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에 대한 묵상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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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석 (193.♡.64.203) 댓글 2건 조회 7,529회 작성일 06-04-11 02:52본문
1편(3월 30일 게시)에 이어 계속됩니다. 여기 내용은 전적으로 저의 묵상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성경에 대한 정통 해석이라고 생각하시는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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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야곱에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엄마한테 매일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처음 대하니 처음에는 정말 하나님이 맞나 의심도 들고, “아니야 진짜 같다”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그래도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들어갑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쪼그라 들었던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모든 신경이 곤두세워져서 몸의 모든 세포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상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습니다. 야곱에게는 처음 있는 경험입니다. “말로만 듣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나에게도 오시다니…” 태어나서 처음 맞는 감격, 황홀감, 긴장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야곱을 사로잡습니다. 리브가가 하나님이 “너의 형이 너를 섬기게 될거라”고 예언했었다고 야곱에게 누차 이야기해 왔지만 야곱은 리브가가 자기를 위로하려고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나같이 못난 놈에게 무슨 당치 않은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아버지 이삭이나 에서에게나 어울리지” 생각을 했었겠지요. 그런 줄 알았던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때 야곱은 바로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바로 여기에 항상 나와 함께 계셨구나!!!” 어릴 적 그 어둡던 시절에도,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챌 때도, 에서를 피해 집에서 도망나오듯이 떠나오던 때도, 외로움, 두려움에 떠는 이 순간에도 나와 같이 하신다는 이 체험으로 야곱은 새로 태어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순간입니다. 정신적인 꼽추였던 야곱의 등이 확 펴지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자기가 스스로 일어나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는 병자이었다는 사실을 통감합니다. 이제까지 남의 탓만 해 왔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기 병을 낳게 하기 위해 38년 동안이나 누군가가 자기를 연못에 넣어주기만을 누워 기다리고 있던 병자를 예수님이 한 순간에 일어나게 하신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병자가 일어나 기뻐 팔짝팔짝 뛰었겠듯이 야곱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것들이 아직 많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돌베개로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 부릅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설레임으로 변합니다. 앞날은 다른 사람이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달려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빽까지 생겼다”고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이라 믿게 됩니다. 그리 되면 자기가 세운 돌기둥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자기에게 주시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고 큰 소리(서약)까지 칩니다. 이러한 경험은 삶을 살아오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제까지의 내가 아닌 나를 경험하고 앞날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그 첫번째 순간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낚음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따르게 되는 그 순간입니다. 항상 “초심이 중요하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말들을 많이 하지요. 야곱에게는 이 순간이 바로 그 초심의 단계입니다. 훗날 야곱에게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였나고 물어보았다면 바로 이 순간이었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요? 많은 분들이 이런 영적 체험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고난한 삶 가운데서 자꾸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가끔 생각이 나더라도 “그때 참 좋았었는데… 그 순간이 다시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그리워하고 끝나곤 하지요. 야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봅니다.
새로워진 야곱은 마음뿐만 아니라 얼굴도 달라보입니다. 두려움과 열등감으로 일그러져 있던 과거의 얼굴이 아닙니다. 얼굴과 등이 곱게 펴진 콰지모도를 상상해 보십시오. 안소니 퀸이지요. 이제는 기쁨과 설레임과 의욕으로 가득찬 얼굴입니다. 외가를 찾아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딥니다. 외가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계획과 다짐이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던중 동방 땅에서 우연히 외사촌인 장래의 아내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찾던 것을 비로소 찾았을 때의 기쁨이 야곱을 뒤덮습니다. 라헬은 야곱이 이제까지는 감히 넘보지도 못했던 그런 아리따운 여인입니다. “이게 우연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더해졌겠지요.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들어가 일을 하며 한 달을 지난뒤 무엇을 보수로 바라느냐는 라반의 물음에 라헬을 달라고 합니다. 과거의 야곱에게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지요. 라반은 라헬과 바로 결혼시켜 줄 수는 없고 7년간을 자기를 위해 봉사하면 결혼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라헬과의 결혼만을 꿈꾸며 힘든 줄도 모르고7년간을 열심히 봉사합니다. 근처에서 바라보는 라헬이 얼마나 이뻐 보였겠습니까? 7년간의 봉사를 끝내고 라헬과 결혼하는 날,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 이제 어려운 시절이 끝나고 내게도 드디어 평안과 행복의 날이 오는구나” 그랬겠지요.
결과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못생긴 라헬의 언니 레아가 누워 있었습니다. 신부가 바뀐 것이지요. 이때 야곱(안소니 퀸)의 표정이 연상되십니까?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야곱이 자기 신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결혼식 때는 신부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밤에는 깜깜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목소리가 달랐을 수도 있으나 초야에는 서로 이야기도 안하고 넘어갔을 수 있겠지요. 라반은 쉽게 시집가지 못할 레아를 이렇게 시집보내고 야곱을 7년 더 봉사케 할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항의를 해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레아와 신혼 초야를 치른 야곱은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신부를 알아보지 못한 자기의 책임도 있기에 결국 어쩔 수 없이 레아를 아내로 인정합니다. 일부다처제니 아직도 라헬과 결혼할 수 있습니다. 아직 벧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에너지가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마음을 다잡고 라반의 요구대로 7년간을 더 봉사키로 약속하고 라헬과의 결혼식을 치룹니다. 결혼식날 야곱은 “7년간 봉사할 것이 남았지만 이제 진정 평안과 행복의 시간이 오겠지” 잔뜩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던 라헬과의 결혼이 야곱에게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얼굴이 아리따운 라헬은 마음씨까지 아리땁지는 못합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온 언니가 먼저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게 되자 라헬의 질투심이 발동합니다. 라헬은 주로 자기의 장막에 거하던 야곱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야곱은 이에 견디다 못해 라헬의 장막을 나와 갈 데가 없으면 레아의 장막으로 갔겠지요. 그 때마다 레아는 딱딱 임신을 하고 아들들을 더 낳습니다. 라헬의 질투심은 극에 달합니다. 자기의 종을 야곱과 동침케 하고 결국 아들을 낳게 합니다. 레아도 이에 질세라 자기 종을 야곱과 동침케 해 아들을 낳게 합니다. 두 자매(레아, 라헬)와 그들의 종들(실바, 빌하)을 아내로 거느리게 된 야곱은 이 틈바구니에서 과연 평안했을까요? 아니지요. 아들들이 많아져 좋기는 했겠지만 아내들이 교대로 긁어대는 “바가지”에 평안할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라헬과 결혼하기 전의 7년은 라헬과의 결혼만을 생각하며 정말 힘든 줄 모르고 지낸 반면, 라헬과 결혼한 후의 7년은 너무나 다른 세월이었습니다. 정신적 고난의 세월이었겠지요. 이와 함께 야곱의 목표는 이제 라헬에서 다른 것으로 변해 갑니다. 재산을 모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반 등 주위에 여러 사람을 보건대 재산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평안과 행복이 보장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어떻게 하면 재산을 모을 수 있을까 궁리합니다. 야곱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어려서부터 엄마 리브가로부터 많은 이야기들 들으며 지식을 쌓았었습니다. 하나님께도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는지 야곱의 머리가 워낙 좋았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야곱은 자기를 붙잡아 두고 이용해 먹으려던 라반을 역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해 나갑니다. 흰 양들 속에서 얼룩 무늬가 있는 양이 태어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라반을 완전하게 이겨버립니다. 점점 늘어가는 재산을 보며 야곱이 얼마나 흐뭇했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야곱에게 평안과 행복이 찾아왔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재산이 많아질수록 라반과 그 아들들은 속은 기분이 들면서 “잘못했구나” 생각을 하고 야곱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야곱의 재산을 가로챌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를 눈치채고 어떻게 해야 하나 또 궁리합니다. 하나님께도 원조를 청합니다. 피곤함에 지친 야곱에게 고향 생각이 납니다. 벧엘에서 받았던 에너지는 바닥이 났습니다. 집을 떠나온 지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라헬과의 결혼에, 아내들과의 생활에 고향 생각을 잘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 고향으로 돌아가자, 재산도 모았으니 여기보다는 날거야”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도 고향으로 돌아가라 합니다. 이제 재산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평안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모든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고향집으로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이 시켜서 고향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돌아가라고 말한 고향은 아버지 이삭이 있는 물리적 고향이 아니라 야곱의 초심,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아직 모릅니다. 이 순간 야곱에게는 오직 이 많은 재산과 가족을 모두 다 데리고 어떻게 무사히 도망치느냐와 고향에 있을 에서를 어떻게 무마시키느냐는 것이 문제이었습니다.
야곱은 궁리, 또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았을 겁니다. 네 아내를 하나님의 말을 빌어 설득합니다. 네 아내도 동의합니다. 야곱은 라반이 집을 비운 틈을 타 도망갑니다. 아마 세부계획을 미리 완전히 짜서 네 아내, 자식들, 하인들, 양떼, 소떼, 낙타들을 데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고향에 보내 에서의 동정을 살피도록 합니다. 라반이 야곱이 도망친 것을 알고 야곱을 추격해 쫓아옵니다. 야곱과 상면한 라반은 야곱의 생각과는 다르게 강하게 나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라반에게 역사하신 것으로 성경에 기술되어 있기도 하지만, 야곱이 이미 라반의 세력권 밖에 있었고 야곱의 세력을 직접 보았을 때 라반이 압도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힘이 납니다. 라반을 힘껏 몰아 부치고, 라반의 제의였지만 서로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냅니다. 라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한숨 돌렸습니다. 이제 에서 문제만 해결하면 됩니다.
에서를 정탐하고 돌아온 하인은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고 전합니다. 이는 야곱이 예상했던 것 이상입니다. 400명이면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두렵습니다. 답답함에 또 궁리합니다.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어 하나라도 보전을 할까 궁리도 해 보고, 하나님께 지난 약속들을 상기시키며 간구도 해 봅니다. 그러나그러나 그동안 답을 주시던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재물이면 에서를 무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으로 몇 단계에 걸쳐 예물을 보내면 에서의 마음이 수그러 들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앞서 간 무리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이제 아무런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야곱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에서의 무서운 얼굴이 앞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어릴 적 그 암울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아, 나에게 그 암울했던 시절이 다시 오고 마는 것인가?” 가족들까지 다 얍복강을 건너 보내고 야곱은 홀로 남습니다. 잊어버리고만 있던 그 어린시절,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일, 벧엘에서의 회심, 결혼생활, 자식들, 재산 모으던 일, 라반에게 큰소리 치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야곱의 머리를 스쳐갑니다. “아, 이제 마지막인가?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야곱의 탄식이 노을지는 저녁 하늘에 메아리칩니다.
이 순간 왠 사람이 야곱을 덥칩니다. 두 사람간의 씨름이 시작되고, 이는 밤새 지속됩니다. 또 한번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지난번 벧엘 때와는 다릅니다. 이는 벧엘 때의 감격이나 황홀감이 아닙니다. 환골뼈가 뿌러지는 아픔이 동반합니다. 통곡 속에서 지난 세월에 대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소위 야곱의 “얍복강가의 회심”이 있게 됩니다. 여기까지 참고 기다리며 동행하시는 야곱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3편에 계속됩니다.)
댓글목록
김재환님의 댓글
김재환 아이피 (211.♡.140.177) 작성일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건 자기자신을 믿게됐다는 걸 뜻하는건가요?
이광석님의 댓글
이광석 아이피 (193.♡.64.203) 작성일단순히 자기자신을 믿게 됐다는 것보다는 좀 큰 의미인것 같습니다. 진리의 편린을 맛보았다고나 할까요.. 자기 자신이 추구하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는 깨달음, 그런 영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