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깨우고 들을 깨우는 농부의 입맞춤이 시작되었습니다. 숲속의 잠자는 공주를 왕자가 키스를 해서 깨우듯ㅋㅋㅋ. 이와같이 우리도 자신에게 입맞춤을하고 그렇게 내면의 잠자는 영혼을, 깨어나길 간절히 원하는 영혼을 일깨워야겠습니다^^~~.
도덕경 60장. 작은 생선 조리듯 하라.
큰 나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조리듯 하라.
도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귀신이 신령을 부리지 못한다. 귀신이 신령을 부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신령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한다.
그 신령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인 또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이 둘이 서로 상하게 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덕이 더욱 쌓이게 되는 것이다.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차창밖을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참 마음이 행복해졌습니다. 오늘 석가탄신일이고,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곧잘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정말로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습니까?, 진실로 예수가 부활했습니까?.'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던지 말았던지, 예수가 부활했던지 말았던지, 중요한 것은 여러분 각자 자신,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인 여러분이, 단 한번밖에 없는 여러분의 삶속에서 영혼이 깨어나는 것이고(부활), 그래서 삶이 조화롭게 되고 행복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서 보여주는 표현들 '아직 첫 웃음을 웃지 않은 갓난 아이와 같고, 어린 아이는 하루종일 울어도 목소리가 쉬지 않고'라는 표현 등등을 보면 이 사람이 참 가정적이고 섬세하고, 참 신비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큰 나라'는 '나'라고 하는, 자기자신이라는 나라입니다. 내가 내 자신위에 우뚝서면 어디를 가더라도 분명하고 참된 평화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작은 생선 조리듯 하라', 작은 생선을 가장 잘 조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작자작하게?, 작은 생선이 부서지지 않게?, 양념을 몇 번씩 나누어서 붓고?, 불조절을 잘하고 신경을 많이 써서? 여기에서 포인트는 끓기 시작하면 불을 약하게 줄이고,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작은 생선이 부서지지 않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또 그 맛이 제대로 우러 나옵니다.
●삶의 불안과 고통을 영원히 끝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 마음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온갖 감정, 느낌, 생각들이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기쁘고, 슬프고, 두렵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마음의 작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불안, 외로움, 느닷없이 찾아오는 우울, 긴장되고, 허허롭고, 온갖 망상, 잡생각들, 거부에 대한 두려움, 질투, 환희심, 어두워지는 것, 정말 이 마음은 전부 헤아일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하늘을 비단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다 쓸 수 없다'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의 마음이 실제 이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기치 않게 이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걸 경험하는 것은 항상 '지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흘러가기에 늘 변화무쌍합니다.
●노자는 정말 너 자신을 잘 다스리고 싶거든, 가만히 내버려두라 말합니다. 그냥 경험하고, 어떻게 하려 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것이 영원한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요즘 도덕경에서 가장 홧한 아이템~~시지프님, 텃밭에서 부추를 손질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가장 맛있게 양념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울/불안/긴장이 올라오면 이것들을 맛이 없다고 생각하고, 맛있는 존재가 되려고 작은 생선을 마구 뒤집어 버립니다. 작은 생선조리듯 가만 내버려두지 못하고, 맛이 없다고 생각되는 건 빼버리고, 맛있다고 생각되는 건 더 넣어서 어떡해서든 맛있게 하려드는데, 노자는 제발 그러지 말고 가만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입장에서는 그 모두가 절대적으로 맛있습니다. 번뇌가 곧 깨달음입니다. 중생 그대로가 부처입니다. 그러니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순간순간입니다. 어느순간 갑자기 긴장하고 진땀을 흘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러는 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면 이해라도 하는데, 그것은 정말 느닷없이 옵니다. 그래서 할수만 있다면 그것을 경험하고 싶지 않고, 자기 삶에서 빼어버리고 싶어합니다.
●선의 입장에서 말해보겠습니다. 우리가 긴장하고 불안하면, 긴장과 불안에 집중하는데, 이게 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이 마음이 만들어낸 무늬에 일희일비하고 또 그것을 취하고 버리려 합니다. '회광반조', 그것을 돌이켜 그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다면, 물결이 일어나는데 그 물결은 모두 물이 만들어내는 형상일 뿐입니다. 눈하나가 바뀌면 됩니다.
●고통이 올 때 고통속에 있어 보십시오. 그런데 마음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힘들지 않으려 하기에 고통이 지속됩니다. 한번 그 마음을 돌이켜 보십시오. 지금 이순간 내게 올라오는 게 진리입니다. 평화가 오면 그것을 붙잡으려들고, 고통이 오면 몸부림을 치면서 도망칩니다. 그러나 그때 한번 돌이켜 고통을 받아들이면 영원히 고통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삶이 힘든 것은 고통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피하고 달아나고 저항하기에 지속적으로 고통스럽게 됩니다. 고통이 곧 자유고 평화인데, 그것을 밀어내고 저항하기에 스스로 고통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인줄 알면 마루든 골이든 상관없게 됩니다. 저는 제가 너무 초라하고 작았기에 근원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흔들림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보잘 것없는 작은 파도가 아니라 바다가 되고 싶었는데, 어느날 문득 보니 제가 이미 바다였습니다.
*스승의 날이라고 야마꼬님이 특별히 신경쓴 밥상~~~~참나물, 무우어린 잎싹(고수를 넣어 버무렸는데, 전라도 촌놈입맛에는 별로~~), 알갱이 가득하고 구수한 청국장, 친환경 계란으로 만든 찜(총 6개를 만들었는데, 소금간을 하다가 그릇이 섞이는 바람에 어떤 것은 소금간이 안되고, 어떤 것은 두번 되어 짜게된 아픈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맛깔나는 부추전, 하동에서 가져온 도토리 묵, 어제 채집하여 공을 들여 껍질을 벗겨내었다는 머위대 나물(전라도 사투리로 머그때), 발사믹식초와 들었지만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여러 달콤한 것들이 들어간 샐러드 등등, 거기다 오늘은 밥도 그릇에 고봉으로 가득~ 담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귓가를 때리는 믿을 수 없는(?)말 한마디, '야마꼬님, 밥, 또 있어요?'(기태선생님의 밥찾는 소리)ㅋㅋㅋ. 이 밥상이 만들어지기까지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손길들까지 합하여,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황벽선사가 말합니다.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하고, 소리와 색깔(우리에게 감각되는 모든 것, 우리 내면의 모든 것), 그 모두가 부처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부처를 찾을 것인가?, 이미 부처인데, 어디에서 부처를 찾을 것입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부처입니다. 그러니 다만 내버려 두십시오.
●우리가 이미 부처인데 그것이 주는 깊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상, 생각 때문입니다. 황벽이 다시 말합니다. 처음부터 이순간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찾고 구하기에 지금과 다르다. 만약에 네가 찾지만 않는다면(따로 구하지만 않으면) 어디에 다름이 있겠는가? 석가모니가 말했습니다. 내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러보니 진실로 얻은 바가 없다. 우리 마음이 죽끓듯할 때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아플 때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고통스러울 줄 알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줄 알게 되면, 그 즉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깨달아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얼마나 오묘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서울대를 나왔고 법관을 했고, 참 스펙이 훌륭하지만 자존감이 낮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삶이 괴로웠고, 어느날 서점에서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는 제목을 보고 커다란 분노가 일어납니다. 왜?, 자기는 이렇게 괴로운데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고 헛소리를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순전히 따지기위해서 저를 찾아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친구가 한소식하게 되고, 그때부터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듭니다. 그때 제가 참 화가 났습니다. 깨달음이란 취하고 버릴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자기에게 오는 무거운 짐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그저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비로소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첫 출발선에 서게 되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벌써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듭니다. 그때 제가 참 많이도 그 친구를 나무랐습니다. 그뒤로 그 친구가 내게 섭섭했는지 저를 떠났고, 몇 년이 지난후 다시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이 친구가 말하길, 그 뒤로 참 고생을 많이하고 받아들이려 아무리 시도를 해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지쳐서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포기했었다. 그런데 그 포기의 순간에 그것 자체가 됩니다. 그러고 나서 제게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가 자신을 무척이나 화나게 하고 그래서 따지고 싶었었는데,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가 정말 맞는 말이더라고.
●자신을 통째로 한번 받아들여 보십시오. 혼비백산할 때 한번 혼비백산 해 보십시오. 다 건너뛰고 자기 구미에만 맞는 것을 경험하려 들면, 그 삶이 온전하겠습니까?, 자기삶의 절반만을 경험하려 들면 그 삶이 온전하겠습니까?
●애시당초 이대로입니다. 다만 따로 구하기 때문에 자기스스로 고통과 목마름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따로 찾지만 않으면 어디에 다름이 있겠습니까?
●마조선사가 말합니다. 만약에 곧장 도를 깨닫고자 하느냐, 평상심이 도다. 저녁 늦게 커피를 마셔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거리는 것 이게 바로 도입니다. 평상시에 쓰는 이 마음이 도입니다.
●무엇이 평상심입니까? 조작하지 않는 것, 옳거나 그르거나 판단하지 않고, 취하고 버리지 않고, 또 초라한 것도 없고 대단한 것도 없는 이것이 평상심입니다. 오직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고, 그것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내가 곧 믿음입니다. 제 딸이 어느날 제게 '아빠, 자유가 뭐야?'하고 묻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자유야'. 사랑은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사랑입니다. 지금 이순간 이것말고 다른 것만 구하지 않으면 알게 됩니다. 내가 왜 이 이 육체를 가지고 여기에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냥 나자신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걸 알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인생에서 해야할 일은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자신을 만나는 일, 어느 분이 말했습니다. 어느날 잠을 자다 주룩주룩 내리는 소나기 소리에 잠을 깼는데, 그 순간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다고 합니다. 그 초라함. 이게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누가 자신에게 왕의 대접을 해주더라도 이 초라함과는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위, 하늘아래 여러분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것을 아는 길은, 무조작, 무취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으로 돌아오면, 힘들 때 힘들어 보면, 그냥 그대로 존재해 보면 알게 됩니다. 자유는 어떤 관념이 아니라, 지금 자기 삶에서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주 어릴때 잠시 교회에 다녔었는데, 그때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백명의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자리였었고, 마침 점심때였는데, 음식은 고작 몇 바구니 되지 않았다는,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으로 그 얼마되지 않는 음식으로 수백명의 사람을 먹이고도, 여러바구니의 음식이 남았다는.... 햐, 이 놀라운 기적이 산청에서는 매달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번 빈손으로 가지만, 따뜻한 커피와 과일, 다양한 종류의 간식과 풍요로운 점심, 그리고 운이 좋으면 따뜻한 저녁까지 챙겨 먹을 수 있으니까요......오늘은 스승의 날이라고 여러분들이 맛있는 떡과 케잌을 가득가득 해 오셨습니다. 일선님, 미경님, 미영님, 정광자쌤부부, 전경원씨부부와 참석하신 많은 분들의 마음이 합하여 스승의날 행사를 부끄럽지 않게 치루었습니다. '스승의 은혜'노래를 부를 때는 가슴이 찡~했었습니다. 제가 이 놀라운 공간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초라할 때, 거기에 초라함만 있을까요? 거기엔 아주 대단한게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뚜벅뚜벅 걸어가게 되고, 자기삶이 주는 모든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생사에도 매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제 내 자신이 되었습니다. 초라함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 더이상 지킬 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될때 삶이 아주 편하게 되고, 그 삶의 에너지가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마귀(귀신)에게 유혹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마귀는 우리 내면의 생각입니다. 분별심이고 망상입니다. 제가 눈을 떴을 때 참 평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후로도 제 안에서는 온갖 것들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들도 나를 다치게 하지 못하고, 저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틋한 마음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그냥, 여러분입니다. 제가 알고 보니까, 애시당초 지금과 같았습니다. 이 삶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만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한없이 초라한 일상속에서 위대한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이게 나야'하는게 없게 됩니다.
*옷선물(상의)받고 좋아하시는 모습.... 옷이 참 잘 어울립니다. 선생님의 품격을 한단계 끌어 올렸습니다~~~~
<질의 응답>
○남편과 싸우고 한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참아야지, 내가 먼저 손 내밀어야지하며, 싸우더라도 3일 이내에 제가 먼저 사과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정말 못참겠더라고요. 그리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지도 않고 한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편이 먼저 화해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화해하기가 싫어 지금 그 상태로 진행중입니다. 제 시아버지가 공무원생활을 했었고, 그래서인지 무척이나 권위적입니다. 시아버님이 자식들과 어머니께 하는 모습이 너무 권위적이어서 제가 숨을 막히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남편이 점점 시아버지를 닮아갑니다. 제 아들도, 아빠에게 '딱 할아버지네'하더라고요. 할아버지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할머니나 가족들에게 하는 권위적인 모습이 정말 싫다고 말합니다. 지금 제 남편과 기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동안 쌓여왔던 묵은 감정을 이번에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예전에 남편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묵은 감정, 제가 정말 어이없이 참아왔던 일들이 너무 억울해서 가끔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신랑도 너무 미워지고, 그래서 이 한달동안 신랑얼굴을 정면으로 본적이 없고, 필요한 말만하고 말아버립니다.
●제겐 참 감사한 것밖엔 없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김선생님은 참 보람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보람된게 아니라,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저를 찾아온 사람이 치유되어 자기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때 참 감사합니다. 저는 화장실의 변기입니다. 누군가 급한 설사가 났고, 그래서 화장실의 변기에서 푸다닥합니다. 그러고 나면 얼마나 시원합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볼일을 그렇게 보고나서 변기에 대고 고맙다고 합니까? 자꾸 변기에게 찾아와서 고맙다고 합니까? 볼일을 본 사람은 그저 떠나갑니다. 그러고 그렇게 하는게 맞습니다. 그 변기와 마찬가지로 저에겐 제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게 없습니다. 허공과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주고 또 주고하다가 제 몸이 다 떨어져 나가더라도 좋다는 그런 마음일 수 있다는 게 저는 정말 좋습니다. 흔적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는 게 어렵다는 것은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그것에 대한 저항이 있습니다.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냥 고통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자체가 되면, 고통속으로 들어가면 고통이 없습니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에고와 의도가 있으면 정말 힘들어집니다. 내가 고통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그것을 허용하려 노력하지만, 사실 그것은 고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고통속으로 들어가려 노력하고 고통을 느끼려고 애쓰는 행위를 통해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면서도 자신은 진실로 고통을 허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이게 아주 단순한 건데, '고통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되나요?'라고 묻는 그 말속에 어떤 의도가 느껴집니다. 진실을 발견하려는 에너지보다는, 자꾸 거부하고 밀어내는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고, '어떻게 해야 받아들이는 것이냐'고 묻는데, 사실 그렇게 묻는 그 마음의 믿바탕을 보면, 이런 자신의 몸짓을 통해 얼른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고통을 느끼려고 애를 쓰는데, 그 밑바탕에는 그 고통에 저항하고 고통을 밀어내려고 하는게 보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하느냐?'하는 그 말속에 이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고통과 하나가 된 마음이라면 그런상태라면 그 고통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만약 죄를 진자가 자기가 진짜 죽을 죄를 진 죄인이라고 느끼는 자라면, 그의 입에서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용서'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진짜로 그 고통을 받아들이면, 그 속에 고통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진실로 고통과 하나가 되면, 고통자체만 있고, 고통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구 치과의 배원장님이 제게 차를 사주셨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돈많다고 해서 그런 마음 내기 힘들다. 12번은 고맙다고 해라!'
쿵푸팬더3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넌 누구냐?'
'나도 같은 질문을 여러번 했었지, 난 팬더의 아들인가? 거위의 아들인가? 제자인가? 아니면 스승인가? 알고보니 이 모든 게 나였어, 난 용의 전사다.'
'이 모든 게 나였어'하는 대사를 들을 때 제가 울컥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들이 나 혼자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과 함께 여서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서 많은 영혼이 깨어납니다. 이 세상은 무엇하나 혼자 이루는 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같이 합니다. (저희 산청도덕경 모임에 나오는 도반들도 늘 선생님의 찌그러진 차를 보며 '어떡하나 어떡하나'하고 속으로 근심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얼굴을 본적도 만나 뵌적도 없지만, 산청 도덕경 도반들을 대표해서 배원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난 34년간 죽어라 노력했는데, 단 한순간 저의 꼬라지를 보았습니다. 저는 34년동안 진실을 추구한다고 믿어의심치 않았는데, 어떤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저의 꼬라지를 보아버렸습니다. 제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단 한순간도 정직하지않았던 저를 보았습니다. 단 한번의 목격이 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와같이 진실은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혁명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제 말을 안들으려하고 자꾸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애쓰고 있고 노력하고 있다'말하고, 또 '느껴 보려고 한다. 방법을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모르고 싶은' 마음이 강함을 봅니다. 길을 가다보면 잘못가기도 합니다. 그런분들에게 제가 지금과 같이 잘못된 과정을 짚어 줍니다. 그러데 그것을 자꾸 거부합니다. 자신이 잘못 가고 있고, 그것을 지적해 줄 때 자신이 지금 잘못 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시인하게 되면 바로 그순간 즉각적인 변화가 옵니다. 진실은 단순합니다. 내가 진실을 알고 싶었는데 사실은 도망다니고 있었구나하고 시인하고 인정하면 그때 바로 즉각적인 변화가 옵니다. 제가 당신을 오늘처럼 한번씩 때리는데, 그 과정에서 그것을 거부하는데, 그것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당신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이런 대화를 한번 해보고, 이런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참 중요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자에 칼을 대지 않고 아주 예쁘게 껍질을 벗기는 방법은?
그 방법은 감자를 포대기에 넣고 비비면 껍질이 아주 잘 벗겨집니다. 이와같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감자이고, 이렇게 우리가 서로 부대끼는 이 자리, 이 모임이 자연스럽게 감자의 껍질을 벗기는 자리입니다. 하나의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자리입니다.
*월출산에서...
새봄
(김지하)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푸르름이 짙어지는 이계절에 참 좋은 시인것 같습니다.
부끄러워 말을 잘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친근하게 먼저 다가서지 못하는, 내성적인,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그리고 그런 나를 인정하지 못했기에 내가 무조건 남들보다 잘나야 했었고, 상대방의 성공을 깍아 내려야했고, 상대방을 속물이라 비웃었으며, 자신을 과장해서 드러내었고, 자신에 대한 외부의 비판에는 늘 조마조마하면서도 상대방은 무자비하게 비판했었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기에 늘 변명과 합리화가 필요했고, 상대방의 실수와 잘못이 필요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열등감에서 오는 비교하는 마음이 아닌, 상대의 행위를 비난, 비판하고 그래서 내가 상대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마음이 없이 보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말 내 에고를 만족시키려드는 그 모든 행위들을 당장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상대방은 못났고 나는 잘났어하는 모든 의도와 행위를 당장 그만두어야겠습니다. 나를 만족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나와 상대를 구분짓고, 스스로 자신을 묶는 행위인, 그래서 자신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뿐인, 열등감을 교묘하게 감추기위한 시도일 뿐인 그 모든 허튼 짓을 당장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장마가 시작되는 6월 소나기 소리가 우리의 초라함을 두드려 깨울때, 그 축복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라며.....
6월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