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복도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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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83.♡.236.40) 댓글 6건 조회 16,527회 작성일 13-07-09 09:15본문
담양읍 북부를 가르는 담양천 가에로는 300~400년 전에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제방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2km 길이로 푸조나무, 팽나무 등이 제림을 형성하고 있다. 일명 담
양관방제림으로 천연기념물 366호이다.
몇 년 안 된 어린 나무부터 수백여 년이 된 고목까지 서로 얼기설기 엮어져서 긴 복도를 만
들어 내고 있었는데, 이 길을 걷고 있으면 시간을 헤집는 기분이 든다.
점심을 먹고 낮잠 좀 자려고 이곳을 찾으니 읍내의 어르신들이 평상마다 넘칠 만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전국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많은 마을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담소를
나누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오토바이 타고 온 어르신, 전동
차 타고 온 어르신, 자전거 끌고 온 어르신, 지팡이 짚고 온 오르신 등등이 어우러져 아이
들 초등학교 운동회 마냥 왁자지껄한 분위기이다.
하여간 이러한 분산함은 낮잠 자기에는 바람직하지 않아, 제림 끝자락 쪽으로 향한다. 입구
쪽은 그렇게 분산했는데, 발걸음에 시간이 보태질수록 한산해진다. 정적이 느껴질 만큼 조
용한 곳까지 다다르다보니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듯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벤치에 누웠더니 머리 위로 수많은 잎들이 각각의 모양으로 바람에 산들거
린다. 이제 갓 태양빛을 맛보는 어린 싹으로부터 쇄하기 직전의 드샌 진녹의 잎까지 수많은
잎들이 자기만의 소리와 흔들림을 갖고 거기 그렇게 있었다.
이 개개의 잎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라치면 그 하나하나가 연필로 그대로 옮길 수 있을 정도
로 선명히 조명되는데, 초점을 풀고 전체의 흐름을 보고 있으려 치면 나는 시공에 표류하는
바람이 된다.
그렇게 넋이 빠져 있는 터...
“어디서 왔냐?”
몸을 추슬러 앉으며 보니 80이 넘은 등이 휜 할머니 한분이 걸어오시며 활기 있게 말을 건
네다.
“어디서 왔냐?”
“군산에서 왔는데요?”
“성이 뭐여?”
“박씨요.”
“응~ 박서방~”
“혼자 왔냐?”
“네”
“친구들하고 같이 다니지 그러냐?”
“네ㅋ”
“나는 바로 이 집(제방 아래 집을 가리키며)에 살어. 17살에 여기로 시집와서 여태껏 살고
있어.”
할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손자 대하듯 거리낌 없다.
“...어디서 왔냐?”
“...ㅠㅡ군산요.”
“성이 뭐냐?”
“...ㅠㅡ 박씨요”
“음~ 박서방. 혼자 왔냐?”
“ㅠㅡ 네”
...
할머니는 주머니의 사탕을 꺼내 나그네에게 하나 건네시는 것을 신호로 몇 번이고 같은 질
문을 반복해서 물으셨다. 처음 몇 번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는데, 같은 질문(‘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혼자인지’)에 답변하면 할수록 그것이 인생
의 근원적인 화두로 자리매김 되어 내 어깨를 묵직하게 눌러댔다.
할머니의 관심은 나를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간간히 지나는 모든 여행객들에게 “어디서 왔
어?” “쉬었다 가”라고 청하신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들은 마을 어르신의 말씀이 단순한 배려로 여겨지기에 그냥 밝은 표정
으로 답례한다.
할머니는 자신이 처음 시집왔을 때는 이 두꺼운 고목이 저 앞의 가냘픈 나무 정도 밖에 안
되었다며, 고목이 현재의 크기로 자랄 때 까지 자식들 장성해서 다 출가하고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감정의 동요 없이 쏟아내신다. 세월에 맞서지 않고 그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이의 덤덤함이 느껴진다. 한해를 더 살아 갈수록 젊은 시절의 조급함은 사라
지고, 한바탕의 긴 꿈의 막바지를 관조하는 여유가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늙음’의 축복이리
라.
고목 사이를 뚫고 전동기를 타신 할아버지 한분이 나타나신다. 허물없는 사이로 보이는 두
분은 천진난만한 농을 주고받으신다. 그러는 중 할아버지는 “왜 혼자 있냐? 까까 사주는 삼
촌이 저쪽에 있지 않느냐?”고 어르시고, 할머니는 “삼촌은 진즉에 죽었다.”고 대수롭지 않
게 답하신다. 이에 할아버지가 “죽긴 왜 죽어? 삼촌이 있는지 없는지는 저쪽으로 가보면 확
인해볼 수 있지 않느냐? 까까 얻어 먹으로 가자.”고 재방 입구를 가리킨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누구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들의 대화 속에
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그들은 넓게 가지를 늘어트린 고목과 어린 나무 잎이 서로
자연스레 뒤집히고 어우러져 하나의 숲을 형성한 것처럼, 뒤섞인 시공과 관계의 혼합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사실과 거짓, 있음과 없음의 경
계는 그들이 지나온 세월의 풍파 속에 그렇게 희미해져 있는 듯 했다.
딱히 “삼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러 가자, 말자”도 둘 사이에 결정된 바가 없는 듯 한데,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은 제림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깔깔대고 어깨를 두드리며 주고
받는 장난은 영락없는 어린아이들의 그것이었다. 투닥 거리던 두 노인들은 특유의 생기를
내 뿜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시간의 복도 틈을 비집고 사라지신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로, 바람이 불어차고 잎들이 산들거리고 그 사이로 햇살이 쪼개져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낮잠을 자려 이곳을 찾은 나그네는 잠에서 깬 직후의 몽롱함을 느낀
다.
방금 내가 겪은 일이 잠시 후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증발해 버릴’ 한 여름 낮의 백일몽이
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살고 있는 ‘단단한 세상’ 속에 빚어졌던 현실이었던가. 현실과 꿈, 과
거와 현재, 이곳과 저곳, 시과 공간이 얽혀진 이 혼재상황은 몽롱함을 더해 간다.
...
손에는 한 움큼의 사탕이 쥐어져 있었으나, 그것을 만지작거릴수록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을
가늠할 수 없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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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명도abcd님의 댓글
명도abcd 아이피 (14.♡.11.225) 작성일* 둥글이님, 유랑 사진은 없나요?
명도abcd님의 댓글
명도abcd 아이피 (14.♡.11.225) 작성일아,,사진이 있네여 ㅎㅎ
명도abcd님의 댓글
명도abcd 아이피 (14.♡.11.225) 작성일
* 저는 울산서 살고 있지만(고향은 대구) 사실 전남은 역사와 풍류의 장소라 할 수가 있죠. 삼성의 안주인 홍라희 여사는 원불교에 독실하고 라희는 부친 홍진기선생이 '전라도에서 낳아 기쁘다'라고 해서 <라희>라고 했다하며, <영광>은 증산도의 강증산의 출생지(?)이며 <해남>은 법정스님의 고향이며 저의 점잖으신 큰이모부가 해남분이며, <곡성>은 몇해 전 입적하신 '성륜사'의 청화스님이 계셨던 곳이고 <장성>은 역시 입적하신 '백양사'의 서옹선사의 도장이었고, <장흥>은 '서편제' '잔인한 도시'의 소설가 서울대 독문과 출신 이청준의 고향이고 <순천>은 유명한 '무진기행'의 서울대 불문과 출신의 김승옥의 고향이다. 그리고 순천은 한국 3대 사찰의 하나인 '송광사'기 있으며 효봉, 구산,법정,보성 등 기라성같은 고승을 배출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2010년 10월 순천 갈대축제를 함 갔다온 적이 있다.
끝으로 <담양>은 조선 선조 때 송강 정철이 한양에서 잠시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며 가사 '관동별곡'을 지은 곳이다. 그러고 보니 전남은 역사적, 문학적 예향임이 틀림 없는 것 같다 ~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83.♡.236.40) 작성일오호~ 문화전문가시구만요. ㅎㅎ 줄줄줄 나오십니다. 저는 고향은 전북인데 확실히 전남의 분위기가 보다 격이 느껴지더라고요. 지금은 그냥 유랑을 다니고 있지만 나중에 전남지역의 문화에 대해서 공부하고 다니는 것도 많은 배울꺼리가 될 듯 하더라고요. 근데 문화재 관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어찌 그리 줄줄이 아시는지~ ㅋ
명도abcd님의 댓글
명도abcd 아이피 (1.♡.139.125) 작성일
ㅎㅎ 아닙니다. 그냥 역사하고 철학을 좋아하는 학인입니다. 요즘 보는 책은 유명한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6권> 중 2권과 이수광의 <공부에 미친 조선 선비 16인>을 보고있는데요,,,
빠트린게 있는데, 다산 정약용은 강진서 농민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보리타작' 이란 한시를 썻고 목민신서,흠흠신서 등을 썻지요. 고산 윤선도는 소북파로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 아들인 영창대군을 추앙하다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경북 영덕에서 유배에 풀려나 전남 보길도의 '세연정'에서 어부사시사,만흥 등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또 무궁무진하지요~ 둥글이님은 요즘은 여기에 뜸하시네요...
그리고 영암의 월출산은 바위로 유명한 아주 걸출하고 아름다운 산인데 백제 때 왕인박사의 유허지인 도갑사가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진은 1930년대의 순수시의 대가인 영랑 김윤식의 생가가 있는데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는 대표작 명시이죠,,,,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83.♡.236.40) 작성일네 알겠습니다. 문화적 식견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도 참 유익한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