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유능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음감보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절대음감이란 음을 듣고 그 고유의 음높이를 즉석에서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반대로 상대음감은 음을 듣고 그 음을 다른 것과 비교해서 음높이를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상대음감이든 절대음감이든 그 음높이를 아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절대음감의 음이 살아있는 음이라면 상대음감은 죽은 음이다. 소위 달을 봐야지 손가락은 왜 보느냐는 말처럼 절대음감은 달을 보는 것이라면 상대음감은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다. 그 차이는 크다. 같은 ‘솔’음이라도 살아있는 ‘솔’과 죽은 ‘솔’의 차이는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와 육지에서 냉동된 물고기와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음이란 들어야 하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음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즉, 시각과 청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괴로움에서 구원하는 보살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여기서 관세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볼’ 觀과 세상 사람의 ‘소리’라는 世音이 결합된 말이다. 다시 말하면 관세음보살은 음은 들어야 하는데 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을 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서비스와 연관해서 해석하면 음(音)을 보는(觀) 자만이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진정한 서비스는 고객의 살아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절대서비스감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고객의 소리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일본의 山本哲士라는 학자는 서비스란 고객의 소리(音)를 듣는(聽) 것이 아니라 고객의 얼굴(色)을 듣는(聽)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