어난 날이라고 여기저기 호들갑 떠는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하지만 진정 석가주의
자이고 싶다면 그의 유언대로 그의 말을 잊고, 그를 죽여라! 그가 태어난 날이 아닌, 그의
죽음을 기념하라! 그는 회의, 무기력, 허무, 무실천의 전도자가 아니라, 그 모든 그럴싸한 형
의상학의 파괴자였다!
...(중략)...
댓글목록
제석S님의 댓글
제석S 아이피 (222.♡.105.160) 작성일
6년째 노숙하시는 백수폐인보다 못한 사람들은 없는듯 한데요~~~
기분 나빴다면 죄송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